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불갑사와 법성포 불교 도래지로
모처럼 찾은 진도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그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본래는 여유있게 고향을 더 돌아보고,해남 땅끝마을을 경유하여 아우들이 있는 고흥을 거쳐 경상도 일원까지 살펴볼 예정이었지만, 날씨가 비가 올꺼라는 예보가 있었기에 일정을 단축시킨 것이다.
갑자기 변경된 일정이다보니 어느곳을 경유할까 생각하다가, 영광쪽을 돌아보고 고창과 부안을 거쳐, 새만금 자역의 선유도를 돌아보기로 스케줄을 잡았다.
출발시간은 공교롭게도 천안에서 출발했던 꼭 같은 오전 8시였고.....
진도대교와 우수영을 지나 목포로 빠지다가 잠간 실수로 영암쪽으로 접어드는 삼호로 빠져들고 말았다.
네비게이션을 보질 않고 순전히 이정표 만을 보고 가는 스타일 이기에, 자칫 이정표를 놓치면 이런 실수가 가끔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곧바로 제대로 코스를 바로 잡고, 무안과 함평을 경유하여 드디어 영광으로 접어들었다.
영광은 전라도에서 내가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유일한 지역이다.
전북과 전남 각시군은 물론 왠만한 도서까지도 속속들이 가보았지만 영광은 어쩌다 가볼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호기심이 일었고,생소한 마을 이름 하나 하나가 뇌리에 새겨졌다.
영광에는 어디보다 가보고 싶었던 곳이, 불갑사와 법성포 불교 최초 도래지였기에 두곳만을 선정하여 답사 코스로 정했다.
해남에서 바라본 진도대교
고향 땅을 못잊어 이렇게라도 마지막 사진에 담아둔다.
이곳은 무안에 있는 남도 전통 옹기집
예전에 옹기 구매관계차 한번 다녀갔던 곳이기에, 그 추억을 되살려 잠시 발길 옮겨 보았고....
이곳은 무안 초당 대학교
영광 내산 서원
불갑사를 들어가는 길목에서 먼저 만나보게된 서원이다.
내산서원(內山書院)은 수은(睡隱) 강항(姜沆)을 추모하기 위해 1635년(인조 13)에 세운 서원이다.
강항은 조선시대 초기의 학자 강희맹의 5대손으로 1567년 5월 17일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났다.
158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며 1588년에 진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그는 의곡(義穀)과 군기(軍器)를 모아 고경명 의병소로 보내기도 했다.
1593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박사 · 전적을 지냈다.
1596년에는 공조좌랑과 형조좌랑을 지냈으며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분호조참판(分戶曹參判)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운반임무를 수행했다.
남원읍성이 함락되는 등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자 고향 영광으로 내려가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명을모으기도 했으나,영광 또한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가족을 데리고 바닷길로 피난길에 나섰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일본으로 압송되어 체류생활을 하게 되었다.
강항은 포로로 억류된 상황 속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조정에 일본의 정세와 사회상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의 노력은 훗날 그가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귀국하여 지은 ‘건거록(간양록)’에 잘 나타나 있다.
강항은 포로생활 중이던 1598년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를 만나 교류하게 되었다.
후지와라는 7세 때 출가하여 사찰 쇼코쿠사(相國寺)에서 선학(禪學)과 한학(漢學)을 공부한 인물이다.
승려이자 학자인 그는 1590년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 사절단의 일원인 허성(許筬)과 만나면서 주자학에 심취하게 되었고, 1598년 조선인 포로 강항을 교토 후시미성에서 만나 교류했다.
그의 사상은 유불(儒佛) 일치사상이었지만 허성과 강항을 만나면서 주자학 중심으로 기울게 되었고 환속하여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후지와라는 불교를 비판하고 에도시대 일본 주자학의 기초를 다지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강항은 일본 체류 중 사서오경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여 일본 주자학이 발전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618년 5월 6일 52세의 나이에 별세하였고,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내산서원에 모셔졌다. 1
635년(인조 13) 나라에서 용계사(龍溪祠)라는 사액 현판을 내렸다.
1658년 나라에서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를 증직하였고, 1702년(숙종 28)에 서원 건물을 고쳐 지었으나 1868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광복 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고 ‘내산서원’이라 이름 지었다.
