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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전국장애인부모연대파주시지부 /(사)새누리장애인부모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무선맘
살아서도 죽어서도 증명할 수 없는 그곳.
“증언을 듣는 쪽은 금방 ‘믿을 수 없어’라든가 ‘있을 수 없어’라고 한다. ‘과장이야’라든가 ‘증거는 있는가’ 따위를 입에 올리기 시작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사람들 상식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존자들은 자신들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입증 책임을 지게 된다. 묘사 불가능한 일을 묘사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을 이해시킨다는 부조리한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조리를 참아내며 증언하고 있음에도 세계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이다. 증인들은 피곤에 지친 나머지 절망해서 세상을 떠나간다.” (서경식. ‘참극 생존자들이 세상을 저버리는 이유’)
윗글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에 대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당시 독일 최대의 집단학살수용소였던, 400만 명의 유대인이 죽어나갔던 아우슈비츠 말이다. 그곳은 평균 생존기간이 3개월이었다. 그러나 바깥 세계로 나가 이곳의 비극을 증언하겠다는 일념으로 레비는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1945년, 마침내 전쟁은 끝난다. 집에 돌아온 그는 수용소에서의 10개월을 기록한다. ‘이것이 인간인가.’ 그 증언의 목소리가 담긴 레비의 책 제목이다.
그러나 증언은 실로 어려운 것이었다. 증언하는 이는 증언하기 위해 지난 시간을 계속 복기해야 했다. 듣는 이는 상식 너머 일어난 일에 대해 믿기 힘들어했다.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괴로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증언은 오로지 그만의 몫이었다. 자기 삶에, 아니 이 세계에 일어난 비극에 대한 유일한 증인이기에. 피해자이자 생존자이기에.
하지만 한편, 그는 살아나왔기에 그곳의 끔찍함을 온전히 증명할 수 없었다. 평균 생존기간 3개월. 죽어야만 그 끔찍함은 증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살의 현장에서 모두가 다 죽어버린다면 누가 그에 대해 증언할 수 있겠는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증명할 수 없는 곳, 그곳이 아우슈비츠였다.
레비는 1987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집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 그의 묘비에는 생몰연도와 함께 아우슈비츠에서의 수인번호가 새겨져 있다. 174517. 인간의 언어로 차마 해석되지 않았던 대학살의 현장에 대한 증언은 숫자로 남겨진다.
![]() ▲지난 3월 22일 늦은 2시 방송통신대학교 역사관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 및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 |
한종선‘들’. 그 입이 말한다.
여기 또 하나의 생존자가 있다. 26년 전 삭제된 과거에서, 사람들의 망각의 껍질을 찢고 나온 이다. 12년 동안 513명의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부산의 형제복지원, 그곳의 생존자 한종선. 그의 이야기가 지난해 11월 ‘살아남은 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됐다.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 나 역시 아니 우리 가족 역시 당신들과 같은 가정이 있었던 일반 사람이었다.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죽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살아남은 아이, 126쪽~127쪽)
그가 입을 연 후, 또 다른 한종선‘들’이 나타났다. 망각 속에서 꿈틀대는 오래된 기억의 움직임이 발화되기 시작했다.
지난 3월 22일 늦은 2시 방송통신대학교 역사관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 및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는 형제복지원의 또 다른 생존자들이 나와 그 시간을 증언했다.
“시설에서 잘 알았던 사람을 부산 서면에서 우연히 만났다. 핏기가 하나도 없어 물어보니 거의 매일 피를 뽑아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한다. 수혈하면 빵 주니 매일같이 그렇게 산 거다. 형제복지원 4년 있다가 집에 돌아가니 집은 이사하고 없어졌다고 한다.
나와서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거의 다 노숙자로 살고 있다. 그 안에서 너무 오래 있어 사회생활도 하지 못한다. 가정도 무너졌다. 어린 나이에 잡혀 들어간 사람 중엔 집에 돌아가려고 해도 집을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다른 시설로 들어간 사람도 있다.”
