금성산[金城山] (531m)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金城面) 수정리 북동쪽에 있는 산.
경북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에 위치한 금성산은 해발 530m의 사화산으로 비봉산(해발 671m)과 말발굽형 산세로 서로 쌍벽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옛날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이 조성한 길이 2,730m, 높이 4m의 금성산성이 등산로 주변에 있으며 신라시대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 수정사와 산운고택마을의 소우당을 둘러보면서 하루 일정의 등산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산운고택마을
산행 A코스 :
용문지 주차장 - 금성산안내도-팔각정옆-금성산성-용문바위-병마훈련장-전망대-명당터-
금성산정상(530m)-건들바위-용문정 갈림길-용문지 주차장(약 2시간 소요)
금성산의 본 이름은 천진산(天辰山)이다. 금성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처음 진나라가 도읍하면서 수도방위를 위해 이 산에다 성을 쌓고 쇠덩어리 같이 견고하다는 뜻으로 쇠울산성이라 이름한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하게 되면 쇠울(금성), 쇠울산성(금성산성), 쇠울산(금성산)으로 자리매김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서에 이르기를 중원(중원)에 장사오악(장사오악)하고, 동방에 삼태오악(삼태오악)이라 하여 동에 금강산, 서에 묘향산, 북에 백두산, 남에 지리산, 중앙에 삼각산을 오악 또는 오명산이라 한다. 삼태산이란 우리나라 중추를 가리키는 삼화산(삼화산)으로 북에 백두산, 남에 한라산, 중앙에 천진산을 말한다. 삼태산은 천상의 삼태의 현상으로 모두가 화산이므로 분화하다가 멈추게 되어 산마루가 함몰되어 오목한 것이 특징이다. 사화산으로, 한반도 최초의 화산이다. 백악기에 화산이 폭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팔각정 쉼터 오른쪽이 등산로 초입
이 석축은 천혜의 요새지를 활용하여 조문국 시대에 산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조한 둘레 2,730m, 높이 4.3m의 금성산성이다. 이 옛 성을 조문성, 금산석성, 금학산 고성이라고도 한다. 산정식[山頂式]과 포곡식[包谷式]을 갖춘 복합식 성이다. 이 산성은 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에서 고려태자 무와 백제 태자들이 겨루는 1차전을 치룬 곳으로 비정하는 곳이자, 그 이전 신라 제9대 벌휴왕(184~196, 發暉尼師今) 2년(185년)에 군주 구도[仇道]와 구수혜[仇須兮]를 앞세운 신라군과 전투하던 곳이다. 그야말로 조문국이 최후를 맞이한 패전장[敗戰場]인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25권 경상도 의성현 고적조[古跡條]에 금성산 고성[金城山 古城]에 대해 "둘레 9,100척, 높이 13척으로 아주 높고 험하다. 안에는 네 곳의 샘물이 있다"하고 기록하고 있다. 성벽은 동쪽 건너의 산 능선까지 연결되어 있다. 급경사지는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흙과 돌로 쌓았고, 경사가 완만한 능선에는 자연돌로 쌓은 협축법, 경사가 거의 없는 기슭에는 편축법[片築法]으로 쌓았다.
산성을 따라 지그재그로 오르는 길, 450고지에는 관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편평하고 솔숲이 무성하여 쉬기에 좋은 이 곳의 산성은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어 높다. 로프를 잡고 올라야 한다. 조문국 망루가 있던 곳으로 적의 침입을 감시하던 곳이었던 만치 조망이 좋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 제7 문무왕 하편에 신라 30대 문무왕 13년 계유년 9월 (서기 673년)에 시중 천광에 명하여 조문성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뤄보아 고려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또는 왜적과 대치할 목적으로 이후도 여러차례 수축[修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구한 세월 속에서 비교적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할 것이다. 성은 무너졌으나 주변의 돌들을 살펴 과거 형태나 규모를 가늠해 본다.
