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와 라깡의 쉬레버 박사의 정신병 사례 비교: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 - 신 명 아(경희대학교)
서 론
프로이트와 라깡이 연구한 정신질환 환자 중에서 신경증(neurosis)의 히스테리아 환자 ‘도라'(본명:이다 바우어)에 대한 연구는 근세에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더욱 커짐으로써 정신분석가는 물론 문학비평가의 관심까지 받으면서 그 위상을 굳혔다. 따라서 신경증은 우리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개념으로 다가와 있다. 반면에 신경증과 더불어 정신질환의 주요 병리현상을 구성하는 정신병(psychosis)에 대한 연구는 우리 일반 독자들에게 멀리 존재하여서, 아직 그것의 구체적 구조가 모호한 채로 인식되어있다. 다행히 프로이트와 라깡이 정신병 환자 중에서 쉬레버 박사(Dr. Schreber)의 사례를 심도 있게 연구하였고, 이들의 연구는 정신병 구조의 파악에 필수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논문은 프로이트와 라깡의 쉬레버 사례 연구를 비교함으로써, 정신병 구조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두 정신분석가의 연구의 차이를 살핌으로써, 라깡의 정신분석의 특징과 그 의의를 새로이 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라깡의 읽기가 프로이트의 읽기와 결별하는 지점에서 나타나는 상징계의 의미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승인'(Bejahung)의 기제와 이것을 거부하는 ‘폐제'(Verwerfung 혹은 foreclosure)의 기제가 인간의 언어활동과 정신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쉬레버 박사 사례와 기존의 연구 경향
쉬레버 박사(1842-1911)는 독일의 저명한 의사로서 아이들의 정상적 발육과 교육을 위한 저명한 저서(The Book of Health와 Medical Indoor Gymnastics)를 남기고 정신건강에 필요한 집의 조그만 정원을 적극 강조하여서 그런 정원을 '쉬레버정원'이라고 이름을 남길 정도로 명성을 누린 모리쯔 다니엘 쉬레버 박사를 아버지로 두었다. 쉬레버는 집안의 내력이 교수와 의사를 지낸 아버지 쪽 선조와 어머니 쪽 선조로는 판사를 가진 귀족적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이런 저명한 아버지는 사다리에서 떨어져 뇌를 다친 이 후 자살충동을 느낄 정도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아들 다니엘 쉬레버가 변호사를 막 시작할 즈음에 50세 초반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판사인 형도 38세의 젊은 나이에 결혼을 바로 앞두고, 오랜 독하나님생활의 방종함으로 얻은 매독의 증세를 비관하여 권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져지고 있다. 나중에 쉬레버의 여자형제들은 그 당시 그들의 오빠가 틀림없이 정신병(psychosis)을 진전시키고 있었지만, 당시의 의사들이 정신병원에 넣을 정도로 심각하게 앓고 있지 않았다고 오진한 것을 애도하였다(쉬레버 옹호 In Defense of Schreber, 23).
이런 방종한 형과 다르게 쉬레버는 정말 모범생의 삶을 살았고, 1878년 2월, 36세에 유명한 오페라 단원이던 하인리히 베르의 21세 된 딸, 사빈 베르(Sabine Behr)과 결혼한 후 6 번의 유산으로 인해 아이만 없었다 뿐이지 행복한 생활을 누렸다. 이런 행복한 일상이 정신적 병마에 오염되게 된 것은 1884년에 색소니 지방의 쉠니쯔(Chemnitz)에서 판사로 재직하면서 국가자유당(National Liberal Party) 의 국회의원(Reichstag) 자리를 위한 선거에서 패배를 했을 때였다. 쉬레버는 비스마르크를 지지하고 반 사회주의자적 입장을 견지하고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유태인이고 천주교도인 브루노 가이저(Bruno Geiser)에게 참패당함으로써 근 1년 반 동안 우울증(depression)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첫 번째 질환이 발생될 때 그는 리히터(Richter) 박사를 처음 찾아갔고, 그 의사는 그 당시 진정제로 쓰던 브로마이드를 그에게 주로 투약하였으나, 쉬레버 박사의 자살 충동이 지속되자 가족들은 그를 더 유명한 의사, 플레쉬그(Flechsig)에게 그를 의뢰하였다. 플레쉬그는 진단서에 쉬레버는 부작용으로 “환상과 망상 같은 약물에 의한 정신착란의 증후”를 야기시키는 “(우울증) 만성적 브로마이드 중독?”(『쉬레버 옹호』, 38)이라고 적고 있다.
1886년 1월에 판사 일에 복귀하고 나서 그는 라이프찌그에서 8년 동안을 아무 병마에 시달리지 않고 행복한 날을 보내며, 계속 승진을 하는 영예를 누렸다. 그는 장래에 색소니 지방의 사법부 장관감으로 기대되어졌고, 1893년에는 드레스덴의 상급법정에서 5인조 판사단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자기보다 20살이나 많은 판사들을 인도해야하는 이 영광스런 직위는 쉬레버에게 막중한 정신적 부담을 주었다. 이 직위는 그에게 영광을 안겨다주기 보다 두 번 째로 정신적 질환이 발생되는 심각한 위기를 발생시켰다. 쉬레버의 첫 번째 정신적 질환증세를 고쳐준 플레쉬그에게 감사를 하는 의미에서 그의 사진을 책상 위에 놓고 지내던 쉬레버의 부인은 남편을 다시 플레쉬그에게 의뢰하여 1894년 6월 14일 까지 그의 병원에서 치료받게 하였다.