부산참다움장애인자립생활센터 박태길 소장의 증언이다. 박 소장은 84년부터 87년까지 형제복지원에 있었다. 집을 나와 생활하며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잠을 자던 중 갑자기 강제로 잡혀갔다.
어느 새벽녘이었다. 파란색 군용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를 파출소로 끌고 갔다. 파출소에서 신분증 있는 몇 사람은 풀려났다. 당시 그는 14살, 신분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집이 어딘지, 부모님 성함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신분증 없는 사람들은 다시 강제로 차에 실어졌다. 그 길로 차는 형제복지원으로 향했다.
형제복지원은 모든 원생을 군대식으로 편제했다. 한 소대당 90~120명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아동들이 모여 있는 소대는 1소대부터 28소대까지 있었다. 박 소장은 2소대 조장이었다. 단체생활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 소대마다 소대장이 있었고 그 밑으로 총무, 조장이 있었다. 조장은 원생 중 소대장이 임명했다.
박 소장은 “우리 밑에 있는 사람들을 때리지 않으면 우리가 소대장에게 개박살 날 정도로 맞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라면서 참담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조장은 조원들을 ‘관리’해야 했다. 매일같이 폭행과 기합이 있었고, 도리어 없으면 허전할 정도였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엄청나게 많은 기압을 받았다. 14살에 군인보다 더 많은 제식훈련을 받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맹물에 선지와 소금만 넣은 국을 일 년 내내 먹었다. 썩은 생선구이 등의 반찬을 일 년 동안 먹는 곳이었다.”
어느 날 박 소장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 탈출사건은 발각되어 중대장에게 야구방망이로 사정없이 맞았다.
탈출해서 밖으로 나갔으나 3, 4일 만에 다시 잡혀 들어온 이도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파 슈퍼에서 먹을 것을 훔치다 걸렸는데 파출소에서 형제복지원으로 보낸 것이다. 사회정화를 이유로 거리의 부랑인들을 쓰레기 치우듯 치우는 시절이었다.
박 소장은 그곳에서 지내며 심장병을 앓게 된다. 그러나 복지원에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의사에게서 받은 약은 감기약과 원기소 뿐이었다. 시설에서 나왔을 때 병은 더 악화하였다. 희귀성 심장병이었다.
한 해 20억 원 지원, 513명 사망, 2년 6개월 징역
1987년 1월 17일 토요일,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이 구속된다. 그러나 다음날, 담당 검사에게 부산 시장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박 원장 구속하면 안 됩니다. 빨리 석방해야 합니다.”
당시 형제복지원 사건 담당 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는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 그리고 수사를 계속 진행한다. 그러나 녹록지 않았다. 박인근 원장은 이미 당시에도 중앙정부에까지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형제복지원 등의 운영자금으로 1985년에는 18억 원, 1986년에는 21억 원가량을 국가와 부산시로부터 지원받고 있었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한 해 정부지원금만 200억 원이었다.
“국가보조금 1년에 20억 원, 그리고 불우이웃돕기 등으로 많은 성금이 들어오니 예산이 엄청났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은 사람들에게 김해 들판에서 채소 키우고 남은 찌꺼기인 시래기를 공짜로 거둬가 먹이거나, 부산 도축장에서 도축 시 발생한 소의 피-선지를 공짜로 가져와 먹였다. 선지는 사실 돈 주고 버려야 하는 산업폐기물이었다. (식단이) 이러니 건강상태는 형편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매일 중노동에 동원되어 끊임없이 일해야만 했다.”
김 변호사가 형제복지원 수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 역시 울산의 산속 작업장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그곳에서는 목장 건축이 진행 중이었다. 인부들이 산 깎는 작업을 하는 동안 주변 경비원들은 몽둥이를 들고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그곳이 형제복지원이 부랑인을 끌고 와 강제 노역시키는 곳임을 알게 된 김 변호사는 이를 계기로 박 회장을 구속한다.