『삼국사기』기록을 통해서 볼 때, 신라에서 축조한 산성으로 추정되는 것이 약 100여개 정도이고, 실제 조사된 성곽은 약 160여 개소로 추산된다. 이 중 경상북도 지역에 있는 성곽과 신라의 서북진출로와의 관계에서 경주-영천-의성-안동-영주-죽령에 이르는 길은 초기 조문국으로 통하는 길을 죽령까지 연장시킨 것으로, 북진과 적군 침투를 방비하는데 있어 요충지에 위치한 중요한 시설인 것이다.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이 쌓은 성(길이 2,730m)으로, 조문국이 신라에 병합되기 전 신라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최후의 패전장으로 전해진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이 성을 보수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지금의 산성은 높이가 채 1m도 안되지만 그당시 몸만 숙이고 화살만 피하던 시대에는 굉장한 은폐물이고 철벽옹성이 따라없지 않을까 싶다
금성산과 비봉산은 능선으로 이어져 있는 발발굽지형의 산세와 주변조망이 수려하고 두산 모두 라이딩 묘미가 서로다른 느낌이 있다. 금성산은 흙산인데 비해, 비봉산은 바위산으로 귀암절벽이 빼어난 산, 두 산이 흙이나 바위에 온통 소나무가 뿌리를 박고 백악기시대부터 이어지고 있다는것, 소나무향으로 마음의 치유를 하시고 싶은 분들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적극 권해주고 싶은 산이다.
성벽을 따라 오르다 보면 이정표에 조망대와 병마훈련장 나오지만 오늘 코스는 오른편은 용문바위쪽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매우 중요함)
용샘이 있다고 하는곳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절벽을 보면 저절로 "열려라 참깨" 주문이 나오도록 세워 놓은 신기한 바위문 모양, 가까이 가서 하늘을 보면 뻥뚫린 하늘이 보이고 햇살이 비치는 사이로 소나무도 보인답니다.
정면에 보이는 움푹 안으로 파져서 문처럼 생긴 바위가 '용문'바위이다. 용가매골을 두고 인근 주민들은 금성산에서 가장 절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용문 왼편으로 용이 승천했다하는 용가마가 있어 바위사이에서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용출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길 없다. 다만 '용문'은 암벽을 즐기는 이들 사이 천장 부분에 큰 구멍이 나 있는 등 절경이라 '무지개 바위'라 하는데, 암벽타기 좋을 암벽장이지만 지금은 금지되어 있다. 예전에서 용문지로 향하는 길은 되돌아왔지만 지금은 데크계단으로 금성산정상으로 이어지는 최고의 절경이다
금성산은 조문국 시대에 조성된 금성산성을 따라 등산로가 개설돼 대체적으로 산을 오르기가 편하고 볼거리가 많다.보현산에서 뻗어내린 지맥으로 형성된 금성산은 마주보고 있는 비봉산(해발 671m)과 쌍벽을 이루면서 절경을 드러낸다.
금성산 산행을 하는 토요일은 너무나 조용하고 산속 야외정원이 나만의 공간이었다
테크 전망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금성산 최고의 절경을 보고 되돌아 가지않고 정산으로 올라가는 테크계단이 만들어져 의성군 문화관광과에서 등산객을 위한 배려가 돗보이는 곳이었다
금성산 정상에 서면 오른편으로 비봉산 능선이 여인이 누워있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옥황상제의 늦둥이 옥녀가 하늘나라의 율법을 어기고, 이 곳에서 그 벌칙을 받다가, 용부정의 물로 치성을 드려 하늘나라로 올라갔는데, 비봉산의 능선이 승천한 옥녀의 형상을 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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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 옥녀봉 전설(金城山玉女峰傳說) 이야기
우리나라 금수강산 어디를 가나 그 역사나 지명에서 유래하는 무수한 이야깃거리가 많다. 특히 역 사적인 진실을 문서화 하지 못하는 고대사일 경우 이런 전설은 정사(正史)에 버금가는 자료가 되 기도 한다.
우리 지역의 금성산 옥녀봉도 옛 부족국가 시절부터 전해 내려오는 아름다운 전설이 존재하고 있 다. 금성(金城)이란 의미는 쇠울(쇠같이 견고한 울타리를 뜻한다)이라는 순수 우리말의 한자표기 이다. 이 어원에서 지금 우리가 말하는 “서울”이란 말이 파생되었다는 설도 있다. 쇠로 쌓은 울타리라는 뜻은 그만큼 외부로 부터의 침입하기 어려운 난공불락(難攻不落)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도 금성산에 가면 병마훈련장터와 산성을 쌓은 흔적을 쉽게 볼수 있다.
원래 금성산은 부족국가 시대는 천진산으로 불러왔는데 그 다음에 영니산(盈尼山) 금학산(金鶴山) 이란 명칭으로 내려오다가 일제 강점기에 금성산(金城山)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그 금성산의 주봉인 옥녀봉의 전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옥녀봉은 원래 주산인 금성산이 화산활 동을 했던 곳이라 휴화산이 된 다음에도 그 주위에 늘 떡시루처럼 김이 올라온다고 해서 일명 “시루봉”이라고도 한다.