이 당시 그는 불면증으로 시달리면서, 빈번히 자살을 시도하느라 밤에 침대 시트로 목을 메는 시도를 하는가 하면, 소리를 지르고 그를 저지하려는 조수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피해망상적 정신착란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히 그는 플레쉬그가 그의 병을 고치기는 커녕 더 악화시키려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며, 모든 조수들의 행위를 플레쉬그의 사주를 받아 자신을 해치려는 의도로 착각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그의 증세는 1894년 남편에게 시달리는 딸을 잠깐 친정으로 불러들여 몇 일 간 휴식을 취하게 한 사빈의 아버지의 의도로 사빈이 쉬레버를 잠시 방문하지 못하게 될 때 발병되었다. 부인에게 많이 의존적이던 쉬레버는 더욱 상처를 받고 그녀를 다시는 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환영이라는 착란증세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온갖 종류의 환청을 듣게 되고 부인의 무덤을 지나갔었다는 시각적 환각증세를 보이는 등 완전히 정신분열(schizophrenia) 증세를 보였다. 이런 증세를 완화시키기 위해 플레쉬그는 그에게 모르핀과 비스머드(bismuth) 등 부작용으로 착란 증세를 유발하는 가능성도 있는 약들을 투약하였다. 이 때의 그의 주된 착란 증세는 플레쉬그가 “영혼살해”(soul-murder)를 감행하여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피해)망상적(paranoid) 착란증세와 세상의 끝이 도래하였으며, 모든 것이 와해되고 부패한 상태라는 망상이었다.
1894년 6월, 부인 사빈은 남편의 월급에 대한 권리 문제로 남편과 심하게 갈등을 겪게 되자 플레쉬그의 도움으로 남편이 정상적인 사회적 의무를 다할 수 없다는 법정의 판단을 얻어내고, 그를 리덴호프에 있는 피어슨 박사의 정신병원으로 잠깐 옮긴 후, 다시 소넨스타인 국립 정신병원으로 이동시켰다. 이로 인해 쉬레버는 1902년 12월 20일 까지 3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7년 동안 이 병원에 감금되었다. 결론적으로 쉬레버는 두 번 째 정신병이 도발 된 후 9년 동안이나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비운의 운명을 겪게 되었다.
소넨스타인 정신병원에서 쉬레버가 보인 주된 증세로는 자신이 여성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강간당할 위험에 처해있다는 망상과, 인간의 세계를 잘 모르는 하나님이 쉬레버 자신을 통해 육욕적 쾌락(voluptuousness)을 즐긴다는 망상을 들 수 있다. 이 당시 쉬레버는 하나님이 그를 괴롭히기 위해 그의 신경에 온갖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이런 행위를 하나님의 신경들, 즉 그가 하나님의 광선들(rays)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일으키는 ‘기적들’로 묘사하였다. 쉬레버에 의하면, “나의 몸에서 어느 한 다리나 기관이 기적들에 의해 당겨지는 것을 피하지 못했으며… [나의 몸은 이런 하나님의] 불순한 광선들에 의해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순수한 광선들에 의해 다시 고쳐지거나 구성되기도 하였다”(내 정신병의 일기 Memoirs of My Nervous Illness, 131-132).
쉬레버는 자기 몸에 가해지는 이런 하나님의 ‘기적들’에 무관심하기 위해 일부러 창문을 열어놓고 몸을 얼게 하거나, 나아가서는 피아노를 침으로써 이런 현상을 무시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당시 쉬레버는 특히 다양한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환청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썩은 고기!(Luder)”라고 부르는 환청을 듣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쉬레버 자신의 흡입능력에 빨려서 하나님의 부분을 상실하는 것이 두려워 끝임없이 그를 파괴하려고 한다고 착각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파괴공작을 무산시키는 승리자가 되기도 하였다는 망상을 했다. 쉬레버는 하나님을 ‘전면부분’과 ‘후면부분’으로 분리하거나 열등한 하나님인 아리만(Ahriman)과 우월한 하나님인 오머즈드(Ormuzd)로 이분화시킨 후, 이런 두 하나님의 부분들은 어떤 때는 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서로가 반목한다는 착란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쉬레버의 이런 하나님과의 투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완화되어서, 나중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여성으로서 신에게 육욕적 쾌락을 줄 수 있고, 세상이 다 파괴된 후 유일하게 남을 자손을 하나님에 의해 잉태할 것이라는 망상을 가지게 된다.
이런 정신병적 증상을 가진 쉬레버의 사례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살펴보면, 크게 그에게 우호적이며 그를 옹호하는 그룹과 그에게 비우호적이며 그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보수주의자로 비난하는 그룹이 있다. 그를 비난하는 그룹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로 대변되고 있으며, 카네티는 쉬레버 박사가 쓴 내 정신적 병의 일기를 히틀러의 편집증적 전기인 나의 투쟁의 선구자적 텍스트로 보았다. 카네티는 편집증을 전체주의적인 독재주의와 연결하며서, 편집증환자와 독재자는 권력의 병을 앓으면서 혼자만의 생존에 대한 병적 의지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온 세상을 희생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카네티는 세상이 다 망해가고 쉬레버 자신은 유일하게 살아서 신의 자손을 잉태하는 여성으로 변한다는 망상이야말로, “권력을 쫒는 모든 자들의 가장 강한 충동”의 한 면모를 드러낸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카네티는 “경멸되어서 벼려지고 힘없이 어느 정신병원에서 [정신적으로] 황혼의 상태를 끌어가는 삶을 사는 미친사람들은… [오히려] 히틀러나 나폴레옹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류를 위해 이것의 [즉, 권력의] 저주와 이것의 주인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쉬레버 옹호, x, 재인용)라고 말한다. 이러한 양상은 쉬레버가 1902년에 정신병원에서의 구금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해달하고 법원에 내놓은 청원서의 기각에서도 드러난다. 샌트너는 “그[쉬레버]가 그의 망상에서 이미 전체주의화하고 있는 본능적 경향의 사회적 형태에 대한 취향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즉 “그가 순수한 아리안족으로서가 아니라 흑인이나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생각했었더라면,”(x) 이전에 그의 동료였던 그 법정의 판사들은 그의 해방탄원서를 기각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샌트너에 의하면, 이러한 읽기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구아타리에 의해서도 지지된 바 있다.