수사를 통해 형제복지원의 실상이 하나둘 드러났다. 김 변호사는 “3000여 명이 넘는 수용자들을 관리하는 방법은 오직 폭력과 공포밖에 없었다”라며 “거기서는 정말 때려죽였다. 부녀자, 어린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은 대수롭지 않은 가혹행위였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수용자 대부분은 무보수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봉제공장, 목공소, 철공소 등에서 쉴 새 없이 일했다. 도망치거나 명령에 반항하는 수용자들에겐 형벌이 가해졌다. 얻어맞아 죽는 일도 다반사였다. 시체는 의사로부터 자연사 진단서를 끊어 의과대학 실습용으로 팔았다. 1975년~1986년까지 복지원에서 사망한 수용자만 513명이었다. 대부분 굶어 죽거나 맞아 죽은 이였다.
3개월에 걸친 수사로 드러난 원장의 국고보조금 횡령 액수만 11억 4254만 원이었다. 법률상 횡령 액수가 10억 원이 넘으면 무기징역을 구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검찰 상부에서는 7억 원 미만으로 변경하라는 압박이 가해졌다. 무기징역을 구형할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횡령 액수를 6억 8178만 원으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을 통해 복지원의 참상은 계속 보도됐다. 결국 부산시는 수용자들을 점차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87년 1월 15일 3174명이었던 수용자 수가 그해 5월 23일에는 176명이 되었다. 수사 4개월여 만에 3000여 명이 석방된 것이다.
1987년 6월 23일, 법원은 박 원장에게 징역 10년과 벌금 6억 8178만 원을 선고한다. 그러나 1차 항소심에서 박 원장은 벌금이 사라진 징역 4년을 선고받더니 2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1989년 3월 15일 3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는다. 김 변호사는 “한 사건이 일곱 번의 재판을 거치는 사이 형량은 4분의 1로 줄어들었다”라고 비판하며 당시를 떠올렸다.
형제복지원, 1000억 원대 자산 소유한 사회복지법인 되어
26년 전, 2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던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현재는 어떨까. 형제복지원은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아래 형제재단)으로 이름을 바꿔 1000억 원대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박 회장은 2011년까지 형제재단의 이사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그의 셋째 아들 박천광 씨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부산사회복지연대 박민성 사무처장은 “이 돈은 단순한 횡령만으로는 만들어지기 어려운 돈이다”라며 “이것은 그 안에 있던 3000여 명에 의해 만들어진 돈”이라고 꼬집었다.
박 사무처장에 의하면 2004년 부산에서 조직된 사회복지법인대표자협의체의 회장이 바로 박인근 회장이었다. 당시 창립행사에는 부산의 유명 복지법인 이사장, 비리 등의 문제로 거론된 복지법인 이사장 등이 참석했으며 박 회장의 협의체 회장 취임식이 이뤄졌다. 박 회장이 협의체 사무실 비용을 비롯한 설립비용을 모두 출자하고 복지법인 대표이사를 모았다고 박 사무처장은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박 회장의 건재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2012년 7월, 박 사무처장 측에 형제복지원에 대한 한통의 제보 전화가 걸려온다.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띄고 있어 박 사무처장은 시의원에게 형제재단에 대한 최근 감사내용과 회계에 대한 정보공개 요청을 했다. 이를 통해 형제재단이 법인 소유의 영리시설인 사상해수온천 리모델링을 위해 2005~2009년까지 부산상호저축은행에서 118억 원을 대출하였으며, 부산시가 2009년 이 대출에 대해 장기차입허가를 해준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대해 박 사무처장은 의문스러운 부분 몇 가지를 지적한다.
우선, 부산시의 장기차입 허가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형제재단은 복지법인이나 사상해수온천은 엄연히 영리적 성격이기 때문이다. 즉, 영리적 성격의 시설에 부산시가 100억 원이 넘는 대출을 장기차입해준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박 사무처장의 의견이다.
대출 순서 또한 앞뒤가 맞지 않다. 사업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한 후 대출 허가가 이뤄져야 하나 이번 건은 대출해준 후에 부산시의 허가가 진행됐다. 리모델링을 위한 대출은 2007년에 이뤄졌으며 부산시의 장기차입허가는 2009년이다. 박 사무처장은 “이런 일은 보통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부산에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라며 “공무원과의 유착이 의심된다”라고 의문을 내비쳤다.
