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먼저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연예인이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포기는 김치 담글 때나 쓰는 말이다.” 포기라는 말은 배추를 셀 때나 쓰지,
자신의 삶을 단념하고자 하는 의사 표명하는데 쓸 일은 없고,
그런 자조적인 생각을 할 일조차 없으리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연예인의 말에 여러분은 얼마나 동의하십니까?
옛말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도와 성공하게 한다.’라는 말입니다.
또, “감나무 밑에 누워 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노력은 하지 않고 기회만 보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와
“감나무 밑에 누워 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속담은 서로 정반대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말에 따라 살아오셨습니까?
가끔 신자들 중에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신자들을 보게 됩니다.
물론 신앙심이 깊어서 그러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아는 하느님이라면,
또 길진 않지만 감히 제가 살아온 삶에 비추어 본다면
그분들이 뜻하신 바가 이루어질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만드셨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사람은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피조물은 노력한다 해도 스스로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없지만
사람은 스스로 노력 한다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의 잠재 능력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고, 옆의 사람과 서로 연대하고 협동해서
본인이 생각한 것 이상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런 경우를 실제로도 많이 봐 왔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봐도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 민족의 정체성과 신앙심을 잃지 않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에제키엘 예언자가 대단한 예언자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미 사라져버렸다면,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을 잃어버렸다면
그의 예언이 이루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 이 세 오누이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저버렸다면 마르타와 마리아가 살면서 예수님을, 라자로가 죽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살면서 아직 또는 죽어서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은총을 받지 못하고,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삶과 죽음의 굴레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었기에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글 :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 – 서울대교구
인연으로 이어진 신앙생활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께서 교리 공부와 봉사 활동 등을 하시며 세례를 위해 애써 주신 덕에
저희 삼남매는 일본 오사카의 한인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당시 아버지는 성당까지 운전만 해주실 뿐 세례를 받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약 2년간의 오사카 생활을 마치고 떠나면서 대모님과도 연락이 끊겼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한인 성당 사무실에 문의를 했으나 성함만 알려줄 뿐
연락처는 알 수가 없다고 하여, 그저 기도 중에 가끔 기억할 뿐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저는 또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도쿄 한인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유학생부터 주재원 가족, 교민, 한국에서 오신 수도자들이 다수 계셨습니다.
외로운 유학생에게 매주 한국어로 드리는 미사는 마음의 위안이자 안식처였습니다.
하루는 기숙사에서 전철역으로 걸어가는데,
며칠 전 한인 성당 제단 위에 계신 것을 뵈었던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저도 모르게 다가가서 “신부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소중한 인연의 시작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마침 신부님이 사시던 예수회 사제관이 제 기숙사와 아주 가까이에 있어 종종 뵐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 후 몇몇 천주교인 유학생과 정기적으로
철학과 성서 공부를 하며 지냈고, 가끔 다 함께 피정을 가기도 했습니다.
수도 생활을 하시는 분들과 개인적인 교류가 없었던 저에게 수도자의 생활은
큰 충격이자 자극이었습니다. 일본 생활보다도 신부님들의 삶이 훨씬 더 새로운
세계로 느껴졌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규칙적인 공동생활 그리고
정제된 삶이 주는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인간다운 면모를 엿보며
수도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약 7년이 지나 신부님과 저는 비슷한 시기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을 했습니다.
신부님과 맺은 인연은 귀국 후에도 계속 이어졌으며,
또 다른 인연의 끈이 되었습니다. 그 중 특히 놀랍고 경이로운 일은, 친정아버지께서
신부님의 소개로 만나게 된 한 신부님의 권유로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또 신부님을 통해 만난 한 자매님은 제 신앙생활의 큰 등대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크고 작은 고비가 올 때 마다
제 주변으로 뻗은 인연의 끈이 저를 잘 끌어주어 왔던 것 같습니다.
그 인연의 끈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역시나 40여 년 전이 떠오릅니다.
낯선 나라에서 손수 성당 문을 두드려 세 자식과 함께 세례성사를 받으셨던
용감한 어머니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머니를 통해 시작된 인연의 끈이,
신부님을 비롯한 많은 소중한 만남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저를 지탱해주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동시에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계실지 모를 저의
대모님을 기억하며 기도드립니다.
글; 유난이 글라라 – 리움 미술관 보존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