쉬레버에게 우호적인 그룹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 중의 하나는 쉬레버와 그의 유명한 의사 아버지와의 관계를 기초로 아들 쉬레버가 아버지의 억압에 의한 희생자라고 보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입장은 1959년에 쉬레버: 아버지와 아들을 쓴 윌리암 니더랜드(William Niederland)에 의해 견지된다. 니더랜드는 아이들의 올바른 정신적 신체적 교육을 위한 저서를 쓴 아버지의 저서 내용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잠자는 자세나 공부하는 자세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 온갖 형태의 기계적 도구를 창안하고 주창한 아버지의 교육방법이 어린 쉬레버에게 상당한 정신적 외상을 입혔기 때문에 그의 정신병이 발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1973년에 모튼 쉐츠만(Morton Schatzman)의 영혼 살해: 가정에서의 탄압 Soul Murser: Persecution in the Family에 의해 더욱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모츠만과 더불어쯔비 로데인(Zvi Lothane)도 『쉬레버 옹호』에서 쉬레버 박사에게 우호적인 연구를 발표하였다. 로데인은 쉬레버를 단순히 편집증 환자 혹은 동성애자로 보는 견해를 반대하고, 그의 신경적 병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의 사람들로 인한 ‘깊은 애정적 의기소침(a deep affective depression)’에 의해 야기된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로데인은 쉬레버가 실제로 부인보다 더 마음이 따뜻하고 여성적인 사람으로서 상처받기 쉬운 성품의 사람이었으며, 부인은 오히려 그보다 냉정하고 상황을 조정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이 나중에 양녀로 들인 어느 이름없는 오페라가수의 딸도 사실 부인이 혼외정사로 낳은 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의 쉬레버 박사 연구는 쉬레버의 망상들을 양 극단에서 보는 것, 즉 한편으로 히틀러의 국수주의적 집착들과 유사한 것으로 보거나 가정의 가부장적 존재의 희생으로 보는 경향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여 주로 언어의 측면에서 이 양극단을 다 포함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일환은 에릭 샌트너(Ericl L. Santner)의 쉬레버 박사연구에서 발견된다. 샌트너는 당시 어린 아이들의 자위행위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그 행위를 막는 기계적 도구를 확산시킨 쉬레버의 아버지 모리쯔 쉬레버 박사가 쉬레버를 희생시켰다는 니더랜드의 읽기를 극복하고, 쉬레버의 망상은 아버지 자체가 아니라 (소위) 아버지의 기능인 ‘명명하기(이름짓기)의 위기(investiture crisis)'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샌트너는 쉬레버가 속했던 사회에서 기존의 전통과 가치가 무너지고 모더니티로 전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명명하기의 위기’는 주체의 소외, 법의 부재, 도덕의 아노미 현상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한다. 샌트너는 쉬레버의 망상은 이런 소외와 부재에 대한 ‘자기-치유’의 창조적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런 읽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창자, 장-프랑소아 료타르의 읽기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료타르는 쉬레버의 망상이 그의 의사, 플레쉬그 그리고 하나님까지 연루되어 남성 혹은 권위의 소유자에 고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는 여성[혹은 하나님과 플레쉬그가 몸을 약탈하는 창녀] 의 위치에서 수동성을 소유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의 망상을 창조하는 본능의(libidinal) 육체야말로 이런 권위의 존재를 욕망의 ‘현기증나는’ 게임에 연루시키는 창조적 행위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료타르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한 어린 아이가 매맞고 있다”라는 논문에서 논의된 것들은, 즉 한 주체가 상대방의 주체로 잘못 인식된다는 논의들은, 해석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본능의 활동을 해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읽기 체계라고 주장한다. 료타르는 맑스 혹은 레닌 같은 모든 이데올로기 주창자나 프로이트 같은 권위의 주체들은, 들뢰즈와 과타리가 소도시(조무래기) 변태자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다니며 조직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을 현기증나게 무질서 속으로 이끄는 ‘본능적 과정들(libidinal processes)’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권위적 조직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료타르에 의하면, 이런 남성적 권위의 주체들은 대중(혹은 여성)을 자기들의 이성적 이론 혹은 계획을 위해 전체화하고 약탈하지만, 역설적으로 대중들은 이제 “사회주의여 영원하라!” 혹은 “조직이여 영원하라!”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쉬레버의 경우처럼 “본능이여 영원하라!”를 외친다고 말한다(153).
