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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4
[K 생각] ㅡ 운명의 끈과 기회주의자의 말로
길을 걷다가 바닥에 떨어진 돈을 보고서는 먼저 주변을 살피고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주저앉으며 돈을 줍는다.
다시 길을 걷다가 또 길 위에 뒹구는 돈을 보자 얼른 주워 호주머니에 넣는다. 이젠 망설임도 없고 눈치도 보지 않는다.
또 길을 걷다가 땅에 떨어져 있는 돈을 보자마자 거침없이 달겨들 듯 손부터 나간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돈에 발이 달린 듯 내민 손이 쑥스럽게도 바람에 실려가듯 한발짝 멀리 달아난다.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돈이 움직인 쪽으로 한걸음 내딛고 다시 웅크려 손을 내밀고 돈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돈은 다시 또 두발짝 멀리 달아난다.
이쯤되면 대개는 포기하고 뒤돌아서서 가려던 자기 길을 가겠건만 집착이 그냥 놔두질 않는다.
쫓고 쫓으며 돈을 향해 달린다. 가려던 목적지도 잊고 가족도 잊고 마침내 자기도 잊은 채로.
그러다 바람에 실려 둥둥 떠가던 돈이 도로 위 하수구 밑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종내엔 돈을 찾아 하구수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그리고 운명인 듯 하수구 뚜껑을 밟으며 급히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난다.
돈에는 마치 실이 달린 것처럼 운명의 끈이 달려 있어 돈으로 기회주의자를 유혹하고 희롱한 것이었다.
운명은 기회주의자에게 교통사고를 피하게는 해주었지만 하수구 속에 그의 인생을 처박은 셈이 된다.
그러나 운명이 잔인해지면 그 뒤는 장담할 수 없게 된다.
2. 2024
[K 생각] ㅡ 거부권 남발
침몰하는 배 위에서 황금칼을 휘두른 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우리 불쌍한 국민들은 배의 침몰을 두려워하기도 전에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광인의 칼날을 피하는 데에 급급해야 하는 첩첩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으니,
이처럼 무도하고 몰상식한 정권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어디 또 있겠는가.
우리 국민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지 정권에 충성을 하는 것이 아닐진대,
영토마저 포기하려는 듯 "독도는 우리 땅"이라 선언조차 못하고 침묵하고, 국민 주권마저 억압하고 뭉개려 하니,
대통령 거부권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 새삼 다시 묻고 싶다.
3. 2024
《시》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집착에 빠져들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여 수시로 격노하니
무식하거나 생각하는 머리가 모자르거나
경거망동하며 촐랑대며 입방정을 떨더니
마음 닿기가 사악하기 이를 데가 없었고
독배를 들이켜야만 이독치독이 되겠더라
탐진치 신구의 / kjm
* 탐진치 : 탐욕, 진에(분노), 우치(어리석음)
* 신구의 : 세가지 독으로, 몸과 입과 의지에서
4. 2023
[K 생각] ㅡ 원죄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윤똘과 검찰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젠 서로에게 적의를 애써 숨길 필요도 없다.
5. 2022
[회복의 시간에서, 도약의 시간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회복의 시간'을 넘어서,
이재명 후보가 이제 '도약의 시간'을 말할 때..!!
* [moonism (문재인 철학)12]
kjm _ 2021.2.2
오늘 낮에 본 국무회의 녹화 영상에서 "포용적 회복"을 여러번 강조하시는 문 대통령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작년 2020년 한 해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쳐와 세계 모두는 '버티기 해'로서 일년 내내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잘 버텼던 나라가 되었습니다.
2021년 올해는 '코로나 백신의 해'가 될 것입니다. 빠르고 늦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변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백신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경제의 문제인데, 경제 침체는 세계 각국 공히 예외없이 겪었습니다. 다행히 우려하던 경제공황에까지는 닥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살얼음판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특히 두드러졌던 것은 '코로나 양극화 현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경제 회복과 양극화의 해소라는 두 가지 모두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다 보니 "포용적 회복"이란 표현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아직 말씀 안 드렸나요?ㅋ
문재인 철학의 또다른 축, <포용의 철학> 말씀입니다. 제발 여기에다가 선별적 포용이니, 선택적 포용이니 하면서 갖다 붙이진 마십시오. 그냥 '포용'입니다. 따로 조건이 안 붙습니다. 여기에 머리 굴리는 헛수고는 낭비입니다.