그뿐만 아니다. 118억 원의 사용처도 분명치가 않다. 70억 원은 리모델링으로 되어 있으나 나머지 사용처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리모델링으로 되어있는 70억 원도 “정확한 근거가 있지는 않다”라고 박 사무처장은 밝혔다.
이어 박 사무처장은 형제재단은 부산시의 각종 감사 때 제대로 된 지적을 받아본 적 없으며, 장기차입과 관련한 서류와 대출금 상환에 대한 계획 등이 미비하거나 누락되어 있는 점도 지적했다. 이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면서 부산시는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열흘간 형제재단 감사를 시행했다.
그 결과 △법인이 기본재산 매각대금을 장기차입금 상환에 사용해야 하나 개인적 용도로 14억 5300만 원을 사용하는 등 처분허가 조건대로 사용하지 않은 점 △사상온천 수입사업 회계에서 전 대표이사 박인근 개인이 운영한 타시설(한솔탕)에 2억 원을 지급하고 장부상 잡지출 등으로 비용처리하면서 실제로는 박인근 및 박인근 사위 김현수 개인 용도로 4억 4700만 원을 지출한 점 등이 밝혀졌다. 감사결과로 부산시 공무원 16명에 대한 징계가 이뤄졌으나 극히 가벼운 징계에 그쳤다고 박 사무처장은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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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사회복지법인에 복지를 ‘위탁’했다
형제복지원에 아무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975년 12월 15일에 제정된 내무부 훈령을 근거로 댄다. 내무부 훈령 제410호엔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조치 밎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지침’이 나와 있다.
상지대학교 김명연 부교수는 “이는 법령이 아니라 훈령에 지나지 않지만 국가가 경찰법적 차원에서 부랑인 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최초의 공식문서”라며 “내무부 훈령은 법률이 아니라 행정규칙이며 따라서 부랑인 강제수용의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라고 설명한다. 훈령 제410호는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폐지된다.
김 교수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중대한 인권유린 행위”였다고 비판한다. 국가범죄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것이 ‘합법적’으로 자행된 것에 주목하며 당시엔 합법이었으나 왜 결국 범죄일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한다.
“국가범죄는 많은 경우 합법적으로 자행되기 때문에 사후처벌이나 국가배상책임 인정 등과 관련하여 많은 법적 논쟁을 야기한다. 그러나 법률이 자연법과 충돌하거나 정의에 대한 실정법의 모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서 법률이 ‘부정의한 법’으로 정의에 양보해야 하는 경우 법률은 한계에 직면한다. 이 경우 법률은 법적 성격을 상실하며 전혀 법이 아니다.
따라서 실정법이 극도로 부정의한 경우 실정법은 법이 아니라 법의 탈을 쓴 불법, 즉 법률적 불법이다. 표면적으로 합법적 행위일지라도 법적으로 효력이 없으며 그러한 행위가 잔혹한 것일 때에는 범죄로서 마땅히 처벌해야 한다.”
법이 힘을 갖는 것은 그것이 정의에 기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 자체가 극도로 부정의한 경우, 법은 존재 근거를 잃는다. 무력화된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국가 책임으로 연결되는가?
이제까지 사회복지시설에서의 인권유린 문제는 시설과 시설장만의 책임을 물었다. 단일 사건으로 분류하며 그 시설 자체만을 문제시했을 뿐, 국가 책임을 물은 적은 없다. 그러나 김 교수는 국가에 의해 부랑인 단속과 강제구금이 자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사회복지증진의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사회복지시설에서의 인권유린 책임을 국가에 묻는다.
사회복지사업법에서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사회복지를 증진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한다. 법에 따라 국가는 사회복지법인을 지원하고 보호하기 위해 인건비·운영비·시설보강비 등 사회복지법인에 필요한 비용 전부 또는 일부를 보조금으로 지급하여 직접 지원하며,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사업에 출연 또는 기부한 재산은 상속세와 증여세, 법인세, 지방세가 감면되고 사회복지법인의 고유한 목적사업에 대해서는 법인세가 면제되는 등 세제상의 간접 지원을 주고 있다.