프로이트의 쉬레버 박사 사례 읽기: 아버지와 동성애
프로이트는 쉬레버 박사의 임상 사례를 칼 융에 의해 소개를 받았으며, 페렌지(Sandor Ferenczi)에게 이 사례연구를 공동연구하자고 제의를 하였으나 페렌지는 프로이트가 그를 단순히 비서로 여기는 것을 느꼈으므로 이 제의를 거절하였다. 프로이트는 쉬레버 연구를 하기 일년 전인 1909년에 이태리로 함께 여행을 갔던 페렌지에게 편지를 써서, 빌헬름 플리스에 대한 프로이트 자신의 동성애적 감정이 이 연구를 하면서 많이 가다듬어졌다고 고백하면서, “편집증 환자들은 실패하였지만 자신은 성공하였다”고 말하였다. 샌트너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몇 몇 정신분석 동료들에 대한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투쟁하고 있었으며,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친구들, 즉 플리스와 에들러 그리고 페렌지 까지도 편집증의 계열로 묶고 있다고 말한다(20). 융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로이트는 이태리 여행 시 페렌지가 “여자처럼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게 원했지만, 나의 동성애는 결국 그를 여자로 수용할 정도로 진전되지 않았다”(샌트너, 20, 재인용)고 불평하였다.
쉬레버 연구와 프로이트의 동성애의 연결 가능성은 피터 게이(Peter Gay)에 의해서도 주장되었다. 게이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쉬레버에 대한 광적 집착”은 프로이트의 플리스에 대한 동성애적 애정의 결과이며, 또한 이 연구 중에 프로이트는 “플리스와의 사건의 상처”를 다시 열어주는 애들러에 대한 동성애적 감정 때문에 적잖이 투쟁을 하였다(278). 게이는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쉬레버를 연구하는 것은 플리스를 기억하는 것이었으며, 플리스를 기억하는 것은 또한 쉬레버를 이해하게 만들었다”(279)고 한다. 이런 프로이트의 쉬레버에 대한 동성애적 전이감정은 그가 정신분석의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번히 “영혼 살해”, “신경 접촉(nerve contacts)” 같은 쉬레버의 상상적인 신조어들을 사용하게 만들었고, 융과 아브라함, 페렌지도 이런 용어를 함께 사용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즈비 로데인은 프로이트의 쉬레버 연구에서 동성애의 강조는 프로이트 자신의 (동성애) 콤플렉스가 역동적으로 전이된 결과라고 말한다. 또한 로데인은 초기 정신분석기 그룹에서 잠재적인 동성애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정신분석의 역사에서 가시적이면서도 동시에 은밀한 조류였다”고 덧붙인다(338-39).
로데인이 지적하였듯이, 쉬레버가 그의 삶을 통해서건 텍스트를 통해서건 프로이트에게 역전이 할 계기도 없이, 프로이트가 그의 쉬레버 연구에 자신의 동성애적 감정을 전이하게 만든 정신적 기제는 투사(projection)다. 프로이트는 편집증의 증후형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이 투사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어떤 내부적 인식이 억압되면, 그것의 내용은 어느 정도 왜곡되어 일종의 외부적 인식으로 의식에 들어온다”고 한다(169). 프로이트는 이런 외적인 인식으로 변형되어 나타난 것이 망상이며, 특히 편집증에서의 피해망상(persecutory delusion)은 바로 원래의 감정이 변형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편집증에서의 투사과정을 네 가지 방법으로 설명한다.
첫 번 째로, ‘(한 남자인) 나는 (한 남자인) 그를 좋아한다’는 기본 전제에서 동사부분이 변형되는 경우다. 프로이트는 원래 “좋아한다”는 감정이 억압되어진 후, “나는 그를 미워해”라는 전제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 전제는 투사에 의해 다른 전제로 바뀌어서, “그는 나를 미워해(탄압해). 그래서 내가 그를 미워하는 것이야”라는 전제로 변형된다. 결론적으로, 편집증 환자의 동성애적 감정은 원래 자기의 애정대상(love-object)에 의해 탄압 받는 것으로 변형되어진다. 프로이트는 이런 과정으로 쉬레버가 유능한 아버지와 형에게 가지는 애정, 즉 동성애적 감정이 플레쉬그에 의해 탄압을 받는다는 피해망상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고 해석하였다.
두 번 째로, ‘나는 그를 좋아한다’는 기본전제에서 목적어 부분이 변형을 일으키는 경우다. 편집증환자의 동성애적 감정은 사랑 받는 대상을 남자에게서 여자로 변형시킴으로써 색정광(erotomania)의 증세를 보이게 된다. 다시 말해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나는 그녀를 사랑해. [왜냐하면 그녀가 나를 사랑하니까]”. 이런 전제에서 보여주듯이, 대상이 바뀜으로써 온통 사랑 천지가 되어 색정광의 현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색정광의 많은 사례는 “과장되거나 왜곡된 동성애적 집착”(166)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세 번째로, ‘나는 그를 사랑해’라는 기본전제에서 주어 부분이 변형되는 경우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편집증 환자는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그녀가 [혹은 그가] 그를 사랑해“라고 생각함으로써, 다른 여자 내지 다른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질투의 망상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네 번째로, ‘나는 그를 사랑해’라는 기본전제가 완전히 거부되어지는 경우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 기본전제는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하지 않아--나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로 변형되어, “나는 나 자신만을 사랑해”라는 과대망상(megalomania)의 증세를 보이게 된다고 설명한다.프로이트가 언급한 이런 편집증의 증후들은 기본전제, 즉 동성애의 변형물이다. 프로이트는 쉬레버의 다양한 망상들과 증후들을 동성애의 관점에서만 설명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쉬레버의 『일기』에서 “나의 아버지와 나의 형에 대한 기억은… 나에게 신성한 것이었다”는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의 병의 원인은 “여성적인 (즉, 수동적인 동성애적) 소망 환상(a feminine (that is, a passive homosexual) wish phantasy)”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프로이트는 쉬레버가 태양이 자기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망상과 그 태양에게 소리를 질러대거나 저급한 하나님, 아리만과 동일시하는 증후는 쉬레버의 아버지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프로이트는 자기 환자 중의 어떤 환자가 아버지를 상실했을 때 “그를 자연과 숭엄한 것에서 다시 발견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쉬레버와 태양의 관계를 아버지의 집착으로 설명하였다.