아득한 옛날 백두산 천지에서 자란 신용(神龍)이 상제의 부름을 받고 등천(登天)하여 관우(觀 雨)라는 칭호를 얻고 이 땅에 우정(雨政)을 맡게 되었다. 관우라는 의미는 용을 일컫는 말인데 비 를 바란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우정(雨政)이란 벼슬자리는 세상에 비를 관장하는 자리이므로 그의 임무는 아주 막중한 것이었 다. 인간세상에 때를 맞추어 비를 내려 주어야 만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살아가고 모든 생명체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관우의 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관우는 운동(運童)과 풍녀(風女)를 거느리고 밤낮없이 이 땅에 비를 내리고 가뭄을 관리하는 일 로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상제로부터 느닷없이 비를 멈추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유를 불문하고 다음 지시 가 있을 때까지 비 내리는 작업을 멈추라는 상제의 엄명이었다. 처음 한 두 달은 일거리가 없어서 오히려 편했다. 그러나 석 달째 접어들면서 초목은 오그라들고 동물들은 식수가 모자라 아우성이었다. 그냥 보고 있기만 하는 일이 날마다 가시 방석이었고 지옥 이 따로 없었다. 이런 딱한 사정에도 하늘에서는 아무 기별이 없었다. 관우는 덜컥 겁이 났다. 자기로서는 사심없 이 주야를 무릎 쓰고 비를 고르게 내려 어느 한군데 모자람 없이 분배했건만 이런 일이 일어 날 줄을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차라리 내게 잘못이 있다면 나를 벌 줄 것이지 무고한 생물들 에게 고통을 주실까?’ 하고 은근히 상제(上帝)를 원망하는 마음까지 들게 되었다. 얼마 후 관우 는 상제를 알현(謁見)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큰 마음을 먹고 하늘로 올라간 관우는 상제의 알현 을 청하자 시자(侍者)의 인도로 상제전에 인도되었다. 관우는 예를 마치고 엎드려 읍소 하였다. “신은 본시 천출로 외로운 산상에서 자라나 본 것마저 없는 터에 상제께서 어여삐 여기시어 버리 지 않으시고 일자리를 주신데 보답코자 힘써 노력하였사온데 혹여 잘못이 있다면 신을 벌하여 주 십시오. 비를 내리지 말라 하옵심은 지상 생물들의 사활(死活)이 달려 있사옵니다. 그 동안 가뭄 으로 식물은 오그라들고 동물들은 식수가 모자라 아우성이며 인간은 기근이 들어 차마 보기가 민 망할 지경이옵니다. 차라리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상제는 관우의 읍소 를 딱하게 바라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 번 일은 경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경은 오랜 세월 하계우정(下界雨政)을 맡아오면 서 일에 게으르지 않고 나누는데 후박(厚薄)이 없었으며, 천년을 하루같이 소임을 다하여 온 것 을 가상하게 여겨 가까운 시기에 편안한 자리로 옮겨 줄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니 관우는 염려치 말라”하였다. 관우는 다시 아뢰었다. “비록 이번 일에 신의 잘못이 없다 하여도 비를 멈추라 하심은 제게 가혹한 형벌이옵니다. 지금 下界에는 기갈로 인하여 동식물의 참상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옵니다. 어찌 이런 광경을 보고만 있으라 하시옵니까?” 상제가 다시 이르기를 “이는 모두가 하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망대로 하려는 사심의 소치이니 감내해야지. 태초에 태양을 나누어 지축을 만들고 생기 있는 땅을 만들기 위해 식물을 먼저 심고 동물을 만들어 이 없 는 자에게 뿔을 주고 뿔 없는 자에게 이를 주어 자생 할 수 있게 생기를 주었건만 거기에 족하지 않고 쓸데없는 힘겨루기를 하다가 자멸해 가는 종족이 부지기수였느니라. 더구나 굳센 뿔도 강한 이빨도 갖지 못한 인간이 지혜를 개발하여 자연식의 경지를 벗어나 잡아서 먹던 습성에서 길러먹 는 비법을 찾더니 근자에 농경법을 연구하여 열심히 일하고 서로 돕고 화합하는 미덕을 가상히 여 겨 경으로 하여금 비를 족하게 주라 하였는데, 풍화우순(風化雨順)하여 생활에 자족함을 만족하 지 못하고 앞선 자들이 당파를 지어 약자들의 가진 것을 갈취하여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일삼으 니 이를 용납할 수 없어 벌하려는 것이다. 하나 나는 결코 그들을 멸망하게 할 수 없어 밤이슬을 후하게 내려 연명하게 할 것이니 경은 걱정 말고 내려 가 보라”는 명이 내려졌다. 관우가 물러나려는 순간 상제는 사담이 있으니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 옆자 리에 앉은 관우에게 상제는 나직하게 말했다. “실은 내게 만득(晩得)으로 얻은 여식이 하나 있는데, 어여쁘게 자라 귀엽게 보았더니 자망대로 커 말썽만 일으키다가 마침내 범률(犯律)한 바 되어 법에 따라 삭발하 고 下界에 내려가 수도하라는 령을 내렸느니라. 