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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재사랑산악회-제182차 산행] 삼척 두타산-쉰움산 (2)
▶ 2017년 11월 19일 (일요일)
[산행코스] ☞ 천은사(삼척시 미로면)-쉰움산-삼거리-두타산성터-무릉계곡-삼화사-주차장
• [두타산 1,050고지의 삼거리] — 정상을 앞두고 무릉계의 하산길로…
오후 1시 15분, 두타산(頭陀山) 1,050고지에 올랐다. 두타산 정상까지 고도 300m를 남겨둔 지점이다. 이곳은 무릉계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천은사 계곡-쉰움산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 이정표 앞에서 선두의 민 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이 오른 1,050고지, 그러나 이곳에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두타산 정상은 마음에 품고 이곳에서 그냥 하산을 하기로 한 것이다. 짧은 겨울 해, 최소 두 시간이 소요되는 왕복 길, 그리고 무릉계로 내려가는 하산 길은 아주 길고 험하고, 또 산행을 마치고 삼척에서 서울까지 가야할 귀경 길 또한 멀기 때문이었다. 적절한 조치였다. 아쉽지만 이 삼거리에서 하산을 하기로 했다.
선두의 민 대장이 찬바람을 맞으며 띄엄띄엄 올라오는 대원들을 기다리며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추운 곳에서 오랜 시간을 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니다. 대원들의 안전산행을 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는 마음,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 [가파르고 험난한 하산길] — 무릉계 방향의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 하산 길은 경사가 아주 급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바위의 가파른 길, 여기저기 돌들이 밟히는 험한 산길이 이어졌다. 능선의 산길에는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급하게 쏟아지는 길목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백두대간의 산체를 바라본다. 청옥산-망군대-두타산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체가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무릉계에서 이 길을 따라서 두타산 정상에 오르고, 백두대간을 따라 북상하여 청옥산 정상을 찍고 용추폭포로 하산 한 적이 있다. 오랜만에 두타산을 찾은 오늘, 그 감회가 새롭다. 그해 뜨거운 여름이었다. 당시에도 두타산의 등정 길이나 청옥산의 하산 길이 워낙 험하고 길었으므로 코에서 단내가 나는, 고난의 산행을 한 기억이 남아있다.
오후 1시가 넘었다. 배가 고팠다. 무자비하게 아래로 쏟아지는 산길이, 잠시 능선의 완만한 길로 이어지고 그 길목에는 하늘을 찌르는 아름드리 거송들이 완강한 모습으로 산체를 지키고 있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장대한 소나무를 스치는 솔바람소리, 내 마음속의 탁한 기운을 가차 없이 쓸어내리는 듯했다. 두타산의 이름이 된 두타행(頭陀行)이란 원래 무소유의 청빈수행이 아닌가. 두타(頭陀)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갖가지 욕심과 세속적인 잡다한 감정을 쓸어내고 오직 빈 몸으로 걸식[托鉢]하며 구도하는 수행이다. 내 어찌 옛 구도자의 그 무서운 고행(苦行)의 경지를 따르겠는가. 그러나 시야를 압도하는 우람한 두타산의 거대한 산체를 바라보며 장대한 소나무의 세찬 솔바람소리를 들으니, 뜨거운 가슴이 시원하게 씻어지는 느낌이다. 하늘이 내린 인간의 본성(本性)을 생각해 본다. ‘하늘 마음’이다. 하늘같이 크고 밝은 마음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자신과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다.
각지고 험한 바위와 소나무의 군락이 이어지는 능선 길을 따라 걸었다. 오후 2시, ‘대궐터 삼거리’의 이정표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봉의 뒤쪽, 바람이 살짝 비켜 가는 곳에 자리를 잡아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능선을 넘어가는 직풍(直風)은 피했지만 여전히 영하의 매서운 날씨, 산은 추웠다. 방한복을 챙겨 입었다. 서둘러 식사를 했다. 다행히 보온병에 담아온 배추국이 따뜻했다. 식사를 하는 사이 금방 땀이 식으며 추위가 엄습한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민 대장과 하회탈 부회장이 후미를 수습하여 당도했다. 먼저 온 산우들은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모두 싸늘한 한기를 느끼며 서둘러 식사를 했다.
• [점심식사 후, 험난한 하산길] — ‘대궐터’까지의 능선, ‘깔닥고개 입구’까지 내리막길
오후 2시 28분, 식사 후 산행을 계속해 나갔다. 급전직하의 아찔한 경사의 험악한 산길이다. 그냥 아래로 쏟아진다. 그러다가 다시 평탄한 능선 길, 크게 자란 소나무들이 울창한데, 사방이 트이는 곳에서는 장엄한 청옥산과 만경대의 산체가 보이고 그 대간에서 아래로 뻗어 내리는 산줄기와 골짜기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첩첩산의 골짜기가 그 굴곡의 음영(陰影)을 이루고 있었다. 아래로, 아래로 쏟아지는 산길을 길었다. 온몸에 다시 뜨거운 열기가 솟으니 찬 바람결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얼마간의 평지의 능선 길이 이어지고 또 가파른 내리막길이 번갈아 이어졌다. 오후 3시, ‘사고다발지역’이라는 경고 팻말이 있는 갈목, 이정표에 ‘대궐터’를 표지하고 있는 지점을 통과했다. 길목에는 장대한 금강송이 하늘을 찌른다.
