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빼기 행주치마
김인기
대략 달포쯤 전이었다. 내가 서문시장 어느 난전에서 생미역을 사려다가 말았다. 가격이야 쌌지만, 어째 내키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면 안 사는 거지. 그런데도 왜 그랬을까? 내 귀에는 그날따라 상인의 핀잔이 크게 들렸다. 나는 조용히 물러났지만, 뒤끝은 굳세게 남았다. 이 할망구야! 다시는 여기서 내가 뭘 사나 봐라. 이 장사꾼은 얼룩빼기 행주치마를 차고 있었다. 나도 도량이 넓은 사람은 아니다.
핀잔은 왜 생기나? 상대가 못마땅하니까. 적어도 나는 너보다는 더 낫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러느냐? 이런 감정도 얼마쯤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또 상대가 감당하기 버거울 때도 있다. 그렇다면 허세라도 부려 자신의 위신을 세워야지. 이러나저러나 인간사가 복잡한 건 확실하다.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이런 삶이 애잔하다. 급기야 나도 그만 이렇게 중얼거린다.
“참, 용하다, 용해!”
인간들이 멍멍이나 야옹이를 상대로 경쟁하지는 않는다. 그런 만큼 그래도 나를 인간으로 봐준 거잖아. 그럼,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야. 이러면 아무런 갈등도 생기지 않는다. 이쪽이 하찮은 존재일수록 저쪽은 오히려 더 난감하다. 도대체 어디서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런 내게 저러나? 감정은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바뀌는 터라, 누가 굳이 뭐라 할 것도 없으나, 이치로 따져보더라도 실정이 그렇다.
시장은 상품의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다. 나 이런 사람이야! 누가 이러면서 위세를 뽐내는 무대는 아니다. 때때로 정치인들이야 ‘민생행보’라는 걸 한답시고 나타나 상인들한테 빈축도 사지만, 시장의 원래 기능은 ‘절대로’ 그런 게 아니야. 그러나 실지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노라면, 이런 주장마저도 무색하다. 그러므로 ‘절대로’라 단정하지 말자. 시장도 무척이나 복잡한 세계이다.
느닷없이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과거사가 떠올랐다. 이미 삼십 년도 더 지났다. 아마도 여동생이었을 터인데, 이 녀석이 시장에서 돌아와 분개했다. 어느 장사꾼이 자기를 함부로 대했다나. 그렇기로 일일이 잘잘못을 따지나. 아무도 남들과 늘 원만하게 지낼 수는 없다. 피차가 다 그래.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산다. 달리 도리도 없잖아. 당시에도 나는 그저 그러려니 하며 지나쳤다.
그러나 내가 둔감해서 놓친 부분이 있다. 아무개야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 바 아니다. 이러다 보니 내 태도에도 변화가 없었다. 다시는 우습게 보이지 말아야지. 이런 결심이 없었다. 남들이야 나를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그거야 다 그네들의 소관사이지. 이러니 내가 출세와는 거리가 멀지. 남들이 함부로 깔보지 못하도록 옷차림부터 바꾸자. 아, 이것만이 아니지. 이참에 더 나아가서 이것저것 다 바꾸자. 이래야 누구라도 남들이 선망하는 뭐라도 될 가능성이 있지.
“저러다가는 고객들이 다 도망갈 텐데······.”
하, 내가 수모를 당하고도 장사꾼 걱정을 다 한다. 정말 실속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비록 그 양반은 나를 같잖게 여겼을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았다. 다시는 거기서 물미역을 사지도 않을 거면서, 무슨 미련이 있다고 쓸데없이 이러나. 나는 더욱 기가 막히게도 이것저것 다 바꾸며 오래오래 피땀을 흘렸으나 안타깝게도 끝끝내 빛을 보지 못한 분들에게도 감히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괜찮아요. 뭐가 뭔지도 몰라 노력조차 하지 못한 작자도 여기 있는데요, 뭐.”
이걸 덕담이라고 한다. 누구는 결과가 모든 걸 말해준다고 하더라만, 이것도 늘 그렇지는 않아. 상처 없는 영광도 없다. 그러니 간신히 출세라는 걸 해봤자 이것도 기대와는 너무나 어긋난다. 이게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그 기대라는 것마저도 자꾸만 변하니까.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그런가 싶기는 한데, 내가 이러자고 그랬던가!”
“호강에 겨워 별별 소리 다 하는구나.”
각자가 불평불만이 있다. 그리고 다 그럴 만하다는 변명거리도 있다. 그래서 무리가 없는가? 이것도 아닌 듯하다. 변명이 완전하다면 아쉬움도 없어야지. 이래야 모순이 없다. 어디서 탈이 났을까? 나도 우물쭈물한다. 내 판단도 미덥지 않아. 이러니까 나는 질문을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자신이 뭘 모르는지는 알아야 한다. 이게 명확하지 않으면 질문도 갈팡질팡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다음과 같은 관용구를 인용하는 바이다.
“삼가 엎드려 강호 제현의 질정을 바라오.”