프로이트는 플레쉬그가 그의 영혼을 살해한다는 쉬레버의 망상을 아버지에 대한 집착으로 설명한다. 쉬레버에게 아버지는 또한 거세공포의 원인으로서, 쉬레버에 의해 아버지의 역할을 투사받은 플레쉬그는 바로 이 거세공포를 재현하고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서, 프로이트는 이런 아버지의 거세에 대한 위협은 여성으로 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거세위협을 피하고 싶은 그의 소망적 환상의 직접적 재료가 된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쉬레버의 정신병이 51세에 발생한 것은 이성애적 경향과 동성애적 경향에서 갈등을 겪어 가다가 어떤 충격적 사건이 오면 기존의 방향에서 거꾸로 선회하게 되는 것과 연결된다고 본다. 또한 여성도 이 나이에 성의 절정기 이후에 겪게 될 쇠퇴기를 경험하게 되듯이, 남성도 예외는 아니므로 더욱 이런 병리적 현상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에 쉬레버의 정신병이 발생되었다고 본다. 이와 더불어서 8년 뒤 두 번 째로 정신병이 재발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부인이 며칠 친정을 다녀오느라 병원방문을 못하게 되었다. 이 때 그의 정신병은 더욱 심각하게 발전되었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쉬레버의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해석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지금까지 “부인의 존재는 그의 주변에 대한 남자들의 매력적 힘에 대한 방어로서” 존재하였다(145). 그러나 부인의 부재는 그의 동성애적 경향의 봇물을 터뜨리게 만들었고 그의 방어가 무실해졌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의 증거로 부인이 부재하던 날 밤에 여러 번의 사정을 경험하였던 것을 제시하면서, 이 사정들은 무의식적으로 남아있는 동성애적 환상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쉬레버 사례 읽기에서 동성애적 성향에 대한 강조는 프로이트의 믿음, 즉 쉬레버가 남성을 선호하고 아버지 같은 남성에게 가치를 둔다는 믿음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프로이트의 논의에서 쉬레버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고, 부인의 존재에 대한 언급은 앞서 논의한 것 외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성향은 프로이트가 여성 히스테리아 환자 도라를 연구한 논의에서도 나타났었다. 프로이트의 남성선호 사상은 쉬레버에게 투사되어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하게 만든다: “쉬레버가 자신의 동성애적 환상과 잘 타협하고, 그의 병이 거의 회복에 가까운 상태로 종결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컴플렉스가 조율되고 실제 생활에서 훌륭한 아버지와의 그의 나중의 세월이 아마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181).
프로이트의 잠재적인 동성애 감정의 투사는 아버지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쉬레버가 가져본 적도 없는 아들에 대한 언급에서도 나타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쉬레버]가 행복한 것으로 묘사한 그의 결혼은 그에게 어떤 자녀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 특히 이것은 그의 충족되지 못한 동성애적 애정들을 없애줄--그의 아버지와 형의 상실을 위해 그를 위로해줄 어떤 아들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158)라고 진술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쉬레버 읽기는 이런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의 투사로 점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쉬레버의 정신을 그 자체로 탐구하기 보다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는 관점에서 쉬레버의 망상을 해석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쉬레버의 망상에서 다른 이론가들이 쉬레버의 상상적인 창조력의 증거로 보는 하나님의 ‘신경들(nerves)' 혹은 ‘광선들'을 성욕성의 차원에서 ‘정충(spermatozoon)'으로 해석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쉬레버의 망상은 “리비도[본능]적 부착(libidinal cathexes)의 외적 투사이자 구체적인 재현이며: 따라서 그의 망상에 우리 이론과의 놀라운 유사성을 주고 있다”(181)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여성 히스테리 환자 도라의 사례를 초기에 썼을 때, 자신의 시각이 도라의 무의식적 욕망이었던 레스비안적 애정을 무시한 것을 20년 후 의 ‘후기’에서 고백하고 잘못을 시정하였었다. 그러나 쉬레버의 사례에서 ‘후기’에서는 이런 남성중심적 사고가 인식되어지고 시정되기는 커녕 한층 강화되었다. 프로이트는 쉬레버가 태양을 직접 바라보고 눈을 다치지 않고 오래 응시할 수 있다는 진술이 쉬레버의 아버지에 대한 충성심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프로이트는 태양이 아버지의 상징이라고 말하고, 신화에서 독수리도 새끼를 태양에 비춰서 빛 때문에 눈을 피하지 않는 새끼만을 기르는 것은 그들이 태양과 같은 족속임을 증명하는 방법임을 지적하였다. 이 점을 고려해 볼 때, 쉬레버도 아버지(태양)와 같은 계열임을, 그리고 그의 가족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프로이트는 해석한다. 이런 프로이트의 아버지 중심적, 동성애적, 자기 이론 중심적 사고는 프로이트로 하여금 쉬레버의 사례를 환자의 입장에서 파악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가의 잠재적 동성애는 물론 그의 이론적 개념을 투사하게 만드는 전이를 부추기고 말았다.