따라서 재난지원금도 보편이냐 선별이냐를 두고 편가르기도 무의미한 일입니다. '적재적소'와 '적정'과 '적시'만이 문제일 뿐입니다.
다행히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회복"을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2021년 올해도 세계는 '버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백신 접종으로도 안 됩니다.
백신 접종이 아직은 제로(0)라는 이유로 방역 평가가 3위에서 12위로 내려갔지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코로나 대유행 속에서도 제조업을 비롯한 경제 성장의 기반과 토대를 잠식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즉 금융과 실물 모두를 가장 잘 지켜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회복"을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들은 모두 다 아직까지 엄두도 못 내는 단어가 "회복"입니다.
여기서 <회복의 철학>이라고 명명해도 될까요? 저도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ㅋ
다만 <포용의 철학>과는 달리, <회복의 철학>은 '왜의 철학'이 아니라 "어떻게 철학"이 되겠습니다.
6. 2022
[K 생각] ㅡ 정권교체?
그동안은 정치가 국민에게 그다지 효능감을 주지 못 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정치와 정치의 대결이 아닌 정치와 검찰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정권교체라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다.
7. 2022
20대 대선 토론에 부쳐..!! (경제 편)
1. 나는 경제인
문 "나는 누구인가?"
답 "지구에 머물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경제인이다"
ㅡ 지구인이고, 현대인이며, 경제인이라는 것
낯선 세상에 던져져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이다. [지구인]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나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이다. [현대인]
마침내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나는 여러 모습의 페르소나(사회적 인격)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가장 강력한 모습은 '경제적 인간'의 모습이다. [경제인]
2. 문제 상황 (피케티의 분석)
현대의 경제 문제는..
ㆍ소득 불평등과 자산 불평등의 문제.
ㆍ지난 150년 간, 선진국은, 자본수익률은 4~5%이고, 경제성장률은 1∼2% 수준이었다.
ㆍ부유층에로 자본 편중현상이 심각해졌다.
ㆍ소득 및 부(자산)의 편중을 완화하는 효과적인 정책 수단은 조세 정책이다.
ㆍ20세기 조세 정책의 변화를 보면, 일관된 정책 방향이 없었다.
ㆍ소득과 자본 편중이 심각해지면, 세계는 민족주의, 정치적 불안 등 좋지 않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조세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
3. 비판 : '배 아픔 정서'를 부추기는 피케티 경제학이라고 비판하는 현진권(자유경제원 원장)
정책 목표는, 성장과 빈곤과 소득분배. 하나가 아니다. 그런데 피케티는 세 가지 중, 소득분배 문제만을 정책목표로 접근했고, 성장과 빈곤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평등한 1960년대'와 '불평등하지만 절대빈곤에서 벗어나 전체적으로 소득이 늘어난 2020년대' 중 어느때를 선택할 것인가?
시장주의를 전제하면, 상대적 소득격차는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정책 목표가 되어야 할까? 상대적 소득격차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수단을 강구하면, 경제는 오히려 퇴보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절대소득에 정책적 관심을 두어야지, 상대소득 문제는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해결할 수 없다.
소득분포는 소득수준의 결과일 뿐, 정부가 전체 국민의 소득수준에 대해 관심을 둘 필요는 없다. 또, 상위계층의 소득수준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특정 상위계층의 소득수준 지표를 통해 사회구성원들의 ‘배 아픔 정서’를 부추길 뿐이다. 정부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빈곤 해결이다. 즉, 빈곤층의 소득을 높이는 일이다.
상위 1% 계층은 전체소득의 몇 %를 차지해야 바람직할까? 불평등과 양극화를 평등 세상으로 바꾸려면, 모두가 똑같은 소득을 가지면 된다. 즉, 상위 1%는 전체 소득의 1%만 점유해야 한다.
소득분배는 시장이 작동한 결과이지, 정책목표가 될 수 없다.
소득분배가 어떤 수준에서 최적인가를 제시하지 못하면, 불평등 완화는 구호적 주장일 뿐, 구체적 수치를 제시해야 하는 정책목표가 될 수 없다.
