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10 가해 부활6주일
사도 17:22-31 / 1베드 3:13-22 / 요한 14:15-21
‘알지 못하는 신’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의 두번째 선교여행은 교회선교 역사상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그동안 이스라엘과 주변지역에서만 전해졌던 복음이 최초로 유럽 땅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밤 바울로는 거기에서 신비로운 영상을 보았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던 것이다.”(사도 16:9) 이를 계기로 마침내 바울일행은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은 이스라엘과 중동지역과 사뭇 다른 문화적 분위기였습니다. 특별히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가 있는 지역은 오늘날 서구문명의 토대를 이루는 그리스신화와 희랍철학의 발상지였습니다.
오늘 들은 제1독서는 그 문명의 중심 중에서도 중심인 아테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다와 그리스라는 두 문화와 그 정신을 공부한 지식인(知識人) 사도 바울은 무턱대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우선 현실을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것은 상대의 문화를 무조건 부정하기 보다는, 그 안에 들어있는 종교심을 긍정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겠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전을 둘러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다양한 신들을 섬기던 당시 사람들이 행여나 자신들이 몰라서 놓친 신들이 있을까 봐 새겨 놓은 일종의 포괄적 안전장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지점을 접점삼아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도 17:23)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분을 창조주 하느님으로 소개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세상만물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신전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하느님은 인간이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걸 의미합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그 하느님이 인류를 만드시고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과 살아가는 시간을 주재하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인류는 한 형제자매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은 다시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고 설파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희랍 시인의 표현을 빌어서 전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은 모든 민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각 사람들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당신들의 문화 안에도 이미 하느님에 대한 단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image of God)인데 왜 금이나 은이나 돌들로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하느님으로 착각하느냐고 질타하면서 그러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라고 촉구합니다.
이와 같이 아테네에서 했던 사도 바울의 설교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단순한 전도라기 보다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기독교와 그리스문명 간에 첫 대화이자, 세속문화와 그 정신에 대한 기독교 입장의 기초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했던 이러한 논쟁 이래, 교회는 오늘날까지 세상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때때로 신앙인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신이 어떤 분인지 잃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알지 못하는 신을 다시 섬기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요?
저는 그러한 이유를 인간이 신을 인식하는 두 가지 경로 때문에 발생한다고 봅니다. 하나는 인간이 이미지나 형상 등과 같은 시각적 요소로 신을 알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들은 사실 인간의 심리와 세상에서의 역할이 투영된 형상들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많은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각종 신상(神像)들 역시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미술에서도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미켈란젤로가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아담의 창조』에 묘사된 신은 백발에 흰 수염을 지닌 근육질 남성으로 그려졌습니다. 또한 영국의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 『옛적부터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에서는 흰머리와 수염을 늘어뜨린 건장한 남성으로 그린 하느님이 손에 컴퍼스를 들고 세상을 측량하는 모습으로 창조한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그림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하느님을 하늘에 살거나 구름 위에 앉아있는 나이든 남성이라는 이미지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한 현상은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도 여전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의인화된 신의 이미지는 미디어 기술의 발달로 오히려 더 화려하고 현란한 모습으로 꾸며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지성적 사유와 그를 통한 원리로서 알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희랍철학이나 동양사상과 종교는 이러한 인간의 사고와 수행을 통해 깨달은 정신의 열매들입니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적이고 종교적 훈련을 통해 오랫동안 익혀야만 하는 추상적이고 영적인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요소는 기독교에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서양 중세시기에 활약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쓴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에서 그는 하느님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논증하는 다섯가지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경험세계에 있는 다양한 움직임들과 목적성을 비롯한 여러가지 현상을 찾아 올라가면 그 최후의 존재, 즉 모든 원인의 원인이요, 모든 움직이는 것들의 최종근거는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증명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오늘날 기독교 철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을 활용하여 궁극적 존재를 알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오늘날 과학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신을 탐구하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들이 각각 한계와 위험성이 있다고 봅니다. 먼저, 이미지와 형상으로 하느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파악하기 어려운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쉽고 친근하게 알 순 있지만, 자칫 신을 우리의 관념이라는 틀에 묶어버릴 수 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신의 이미지를 조작해서 대중들을 오도할 위험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추상적인 원리로 하느님을 이해할 때, 시각적인 것보다는 우상에 빠질 위험이 훨씬 줄어들지만,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과 동떨어진 지적이고 사변적인 세계에만 머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알지 못하는 하느님을 안다는 것과 그러한 하느님이 지금 이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와 실제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나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요한 14:17, 21)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 핵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이란 말로 이 모든 신비를 풀어냅니다. 그 신비란 이것입니다:
무한(infinite)하시고 한계가 없으신(unlimited)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인간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잘 못 느낍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친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교회는 그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예수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처럼 배 고프면 먹고, 즐거우면 웃고, 슬프면 울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공감(compassion)이 뛰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로애락 한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동고동락하셨습니다. 그 수준이 십자가에 달릴 정도까지였습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은 인간이 지향하는 최고의 형태인 ‘참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인간과 하느님을 이어주십니다.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을 가리켜 ‘참 인간이요, 참 하느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승천일을 앞둔 부활절 막바지! 교회는 다시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리키는 하느님은 인간이 상상해 내는 그런 하느님도 아니요, 추상적 원리만 있는 그런 사변적 존재도 아닙니다. 교회는 참 인간이요, 참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혜를 보이는 것은 통해 전하는 ‘성사(sacrament)’라는 표현을 빌려서 예수님 이야말로 그러한 성사의 원형, 즉 ‘원성사(原聖事)’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다른 어떤 것에서 찾지 않고,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압니다.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보고 듣습니다.
전례를 통해 예수님과 상통합니다.
이웃을 통해, 그리고 삶을 통해 예수님을 느낍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압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알지 못하는 신은 아는 신으로 우리 안에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하느님, 이러한 예수님이 생생하게 임하시길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