풍문에 들으니 천진산 시루봉에 있다는 소식을 들 었으나 곁에 두고 있다가 떠나고 나니 마음이 허전하여 참기가 어렵구나. 하계에는 寒暑가 있다 고 하니 고생이 심하겠지. 하지만 자업((自業)이니 도리가 없구나.”하면서 상제는 떠나려는 관우 에게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이 말은 아비 된 자의 마음이지 경에 그 애를 도우라는 말이 아니네. 절대로 도와서는 안 되 며 이 말을 들은 척해서도 안 되네. 이 말을 듣게 되면 여식의 마음이 약해질지 모르기 때문이 네.”하는 상제의 부탁을 들으며 그 보이지 않는 상제의 부정에 관우의 가슴조차 먹먹해졌다. 이 세상 자식 가진 부모 마음은 모두 다를 바 없을 터, 하물며 우주만물을 주관하고 상제의 영이 라면 거역할 자가 없는 무소불위의 실권자이면서도 평등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려는 상제의 충심 에 감복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거년(去年) 봄비를 내리려고 하늘에 올라가 천진산쪽을 보았사온데, 난데없이 커 다란 흰 돼지 한 마리가 정토를 물고 날아 시루봉 혈담을 메우더니 산상에 토막을 짓고 거룩한 아 녀자가 하늘색 후양을 쓰고 단정히 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범상한 일이 아니다 생각하였사온 데 그 분이 바로 따님이셨군요.” 관우는 대답하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처소로 돌아왔다. 처소로 돌아온 관우는 그 동안 비워둔 집단속을 하고 옥녀의 토막으로 가 보았다. 관우가 가까 이 오자 옥녀는 경계하여 꾸짖어 말했다. “여기는 아녀자가 홀로 수도하는 처소인데 댁은 누구신 지 용건이 있으면 신분을 밝힐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썩 물러나시오.”하면서 호통을 쳤다. 그러 자 관우가 말했다. “나는 백두산에서 자란 신용이며 하늘의 명을 받아 이 땅의 우정(雨政)을 맡고 있는 관우라 하 오. 맡은 소임을 위해 상공에 올라가 지상을 살피게 되었는데 거년부터 이곳에 이상한 조짐을 보 았고 지금은 아녀자가 홀로 기거하는 것이 범상치 않아 그 연유를 알고자 온 것이니 괘념치 마시 오”하였다. 가까이 온 관우에게 옥녀는 그제야 의심을 풀고 조용히 말했다. “이 몸은 선경에서 자란 옥녀라고 하는데 어려서부터 철모르고 자라 범율한 바 되어 선율에 따 라 삭발하고 下界에 내려가 머리가 자랄 때 까지 수도하라는 영을 받고 수도하는 수인(囚人)의 몸 이옵니다. 이런 소녀를 그냥 지나치니 않으시고 찾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라는 말과 함께 자기의 머리도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고 수신하는 도에 따라 자란다는 말을 하면 서 상제의 딸이라는 사실은 감추었다. 사시사철 춥지도 덥지도 않는 꽃그늘 아래서 그 삼단같이 긴머리로 양친의 총애를 받던 옥녀는 옛 날이 회상되어 아주 슬픈 눈빛으로 관우를 건너다 보았다. 관우는 자기가 안고 있는 비밀의 보따 리가 더욱더 부담스럽고 아파서 꼭 바늘뭉치를 무명보자기에 싸서 안고 있는듯 했다. “하계에는 계절이 있어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는 매우 힘드실터인데.......” 하고 걱정어 린 말을 하였다. “수도의 명을 받은 소녀가 어찌 편안하기를 바라겠사옵니까? 이 정도의 고생은 각오가 되어 있으니 심려치 마십시오”하고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려는 옥녀를 관우는 놓치지 않 고 보고 있었다. “그러면 식생활은 어떻게 해결하시는지요?” 하는 관우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조석 식사는 다행히도 하늘에서 천도를 얻어와 걱정이 없으나 山上이라 물을 길러다 먹으려니 까 그 일이 큰 일입니다.” 고 대답했다. “이 근처에도 자세히 살피면 물 나는 데가 있을 텐데”하고 관우는 사방을 살폈다. 과연 멀지 않 는 바위틈에 물이 비치는 곳을 발견하고는 관우는 꼬리를 바위틈에 대고 비비니 바위에 구멍이 뚫 어지고 물이 흘러나왔다. 그 곳이 지금의 용가마다. 관우가 옥녀의 식수를 해결 해 준 곳이 바 로 이 용가마(용부정)였다. (관우라는 의미는 비를 바란다는 의미로서 용에게 붙여준 벼슬자리이 다) 관우는 다시 지형을 살펴보았다. 이곳은 한밤도의 중심이요. 옛날 화산으로서 항상 김이 올라오 기 때문에 시루봉이라 불리어 왔는데 어인일인지 냉랭하기만 하여 지맥을 따라 내려가 보니 멀지 않는 빙계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 곳에 살던 이무기가 시루봉으로 통하는 지맥을 자기굴에 따돌려 난방을 하였던 것이다. 관우 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꼬리를 쳐들어 이무기의 굴을 힘껏 내리쳤다. 