이제부터 ‘깔딱고개’ 구간이다. 아래에서 이곳에 올라오는 산길이, 숨이 깔딱깔딱할 정도로 가파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우리가 내려가는 길로 말하면 심하게 아래로 쏟아지는 산길이라 무릎과 허벅지가 심하게 경직되고 통증이 많이 느껴지는 구간이다. 이제 산길의 주위는 활엽수의 군락지였다. 산기슭은 온통 낙엽이 쌓여 있고, 잎을 내린 나무들이 앙상한 나목이 되어 오후의 햇살을 받고 있었다. 적막이 흐르는 빈 나뭇가지들은 차가운 하늘 속에서 혹독한 겨울나기에 들어갔다.
• [십이폭포와 거북바위 위의 조망] — 장대하게 이어지는 12단의 폭포
오후 3시 30분, ‘깔딱고개 입구’라는 표지가 있는 이정표를 지났다. 이어지는 산길은 완만한 경사의 내리막이었다. 계속 아래로, 아래로 쏟아지는 길이다. 앞뒤의 대원들의 간격이 많이 벌어졌다. 한참을 내려오니 앞서간 대원들이 머물러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른바 ‘산성12폭포’의 장관을 조망하는 바위였다. 지금을 수량이 많지 않아서 폭포는 가느다란 실줄기처럼 보이지만 12단계로 쏟아지는 폭포는 그 규모가 장대했다. 비가 와서 수량이 늘면 장관을 이룰 것이다. 계곡은 이미 햇살이 거두어진 상태였다. 이제 해그림자가 산골짜기 미만했다.
모든 대원들이 ‘산성 12폭포’와 ‘거북바위’에서 주변의 절경(絶景)을 배경으로 하여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시 하산 길, 급하게 아래로 내려가는 험한 산길이다. 하늘을 찌르는 절벽과 엄청난 깊이의 낭떠러지를 지나는 길이었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위험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는 아찔한 벼랑길이었다.
• [두타산성, 백곰바위 위에서의 조망] — 천인단애의 절벽과 고절한 금강송
‘두타산성’의 이정표 있는 전망바위에 도착했다. 그대로 돌출하여 솟아오는 기암과 주변의 산세가 절경을 이룬다. 천인단애의 절벽에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장엄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은 절경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주변의 거대한 절벽과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자생하고 있는 노송이 경건한 성자처럼 보인다. 거기에 원색의 복장을 한 대원들의 모습이 꽃처럼 화사하다. ‘백곰바위’가 있는 암봉이었다.
‘두타산성(頭陀山城)’은 두타산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이곳에 쌓은 산성으로, 신라 파사왕 23년(A.D 102년)에 쌓고, 1414년(조선 태조 14년) 삼척부사 김맹손은 이 성을 증축하고 주위 2,500m 높이 2m의 석성(石城)을 쌓았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난(亂)을 피하여 이 산성에 모였고, 의병장 최원흘을 중심으로 한 젊은 의병들이 이 성을 공격하는 왜적을 맞이하여 용감하게 싸워 전멸시켰다. 지금 세월이 흘러 성터는 없어졌으나, 이곳은 선인의 호국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 [무릉계곡의 명소(名所)들] — 용이 승천했다는 용추폭포, 그리고 쌍폭과 학소대
대원들이 서둘러 하산(下山)을 했다, 짧은 겨울 해, 날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쏟아지는 산길이었다. 한참을 내려왔다. 오후 4시 23분, 드디어 무릉계곡(武陵溪谷)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위로 400m 올라가면 천혜의 절경을 이루는 ‘용추폭포’와 ‘쌍폭’이 있다. 앞서 내려온 일부 대원들은 ‘용추폭포’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무릉계곡은 계곡의 입구에서 용추폭포까지 약 3km의 절경을 말한다.
무릉계곡(武陵溪谷)은, 유서 깊은 ‘삼화사(三和寺)’가 있어 일명 ‘삼화계곡’이라고 하는데 거기의 최상류에는 떨어지는 물줄기가 거대한 바위절벽을 기묘하게 깎아내어,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용추폭포(龍湫瀑布)가 있다. 상탕(上湯)과 중탕(中湯)은 옹기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고 하탕(下湯)은 진옥색의 큰 용소(龍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가까운 곳에는 두 갈래의 물이 한 곳에 합수하여 떨어지는 신비로운 쌍폭(雙瀑)이 장관을 이룬다. 이 밖에 무릉계곡에는 무릉반석·관음사·학소대·금란정 등의 명소를 간직하고 있다. 학소대(鶴巢臺)는 학(鶴)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무릉정공 최윤상의 <무릉구곡가>에서 학소대를 노래하고 있다.