※ 문제적 질문 : 빈자가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하고, 부자도 빈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할까? 을이 갑이 될 수 있어야 하고, 갑도 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한 얘기인가? ㅡ 문제의 핵심은, 그가 항상 부자이고 그가 항상 갑이 되게, 시스템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게 문제.
생애 주기별로 보면, 20대에는 낮은 소득 수준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소득이 높아지고, 은퇴 후에는 낮은 소득으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소득을 비교하려면, 항상 변하는 연간소득이 아니고, 평생소득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ㆍ자본과 노동은 분리되지 않는다. 노동도 노동자본이다.
ㆍ자본만 있으면 성장하는가? 아니다. 기술과 경영과 시장개방이 있어야 한다.
《자본소득 ≡ 자본수익률 × 자본스톡》 (피케티 제1법칙)
ㆍ자본소득 = 이자소득(flow)
ㆍ자본스톡 = 부동산, 주식, 생산기계장비
ㆍ유량(flow) / 용량(capacity) = 자본수익률 / 자본스톡
피케티는 자본소득은 자본스톡에 의해 결정된다는 가정을 했으나, 실제로는 자본소득에 의해 자본스톡의 가치가 결정된다. (비판)
《자본스톡가치 = 자본소득/자본수익률》
가령, 주식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와 같은 논리다. 주식가격이란 기업이윤을 현재 가치로 환산한 가격이다. 주택가격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주택 임대료를 매년 합산한 현재 가격이다.
경제활동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때 자본가치를 가지지만, 수익이 없으면 자본가치는 극단적으로 영(零)이 될 수 있다.
조세정책에 대한 비판 : 피케티는 세금 정책을 형평성을 달성하는 수단으로만 보고 있지, 세수확보나 특히 경제효율성에 대한 시각은 결여되어 있다.
세금 정책은 세수확보, 효율, 형평, 단순성 등 여러 정책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기 때문에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현대 재정학의 많은 이론은 특히 효율성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접근하고 있다. 경제학은 객관적 학문이므로, 효율성 문제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형평성은, 일반인의 관심은 높지만, 형평에 대한 정의가 주관적이므로, 객관적으로 정교하게 다루는 경제학으로 풀기에는 한계가 있다.
과거 폐쇄경제에서는 조세 정책이 형평성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누진 구조가 강화되었고, 소득 중심의 세금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개방화 경제로 변하면서 소득 중심의 세금 수준이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하였다.
개방화 시대에 형평성을 위해 세율을 높이면, 실제로 발생하는 현상은, 고소득자의 해외 이동으로, 자국 내 세수뿐 아니라 형평성도 달성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회주의 체제인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의 소득세제는 단일세율 체계로 바뀌었다. 피케티는 형평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소득층에 높은 누진세 구조를 주장했지만, 이미 형평 중심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오히려 불공평한 단일세율 체계를 도입하였다.
자본주의 국가 중에서 형평을 강조하는 북유럽 국가들도 고소득층에 대한 세금 강화가 아닌, 세금 완화로 역행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가령, 스웨덴은 2005년에 상속세를, 2006년엔 부유세를 폐지하였다. 또한 소득세제는 모든 소득을 합산하여 누진세율을 적용하는 종합합산제도가 형평을 높이는 제도이지만, 북유럽 국가들은 1990년대부터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에 대해 각각 다른 세율을 적용하는 이중과세제도(dual income tax system)를 도입하였으며, 노동 소득에 대한 세율이 자본소득보다 오히려 높은 구조이다.
피케티의 주장대로 높은 자본세를 부과하려면 모든 국가가 과세자료를 공유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모든 국가가 동조해서 과세 정보를 공유하고, 동일한 세금 정책을 적용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다.
조세 경쟁이 현실화된 국제 경제 환경에서, 동참하지 않는 국가의 이익이 엄청나게 크게 되므로, 과세 자료 공유에 대한 피케티의 제안은 본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지만, 유토피아적이다.
※ 문제적 궁금증 :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은 과연 속마음으로도 이 비판이 옳다고 믿을까?
※ 문제적 질문 :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할 의지가 있는가? 불평등이 공정이고 정의인가?
4. 나의 잠정적 결론
민생 문제란, 국민들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라고 본다.