원시사회가 의외로 교훈을 준다. 현재 급속도로 소멸하고는 있으나, 연구자들이 직접 관찰한 기록물들은 다수 존재한다.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별난 풍습들도 나름대로는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이를테면 사냥을 아주 잘한 동료를 공공연히 모욕해야 할 의무가 있는 아프리카 어느 종족을 생각해 보자. 연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오늘 잘했던 인물이 내일도 잘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특정인을 계속 떠받들기로 하면 불화가 움튼다. 사냥도 혼자서 하는 게 아니지 않나? 이러니 너도나도 나서야지.
“그냥 두면, 마(魔)가 낀다.”
아메리카 인디언 어느 종족은 해법이 너무나도 무작스럽다. 외부에서 얻은 여자를 두고 남자들이 다투기라도 하면, 그 여자를 서둘러 죽여버린다. 이게 공동체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조치라는 거다. 내가 보기에도 이들은 야만인들이다. 그러면 인공지능이니 무선통신이니 하는 인간들은 대단한 문명인들이냐?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게 그렇지 않다. 죄업이 하늘을 찌른다.
그러고 보면 현대문명은 개개인과 집단의 불평등을 용인하는 방식으로 도약한 셈이다. 이게 꼭 이럴 수밖에 없었느냐? 이렇게 따질 수는 있다. 그러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버렸다. 특정인을 모욕해서 유지했던 평등사회는 다 잊기로 하자. 그래서 천하의 인재들이 역으로 특정인들을 옹호하는 주장들을 부지런히 꾸며댔다. 이게 그냥 마음과 마음이 저절로 통하는 설법이 아니다. 특정인들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재화들을 요리조리 분배해야만 했다.
‘이 와중에 누군가는 목이 잘리고.’
논의는 분분하다. 정치철학도 많고, 경제이론도 많다. 나와 같은 자들은 언뜻 듣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도대체 이것들이 무슨 역할을 하는가? 우크라이나에서 또 가자지구에서 또 어디에서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가는데, 설마 이 학설들이 변명거리로나 쓰이지는 않겠지? 나 또한 이런 의심을 아니 하는 건 아니나, 달리 어떻게 할 바를 몰라. 나 역시 어쩌다 그만 차등에 길이 들었나? 아, 그런 건 특별한 인물들이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작자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러나 이것도 부동의 진리는 아니고 누군가의 선택이다.
아프리카 그 원시인들이 잘난 동료들을 모욕하면서 무슨 논리를 사전에 정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신앙이었거나 관습이었겠지. 이게 어쩌면 내면 깊이 숨은 본능일 수도 있어. 현대인들한테도 이런 정서가 오롯이 남은 듯하다. 요즘도 원시공동체와 비슷한 분위기를 공유하는 집단들이 있다. 바로 동창회나 향우회 또는 종교단체나 봉사단체 등등이다. 마침 여기에 누가 거금을 냈다. 이러면 꼭 헛소리하는 친구들이 있다.
말하자면 그게 다 별것 아니라는 거지. 애써 차린 음식들을 실컷 먹고서는 맛이 영 신통찮았다고 떠든다. 이네들이 하는 말만 들으면 기부금을 낸 사람이 도리어 죄인이다. 돈도 내지 않았으면서 목소리가 너무 크지 않나? 차라리 입이라도 꾹 다물고 잠잠히 있기라도 하지. 뭐가 저래? 밉상도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평가는 허술하다. 원시인들의 미덕이 시대를 초월하여 발현한 것이니까. 이 행태가 다소 거칠지만 중요한 기능도 한다.
“와, 생생하네!”
이게 정답이다. 그러나 이네들의 처지도 살펴서 언사를 다듬을 필요는 있다. 저들도 자신들을 몰라. 그래서 왜 여기서는 말썽꾼인데 저기서는 얌전이인지도 몰라. 아마도 오해야 받겠지만, 이들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도 아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과연 현장에서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으려나. 그리고 원시인들과 달리 갖가지 장치들을 마련한 현대인들이라고 해서 곤경이 없는 것도 아니다. 너나없이 일종의 문명병이라 할 만한 것들을 앓는다. 그러니 먼저 상황을 대략이나마 파악하고는 곧장 너스레부터 얼씨구나 떨어보자.
“어허, 여기로 바람이 부네.”
“비가 오려나.”
“천둥도 치려나.”
“저기 얼룩빼기 마대가 지나가네.”
“아, 마대가 아니라 앞치마였구나.”
길은 어디에나 있다.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누구는 벽돌 한 장을 든다. 다 자기 몫이 있다.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것도 없다. 내가 많이 모자라는 작자로구나! 이런 자각이 성장의 계기이긴 하나 자신을 괴롭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나는 천성대로 살 거야! 누가 이래도 잘못은 아니다. 나는 얼룩빼기 행주치마 그 할망구도 용서하기로 했다. 난들 어디서 남들의 허파를 뒤집지 않았겠나.
누구라도 자신을 도두보는 거야 놀랍지 않다. 인간들 본성이 그러니까. 저마다 더러 멋쩍어서 쓴웃음도 짓는다. 때로는 반색도 하고. 저들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남들의 어리석음에 어물쩍 편승하는 태도가 못났다. 나 말고 바보가 또 한 명 더 있어 좋을 게 뭐 있나? 도리어 경계할 일이지. 그렇기는 해도, 역시 동류의식은 위안을 준다. 나와 비슷한 인물들은 다 내 편이야. 이 착각으로 오늘도 든든하다. 좋아, 좋아.
[2024.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