맑고 시원한 곳에 내 배를 띄우니 / 학(鶴) 떠난지 이미 오래되어 대는 비웠데.
높은 데 올라가 세상사 바라보니 / 가버린 자 이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
상류의 동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이곳을 지나는데
이 바위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 [무릉계곡의 금란정] — 선비들의 높은 학문과 의리가 스며있는
그리고 아름다운 계곡의 암반의 가장 자리에 있는 <금란정(金蘭亭)>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삼척지방의 유림(儒林) 제생(諸生)들이 삼척 항교와 명륜당에 모여 학문을 강화하고 우정을 다지는 글을 짓고, 이곳 무릉계곡(武陵溪谷)에 그 서약을 기념하여 <금란정(金蘭亭)>을 세웠다. 원래 ‘금란(金蘭)’이라는 말은 ‘금란지계(金蘭之契)’를 두고 하는 말인데, 그 어원은『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二人同心이면 其利斷金이요 同心之言은 其臭如蘭이라”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으니,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그 예리함이 단단한 쇠도 끊을 수 있고, 하나가 된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을 그윽한 난초의 향기가 난다’는 뜻이다.
• [무릉계곡의 삼화사] — 선종의 대맥을 잇는 유서 깊은 고찰
삼화사(三和寺)는 무릉계곡이 품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인근의 천은사, 영은사, 지상사 등과 더불어 영동 남부지역의 중심 사찰로 선종(禪宗)의 종풍을 지니고 있다. 고적(古蹟)에 의하면,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西域)에서 돌배[石舟]를 타고 동해로 들어왔다고 한다. 두타산에 들어와,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손에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각각 머물렀다고 하여 지금의 삼화사·지상사·영은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삼화사의 주요문화재로는 ‘삼층석탑’과 ‘철불’, ‘목조지장보살상’, ‘부도’ 및 ‘비(碑)’가 있다.
• [무릉반석(武陵磐石)에 새긴 암각서(巖刻書)] —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무릉반석(武陵磐石)에 암각서(岩刻書)가 있다. 반석(盤石) 위에 가로로 쓴 글씨는 살아 움직이는 듯 힘이 있는 웅혼한 느낌을 준다. 암각(岩刻)의 글씨는 이렇다.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과감하게 흘려쓴 초서이다. ‘무릉선원(‘武陵仙源)’은 도교의 신선사상을, ‘중대천석(中臺泉石)’은 유교사상을, ‘두타통천(頭陀洞天)’은 불교사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말하자면 사람과 자연이 일체가 된 무릉계곡에서 유(儒)·불(佛)·선(仙) 삼교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玉壺居士書 辛未'(옥호거사서 신미)라는 각서(刻書)가 씌어있다. ’신미년에 옥호거사가 썼다‘는 뜻이다. 작자에 대해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봉래 양사언(楊士彦)이 강릉부사(1,571~1,576)로 있을 때 무릉계곡을 방문하여 썼다는 것과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부사로 재직 중인 신미년(1,751년)에 무릉계곡을 와서 썼다는 설이 그것이다. 동해시에서는 오랜 세파에 글자가 마모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1995년에 모형석각을 제작하였다.<사진>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 [모든 대원들의 무사한 하산] — 두타의 청빈행을 생각하며…
오후 5시, 모든 대원이 무릉계곡 탐방안내소의 주차장에 하산(下山)을 완료했다. 오늘 산행은 두타산 북동쪽의 천은사(天恩寺) 계곡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쉰움산에서 천하를 조망하고, 두타산 1,050고지를 찍고 무릉계곡(武陵溪谷)으로 무사히 하산을 한 것이다. 백두대간 두타산은 워낙 높고 가팔라서 참으로 힘든 산행을 했다. 산을 오를 때는 동해의 푸른 바다 그 아득한 수평선을 등에 지고 오르고, 하산 길은 거대한 백두대간의 산체를 등에 지고 내려왔다. 무지막지하게 가파른 산길이었다. ‘두타(頭陀)’라는 청빈 수행을 생각하며 온통 자기 욕심으로 들끓는 세상살이를 되돌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대원들은 묵묵히 걸었다. 참으로 뜨거운 고행(苦行)을 한 것이다. 오늘 함께 동행한 모든 대원들에게 경의(敬意)를 표한다. 산행의 선두와 후미에서 오랜 시간 동안 찬바람 맞으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민창우 대장과 김준섭 부회장께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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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호산아 고문님의 생생한 산행기에 고저 감사를 드리면서
멋진 겨울산의 주변 스케치에 함께 다녀온 기분을 느낍니다...
함께 등반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