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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섰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일본군으로부터 끔찍한 성노예 생활을 겪었던 ‘강제 종군위안부’ 출신 할머니들께서 일제가 규정한 삼베수의를 입고 마지막 길을 가셨는데 전통복식 전문가로서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전통복식 전문가인 최연우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는 “삼베수의(壽衣), 영정사진, 유족 완장과 리본을 비롯해 영좌(靈座: 영위(靈位)를 모셔 놓은 자리) 꽃장식까지 광복 70년이 넘도록 여전히 일제 잔재가 장례문화에 남아있다”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일제가 시행한 삼베수의가 우리 전통인 비단(緋緞)수의를 밀어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단국대는 전통복식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대학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조선시대 출토복식(出土服飾: 무덤에서 발굴된 복식) 등 전통복식을 국내 최대 규모로 보유하고 있는 석주선기념박물관이 있습니다.
최연우교수 지적처럼 수의 재료, 완장, 리본 등을 규정한 1934년 조선총독부의 <의례준칙(儀禮準則)> 이후 삼베수의가 확산돼 오늘날에는 “삼베수의가 우리의 전통문화”라고 잘못 인식하게 됐습니다.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제가 강제한 치욕스런 문화를 오히려 전통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정자치부가 주관해 국가장(國家葬)으로 장례가 치러진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에도 2015년 11월 26일 황색 삼베수의를 입고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그가 입고 떠난 수의의 가슴에 부착된 흉배(胸背: 가슴과 등에 장식한 표장(表章))가 대통령의 격(格)에 맞지 않는다거나(대통령이 전통시대 군주에 상응한다고 볼 때, 군주는 가슴, 등, 양 어깨에 둥근 모양의 보(補)를 장식함. 네모난 모양의 흉배를 가슴과 등에 장식하는 것은 신하의 경우임), 곧은깃[直領]의 옷에 흉배를 부착하는 것이 국적도 없는 터무니없는 방식이라는 것은 차치하고(흉배는 둥근깃[團領] 옷에 부착해야 함), 가장 안타까운 것은 수의의 소재를 삼베로 했다는 점입니다.
경북 안동에서 대마를 재배해 물레질로 실을 뽑은 뒤 베틀로 짠 ‘안동포 수의’를 입고 가셨지만, 정부가 삼베수의의 유래를 정확히 알고 국격(國格)을 고려해 전통 비단수의를 마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앞서 정부가 주관해 각각 국장(國葬)과 국민장(國民葬)으로 장례를 치른 고(故)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도 삼베수의를 입고 가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의 장례식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수의뿐만이 아닙니다. 빈소와 전국적으로 설치된 분향소의 영좌 역시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꽃인 국화꽃으로 장식하는 등 일본풍으로 꾸며졌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유가족들은 일제 잔재인 완장을 팔에 두르지는 않고 가슴에 삼베 리본만 달았지만, 삼베 리본도 실상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강제한 <의례준칙>에 규정된 것입니다.
최연우 교수는 “조선시대 무덤은 회삼물(灰三物: 석회·황토·모래를 반죽한 물질)로 두르고 관(棺)도 옻칠을 여러번 해 출토복식이 수 천 점이나 발굴되고 있는데 그 중 삼베옷은 한 두 점 밖에 없다”며, “삼베를 수의 소재로 쓰는 것은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고, 비단, 명주, 무명, 모시를 쓰는 것이 전통을 따르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역대 대통령뿐만 아니라 13~16세라는 한창 꽃다운 어린나이에 강제로 끌려갔던 ‘전시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도 일제 식민통치의 산물인 삼베수의를 입고 한 많은 인생을 마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마지막 길을 일본이 강제한 삼베수의를 입고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꽃에 둘러싸여 조문을 받았으며, 상가에서는 완장과 리본을 달고 문상객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광복 72년째를 맞았지만 아직도 장례문화 주권을 찾지 못하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 장례의식에서 수의는 ‘생전에 입던 옷 중 가장 좋은 옷’, 다시 말해 관리는 관복(官服)을, 선비는 유학자들이 입던 하얀 심의(深衣)를, 여성은 혼례복 등으로 입던 원삼(圓衫)을 사용했습니다. 소재는 모두 누에고치의 실로 만든 비단(緋緞·조직이 복잡하고 무늬가 다양함)이나 명주(明紬·단순한 평조직으로 짜고 무늬가 없음) 또는 목화(木花)로 만든 무명이었습니다.