영광 환영 아치
불갑사 일주문
불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이다. 1909년에 쓴 〈불갑사창설유서 佛甲寺創設由緖〉에 의하면 384년(침류왕 1)에 마라난타가 창건했고, 805년(애장왕 5)에 중창했으며 그뒤에도 여러 차례의 중창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각진국사가 머물면서부터 크게 번창했는데 당시에 머물던 승려는 수백 명에 이르렀고, 사전도 10리에 달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80년에 중건한 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팔상전·칠성각·일광당·명부전·요사채 등이 있다. 이밖에 각진국사비(1359)와 여러 점의 부도가 있고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거상인 사천왕상이 있다.
상사화 조형물
산림 박물관도 있었고.....
불갑사 대웅전
꽃무릇이라 불리우는 조생 상사화란다.
진짜 상사화는 9월달에 빨갛게 피어 오른다고.....
상사화로 유명한 곳은 이곳 불갑사가 제일이며 고창 선운사도 상사화로 알려진 사찰이다.
석탑
색깔이 다른 꽃무릇도 있다.
불갑사를 돌아보고 영광쪽으로 가다가 만나보개 된 곳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물레방아
법성포에 도달하여
법성포는 영광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11㎞ 지점에 있다.
법성이란 이름은 본래 백제에 불교를 전해준 인도의 스님 마라난타가 맨 처음 들어왔던 곳이란 데서 유래한다.
예로부터 호남지방을 드나드는 배들의 관문이었고, 영광굴비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1514년(중종 9)에는 법성포에 진(鎭)을 설치했으며,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을 서울의 마포나루까지 실어나르던 배와 중국대륙까지 가는 배들이 이곳 법성포나루를 거쳐갔다 한다.
또한 영산포와 더불어 호남지방의 세곡을 모아두었던 조창(漕倉)의 기능은 물론 조운(漕運)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수군이 주둔할 정도로 번성했다.
그러나 포항·군산항·인천항 등 근대식 항만시설을 갖춘 항구가 늘어나므로 인하여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졌다.
1970년대 중반에는 떼지어 모여들었던 조기로 대규모의 파시와 어촌취락이 발달했으나, 1970년대말부터는 파시도 옛 풍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법성포 내에는 영광읍에서 흘러드는 와탄천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흘러드는 대산천이 법성포 앞바다에 토사를 퇴적시키면서 점차 수심이 얕아져 폐항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한다.
특히 썰물 때는 갯벌이 선착장 앞에 수백m로 펼쳐지기 때문에 30t 정도 되는 작은 배들도 입항하기가 어렵다.
그결과 3시간이 넘도록 배를 기다려야 함은 물론, 싱싱한 해산물을 실은 배들은 대부분 목포항이나 군산항을 이용하고 있어서 항구로서의 기능이 더욱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 입구
이곳에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도록 되어있다.
세로 축조되고 있는 마라 난타사
아름다운 해안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새로 축성된 건축물
아직 아무런 이름이 내걸리지 않았지만 종무소로 쓰여질듯 싶다
쌍봉 형제봉이 멋스럽다
불갑사에서 보았던 석탑과 너무도 유사하다
간다라 유물관
승강기에서 내려다본 법성포 풍경
좌측 기와집들은 팬션들이라 일러 준다.
고창 땅에 들어서서 이곳 송암농장에서 점심을 뒤늦게야 먹었다.
까닭은 이곳에 오기 직전 공음이란 곳에서 뜻밖의 교통사고로 두시간정도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사고 내용은 공음 파출소 사거리에서 진로 방해를 하던 자동차를 피하려다 오토바이가 쓰러졌기 때문이었고.....
옷이 찢어지고 무릅과 팔을 다쳐 엉망이 되었지만,파츨소 직원들과 인근 약국 아저씨의 따뜻한 도움을 받기도 하였고,고창 경찰서에서 달려온 교통사고 전담반들의 고의는 아녔지만 상대방 과실이라는 확답을 얻어내고서야 훌훌 털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행에는 큰 차질이 생겼다.
시간도 두시간 이상 까먹었고,다친 몸으로 어딜 다닌다는것은 무리라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심을 먹으면서 올라가야할 코스를 다시 머리속에 떠올려 보았다.