라깡의 쉬레버 사례 읽기: ‘아버지의 이름’--승인과 폐제
실질적 아버지에 대한 쉬레버의 동성애적 집착을 강조하는 프로이트의 읽기를 보완하는 연구는 라깡의 쉬레버 연구에서 이행된다. 라깡은 프로이트가 지나치게 동성애적 중심으로 쉬레버를 읽은 것을 시인하고, 상징계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동성애와 쉬레버를 논의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럽다고 생각한다(에크리, 209). 쉬레버의 증후를 해석함에 있어서 상징계적 고려가 필수적이라는 라깡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라깡이 프로이트를 옹호할 때도 드러난다. 라깡은 프로이트가 쉬레버 연구를 하면서, 당시에 쉬레버를 직접 만날 수도 있었음에도 다른 사람처럼 그를 실제로 만나지도 않고 또한 쉬레버의 『일기』에서 가족과 그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기 때문에 삭제된 장을 따로 접근하여 연구하지 않은 것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옹호한다. 그 이유는 쉬레버의 증후 자체가 언어적 관계에 의해 도출된 것이므로 프로이트가 텍스트에만 순수히 의존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라깡은 쉬레버 사례를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를 떠나서 생각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라깡은 쉬레버 읽기를 오이디프스 영역을 초월하여, 고고학적 내지 인종학적으로 ‘태양숭배적’ 주제를 도출해내는 이다 매칼파인(Ida Macalpine)의 접근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라깡이 쉬레버 연구에서 동성애를 논하지 않는데도 오이디프스 구조가 필요하다고 본 것은 바로 정신병의 핵심구조인 폐제가 오이디프스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깡에 의하면, 인간의 무의식은 사물 내지 감정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기표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삶의 어느 순간의 감정이나 사건이 그 자체로 인식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기표로 여러 사건들과 감정들의 관계 속에서 상징계적으로 인식되어있다. 라깡은 이런 감정이나 사건이 기표로 무의식에 인식되는 과정을 ‘승인’이라고 부른다. 라깡에 의하면, 이렇게 상징계로 되어 있는 무의식, 즉 “대타자(the Other)” 속의 “기표의 존재는 사실 주체에게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있지 않고 억압의 상태로 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이것은 반복강박의 수단으로 자신을 기의로 재현해보려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에크리(영어판), 200: 앞으로의 에크리는 영어판임)고 말한다. 따라서 라깡에게 있어서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은 본능(needs)의 요구가 아니라 ‘말의 [반복]요구(the insistence of speech)’가 되는 것이다(세미나 3권, 242). 라깡은 아무리 상상계의 저항을 받더라도 무의식의 기표로 구성된 말은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단어를 말할 때 까지 주체 속으로 다시 돌아온다”(세미나 3권, 242)고 말한다.
라깡은 어린 시절에 인간의 무의식에 기본적으로 기표로 승인되는 과정을 ‘원초적 승인(primary affirmation)’ 이라고 하고, ‘삶’과 ‘죽음’ 등의 상징적 관계를 비롯하여, 이런 ‘원초적 승인’에 반드시 어머니의 욕망인 팰러스를 상징적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표화하는 과정이 들어가야, 정상적인 언어사용을 하고 사회화 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의 이름’이 ‘태타자’에서 폐제되어있을 때, 정신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폐제의 개념은 라깡이 원래 ‘거부’(rejes, refus)와 ‘삭제(retrenchement)’로 쓰다가 1956년에 현재의 ‘폐제'로 정착시킨 개념이다. 폐제되는 것의 대상은 여러 ‘기본 기표(fundamental signifier)’들일 수 있다. 특히 또 하나의 ‘기본 기표’인 ‘아버지의 이름’이 폐제될 때, ‘대타자’에 ‘하나의 구멍’으로 존재하는 이것을 메우기 위해 온갖 상상적인 대체물들이 활동하게 되어, 결국에는 정신병의 증상인 다양한 망상들을 형성하게 된다.
라깡은 폐제에 의해 생기는 정신병과 [무의식의 기표의] 거부(negation)에 의해 유발되는 신경증(neurosis)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 차이는 신경증에서는 무의식의 어떤 것이 이미 기표로 승인된 이후 거부되어지며, 거부된 것은 또 다른 변형된 기표(상징계적 구조를 가진 다른 증후)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상징계의 활동인 반면에, 정신병은 상징계에서 폐제된 것이 실재계에 들어와서 상징계의 원칙을 전혀 무시하고 상상계에 따라 언어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라깡은 “신경증은 언어를 사용하고, 정신병은 언어에 의해 사용되어지고 소유되어진다(if the neurotic inhabits language, the psychotic is inhabited, possessed by language)”라고 말한다(세미나 3권, 250). 다시 말해 정신병에서 주체는 언어를 관장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상계에 의해 사로잡혀서 그것이 빈 껍데기로 사용한 언어의 봇물 속에 묻혀 전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깡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언어활동의 기본구조인 은유의 기능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이름’은 획득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의 욕망인 팰러스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체하게 만드는 ‘부성적 은유paternal metaphor’를 의미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언어, 즉 은유를 쓸 수 있다는 점이며, 이런 점에서 동물은 본능적 취향과 끌림, 욕망에 의해 좌우되고 인간은 이것을 대체한 상징계에 의해 자기를 대표하고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 이런 맥락에서 라깡은 쉬레버의 정신병에서 그의 기표들이 욕망을 담을수록 은유의 기능이 배제되고 상징계의 활동이 멈춰져서, 주체는 그가 말한 [무작위적, 공허한] 말과 하나가 되어버린다고 말한다(세미나 3권, 218).