1474년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염습(斂襲)절차는 습(襲·수의를 팔다리에 끼워 입힘)을 한 뒤 옷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서 끈으로 묶는 소렴(小斂)과 대렴(大斂)의 순서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때 수의는 (비단·명주 등) 견직물을 쓰고 소렴과 대렴을 할 때도 군주가 경사스런 의식에 착용했던 붉은 강사포(絳紗袍)나 제례(祭禮)를 지내며 입던 면복(冕服) 등 최고 등급의 견직물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삼베옷은 고인의 유가족들이 입는 상복(喪服)의 소재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고인과 혈연적으로 가까울수록 거친 삼베상복을 입어서 슬픔[哀]이 크다는 것을 형상화했습니다. 즉 고인에게 삼베수의를 입히는 것은 전통상례문화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국적없는 문화입니다.
조선시대 분묘를 이장(移葬)하거나 개발 등으로 발굴하는 과정에서 비단, 무명, 모시로 된 수의를 다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발굴되는 분묘는 대개 회삼물로 회격(灰隔)처리를 잘 한 경우이고, 두꺼운 회격처리는 경제력이 있는 양반가문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회격묘를 쓸 수 없었고 관 안에 비단수의를 넣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대마로 만든 삼베수의는 매우 가난한 백성 일부나 사용했을 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때문에 삼베로 수의를 하면 “오죽하면 삼베수의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고인에게 가장 소중하고 귀한 비단옷을 입혀드리고 유족들이 거친 삼베옷을 입던 우리의 문화는 조선의 전례서인 <국조오례의>에 명문화된 이래 면면히 이어져왔고, 가족과 친지와 이웃사촌이 모두 모여 슬픔을 함께 하던 전통은 긴긴 세월 이어온 우리의 자랑스러운 장례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통장례문화를 1934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 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가 비단과 명주 사용을 금지해버리고 삼베수의를 입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조선총독부 <의례준칙>의 삼베수의 규정에는 당시의 궁핍한 경제사정 외에도 우리 장례문화를 격하시키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 황제와 관원들의 복식을 자신들보다 등급을 낮춰서 규정한 것이나 일본의 하층민 거주지인 ‘부락(部落)’을 우리나라 마을이름에 붙여 ‘OO부락’으로 부르도록 한 것처럼 우리 장례문화의 격도 형편없이 떨어뜨린 것입니다. 부모님을 여읠 경우 ‘죄인’이라는 뜻으로 상주(喪主)가 입었던 거친 삼베상복을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수의(囚衣·죄인의 옷)로 입게 하여 정신적 열등감을 심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삼베수의를 입도록 함으로써 대마를 많이 재배하게 만든 것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마약중독자를 많이 만들어 우리 민족의 저항의지를 꺾고자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습니다. 대마는 줄기가 삼베의 원료가 되고 잎이 대마초(大麻草·마리화나)로 활용됩니다.
으레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게 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삼베수의가 일제 잔재인 줄을 잘 모르고 전통으로 착각해 미리 삼베수의를 준비하거나 타 상조업체에서 권하는 삼베수의를 쓰고 있습니다. 삼베수의는 과거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흔하게 재배되다가 대마초의 원료라는 점에서 1976년 대마관리법이 시행된 뒤 공급이 대거 줄어들면서 오히려 고급이라는 인식이 장례업계에 퍼졌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재배지역이 대폭 축소된 상황에서 고급 삼베수의조차 중국산 등 가짜가 판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일제 잔재이며 중국산 짝퉁이 태반인 삼베수의를 쓸 명분과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오늘날 상주 등 유족이 팔에 차는 완장과 왼쪽 가슴에 다는 리본도 일제시대 <의례준칙>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시행토록 한 것입니다. 넉 줄 완장은 맏상주가, 석 줄은 둘째 이하 아들이, 두 줄은 사위가, 한 줄은 형제·손자 등이 각각 차는데 이는 실상 우리의 전통이 아닙니다.
