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비화] 문화재 사랑의 표본, 자선당 유구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10. 17.
김정동(金晶東, 1948~ ), 그는 대전 목원대학교 건축과 교수로 재직하는 분으로, 동경 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일본을 자주 출입하였다. 1993년 하루는 오쿠라 호텔의 경내를 산책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징조가 느껴져 등골이 오싹해졌다. 경내 산책로 한 쪽에 버려진 옛 건물의 잔해인 기단․ 계단․ 주초 등 하부의 석물들이 이상한 빛을 발하며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건축학도로서 그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이끼가 고태스런 석물에서 진한 고국의 냄새가 풍겨 왔던 것이다. 마치 전쟁통에 붙잡혀 와 오랜 세월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 고국의 사람을 만나자 데려가 달라며 애원하는 우리의 핏줄과도 같았다.
자선당/ 근정전 동쪽 가까이에 붙어 있던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단아한 목조 건물로, 세자가 학문과 수양을 닦으며 거처하던 5백년 역사의 동궁(東宮)이었다.
건물을 통째로 싣고 가다
그는 즉시 대학 도서관을 뒤지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차분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1916년 9월에 발행된 「건축세계지(建築世界誌)」를 보았다. ’오쿠라는 1915년 겨울 경복궁 내에 있던 자선당(資善堂)을 해체하여 동경으로 이송해 그의 저택 내에 건설하기 시작했고, 당시 2만원을 들여 조립공사, 내외장식공사를 마쳤다‘
가슴이 뛰고 흥분에 찬 김정동은 또 다른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 때다. 1923년 10월의 자료를 읽던 그는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하였다.
’데라우치 총독이 경복궁 내 건물을 영구히 보전하기 위해 철거한 건물 중 오쿠라에게 넘겨준 건물은 관동 대지진으로 불탔다.‘
큰 충격을 받은 김정동은 뭔가 대단한 음모에 의해 우리 문화재가 약탈되어 불에 탔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먼저 오쿠라라는 인물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일본 동경 시내의 도라노몬에 있는 ’오쿠라 호텔‘은 본래 상인으로 유명했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1837~1928)의 저택이 있던 자리였음을 확인하였다. 한국에 돌아온 김정동은 경북궁 내에 있던 건물과 현재 남아 있는 건물에 대하여 세밀한 조사를 착수했다.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를 반드시 되찾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자료를 정리하던 김정동은 민족적 수모와 모욕을 뼈 시린 아픔으로 느껴야 했다. 일제에 의해서 이 나라 정궁(正宮)인 경복궁은 참혹하리 만큼 유린되고 파괴된 현실을 자료를 통해 보게 된 것이다. 무단통치를 감행한 데라우치는 한국인의 마음에서 왕실이란 존재를 말끔히 씻어 내고자 왕조의 상징인 왕궁을 파괴하는 작업을 교묘하게 착수했다. 첫 대상이 경복궁이었다.
1915년 조선 총독부는 경복궁에서 「시정(施政) 5주년 기념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를 열며, 궁궐 안에 5,200평의 진열관을 세우기 위해 수많은 전각(殿閣)들을 헐어 냈다. 1916년에는 근정전 앞쪽에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정문인 광화문을 동쪽 한 구석으로 밀어 버렸다. 2년에 걸친 해체와 폐기로 경복궁은 전체 7,225칸의 궁궐에서 4천여 칸이 헐려 나가고, 더욱이 헐린 건물들은 민간에게 불하(民間拂下)하며 돈까지 악랄하게 챙겼다. 지금 경복궁에 남은 건물은 36개 동(棟)에 불과하니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며 세웠던 330여 개의 동에 비해 겨우 1/3만 남은 셈이다.
김정동은 자료에 나타난 자선당에 대해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다. 자선당은 근정전 동쪽 가까이에 붙어 있던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단아한 목조 건물로 39평의 비교적 큰 건물이었다. 이곳은 왕위를 계승하게 될 세자가 학문과 수양을 닦으며 거처하던 곳으로 5백년 역사의 동궁(東宮)이었다. 1915년 일제는 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이 건물을 폐하려 했으나, 평소 데라우치와 친분이 있던 오쿠라가 특별히 일본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옮길 수 있도록 부탁한 것이다.
결국 이 건물은 1914년부터 철거를 시작하였고, 1916년에 데라우치의 승낙을 받아 통째로 280톤 급 배 ‘영정환(永田丸)’호에 실려 현해탄을 건너갔다. 그 다음에 현재 오쿠라 호텔이 들어 선 자기의 저택에 재 건축한 것이다. 가증스럽게도 데라우치는 자선당의 낙성식 때에 직접 참석하여 축하까지 했다고 전한다. 자선당은 그 후 「조선관」이란 현판을 달고 오쿠라의 사설 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23년 지진으로 목조 부분이 불타 없어지면서 그 때까지 석조물인 건물 잔해만 남아 있던 것이다. 현재도 호텔 내에는 ‘집고당(集古堂)이란 박물관이 있어 일제 때 조선에서 무단 반출해 간 다수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유규만 돌아오다
1993년 여름, 김정동은 끈질긴 조사와 추적 끝에 자선당에 대한 전말의 조사를 마치고 그 사실을 국내에 공개했다. 아울러 문화재전문위원의 자격으로 하루빨리 반환해 올 것을 정부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자 정부를 대신하여 호암 미술관이 오쿠라 호텔 측과 교섭하며 반환 의사를 타진했다. 마침내 1994년 10월, 오쿠라 호텔의 아오키 도라오(靑木寅雄) 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만났다.
“기꺼이 반환하겠습니다.”
아오키는 자선당의 유구들을 반환하겠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전달했다. 신문과 메스콤은 연일 그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그 결과 자선당은 목조 부분을 잃어버린 채 유구(遺構)들만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자선당 반환 사업은 해체에서 국내 운반까지 모든 비용을 호암 미술관이 부담하고, 복귀를 위한 해체는 문화재관리국의 지도 아래 부재별로 217개(109t)에 포장되어 1995년 12월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부는 추후 전문가 회의를 열어 반환된 석재의 복원 방식과 부재 처리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 한다.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그 만큼 불행한 일이다. 하루빨리 자선당이 경복궁에 복원되어 어엿한 제 모습을 갖추어야만 후손에게도 부끄럽지 않고 또 집념으로 문화재를 되찾아 낸 김정동의 자랑스런 애국심도 빛날 것이다. 한일 관계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이처럼 작은 데서부터 하나씩 이루어져야 한다는 교훈을 진하게 남긴 사건이었다.
(참고: ①삼성문화재단 ’95년 사업보고서, ②「일본을 걷는다」․김정동․한양출판 간행)
자선당의 주초석/ 자선당은 「조선관」이란 현판을 달고 오쿠라의 사설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1923년 대지진으로 목조 부분은 불타 없어지고 석물들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