따라서 “설립허가를 받은 사회복지법인은 지위에 있어 사법상의 주체일지 몰라도 기능적으로는 공익실현을 위한 공적주체로 편입되어 있다”라고 김 교수는 설명한다.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인권유린의 책임에서 국가가 비켜설 수 없는 이유다.
김 교수는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형제복지원-피수용자’의 관계를 다시 바라본다. 내무부 훈령 제410호의 위탁경영에 관한 규정을 따라 당시 부산시와 정부는 형제복지원에 사회복지를 ‘위탁’했다.
“여기서 국가와 피수용자는 국가 조치에 의해 수용된 공법관계가 되며, 국가와 형제복지원(사회복지법인)은 공법상 계약관계가 된다. 형제복지원은 서비스제공의무 및 관리의무를 부담하고 국가는 비용지급업무와 지도감독 권한을 가진다. 그리고 형제복지원은 피수용자에게 사실행위로서 보호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할 뿐 피수용자와는 직접적인 법률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김 교수는 “피해자에 대한 배상책임은 관리자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피수용자에게 부담해야 하는 직접책임이며, 배상을 한 경우 사회복지법인인 형제복지원에 구상권을 행사해야 한다”라며 “물론 형제복지원은 민법상 불법행위로 말미암은 손해배상책임이 있다”라고 다시 한 번 국가와 형제복지원에 관한 책임을 강조했다.
‘대감금의 역사’를 기술하라
부산 형제복지원에서의 기억을 담은 한종선 씨의 책 ‘살아남은 아이’ 소개 글에는 “37살의 육체에 갇힌 9살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라고 쓰여 있다. 한 씨가 형제복지원에 끌려간 뒤, 그의 아버지와 누나도 형제복지원에 강제 구금된다. 그날 이후로 한 씨 가족은 흩어지고 한참 후에 한 씨는 자신의 아버지와 누나를 우연히 찾게 된다. 둘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현재도 한 씨 아버지와 누나는 정신병원에 있다.
시간이 흐르며 몸은 자라났지만 마음과 정신은 9살에 묶여 있다. 악몽의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한 마음은 육체의 성장을 따르지 못한다.
“복지사업? 말이 좋아 복지사업이지 부산의 그 복지원과 같은 다른 복지원들에 수용되어 있던 이들,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나? 그리고 그 원장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비교해 보라. 과연 복지혜택이 어디로 향했는지 말이다.” (살아남은 아이, 124쪽)
복지와 사회정화란 이름으로 더럽고 추한 것들은 거리 바깥으로 추방됐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는 이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한 씨와 ‘살아남은 아이’ 책 작업을 함께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규찬 교수는 한국 근·현사를 채우고 있는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이분법적 배치에 ‘대감금의 역사’를 끼워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제복지원은 복지를 내세우는 국가가 동시에 폭력을 어떻게 가져오는지, 채찍과 감금이라는 한국 국가의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사건이다. 다수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소수가 인위적으로 어떻게 배제·삭제·축출되는지 보여주는 표본이다. 한국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은 얼마나 인위적인가. 한쪽은 산업화/근대화로 풀자 하고 한쪽은 민주화로 풀려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빠진 것은 무엇인가. 한국 근현대사를 대감금의 역사로 다시 써야 한다.”
1960년대부터 1987년까지 산업화가 꽃피우던 시기, 시설에 강제수용 당했던 이들은 강제노역에 처했다. 임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정부와 기업은 무급의 노동력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산업화는 이들에게 빚진 결과물이다.
현재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역사가 사실 그대로가 아닌 누군가의 관점과 해석에 따라 기록된 것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면 그 누군가는 대체 누구인지 물을 수 있다. 역사 기술은 기억을 지배하는 권력이다. 가장 중요하기에 인위적으로 삭제된 역사는 없는가.
전 교수는 이 사건이 시설 문제도, 형제복지원만의 문제도, 한종선 개인의 문제도 떠나 하나의 ‘운동’ 차원에서 소화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풀기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그 운동을 돌리는 페달은 글쓰기에 있다고 강조한다.
