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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기법 천설 : 서예 해서 기법천설전영장분류: 서화감상
楷书技法浅说(田英章): 书法楷书技法浅说田英章 分类: 书画鉴赏
소스:이페어케이 플러스
다음으로 맞춤형 문구는 작품 구성 시에도 어색하거나 오해하지 않도록 수용자의 각 방면에 유의해야 한다.가형인 부장이 말하는 양소매청풍(兩 的淸風)의 네 글자는 매우 고상하고 관직자의 청렴함과 청정을 칭송하는 교훈이 있다.문제는 어느 관료가 집에 걸어둘 수 있느냐다.청관(淸官)은 걸지 못하고, 걸면 자랑거리가 되고, 탐관오리는 걸지 못하고 집안에 걸면 '이곳은 삼백 냥이 없다'는 말을 매일 보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양완청풍의 서예 작품이 마치 조요경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문자 내용의 예술성에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지식이자 학문이다. 평소 사상, 예술, 생활의 수양과 필요한 문학 지식을 중시해야 한다.글의 내용이 정교하고 아름다워 서예 작품의 품질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서예 작품의 미를 더하고 촉진시킬 수 있다.또한 좋은 글의 내용은 첫째로 필자의 정서와 흥취를 자극할 수 있는데, 글의 구질구질하고 저급한 재미가 있다면 첫째로 필자를 오염시키고, 둘째로 관람자를 오염시켜 결코 작품감상과 숭경을 해칠 수 없다.서예는 신성한 것이니, 우리는 영원히 마음에 품어야 한다경외하다.
서예 작품의 품식에 관해서는 서예 작품 중의 문자 내용과 그 관계가 반드시 동떨어져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실제 필기에서는 우리가 먼저 정품식을 하고 나중에 내용을 정하기도 하지만, 내용이 먼저 정품식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일반적으로 문자 한 문자로는 몇 가지 품식을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왕왕 그 중의 한 품식이 가장 적합하다.
예를 들면, '호연정기(浩然正氣)'는 종이를 현수막으로 자르고, 네 글자는 가로로 자형(字形)이 약간 크고, 필세가 고풍스러우며, 웅장해 보이게 한다.이런 현수막은 내용과 결합하는 것이 적절하다.그러나 우리가 이 몇 글자를 부채면, 특히 색채가 고운 단선(團線) 위에 쓴다면 '아가벽옥(小家碧玉)'으로 기세는 다 없어진다.
또 예를 들면, 우리는 진소유의 《오작교선·칠석》을 베꼈다.
가느다란 구름은 재치 있게,
나는 별은 한을 전한다.
은한이 아득히 멀다.
금풍옥로가 만나자
세상에 무수한 것을 이긴다.
부드러운 마음은 물처럼
좋은 날은 꿈과 같고,
오작교를 참고 돌아오다.
두 사람의 사랑이 오래되면
어찌 노년에 있을 수 있으랴.
아름다운 단어로 비중에 낙이 있고, 악에 슬픔이 있는 인간의 진실한 사랑을 써낸 애절한 사랑의 한 편이었다.문장이 간결하고 문장이 섬세하여 깨우침이 있는 만고절창이다.이런 시사는 우리가 다양한 품격을 선택하여 쓸 수 있지만, 사랑의 사편이기 때문에 그 필법은 섬세하고 청초하며, 단아하며, 장법에 소밀하고 도량적이며, 지기가 평화로워야 한다.필법 구조는 강렬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특히 전체 편수의 크기를 지나치게 크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품격
서예 문화, 서예 예술은 항상 일정한 형식에 의해 표현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형식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서예품이다. 예를 들면 중당, 현수막, 대련, 현수막, 선면 등등이다.
서예의 각종 품식은 어느 서가가 창안한 것도 아니고, 어느 시대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서예의 각종 품식은 사람들의 서예에 대한 욕구 중에서 서가를 포함해 사회 각 방면에서 점차적으로 설계하여 창작한 것이다.우리는 서예예술의 글쓰기에서 구체적인 상황과 사람들의 구체적인 욕구에 따라 다양한 품격을 유연하고 적절하게 운용하고, 글의 내용과 완벽하고 적절한 결합을 이루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음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몇 가지 품목에 대해서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1 중당. 중당은 넓은 입축자폭으로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입축, 현수막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치수로는 위아래로 길고 좌우로 좁습니다.현수막은 개념상으로는 중당보다 더 좁아야 하지만, 중당, 현수막의 폭은 어떻게 구분되는지 기준이 하나도 없는 폭은 비교에 불과합니다.