따라서 국민들이 정치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안전망과 경제적 안정과 향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다.
그래서 같은 '지구인'으로서는, 기후 환경 바이러스 위기에 대한 대처를, '현대인'으로서는, 차별 혐오 분열과 결별하는 시대정신을, '경제인'으로서는, 불평등과 양극화를, 모두가 희망한다고 본다.
갈등과 분열과 혐오를 기반으로 정치를 하려 했던 미국의 트럼프 정부나 일본의 아베 정권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 되도록 해야지, 계속 붙잡아두려는 극우적인 생각들은,
피케티가 예상하고 지적했듯이, 民生의 문제를 '생존의 문제'로까지 끌어내리고 주저앉힐 수 있다.
ㅡ "소득과 자본 편중이 심각해지면, 세계는 민족주의, 정치적 불안 등 좋지 않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 (피케티)
각각의 방법론의 차이는 차치하더라도,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직시해서, 해결하려는 의지가 과연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시적 질문' 앞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8. 2021
《시》
내가 고독을 말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하나 둘 모여든다
모두가 외로웠던 이들이었다
이내 고독의 축제가 시작된다
가시밭길을 걷던 지난 이야기
침묵에 홀로 몸부림치던 얘기
끝 모른 채 가슴아렸던 이야기
속절없이 마냥 사무친 이야기...
소리 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너의 아픔으로 나의 상처를 감싸고
나의 부서짐이 너를 일으켜 세우며
서로 위로하고 위안 받는 시간이다
그렇게 축제는 절정으로 달려가고
마지막엔 처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점차 평화로운 얼굴들로 가득하다
고독의 밤들이 더는 외롭지 않았다
고독의 축제 / kjm
9. 2020
[신종 코로나, 나의 주문은?]
'신종 코로나와의 전쟁 선포'까지였습니다.
'이미지 정치'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명의로서의 정치'를 기대한 것입니다.
명의는, 질병과 관련하여 핵심을 콕콕 집어내는 처방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라는 WHO 공식 명칭 속에서도, "감염증"이 아니라 "감염병"이라는 보다 철저한 인식을 수반한 대책 수립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대응 방안으로서, 좀더 포괄적 접근으로서, "신종 코로나 감염병과의 전쟁 선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용어는, 그 외의 모든 것을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돌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이 그럴 때입니다!
10. 2020
[행복에 대하여]
1. 행복은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2. 논제 : 행복에 대하여 '육하원칙'에 따라 논하라.
3. '인간의 조건'과 '행복의 조건'을 서로 연관지어 기술하면?
4. 미국인은 한국인보다 더 행복할까? 프랑스인은 또 어떨까? 북한인은 또 어떨까?
5. '생명에의 존중'이 행복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경우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의 경우와 비교해서 서술해보자.
6. 현재의 행복에 만족할 것인가, 미래의 불안을 현재로 끌어 당겨와 껴안을 것인가?
11. 2020
[눈 없는 겨울의 단상]
요즘 TV를 거의 안 보는 내가 드라마 다시보기에서 '겨울연가'를 다시 찾아보고 있다.
올 겨울 내내 눈 구경하기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렵기에, TV 속으로 들어가서나마 눈 구경을 하려는 심사가 아닐까 한다.
잠시 눈과 겨울의 관계를 생각하려니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일년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가운데서 겨울을 가려내는 무수한 징표들 가운데 눈이 가장 즉각적으로 떠올려지는 건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특히나 눈이 안 내린다. 그만큼 기후변화의 심각성이 두드러진다 하겠다.
그만큼 겨울과 눈의 '관계성'이 소실되어간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자! 잠시 비약으로 흘러보자.
가족간에 돈과 사랑의 관계에서 사랑이 빠져나가면 돈이라는 경제적, 물질적 관계만 남게 된다. 그것은 마치 겨울이 다가오는데 낭만적 눈을 기대하기보다는 두터운 패딩을 장만하는 것이 걱정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유기체적 관계가 아닌, 무기물의 결합으로서만 가족 관계가 이루어질 때, 관계란 그물은 이리저리 찢어진 채로 물질적 욕망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것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밀림과 사막으로 대표되는 아프리카도 아닌 이 대한민국 땅에서, 눈 없는 겨울을 맞는 심정은 모두에게 생경할 따름 아니겠는가.