이 바람에 이무기의 굴 은 내려앉고 주인인 이무기는 종적을 감추었다. 관우가 다시 온맥((溫脈)을 시루봉에 연결하고 나 니 옥녀의 토막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마 이것도 옥녀를 향한 관우의 마음이 아닐까 한 다. 관우는 옥녀의 처소를 돌 본 다음 자기의 일자리로 돌아가 하늘의 비 소식을 기다렸으나 끝내 종 무소식이었다. 그 동안 저 아래동네 어정배미의 기름진 논들은 누렇게 타 들어가고 천진산이 품 고 있던 수 많은 백성들 또한 가뭄으로 지쳐가고, 도둑과 전염병이 창궐해서 차마 눈뜨고 볼수 없 는 아비규환(阿鼻叫喚)에 다름아니었다. 왕실의 물을 길어나르던 어정(御井)에도 나인들의 발길이 뜸한 걸 보니 그 깊은 우물도 이제 바 닥이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깊은 우물만치나 관우의 시름도 깊어갔다. 특히 오동산 밑의 꽃들(꽃밭두덩, 지금의 초전마을)은 왕실의 소풍놀이에 더 없이 좋은 자리였는 데 그 소풍행렬을 본지도 언제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관우는 아름다운 금관조복(金冠朝服)에 예 쁜 궁녀들이 도열해서 꽃들에 모여 소풍놀이를 즐기는 조문국의 왕족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마음이 기뻐서 마치 자기가 소풍을 나온 것 마냥 마음이 들뜨곤 했었다. 이제 그 “꽃들”의 아름다운 행렬은 관우에게 잔상으로만 남아 있는 풍경이었다. 잠시 들러본 교방(말 기르는 곳)에는 말들이 털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동네 젊은이 들이 모여서 글공부하던 사 창에는 글읽는 소리가 잦아 든지도 오래였다. 그리고 군량미를 비축해 놓았던 이창은 이미 퇴락해 서 문짝마저 겨우 매달려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각 고을 마다 수신호를 보내던 봉화불이 꺼진지도 오래전의 일이 되어 오직 적막만이 감 도는 죽음의 땅으로 달려가고 있는 발아래 동네를 보며 관우는 雨政을 책임지고 있었던 자신의 존 재가치마저 잃어가도 있었다. 어느덧 칠년의 세월이 흘러 기다림에 지친 관우는 옥녀의 처소를 찾았다. 옥녀가 근심어린 목소리 로 물었다. “아직 비 소식은 없나보지요?” 관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오랜 가뭄으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퇴락해 버린 지상은 초목들의 줄기는 고사(枯死)하고 뿌리 만 남아 명맥만 이어가고 동물들도 먹이가 모자라 생기를 잃었으며 그렇게 기세(氣勢)당당(堂堂) 하던 인간들의 몰골은 더 말이 아니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고 보니 하늘 원망도 나오고 말았다. 하느님이 신령하여 앉아서 모든 것을 헤아 릴 수 있다고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멀지 않아 모두가 말라죽고 말 터인데 하늘의 뜻이 이 땅의 고사멸망(枯死滅亡)을 원치 않는 다면 어찌 이 지경으로 버린단 말인가? 옥녀가“설혹 하늘은 멀리 있어 실 사정에 어둡다 해도 이 땅의 우정을 관리하고 맡아온 댁의 체 면도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자세를 가다듬고 관우를 다그쳤다.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 관우에게 “ 이 몸은 본시 옥황상제의 여식으로 태어나 주위의 사랑 을 한 몸에 받았으나 이를 만족하지 못하고 내 자망대로 하려는 습성이 생겨 어른들로부터 꾸중 을 들었으나 개과(改過)치 않은 죄를 물어 수인의 몸이 되었나이다. 그동안 적소 생활을 하면서 부모 은공과 주위의 고마움이며 더불어 사는 삶에 자기 몫을 해야 남에게 대접을 받는다는 세상이 치를 깨달음이 적지 않았사옵니다. 적은 비록 선경이나 오랜 세월 이 땅에 머물면서 7년대한(七年 大旱)의 고생을 함께 겪다보니 창생들의 고초와 원성을 어이 외면하리까? 목마른 창생에게 물을 주어 죄가 된다면 소녀가 그 죄를 감당하리다. 목마른 자들에게 목이나 축 이게 해 주십시오“하고 애원조로 말하였다. 듣고 있던 관우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어 둘이서 비를 내리기로 합의를 했다. 관우는 풍녀 (風女)에게 바람을 부탁하고 운동(雲童)에게 구름을 모으게 해서 자기는 원수(原水) 가 든 물병과 이를 뿌릴 솔가지를 가지고 옥녀의 처소로 갔다. 옥녀는 이를 돕기 위해 관우의 등 에 업혀 하늘로 올라갔다. 관우는 공중을 날으며 솔잎에 물을 묻혀 열심히 뿌리고 다녔다. 관우 의 등에 업힌 옥녀는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심한 가뭄에 솔잎에 묻은 물로 해갈이 되겠는가?’ 하며 옥녀는 관우의 등에 업힌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 . ..