중당은 보통 청당에 걸려있는데, 정면벽에 중간중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있다.중당은 서화(書畵)의 한 종류로 생성된 연대가 비교적 오래되어 '탱화'에서 점차 진화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이미 당대 이전에도 등장했지만 서화품식의 명칭은 명대 초기에 형성됐다.구양문을 수장으로 한 '예문유취' 권34를 펴니 위조비의 '감물부'에 "…감우가 펑펑 내리고, 길게 늘어졌다.중당을 파서 포를 만들고, 사탕수수를 전청에 심고…." 구절의 '중당'은 서화가 아닌 정원을 가리킨다.당"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는 더더욱 있을 수 없다중당이다. 그렇다고 해서 삼국시대에는 중당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당의 탄생연대를 좀 더 고증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특히 광대한 농촌 지역의 중당은 대부분 대련과 함께 조합하여 사용하며, 대련은 좌우로 나뉘어 있고, 중당은 중간에 걸려 있다.도시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이런 조합의 형태는 줄어들고 현수막과 현수막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2. 현수막은 위아래로 길고 좌우로 좁습니다. 입폭은 우리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품목입니다. 특히 간쑤, 산시, 닝샤 광범한 지역에서는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현수막이 생긴 연대는 비록 정설은 없지만 수대에 이미 출현했음을 이미 알고 있다.수나라 대시인 설도형(雪道形)은 "막장이 짧은 노래로 역수를 읊고 간통을 가르치지 않고 문으로 들어왔다"는 구절이 있다.형가 역수가(易水歌) 바람이 소슬하고 역수한(易水寒) 장사가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그의 집에 걸려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수막이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수막과 화면의 관계에 관해서는 설명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현수막이 앞에 있고 현수막이 뒤에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현수막이 앞에 있고, 현수막이 뒤에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필자는 고증을 하지 않고 감히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다.그러나 현수막·스크린의 선후 문제는 중요하지 않고, 폭이 좁아서 배치와 낙관에 신경을 쓰고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이 많다고 본다.
3、줄스크린. 줄무늬는 위아래로 길고 좌우로 좁은 입폭식, 줄여서 '스크린', 학명은 '스크린',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네모스크린', '여섯모스크린', '여덟모스크린' 등의 '모둠'이라고 불렀는데, 예전에는 '한모둠', 즉 한모둠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모둠이라고 불렀습니다.
막대 스크린은 일반적으로 짝수로 많이 쓰이는데, 홀수를 만들지 않고, 주로 대칭을 보기 위해서이다.관례에 따라 최소 4개, 우리가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은 황정견의 『유동부』, 12개인데, 더 많은 것이 남아 있지 않은지 필자는 아직 만나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전체적인 효과를 봤을 때 너무 많이는 아닌 것 같아요. 너무 많으면 현수막을 파는 것으로 오해하시죠?!
스크린은 사랑받고 있는 아이템. 멋진 스크린을 집 안채에 걸어놓았을 때 '봉구'의 생휘와 화려함을 느낄 수 있어 집안의 백미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비록 한 세트의 화면이 내용, 서체에 제한을 받지 않지만, 반드시 네 가지 점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자형은 너무 커서는 안 되며 글자 수가 약간 많은 것이 좋다.
(2) 각각의 현수막에는 두 줄 이하로 쓰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만약 각각의 한 줄의 글자만 쓴다면 반드시 화려하고 우아한 예술 효과에 영향을 줄 것이다.
(3) 하나의 스크린에서는 서로 다른 서체를 섞을 수 있지만 필자는 하나의 서체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획일적이고 아담한 효과를 거두지 않으면 여러 개의 스크린이 넓게 펼쳐져 눈에 띄지 않는다. 통일되지 않으면 난잡하고 조화롭지 못할 것이다.