그것은 정서적 유대의 균열이요, 심정적 연대의 파탄이요, 무감각적 전이에의 징조다.
정서적으로 메말라가는 인간 심상들의 현화가 가져오는 피폐한 무관심과 무감동이 만들어내는 대자연을 넘어서는 사회적 관계들의 소등, 소각하는 시간의 도래를 목격하게 되는 참담함이 차오르고 분노마저 치오른다.
너무 멀리 나갔나보다. 다시 초기화하여,,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던 한겨울의 흰눈이 한없이 그리운 오늘이다.
들려오는 뜨문뜨문한 소식은 눈이 아니라 비였고, 비는 겨울이 아니어도 '상시적 손님' 아니던가.
눈을 이제 겨울의 '귀한 손님'으로서 격상시켜야겠다.
12. 2019
[지식과 정보]
지식은 내것이지만, 정보는 내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보가 홍수를 이루면 수많은 정보에 휘둘려 혼란에 빠져들게 되고, 필요한 정보를 찾아 정보의 바다 속을 헤엄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정보는 공유를 통해서만 얻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빨리 찾는 자가 독점화를 이루게 됩니다.
찾아서 캐내는 정보는 니것 내것이 따로 없습니다. 그냥 널린 게 정보인 것이죠. 고급 정보라는 것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이미 찾아진 독점화된 정보를 가리킵니다.
정보를 모르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세상입니다. 정보는 방향키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스마트폰에 종속되어 가는 지의 이유는 정보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죠.
그리고 정보는 곧 돈이 됩니다. 일례로 주식 시장은 정보와 돈이 같이 움직이는 대표적인 시장입니다. 정보가 느리면 돈을 잃고 정보가 빠르면 돈을 얻습니다. 정보가 부족하면 실패가 많아지고 정보가 넘치면 실패는 줄어듭니다.
쉬운 일례로 A마트에서 시금치 한 단에 2천원 하는데 B마트에서는천원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B마트로 몰립니다. 이렇게 단순 정보만으로도 천원을 세이브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보와 지식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특히 시간의 축적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어느 특정 장소에 머물게 되면 지식은 상식으로 그치지만, 장소를 초월하게 되려면 지식은 과학적이 되어야만 합니다.
정보의 축적은 시간의 경과에 의해서 관념들을 만들고 이 관념들이 굳어져 지식이 됩니다.
지식들이 축적되고 그 범위가 넓어지면 하나의 패러다임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패러다임 안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내것으로서 집착했던 지식이 시간이 다시 흐르면서 현실 적용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혼란을 겪게 되고 부자유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부침을 겪게 됩니다.
이런 부침이 여러번 반복되고 곳곳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면 기존의 지식에 의문을 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패러다임(지식 체계)의 교체 필요성을 느낍니다. 이 변화 과정이 토마스 쿤은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정보는 수동적으로 얻지만, 지식은 적극적으로 탐구해서 얻습니다.
정보는 특정한 구조를 지니지 않지만, 지식은 특정한 구조와 체계가 있습니다.
정보는 내용을 얻는 것이지만, 지식은 구조와 체계와 방법을 이해하고 획득하고 익히는 것입니다.
부동산 중개인은 정보 장사이고, 학원 선생은 지식 장사인 셈입니다.
정보는 특허가 인정되지 않지만, 지식은 특허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보는 사적으로 매매되지만, 지식은 공적으로 매매됩니다.
우리는 넓은 쓰레기장에서 정보를 줍지만, 우리는 이미 난 도로의 길을 따라서 운전하는 '방법의 지식'을 익힙니다.
그렇다면 지식과 지혜는 어떤것이 우월할까요?
서양의 지식? 동양의 지혜?
