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는 것들의 언어, 이질적인 것들의 언술
김덕영의 이전 작업은 테이프와 인연이 깊다. 아마도 그 존재감이 희박하고 실체감이 박약한 것들에 맞춰진 작가의 관심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존재감이며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을 조형하는데 테이프만큼 부실하면서 적절한 재료도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 부실하고 적절한 재료를 가지고 산처럼 일어서는 숨 쉬는 파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 형상의 껍질을 만들었다. 마치 파충류의 허물과도 같은 사람의 껍질을 만든 것이다. 그 껍질은 아마도 페르소나일 것이다. 현대인에게 페르소나는 마치 자유자재로 입고 벗을 수 있는 옷이며, 상황논리에 따라서 매번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는 의복과도 같다. 현대인의 삶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고, 그 이해관계가 천의 얼굴을 한 페르소나를 요구한다. 최소한 천 벌의 페르소나를 상황논리와 이해관계에 맞춰 적절하게 제안하고 제시하는 것인데, 만약 그 일에 실패할 경우에 그는 삶의 변방으로 내몰리고 도태될 수 있다. 여기에 그렇게 실패한 사람들이 있다. 상황은 달라졌는데, 미처 그 상황에 걸 맞는 페르소나로 갈아입지 못한 사람들이다. 아마도 상대를 향한 적의와 분노, 냉소와 부끄러움과 같이 무의식 속에나 꽁꽁 숨겨져 있어야 할 것을 부지불식간에 들키고만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사람들을 위로한다. 누구 할 것 없이 가면(페르소나의 어원이 가면이다)이 다반사가 된 세상에서 그들은 어쩌면 자신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생각하고 반응하는, 그러므로 자신에게 정직하고 솔직한 별종들일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미처 다른 페르소나로 갈아입지 못한 사람들, 자신의 속내를 들킨 사람들, 허물을 벗지 못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거나 못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적녹색약
작가는 적색과 녹색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색각이상자다. 당연히 트라우마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트라우마를 작업의 표면으로 불러낸다. 이를 위해 작가는 색각검사표 그대로를 확대해 그린다(엄밀하게는 색깔을 구별할 수 없으므로 여타의 방법을 빌려 여하튼 있는 그대로를 예시한다). 보통사람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보통사람들은 구별할 수 있지만, 적녹색약자는 구별할 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린 그림으로 봐서 구별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두 샘플 그림을 대비시켜 보통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적녹색약자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상황논리를 거꾸로 뒤집는다. 이번에는 적녹색약자의 눈에 보이는, 숨은 기호를 구별할 수 있는 임의의 샘플 그림을 그려서 제안한 것이다. 당연히 보통사람들은 볼 수도 구별할 수도 없거니와 보통사람들을 기준으로 만든 색각검사표에도 없는 샘플그림이다. 이번에는 적녹색약자에게는 보이는 것이 보통사람들에게는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작가는 보통사람들은 볼 수도 없거니와 색각검사표에도 없는 이 임의의 샘플그림을 왜 그렸을까. 보통사람들이 볼 수가 있는 것을 적녹색약자는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와는 거꾸로 적녹색약자가 볼 수가 있는 것을 보통사람들은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이 볼 수가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적녹색약자가 볼 수가 없는 것은 문제가 된다. 바로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을 정상성과 정상인으로, 그리고 적녹색약자를 비정상성과 비정상인으로 고쳐 읽으면 작가의 주제며 문제의식이 분명해진다. 주지하다시피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문제는 미셀 푸코가 평생 천착했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푸코는 성 정체성과 성과 권력 담론의 연장선에서 이 문제를 건드린다). 누가 누구에게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판정하고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낙인을 분배하는가. 그 판정과 낙인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닌 가치론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절대 다수의 가치를 반영한 절대 다수의 폭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폭력을 고쳐 잡을 수는 없는 일일까. 볼 수 있다 없다는 문제를 다른 것을 본다거나 다르게 본다는 것으로 고쳐 읽는 것에 그 해법이 있다. 본다는 것은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과 판단과 예기를 동반한 종합적 인식행위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인문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탓에 저마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본다. 더욱이 예술에서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보는 것은 의식적이고 전략적인 층위에서 꾀해지는 핵심 사안이다. 이로써 작가는 정상성과 비정상성과 관련한 사회적 편견이 예술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생산적인 계기이며 실천논리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당연시해왔던 것, 이를테면 상식과 합리의 이름으로 수행되던 것들이 때론 심각한 선입견과 편견과 관성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