고인이 입관한 뒤 묘소까지 누워 이동하는 상여(喪輿)에 장식하는 화려한 종이꽃 외에는 상가에서 생화를 사용하지 않는 게 우리 전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는 근조화환(謹弔花環)을 상가에 세워놓는 풍습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 1926년 순종황제의 국장 장례식 사진첩에서 영좌 주변에 나무로 된 화환이 놓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는 영좌를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菊花)로 장식하는 일본 문화마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좌 뒤에 병풍(屛風)을 세우는 게 전통이었으나 병풍 대신 일본식 국화꽃을 장식하는 풍토로 변질된 것입니다. 물론 헌화나 화환 문화가 당초 서양에서 출발한 기독교 문화라고 볼 수도 있으나, 장례식장에서 꽃장식조차 완전히 일본 황실 상징꽃을 사용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맹자께서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관(棺)의 재료를 좋은 것으로 썼습니다. 그러자 장례를 치룬 후 제자가 관재가 너무 좋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고, 이에 맹자께서 “군자는 천하를 이유로 부모에게 검박하게 하지 않는다(君子不以天下儉其親))”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내 부모장례를 치룰 때 주위의 눈치를 보느라 검소하게 하지 말고 경제적인 능력이 된다면 예법에 맞게 자식으로서의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쁜 현대인들이 전통 예법대로 장례를 치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수의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복원하고,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꽃 장식이나 조화(弔花)도 없애고 병풍을 세우는 방식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전통수의를 복원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고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와 유언, 추모의 마음을 담은 서예 붓글씨를 병풍에 새겨 영좌 뒤에 세우는 것도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것입니다. 실제 전통 장례에서는 관 앞에 병풍을 세웠습니다. 이는 또 상여 앞에서 길을 선도하던 만장(輓章) 행렬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만장은 고인에 대해 슬퍼하며 지은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대나무에 높이 깃발처럼 만든 것으로 문집에 부록으로 싣던 것입니다.
영정사진을 대체해 고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고인을 영원히 추모하고 기념할 수 있는 조각상을 만들어 영좌 옆에 세운다면 한 층 품위있고 격조있는 장례식이 될 것이고, 후손들은 제사를 지낼 때 다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를 모시지 않는 개신교인이라면 고인의 생일 때 기념할 수 있습니다. 조각상은 흉상을 기본으로 하되 두상과 전신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장례를 매장(埋葬)으로 하느냐 혹은 화장(火葬)으로 하느냐에 상관없이 비단수의와 병풍, 초상화, 조각상은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시골에서는 상이 나면 고인의 집에서 동네 사람들이 다같이 모여 장례를 치르면서 발인(發靷)할 때 수 십개의 만장이 앞장서고 수 십명의 상여꾼이 상여를 어깨에 메고 묘소까지 이동했습니다. 이때 상여꾼들은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북망산천이 멀다고는 해도 대문 밖이 저승이네. 염라대왕 부름을 받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우리 부모님 가는 길, 일가나 친척이 많다 한들 어느 누가 대신 가랴, 내 친구가 많다 한들 어느 누가 동행할까.” 라는 상엿소리를 구슬피 불렀습니다. 유가족은 장례 이후 1년 간은 한 달에 두 번씩 삭망(朔望: 초하루와 보름) 때마다 삼베옷을 입고 산소에 가서 제를 올렸습니다. 물론 이 기간 집에서도 고인의 신주(神主)를 계속 모셔놓고 삭망 때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렇게 품격을 갖춰 올리던 장례문화가 오늘날은 병원 장례식장에서 상조업체 주관으로 간편하게 장례를 치른 뒤 운구차를 타고 화장장이나 공동묘지로 가는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급속한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진행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합니다. 더욱이 삼베수의부터 완장·리본, 영좌 국화꽃 장식 등에 이르기까지 온통 일본풍으로 장례가 치러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상여 앞에서 저승길을 안내하던 상엿소리를 부활한다든지 전통예법을 모두 복원할 수는 없지만,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최소한 전통 예법에 따른 비단수의를 입혀 드리고 병풍과 초상화, 조각 등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다면 영원한 안식과 쉼을 찾아 떠나는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될 것입니다.
첫댓글 조선은 공자님의 제례방식대로 해야 되는데~요..
아~~그렇군요.
이런.......
와..! 이걸 몰랐네요....ㅠㅠ
좋은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