* [서양의 지식이 동양의 지혜보다 우월한 까닭은]
ㅡ kjm _ 2009.4.24
지식과 지혜의 추구에 있어서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서양에서는 지식을 '축적'하고 '공유'한다는 점이 다르다. 서양의 지혜란 것도 결국 이런 지식의 축적과 공유를 기반으로 해서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축적의 결과물'이다. 어느날 갑자기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영감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선조들의 지혜들로부터 실마리를 찾아 '새로운 문제해결 방법'을 찾아내는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서양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나 동양은 서양이 갖고 있는 '지혜의 창고'를 갖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공맹을 공부하는 사람은 기존 지식의 이해와 습득에에만 평생 동안 전념하면서 마치 자신들만의 소유물인양 '공유'하려들지 않는다. 그리고 도불에 귀의한 사람들은 이런 '퀘퀘묵은 지식'을 멀리하고 '지혜의 발견'에 몰두하나 이들에게는 '축적'이라는 단어를 모른다. 어렵게 발견된 지혜가 반짝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공맹이나 도불의 경우에는 지식이건 지혜건 업그레이드라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다보니 밖으로 널리 뻗어나가기 보다는 점차로 안으로 침체되기 일쑤다. 즉 현실과 점점 동떨어져가고 있다. 가지고 있는 지혜를 축적하지도 공유하지도 못한다는 것은 더 이상의 발전이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은 이미 더 이상의 '지혜의 발견' 없이도 그동안 축적된 지식만 가지고도 현실에 닥친 난관을 헤쳐나갈 힘이 있다. 반면에 동양은 그동안 수많은 천재들에 의해 발견된 지혜들이 '축적'되지도 '공유'하지도 못한 까닭에 끊임없이 새로이 지혜를 발견하고자 애써야만 하는 수고로움이 뒤따른다. 그러나 현대의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을 해결하고 새로이 생겨나는 난관들을 헤쳐나가기에는 그간의 축적된 힘이 없으므로 그 천재들에게도 힘에 부쳐 보인다. 그런 까닭에 허황된 발상을 가리켜 획기적인 지혜라느니 하는 억지 주장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더우기 그것을 증명하거나 반증할 기준이 없기에 혼란만 가중된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 동양의 지혜가 서양의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남김 없이 버려야 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억지 궤변을 뜯어다 붙이지 말고 순순히 서양의 지식이 우월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시작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새로이 지식 기반을 형성하면서 이제부터라도 '축적'과 '공유'가 가능한 지식과 지혜를 쌓아가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것이지, 아집과 편견만 가지고는 저만치서 앞서가는 서양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러자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선 지식 공유의 기반이 되는 민주주의의 정착이며 지식정보의 민주화와 개방이 첫번째 조건이 된다. 그 다음이 언론의 공정성을 되찾는 일이며 그 다음이 독점자본의 횡포를 물리치는 일이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지식의 건전성이 보장받지 못하며 따라서 축적되지도 못한다. 그리고 건전한 지식의 공유가 제한받기 때문에 그만큼 발전에 속도를 내지 못하게 된다.
혹시라도 이런 지식이나 지혜의 우월적 지위에 대한 서양의 편애를 '양시론'으로 무마하려는 시도는 않는 게 좋겠다. 왜냐하면 이는 '경쟁의 논리'를 터부시하게 되는 자기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해석상 '상호보완적'이라기보다는 '비교우위론'이 이 경우에 맞지 싶다. 하찮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게을리하고 자기보다 나은 상대로부터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참다운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나 보다 나은 것을 인정할 줄 알고 그것을 배우는 데 거리낌이 없어야 발전된 미래가 있다.
그렇다고 서양을 무조건 따르고 익히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맹목적 추종에 불과할 뿐이다. 서양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왔기에 그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들보다 제3자인 우리가 더 훌륭한 반성적 고찰을 할 수 있다. 좋은 것은 배우고 나쁜 것은 버리면 된다. 서양이 가진 좋은 것 중의 대표적인 것이 논리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사고이다. 이것이 '지식 축적'의 동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유념할 것이 하나 있다. 현대과학철학의 이론(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따르자면 과학적 지식은 축적된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변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도 나도 심심치 않게 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패러다임의 변화'로 해석될 수 있는 것도 결국 '축적된 과학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축적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아무리 외쳐봤자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허장성세에 능한 우리 습성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지양해야 할 점은 바로 새로운 개념이나 용어를 남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의 것이 좋다고 해서 남의 것을 추종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남의 것이 좋다고 해서 나를 남처럼 꾸미거나 혹은 그런 남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남의 좋은 것을 내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내가 가진 장점과 더불어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K / 202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