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손이 물병으로가 관우의 그것을 뺏으려 했다. 관우는 놀라 물병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이는 항상 물 을 엎지를까봐 조심한 관우의 직업에서 오는 본능이었다. 그러나 물은 둘이서 다투는 바람에 그만 엎질러져 버렸다. 순간 관우는 정신이 아찔하여 온 몸 에 힘이 빠졌다. 방금엎지른 물로 인하여 지상이 온통 대홍수가 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옥녀도 내려오면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방금 엎지른 물로 지상에는 물난리가 나서 온통 난리법 석이 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옥녀를 내려 준 관우는 말 없이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다음날 관우는 죄인의 모습으로 상제 앞에 나타났다. “우신(雨臣) 관우는 그 동안 가뭄으로 많 은 생물들이 고사하는 참상을 봤고 비를 기다리다 하늘을 우러러 원망하는 소리도 수 없이 들었으 며 우정(雨政)의 책임자로서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상제의 하명을 거역하고 지상의 생물들에 게 목이라도 축이게 한다는 것이 실수하여 물병을 엎지르는 바람에 물바다를 만들고 말았으니 소 신을 벌하여 주십시오” 하며 워낙 큰 실수가 되어 변명도 대책도 없이 다만 통곡으로서 대신하 며 조아렸다. 한 식경을 울고 있는 관우에게 영이 내려졌다. “관우는 울음을 멈추고 얼굴을 들 라. 어제의 홍수사건은 네가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옥녀가 잘못하여 지상에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는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어제의 사건은 비록 너희들의 실수라 하지만 이는 천지조화가 변 천 할 때가 왔기에 하늘은 다만 너희들의 힘을 빌렸을 뿐이니 놀라지 말라! 하늘은 유구한 우주 의 앞날을 위해 언제까지나 비를 뿌리고 다녀야 하겠는가? 이제 원수(原水)항아리의 물을 부어 바 다를 만들고 햇볕으로 인해 증발하는 물을 모아 구름을 만들고, 구름이 쌓이면 다시 비가 되어 내 려가는 자동장치를 할 때가 왔을 뿐이다. 다만 이번 일로 말미암아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들을 도우려는 그대들의 충심을 알게 되었으니 아름다운 일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니 우리 부녀지간도 꽤 오래 헤어져 살았구나. 그 아이 도 많이 성숙했겠지. 철모르고 자기중심의 사고와 제 마음대로 하려던 철부지가 그 동안 근신하면 서 달라졌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 번 일로 보아 저를 희생하면서 남을 도우려 했다 함은 천심 의 발로라 할 것이다. 경은 천년을 하루같이 소임을 다 하였고 남을 긍휼(矜恤)히 생각할 줄 아 는 마음을 가상히 여겨 옥경에 거처를 마련했으니 편히 가서 쉬라“고 했다. 관우의 등천(登天) 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그 후 옥녀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산상에 정석을 날라다 상제단을 만들고 조석으로 용부정 (용바위)의 물을 길어 치성을 드리고 선경의 가르침에 순종하였으니 머리는 하루가 다르게 자랐 고 마침내 선율에서 벗어나게 되어 하늘로 올라가니 상제는 기쁘게 맞이하고 “자로선”이란 자리 를 주어 곁에 있도록 하였다. 자로선(慈露宣)이라 함은 하늘의 밤이슬을 담당하는 신선자리이다. 밤이슬은 식물에 낮의 햇볕과 함께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양수분이다. 이슬은 한낮의 햇살에 쪼이고, 때로는 모진 비바람에 얻은 상처를 말끔히 씻어주고 밤마다 포근히 안아주며 목마른 생명의 생명수라 하여 하늘의 은혜 요, 생명의 감로(甘露)라 하였다. 예부터 선인들은 밤이슬을 사람의 자정(慈情)과 같다고 하였는데 하늘은 밤이슬로 만물을 어루만 지고 어버이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은 그 보다 더 진하다하여 모정삼로(母情三露)라 하기도 한다. 이는 어머니의 자정은 하룻밤에 세 번이나 자식을 감싼다는 의미로 전해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옥녀봉의 전설은 오늘날 까지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 고장 유일의 이야기이다. 용의 의인화된 화법이 이 전설의 특징이며, 삼라만상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정리한 부분과 아무 리 옥황상제의 딸일 지라도 자기 수양이 부족하면 가차없이 벌을 내리게 하는 공정함이 후세의 교 훈으로 남을 이야기이다.