이곳에서 시 한펀을 남겨 본다
구기신 하루
함평에서
영광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구기신 마을이 있었다
참 묘한 이름이로다
그러면서 그곳을 지나쳣고
또 보여리라는
마을도 보였기에
참 기이한 이름 다 보겠네
그렇게 궁시렁 거리면서
영광 불갑사를 돌아본후
와탄교라는 희안한 이름의
다리를 지나치기도 했다
그리고서 다시
영광 법성포
불교 최초 도래지
마라 난타사 답사한후
고창 공음리 파출소 앞 지나다
아뿔싸! 사고가 터졌다
교통 사고 였다
아슬아슬
자동차와 부딪칠뻔 했으나
충돌 사고만은 면했다
옷도 찢기고
팔다리도 다쳐 부상을 당했지만
천우신조로
생명만은 무탈했으니 천만다행
오늘 일진이 와 이러노
이상한 마을 지날때
그때 알아봤어야 했고
와탄교 지날때
와 탄느냐 물어오는 말
깨달아야 하는 건데
아,모두가 나의 불찰이로다
오늘 일진은
아무래도 구기신 하루였구나
고창에서 꼭 돌아보고 싶은 곳들이 있었지만,부안쪽으로 서둘러 방향을 돌렸다.
꼭 가보고 싶은 아련한 추억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다름아닌 부안군 주산면 신성리라는 마을이었다
이곳은 내가 정확히 47년전,1972년 12월 1일 차가운 겨울날 이불 보따리 하나 걸머메고 농촌개몽운동에 뛰어들었던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만 2년 6개월을 머물면서,밤에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낮에는 남의 일을 돕기도 하는 생활을 했었다.
찾아가는 길도 많이 변해 버렸고,건물들도 옛모슴들이 아니었다.
신성리 마을 회관
회관 자리는 그대로인데 건물들은 옛모습이 아니로다
이곳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고,냉방에서 찬 겨울을 지나기도 했던 옛날의 추억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내가 출세를 했다면 떳떳하게 찾아와 잔치라도 한판 벌려주고 싶은 곳인데.....
하필이면 옷도 찢기고 피흘리는 상처투성이로 이곳을 찾아 오다니 누굴 만날 처지도 못되니 참으로 기구하기만 하구나.
이 집은 황씨 어른이 사셨던 집으로, 내가 오랫동안 함께 유했던 집이기도 하다.
찬겨울 냉수목욕해가며 지내왔던 그 옛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이곳을 떠나온 후로는 단 한번도 와보질 못했다가 오늘 비로소 처음 다시 찾아 본 발걸음이 되었다.
문패들을 살펴보니 아는 이름마져 단 한 사람도 없다.
골목길은 그대로인데 건물들은 많이 변해버린 모습들이었고,저기 서 있는 키큰 은행나무도 그땐 없었는데....
나는 왜 이곳을 다시 찾아왔는가!
내가 거쳐간 추억이 그리웠고,나의 정성과 뿌렸던 눈물이 서린 땅이기에 혼자서 조용히 돌아보려한 것이다.
누군가 "눈물어린 빵을 맛보지 못한자 인생을 논하지 말라"던 그 말은 어쩜 불변의 진리라 여겨진다.
나는 낯선 땅 이곳 임지에서 피와 땀 눈물을 남모르게 많이도 흘렸던 곳이기도 하다.
결과는 3가정을 하늘앞에 복귀시키기도 했었고, 축복가정인 현직 목회자 사모를 찾아세우기도 했던 곳이다.
비록 단 한사람도 만나보진 못했지만,내 마음속에 각인된 하늘만이 아는 사연과 더불어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이곳은 김제에 있는 흥복사란 절이다.
올라가는 길에 잠시 쉬어가기에 적합하여 옛날 왔던 곳 다시 들려본 것이다.
죽은 고목나무지만, 흥복사 사찰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겠지 싶다.
흥복사를 돌아본후 아픈 몸을 추스리며 천안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 조금 못 미쳐서였다.
도착하자마자 즉시 병원을 찾아가 상처를 치료하고 검진을 받기도 하였다.
2박 3일간의 짧은 남도 여행이었지만,퍽이나 인상 깊은 추억의 여행길이 되지않았나 생각이 되어진다.
특히나 잊지못할 추억이 서린 신성리 답사까지 하고 온것은 매우 값진 여행으로 기록하여 남겨두고 싶다.
첫댓글 선배님
오랜만에
멋진풍경들고
오셨네요
너무 반갑습니다
항상
건강조심하시고
자주오셔서
멋진 일상들 보여주세요
감사합니다^^♡
고마워요,3년만에 고향에 갔지만 그냥 오고보니 너무 섭섭했어요.
오는 도중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오늘부터 며칠간 병원에 입원해 있을거예요.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좀 쉬었다 나오는게 좋을것 같아서요.
큰일날뻔하셨네요
교통사고는 후휴증이
문제가되니
충분히 치료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