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사제
성 베드로는 1499년 에스빠냐의 알칸타라에서 태어났다. 신학 공부를 끝내고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였다.
1554년 형제회 수도회칙을 더 엄격히 지킬 허락을 받고
형제들을 보속과 극기, 끊임없는 기도와 극단적인 가난의 삶으로 이끌었다.
열정적인 강론을 통해 형제회 안팎에서 큰 성과를 얻었으며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에 있어 아빌라의 데레사에게도 좋은 조언자였다.
그의 개인적 영성 체험,특히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열렬한 신심에서 여러 권의 영적 저서를 남겼다
1562년 10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의 알깐따라 지방장관의 아들로 태어난 베드로 가라비또는 살라망까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16세 때에 만하레떼스에 있는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다.
그가 엄격한 보속 생활을 실시하던 중 바다호스로 파견되었고, 152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을 설교하면서, 로브레딜로, 플라센시아, 라파 그리고 에스트레마두라의 원장으로 봉사하였으며, 라파 수도원을 봉쇄수도원으로 요청하여 허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 한때 그는 궁중의 전속사제로 일하다가, 1538년에는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다소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고, 이것을 관구총회에서 통과시키지 못하자 관구장직을 사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리스본 교외 아라비다산에서 성 마리아의 마르떼노 형제와 함께 은수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수많은 수도자들이 그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따르려고 하였다.
관구내에서는 자신의 규칙이 통과되지 못하자, 이번에는 코리아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얻은 후, 꼰벤뚜알의 지도아래 있는 수도원을 세울 허가를 교황 율리오 3세로부터 받았는데, 이것이 알깐따라의 성 베드로의 프란치스꼬회의 시작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른 수도원들도 그의 규칙을 받아들이므로써, 1561년에는 성 요셉 관구가 설립되었는데,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꼰벤뚜알에서 프란치스꼬회의 관할 아래 두게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마르 8,34) 하셨는데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생애는 그야말로 이 세상을 그 말씀대로 체험한 금욕, 극기의 본보기였다.
그는 1499년에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의 알칸다라 지방 장과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성한 그는 그 시에서 철학을 배웠는데, 얼마 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들의 입신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는
그를 유명한 살라망카 대학에 보내어 법률을 전공케 했다.
그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베드로는 그의 학식이며 가문으로 보아 어떠한 출세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영예와 쾌락이 허무함을 통감하고수도자가 되기를 원하여 여러 수도회의 회칙을 검토한 끝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상에 가장 공명되어 16세 때에 만하레테스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모든 일에 철저함을 좋아하는 베드로는 수도자가 된 처음부터 완덕을 지향하고 생각, 말, 행실에 있어 사소한 점까지 하나도 소홀히 함이 없었다.
그가 얼마나 눈을 삼갔는지, 그가 수년간을 같은 수도원에 살면서 그 수도원 성당의 천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으며 또 같이 기거하는 동료 수사들의 음성은 알고 있으나 얼굴은 통 몰랐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또 사욕 편정을 제어하기 위해 육신을 매질하며 엄격한 단식을 감행하고, 수면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여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나중에는 3일을 한끼만으로 지냈다는 것만 보아도 그의 극기 단련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가 이같이 오관을 삼간 것은, 육욕이며 기타 외계의 사물에 정신을 팔지 않고 마음껏 하느님과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고, 가끔 탈혼 상태에 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독특한 묵상 방법을 사용하며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한 책을 저술했는데 이는 ‘황금의 글’이라는 책이나 아직 한국말로는 번역이 안 되어 있다.
베드로는 자신에 대해 그렇듯 엄격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고 친절해 마치 어진 어버이와 같이 대했다.
그는 1524년, 25세에 서품되었다.
그 후 플라센시아의 프란치스코 수도원 원장에 임명되었고 동시에 설교할 임무도 부여되었다.
그 신앙에 타는 열변은 순식간에 세상에 널리 퍼졌고, 그의 설교를 들은 포르투칼의 왕 요한 3세는 그를 궁정에 초빙하기도 했다.
그의 설교와 일상 생활은 궁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감동하지 않은 이 없었는데,특히 여동생 마리아는 세상이 허무함을 깨닫고 서원을 하고 궁정에서 수도 생활을 했으며, 리스본 시에 클라라회 수녀원을 건축해 기증했다.
베드로의 최대의 업적은 밖으로는 루터의 이단이 일어나고, 안으로는 교회 내의 신앙심이 일반적으로 이완된 당시 프란치스코회의 강기(綱紀)를 숙정하며, 한편 신비신학자로서 유명한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지도해 가르멜 수도원의 개혁에 협조한 것 등이다.
한편 자기 회의 쇄신을 도모하고, 당시 교황 율리오 3세의 강복과 충고를 받기 위해 맨발로 스페인에서 로마까지의 여행을 기도하기도 했다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그의 열심한 태도에 감동된 수사들은 각성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의 모범을 따르며 자기들의 생활을 개선했으므로 같은 회이면서 알칸타리노파라는 명칭까지 받고 일반의 존경을 샀다.
1555년, 스페인 및 독일을 통치하던 황제 가롤로 5세가 그 왕위를 동생인 페르디난도에게 넘기고 자기는 센트유스토 지방에 은퇴해 오로지 수덕에 전념했을 때 알칸타라의 베드로를 그의 지도 신부로 청했던 바, 그는 겸손된 마음에서 대단히 황송하게 생각하며
“저는 도저히 그런 중책을 맡을만한 자가 못됩니다.
폐하를 지도하기 위한 적당한 인물이 다른 데 있을 것입니다”하며 극구 사양했는데, 황제는 그의 겸손 지덕의 미를 깊이 경탄했다 한다.
하루는 어떤 귀족이 신앙의 쇠퇴와 도덕의 타락을 탄식하며 베드로에게 호소하자 그는 “물론 개선해야 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 둘이 먼저 고치는 것으로 시작합시다”하고 말했다 한다.
베드로는 매일같이 고행과 엄격한 단식으로 지내며, 63세를 맞이하여 1562년에는 드디어 병을 얻어 병자 성사를 받고 그 해 10월 18일에 운명했다. 당시 아직 생존 중인 예수의 데레사에게 베드로가 나타나
“고행은 행복하다. 그는 나에게 영원한 행복을 준다”하고 말했다 한다.
그는 1669년에 시성되었고, 1862년에는 브라질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그는 위대한 신비가였던 것이다.
1560년, 그는 아빌라의 데레사를 만나서 그의 고해신부겸 상담자가 되었으며,
가르멜 개혁 운동을 격려하였다.
그는 "기도와 묵상론"을 썼는데, 이것이 후일 성 프란치스꼬 드 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669년에 시성되었고, 1862년에는 브라질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그는 위대한 신비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