병마훈련장에 도착하니, 과거 조문국이 최후를 맞아 성안에 갇혀 있을 동안 병마를 훈련시키던 500여평 평지는 숲에 덮이고 산정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경사져 있다. 평지였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병마훈련장 위치는 9부능선에 꽤 넚은 평지가 있어 말을 훈련시키고 금성산 정상에서 훈련된 말을타고 내려다보며 경비하지 않았을까 삼한시대 때, 조문국의 한 나라의 규모를 대충 유추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비탈길 솔숲과 밧줄을 잡는 구간이 있지만 최근 철계단을 만들어 계단을 오르자 앞이 훤하게 트이며, 헬기장이 나오고, 정상에는 그 유명한 전설 "명당자리" 땅을 판 흔적이 아직도 구덩이가 있다. 그뒤 소나무 숲속에 금성산 정상(530m) 표지석이 그늘에 서있다.
용담(龍膽) 꽃
용담(龍膽)은 다년초식물 뿌리엔 알칼로이드 성분 항암효과가 있고,
웅담보다 쓰고, 상상의 동물인 용의 쓸개처럼 아주 쓰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조문국의 도읍지였던 탑리리 일대를 바라보자면 남쪽 아래로 잠시 내려선다. 솟을바위 위 소돌방구라 하는 조문전망암 위에 서면 과거 조문국 도읍지 일대가 한 눈에 바라다 뵌다. 시원한 조망이 '일품'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낙조와 더불어 지나간 역사속의 조문국 옛터를 바라보기 좋을 너럭바위이다
금성산은 벌판 한 가운데 우뚝하니 솟아난 관계로 가까이 있는 오토산을 비롯 칠곡의 유학산, 의성 최고봉 선암산 등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 산들을 바라보기에 좋다. 금성산에서 출발하여 비봉산을 거쳐 나오는 가운데 골골마다 전답을 거느리고 있는 99개나 되는 소류지를 바라보게 된다.
금성산에 군데군데 조망대에서 둘러보면 특이한 게 눈에 띈다. 산을 둘러싸고 수십 개의 저수지들이 널려있다. 금성산은 과거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산이라서 샘이나 계곡이 발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비가 내리면 빗물이 고이지 않고 땅속으로 바로 스며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조그만 빗물이라도 모아 두었다가 농업용수로 쓰려는 조상들의 유비무환 정신이 뛰어나다...