(4) 화면걸이의 순서는 반드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거꾸로 놓으면 안 된다.
4. 대련. 대련은 '영첩', '대련', '대련'이라고도 부른다.이런 품식의 기원은 이르지만 연대는 고증할 수 없다.
영련은 도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고대 사람들은 복숭아나무를 오행의 정으로 여겨 사를 막는 역할을 했다.새봄을 맞아 복숭아 목판에 귀신 잡는 신상을 두 명씩 그려 넣었는데, 한 명은 신다, 한 명은 울루로 복을 빌고 화를 물리치고 귀신을 쫓는다는 의미로 문 앞에 내걸었습니다.백거이(白居易) 백례육첩(白禮六帖) 운(雲)에 "정월일 복숭아 부적을 만들고 선목(仙木)이라 하여 백귀소외(百鬼所外)"라고 했다.나중에 사람들이 용서를 위해 복숭아 판에 신상을 그리지 않고 이름만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5대에 이르러 복숭아 부에 연어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길한 글귀들이 적혀 신다를 대신하게 되었다.울루의 이름, 영련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송사·촉세가에 따르면 송태조 간덕 2년 맹창의 제사는 도부(桃戶)의 내용과 성격을 바꿔 도부를 귀신을 쫓던 도목판(桃木板)에서 일종의 사상을 표현하는 특이한 문체인 연어로 바뀌게 했고, 이에 따라 우리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의미의 춘련이 되었다.
특유의 문학적 형식 중 하나인 영련은 서예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중화민족의 화려하고 다양한 예술적 독창성이 되었다.서예품 양식의 하나로 우리나라 광범위한 지역에서는 현관 장식, 경조사만 사람들에게 널리 사용될 뿐만 아니라 거실, 서재 안에서도 사람들이 모두 즐겨 걸게 된다.그러나 영련은 변려문과 율시가 형성된 이후 변려문과 율시에서 독립한 문학 장르로 문자부터 격식까지 엄격하다.
(1) 상·하 두 연으로 나뉜 영련은 서예 작품의 양식을 따지면 같은 크기의 현수막 2장, 즉 같은 크기의 종이 2장이어야 한 폭의 영련이 될 수 있다. 현수막의 수는 더도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더도 덜도 말고.
(2) 영련의 글자 수는 엄격한 규정이 없다. 길이가 같지 않다. 많고 적음에 국한되지 않는다. 짧은 것은 한두 자, 긴 것은 천여 자에 이른다.그러나 필자가 볼 수 있는 것은 서서 죽는 것이 낫다는 뜻의 만장연(死;生)이다.거꾸로 살고 싶지 않다"는 문자연설을 할 때도 있다.필자가 만날 수 있는 글자 수가 많은 창롄(長聯)은 윈난(雲南)성 쿤밍(昆明) 대관루(大觀樓)의 장롄(長聯) 180자로, 청나라 말 쓰촨(四川)성 강진(江津)의 재자 종운호(鐘雲舟)가 쓴 '천하제일장련(中 长)'이라는 제목이 1612자로 가장 많다.
(3)영련은 형태가 정렬, 반대, 연구대, 유수대, 집구대 등 다양하고 내용에 따라 춘련, 수련, 만장대, 혼련, 경승련, 수양련, 업련 및 신령 찬양, 충렬, 종공조로 나뉜다.덕의 영련 등등. 그러나 어떤 대련이든지 어떤 형식을 사용하든지 글자수가 같으며 평측상합, 사성대결, 어의상관, 구식대칭, 구법조화 등 몇가지 기본적인 특징이 있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어떤 단어든 위의 특징을 모두 구성해야 연구라 할 수 있고, 하나가 없어서는 안 된다.
오른쪽에서 왼쪽, 즉 윗줄은 오른쪽에, 아랫줄은 왼쪽에, 아랫줄은 왼쪽에, 아랫줄은 왼쪽에 걸어야 하며 절대 거꾸로 걸지 않아야 한다.
벽면에 양이 있고 중당을 다시 걸 수 있는 경우 중당이든 그림이든 글자가든 두 연 사이에 걸어야 하며, 영련은 중당의 자와 같을 수도 있고 중당의 자보다 작을 수도 있어 전통적으로 중당의 자보다 크면 안 된다.