라깡은 실현 불가능한 어머니의 욕망인 팰러스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로 승인하지 못한 정신병 환자 쉬레버는 자신이 이 팰러스가 되기를 시도하여, 다양한 과대망상적 증후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쉬레버는 폐제된 이 남성기표(male signifier) 대신 상상계 속에서 자기가 그것이 되어야했고, 남성기표가 있어야 인식 가능한 자신의 성별 의식을 어떤 식으로라도 인식하기 위해 스스로 여자가 되는, 즉 신의 여자가 되는 망상에 빠진 것이다(세미나 3권, 252). 라깡은 에크리에서도 이런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라깡은 쉬레버가 자신이 하나님의 배우자라는 과대망상을 가지며, 이 망상에서 쉬레버는 자신이 하나님의 욕망인 팰러스가 되었다고 말한다(206). 더 나아가서 라깡은 쉬레버의 팰러스가 되고자하는 욕망이 또다른 해석으로 그의 여성이 되고자 하는 망상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라깡은 쉬레버가 “어머니가 결여하는 팰러스가 될 수 없었으며, 따라서 남자들이 가지지 않은[결여하는] 여성이 되어버리는 해결책[만]이 남아 있었다”(에크리, 207)고 말한다.
라깡은 이러한 과정을 ‘상징계에서 폐제된 것은 실재계에서 다시 나타난다’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라깡은 쉬레버의 망상을 설명하면서, 특유의 시적 은유의 수사학적 기법으로, “주체 안에서 침묵하고 있던[폐제된] 기표는 그 어두움으로부터 실재계의 표면에 일종의 의미의 광채를 투사시키며, 그리고는 이 무의 기저로부터 투사된 빛으로 실재계를 밝혀주는 것이 아닐까?”(에크리, 203))라고 말한다. 라깡은 쉬레버의 망상 속에 나타난 신의 ‘신경들’ 혹은 ‘광선들’은 환각적 효과들이지만, “이런 피조물들은 . . .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서 나타나는 창조주, 생물들, 피조물을 그것들의 상징계적 연결성 속에서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에크리, 203)고 본다. 다시 말해, 사물의 진정한 관계들 중에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가 폐제되어 주체에게 접근되지 않은 것들은 실재계의 영역에서 상상계적인 환상들을 통해서라도 자신을 드러내본다. 뮬러(John P. Muller)와 리챠드슨(William J. Richardson)은 에크리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환각적 재현들은 기표들이 아니라 의미의 예견들(anticipations of meaning)이며, 아버지의 이름이 폐제되어 팰러스와 [상상계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주체의 측에서 실재계를 접근 가능하게 해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249).
이 진술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라깡의 실재계의 개념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딜란 에반스(Dylan Evans)의 설명에 의하면, 1936년에 라깡에 의해 쓰여지기 시작한 이 개념은 당대의 철학자들 중 어떤 그룹에서 유행하던 개념으로서 라깡이 1936년 논문에서 언급한 에밀 메이어슨(Emile Meyerson)이 쓴 저서의 핵심적 개념이었다고 한다. 메이어슨은 실재계를 ‘존재론적 절대체(ontological absolute), 진정한 물자체(a true being-in-itself)’(에반스, 159)로 보았으며, 라깡은 실재계를 이런 20세기 초 철학의 한 조류에 입각하여 어떤 존재론적 본질을 의미하였다고 한다. 이런 실재계는 한편으로 “실재적인 모든 것은 합리적이다(그 역으로도)”라는 헤겔의 견해를 암시하였다고 한다(에반스, 159). 이런 실재계의 개념은 다소 형이상학적 의미를 내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라깡에 의해 더 포괄적으로 쓰여져서 나중에는 현실의 구성물인 물질(matter)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나중에 실재계는 생물학과 “(육체의 상상계적 그리고 상징계적 기능들에 대항하는) 그 적나라한 물질성을 가진 육체”(에반스, 160)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 이후 실재계는 점점 상징계, 상상계와 더불어 정신분석의 주요 개념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상징계에 의해 접근될 수 없는 것, 의미될 수 없는 것이 나타나는 영역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본기표가 폐제된 경우인 정신병에서, 모든 언어활동이 뒤죽박죽이 되고 그 기표를 대신해서 다양한 체계의 망상들이 구축된다. 이것은 ‘너는 나의 부인이다’에서 주체는 물론 타자의 위치를 지정시켜주는 ‘대타자’에 구멍이 생겨서, 모든 관계가 일관성있게 구축되지 못하고, 상징계적 구조에 의해 생겨나는 하나의 타자 대신에 수많은 상상계적인 타자들, 라깡의 표현을 빌리면, “타자들의 그림자들(shadows of others)”(세미나 3권, 53)이 생겨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라깡은 ‘타자들의 그림자들’을 쉬레버가 사람들을 볼 때 그 개체로 보지않고 즉흥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사람들로 망상하는 현상과 연결시킨다. 쉬레버는 부인이 며칠 간 친정에 다녀왔다 다시 나타났을 때에도 그녀를 실체로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람(fleeting men)의 한 사람으로 여겼었다.
