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15-24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의 행동을 만류하신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를 인정하시고서 주시는 분복으로서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재확인 하십니다. 본문 끝 부분에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자손들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 본문 15-16절은
“⑮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⑯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금 이삭이 다시 생명을 갖게 되어 제단에서 일어난 후에 다시 확증하시고 재가해 주고 계십니다.
이삭이 보다 더 완전한 승리를 이루려고 마치 무덤에서 다시 일어난 것처럼 제단에서 일어난 후에 전에 약속하신 것을 다시 확신시키고 제가를 하고 계십니다. 그 사자(使者)는 하나님의 자격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대사들이 그분이 위엄으로 옷 입힘으로 더욱 더 큰 권위를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들이 서로 일관성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전에 까닭 없이 은혜로 그저 약속된 것이 여기서는 보상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은혜와 보상은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자손 안에 약속된 복이 구원의 소망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이 선한 행위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카톨릭 신자들은 대단하게 이것과 그와 유사한 구절들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그것으로 행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받게 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제기하는 자들에 관한 교활한 논증에 쉽게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 약속이 전에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 지금와서는 일종의 보상으로 돌려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선한 행위들에 허락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은혜로 받은 것처럼 여겨져야 합니다. 확실히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이 동일한 약속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확신을 주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신의 덕성 때문에 그토록 엄청난 보상을 받게 되었다면 그에게 먼저 내려진 하나님의 은혜는 결국 아무런 효험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은혜스런 은총에 근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가 굳게 서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즉, 거저 주신 것이라도 행위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불려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심의 영광을 희미하게 하시거나 어떤 방법으로 그 영광을 감소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들을 자극시켜 착한 일을 사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분의 백성들이 의무적인 자기들의 행위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려서 보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 그런 선한 일을 더욱 즐겨 행하게 자극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반드시 갚아야 할 빚으로서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혜택을 단지 보상이라는 명칭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는 여기에 전혀 모순점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여기서 그분 자신이 이중적으로 관대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자극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순수한 은혜에 속한 것을 우리의 행위에다 전가시켜 주시는 면에서 그런 관대성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하나님의 온화하신 초청을 사악하게 외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무감각성을 고정시키려는 그 온화하신 초청을 다른 목적으로 의곡하여 하나님이 그분의 관대하심의 선물로 주신 것을 사람들이 마치 자기들이 잘나서 받은 것처럼 거만을 떨게 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카톨릭 신자들입니다.
2. 본문 17-18절은
“⑰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⑱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입니다.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들의 대적들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문들 안에 그들의 보루가 있었으며 그 문들 안에서 그들의 재판을 집행했기 때문입니다. 제 비록 하나님이 흔히 유대의 원수들을 시켜서 유대인들을 포악하게 다스리게 하셨지만 그분은 그들에 대한 보복을 참으로 억제하며 참고 계셔서 마침내 그분의 약속이 언제나 잘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 자손의 단일성에 관하여 전에 바울이 말한 내용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에서 그 승리는 전혀 차별이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와 그리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서로 꼭 뭉쳐있는 그분의 지체(肢體)가 되는 자들에게 약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합법적인 자녀들과 타락한 자녀들과의 사이에 구별해 주는 표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이 약속은 이스마엘 사람이나 이두메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무차별하게 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백성의 단일성은 그 집단의 머리에 좌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 약속을 확증시키기를 원할 때마다 그들은 다음의 원리를 전제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분리되었던 자들은 다윗의 통치하에 한 몸 안에서 연합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제목에 관한 더 자세한 것들은 12장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본문 19절-24은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20)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21)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23)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24)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입니다.
그들이 일어나 함께 브엘세바에 이르러(한글개역과 다름) 즉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라는 말씀인데 여기서 모세는 아브라함이 이처럼 극심하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시험을 치루고 브엘세바에서 조용히 지냈다고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아브라함의 친척들이 증가되는 것과 함께 삽입된 내용인데 그렇게 한 것은 거룩한 사람이 죽음의 심연에서 다시 이끌려 올림을 받은 후에 여러 가지 면에서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그렇게 소생시켜서 마치 새 사람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또한 다른 이유 때문에 나홀의 후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삭이 그 가문에서 아내를 데려와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여자들에 대한 언급이 극히 드물며 그리고 나홀에게 많은 딸들이 출생되었다는 것은 믿어지고 있는 바이지만 그들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 리브가만 여기서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첩의 아들들을 다른 아들들과 구별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자들에 비하여 보다 명예스럽지 못한 위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첩들이 창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 첩이 보다 하위에 속한 아내였기 때문에서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과 재산의 공유성을 지니고 있는 그 집의 여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홀의 마음에 둘째 아내를 얻는 생각이 들어간 사실이 그 일부다처제가 합법적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풍습에 근거하여 가장 사악한 부패로부터 기원된 것을 그에게는 합법적인 것으로 그가 추측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