“자본과 국가가 작동하는 방식을 바꾸기 쉽지 않다면 역사 서술 방식, 글쓰기 노력을 해야 한다.”
전 교수의 이러한 말은 ‘살아남은 아이’가 다른 이들의 기록에 빚졌기 때문이다. 김용원 변호사의 책 ‘브레이커 없는 벤츠’, 형제복지원 생존자 김용욱 씨의 수기집 ‘생지옥의 낮과 밤’, 당시 부산지역에서 활동하던 중앙일보 기자의 취재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들은 20여 년 전에 쓰인 것들이다. 그러나 당시엔 사회에 아무런 충격을 가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것들이 더욱 가치를 발하는 것은 20여 년이 흐른 지금이다.
오늘의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전 교수는 지금 당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지라도 20년 후를 바라보며 현재의 기록을 남기자고 한다. 20년 후, 한국 사회가 다시 소수자와 약자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때 다시 과거를 꺼내고 현재를 이야기하는 시점이 올 때 이 기록은 증언이 될 것이다. 글쓰기야말로 미래를 책임지는 힘이다. 법적, 제도적 해결도 중요하나 폭력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이 문제가 왜 한국 자본주의 문제와도 연결되는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민주화 투쟁사, 산업화로 푸는, 이러한 역사의 기억을 지배하는 권력에 대해 찔러야 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동시에 대감금의 역사였음을 기획하고 이에 관해 써야 한다. 대감금의 역사는 얼마나 많은가. 그 감금 속에 있거나 감금에 편승한 책임자임을 우리는 폭로해야 한다. (그 기록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20년 후에 또다시 쓰일 수 있다. 이에 대한 끈기가 필요하다.”
“나는 11소대에 있었다.”
이날 토론회 마무리 무렵 당시 형제복지원에 있었다고 밝힌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 않으려 했다. 두려웠다. 지금 그때를 생각만 해도 너무 힘들다.”
홍아무개 씨는 형제복지원에서의 기억과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후, 전국의 고아원을 떠돌며 살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분노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노숙자보고 사회 기생충이라 한다. 그런데 그 기생충에게서 빼먹는 자들은 도대체 뭔가. 헌법에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그 어린애는 국민이 아닌가. 그렇게 죽여도 되고 때려도 된다고 허가해준 건가. 사회에 나와 배운 것은 돈 벌려고 하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거다. 나는 당시 형제복지원 11소대에 있었다.
부산 형제복지원에서부터 인천, 시립아동보호소(현 소년의 집)까지 대한민국 고아원이란 고아원은 다 다녀봤다. 나 혼자 일인 줄 알았다. 배운 사람들은 이런 걸 나 몰라라 했다.
(여러 시설을 전전한 뒤) 어렸을 적, 밥 얻어먹으러 다닐 때 한 아주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너 고아원 가면 공부 가르쳐 주지, 밥 주지, 얼마나 좋으냐, 거기가 있지 왜 밥 얻어먹고 다니냐’ 나는 대놓고 말했다. ‘니 자식이나 보내, 이 쌍년아!’”
홍 씨는 고개 숙인 채 잠시 침묵 후 “죄송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 몇몇 토론회 참가자들은 홍 씨의 증언에 눈물을 닦기도 했다.
다음 카페에는 한종선 씨가 운영하는 형제복지원 피해자 모임 커뮤니티가 있다. 그곳에는 느리지만 조금씩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증언이 올라온다. 그 글을 보면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때의 끔찍함에 몸서리친다.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삶을 어떻게 끊임없이 괴롭히는지 이야기한다. 고통은 기억에서 올라와 현재를 덮친다.
증언은 살아 있기에 가능하다. 아니, 살아 ‘남았기에’ 가능하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증언 불가능한 곳이 아우슈비츠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형제복지원 또한 아우슈비츠였다. 도저히 인간의 언어로 설명해낼 수 없는 그 안의 끔찍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한종선‘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입속의 검은 잎'이 꿈틀거린다. 이 고통의 증언들을 그러모아 진실에 관한 책임을, 이제 누구에게 어떻게 물을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