라깡은 소쉬르의 도표, 즉 담론의 무정형적 물결 층[기의층]과 기표의 연결고리층[기표층]을 설명하면서, 기표가 이 ‘의미[기의]의 바다’에서 하나의 의미를 낚아챌 수 있는 것은 사랑, 죽음, 공포와 같은 주요기표들이 의미들을 묶어주고 구조하여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깡에 의하면, 정신병이 발생되는 때는 ‘대타자’[기표로 구성된 무의식]의 영역으로부터 ‘수용될 수 없는[따라서 폐제될 운명의] 주요기표가 호명’되었을 때이다(세미나 3권, 306). 라깡은 정상적 주체나 신경증을 앓는 주체는 상징계적 규칙에 따라 언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표층과 기의층이 만나게 하지만, 정신병의 주체는 상징계적 구조에 의해 기표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단어를 주저리주저리 읊어버리는 일종의 자동기계 같이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라깡은 이런 일련의 논의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도표(schema R)'에 나타난 정신분석의 I, M, F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I 는 주체(S)의 ‘거울 이미지’로서 자아의 소외된 이상적 자아(Ideal Ego)이고, M은 어머니(Mother)를, F 혹은 F(0)는 아버지(Father), 특히 아버지의 이름이 대변하고 있는 상징계 내지 대타자(Other)를 의미한다. ‘도표'에서는 정상인, 즉 ‘아버지의 이름’이 폐제되지 않은 주체의 정신구조가 나타나 있다. 쉬레버의 논의에서 라깡은 이 도표를 ‘도표schema I'로 개조하여 정신병의 정신구조를 설명하였다. ‘도표schema R'에서는 정상인의 도표에서 ‘사물의 죽음’을 전제하는 언어화의 승화 혹은 대체 작용으로 인해, 어머니의 욕망인 팰러스의 부재와 폐제를 의미하는 ‘아버지의 이름’의 부재가 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표schema I'에서는 서로 영원히 만나지 두 개의 포물선으로 이루어진 점근선적asymtotic 선들이 두 개의 구멍 주위로 감싸고 있다. 여기서 상상계, 즉 I 주변에 나타난 구멍은 어머니가 결여한 팰러스이고, 상징계 주변에 나타난 구멍은 ‘아버지의 이름’F(0)이 폐제된 구멍이다. 이 포물선들 사이로 다양한 [쉬레버의 환각적] 망상으로 ‘예견되어지는’ 실재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라깡은 이 도표에서 정신병의 발생의 핵심적 원인이 ‘아버지의 이름’의 폐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결 론
지금까지 우리는 프로이트의 동성애 중심적 읽기가 어떻게 라깡의 읽기와 차이가 나는지 살펴보았다. 라깡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주체의 타자성을 생각함으로써 정신분석에 기여를 하였지만, 쉬레버 연구에서 그의 한계를 보이게 된 것은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로 인한 동성애적 감정 이외에, 쉬레버의 망상에서 언어의 층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깡은 프로이트가 누차 이야기 하듯이,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는 모든 신경증의 ‘기반암’[병인]이지만, 또한 상징계를 가능하게 하는 초석이 된다고 본다. 따라서 라깡은 쉬레버의 정신병에서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표가 폐제됨으로써, 주체가 언어 속에서 적절한 상호적 반응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자아의 ‘텅빈 말’ 만을 자동기계처럼 말하여 다양한 망상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라깡은 이런 쉬레버의 연구를 통해 정신분석은 절대적으로 언어와 관련된다고 보았다. 라깡에 의하면, 우리가 기표로 된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상징계적 구조가 모든 인간의 경험을 하나의 망처럼 뒤덮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라깡은 우리가 간혹 새로운 상황이나 경험을 직면하였을 때, 웬지 이전에 경험한 듯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기시감(旣視感déjà vu) 바로 상징계적 구조로 인해 생기는 감정이다. 라깡은 언어가 실재계에 틈을 내지만, 또한 인간은 “실재계에서의 의미들 주위를 돌기 위해서라도” 언어를 사용해야한다고 말한다. 라깡의 입장에서 인간과 언어는 이렇게 불가분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라깡은 “정신분석이 주체가 거주하는 언어의 과학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주체는 언어에 의해 사로 잡혀있고 괴롭힘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세미나 3권, 243).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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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ther and the Name of the Father: Comparison of Freud's and Lacan's Case Study of Dr. Schreber
Myoung Ah Shin (Kyung Hee University)
Much Study has been undertaken for cases of hysteria and neurosis and thanks to this trend, the famous hysteric 'Dora' has enjoyed great attention from psychoanalysts and feminists as well. Unlike her, Dr. Schreber did not draw much attention from psychoanalysts and scholars alike. However, Freud, the founder of psychoanalysis and Lacan, the successor of Freud delved into the case of Dr. Schreber and produced the valuable materials indispensable to the understanding of psychosis. Freud's analysis of Dr. Schreber's psychotic phenomena centers on the father while Lacan's analysis centers on the name of the father. In his analysis Freud emphasizes how Dr. Schreber's homosexual love for his father determines his psychic phenomena along with his guilt caused by his unconscious desire for the father. On the other hand, in his analysis Lacan tries to overcome the limitations caused by Freud's too biological reading of Dr. Schreber's case by paying attention to Dr. Schreber's linguistic expression of his unconscious desires with the concept of foreclosure. In Lacan's view whatever formed in the unconscious level should find outlet into signifiers by way of accepting the symbolic of the society. However, when that process is denied, that is, when the subject does not accept the paternal metaphor, so called, the name of the father, what is repressed in the unconscious returns in the real in the form of hallucination.
첫댓글 지는 무쟈게 어렵습니더한국말도 이리 어렵습니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