조선 제일의 명당자리
비록 풍수를 바라보는 눈이 트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여기서는 맑은 기운을 느낄 수 있는데,산정에 있는 500여평 평지로 이뤄진 산정에 있는 무덤을 쓰고 또 파 헤쳤다 하던 큰 웅덩이는 영남에 널리 알려진 풍수일화를 간직한 곳. 부근 최대의 명당터로 알려진 이 곳에 매장을 하게되면, 그 후손은 3년 이내 큰 부자가 되고 인근 마을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 등 액운이 겹친다 하는 속발지지[速發之地]의 풍수설로 인한 것이다. 이런 연유[緣由]로 인한 것인지, 주변 일대에 가뭄이 들면 금성산 정상은 기우제를 지내는 하늘과의 통로가 되곤 하였다
화산 폭발의 흔적인 정상의 평지는 천하 제일의 명당자리로서 이곳에 조상묘를 쓰면 당대의 만석꾼이 되지만 주변 지역은 3년 동안 가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지금도 주민들이 남몰래 땅을 파헤친 흔적이 곳곳에 있다
금성산의 전설
금성산은 영남에서 가장 많은 풍수 일화를 간직한 산이라 할수 있다. 그 산 자체에 대한 다양한 풍수 해석도 해석이려니와, 무엇보다고 그 방대한 산자락 골골마다에 들어앉아 있는 수많은 마을들이 지닌 각양각색의 명당설이 마치 풍수 전람회장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명당설을 바탕으로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진기한 이야기가있다. 이 금성산 산정에 묘(무덤)을 쓴다면 석달동안 이 산을 둘러싼 지역 일대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이 들고 묘를 쓴 사람은 갑자기 운수가 대통하여 큰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고종때 이 지방에 심한 한발이 든 적이 있었다. 나라를 통틀어 보아도 전국 각 지방에는 비가 내려 가뭄이 말끔하게 가셨는데 이 지방만은 빠뜨려 놓고 말았다. 그래서 논과 밭은 메말라 갔고 곡식은 타죽어 가니 농민들은 메말라 죽어가는 곡식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비를 기다리다 지쳤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농민들은 금성산 산정을 향하여 모였다. "금성산을 파헤쳐라" 고 외치며 모여든 인근 주민의 수는 수백이 넘었다. 사실 이산은 밖에서는 깎은 듯한 적벽으로되어있으나 산꼭대기에는 그 넓이가 600~700평이나 되는 모래밭이다. 진노한 주민들은 모래금을 찾듯이 산정을 뒤졌다. 그 결과 길이 10m의 땅속에서 조그마한 석곽을 발견하니 주민들의 울분은 한 순간에 폭발되고 석곽 속의 사람머리는 산 아래로 팽개쳐졌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이 진노하고 검은 구름이 사방으로 뒤덮어 버리고 그렇게도 목마르게 기다리던 단비가 산과 들, 논밭에 함빡 내려졌다고 한다. 무덤을 쓴 사람은 그 후 모 지역에 가서 재수 대통하여 무더기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어 고향에서 논과 밭, 과수원을 사서 잘 살게 되었다고 하며 그 후 그는 그성산 음덕에 보답할 것을 결심하여 학교가 없는 금성면에 학교를 세우는 등 큰 사업을 하였다고도 한다.
높이는 531m이다. 가마와 비슷하다고 하여 가마산이라고도 부른다.
내륙분지에 솟아 있는 제법 큰산으로, 의성군의 명산으로 꼽힌다.
산길은 정상표지석 뒷편으로 열린 소나무 숲길로 이어진다.
부드러운 솔가리와 하는 쿠션 좋은 바닥에, 솔향기에 취해서 걷다보니 흔들바위 갈림길이다.
주 등산로 서편 아래로 90m쯤 내려서면 흔들바위를 만나게 된다.
흔들바위가 급경사인지라 오를 때 나무계단이 높아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다니면 사실 짧은 거리이다.
우뚝히 솟아있는 바위를 건들면 간들간들 하고 흔들린다. 경사진 비탈 위에는 3개의 바위가 엇박자로 포개어져 있다. 그래서 통상 흔들바위라고 이르지만 건들바위 또는 간들바위라 하기도 한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견디며 서 있는 3층의 석탑처럼 생긴 바위 너머로 배나무골과 금성면 일대가 바라 보이는 조망 또한 아주 좋다.
건들바위를 관망하고 내리막길로 내려오면 왼편으로는 기도원 갈림길,
오른편으로는 용문지 갈림길로 A코스로 내려왔다
용문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뜻에서 인위적으로 조성한 소류지다.
산 위에서는 그 지형이 보인다 - 일명 "옥샘"이라고 하여 성기형 지세이다.
용문정이라는 제명[題名]에는
용이 솟구쳐 오를 만한 용소[龍沼]가 저수지로 변한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다.
2013년 10월 26일 의성 금성산에서....
주변관광지 :
산행 종점 인근에는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 영화 앗뿔싸에 나온 사찰 수정사가 있고, 탑리오층석탑, 관덕리 삼층석탑, 빙산사지 오층석탑 등 우리나라 석탑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석탑과 제오리 공룡발자국 화석지, 문익점 면작기념비, 조문국 경덕왕릉등의 유적지가 금성산 일원을 따라 자리잡고 있다.이중 빙산사지 오층석탑이 있는 빙계계곡은 여름철 피서지로서 빙혈과 풍혈로 유명하다.
역사속에 묻혀진 천진산, 현재 금성산,
또다른 이름은 금학산, 영니산......금학사 사찰 존재....영니산 봉수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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