우리의 서예 연구자로서 영련을 쓰려면 적어도 두 가지 요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사구가 연구가 아닌 것은 두 장으로 나누어 쓸 수 없고, 두 장으로 나누어 쓸 경우 반드시 연구가 되어야 하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써야 할 내용이 맞는지 안 맞는지 여부이다.연문일 때 종이 한 장에 쓸지언정 두 장에 쓰지 않는 것은 종이 한 장을 현수막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인데, 현수막에 적힌 글자는 연문일지도 상관없지만 두 장에 적힌 종이는 바로 영련일지도 모른다.서예 작문에서 글자 수가 같은 두 줄의 글자가 연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고심(高深)한 학문이라 할 수 없고, 이는 붓을 들어 쓰는 사람이 응당 알아야 할 기본기·내공(內功)이기도 하다.
최소한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영련은 명청 양대가 절정에 달했지만 자민국 이래 서서히 쇠퇴하고 있다.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사람들은 대부분 아파트에 입주하였는데, 방이 너무 낮아서 방문이 너무 좁아서 영련이 위태롭게 되었다괘가 제한돼 도시인의 집에서는 흔치 않은데 도심 속 누당관소에서는 시골 마을에서 그녀의 모습도 볼 수 있어 안타깝다.
5. 손글씨. 손글씨는 우리나라 서화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서화 현수막 중 비교적 긴 것으로, 편폭이 대부분 길기 때문에 속칭 '장권'이라 부른다.사람들은 관람할 때 넓은 방을 찾아 전부 펼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다하지만 조건이 한정되어서 다 펴지지 않을 때는 손으로 펴면서 보고 말아서 '손 두루마리'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고대에는 거의 모든 도보, 죽간, 목간이 말릴 수 있었기 때문에 두루마리라는 품식은 진한(秦漢) 시대의 '경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사료에 의하면, 수권은 순전히 서화의 한 품격으로 적어도 진대에 즉흥적이었다고 한다동진고개지(東晋古凱之)의 여사잠도(女史潛圖)는 유고(有故)의 중국 최초의 것으로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원작은 산실되고 당나라 모본이 남아 있다.이 모사본은 원래 원명원에 소장돼 있다가 8개국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우는 사이 영국군 대위 기용송에 의해 영국으로 건너가 대영박물관에 보관됐다.기존 12단, 오랜 세월로 현존하는 여사잠도는 9단만 남아 견본으로 채색됐으며 세로 24.8cm, 가로 348.2cm의 크기를 자랑한다.2차 세계 대전 때 영국 정부는 미얀마에서 중국군을 해소하고 감사하다 일본군에 포위된 바 있고 의도적으로 사례를 사진사''여고, 중국 반환을 잠과 잠수함 한척을 증정하게 하고 있다.국정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다.당시 중국 정부가 고려했다전쟁이 필요해 잠수함을 택한 여사모니터는 지금도 대영박물관에 있다.하지만 적어도 영국인들의 눈에는 여성잠도가 당시 잠수함 한 척과 가치 면에서 맞먹는다는 설명이다.
서예 두루마리 글의 내용과 형식이 비교적 광범하여 한 사람이 쓰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쓰기도 하며, 완전한 한 편의 문장이나 시 한 수의 시 한 편의 시 한 편의 시와 여러 수의 시와 같은 서체의 종류는 더욱 제한이 없다.
두루마리 기능은 주로 소장하기 위해서이며,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두루마리 종횡의 길이는 구체적인 규정이 없으며, 손으로 펼쳐 감상할 수 있는 편의를 고려해 일반적으로 세로 높이는 30~80cm, 가로 길이는 3~10m이다.너무 길면 보풀도, 운반도 불편하다.
요즘 서예를 좋아하는 많은 친구들은 어떤 '제일'과 어떤 '가장'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데, 오랜 시간을 들여, 몇 백 미터에서 수천 미터나 되는 '장권'을 만들고, 또 야심차게 '기네스 세계기'를 신고하려고 한다.녹(錄)과 창(創)은 '세계 최고'다.정신적인 의지는 정말 가관이고 축하할 만하지만, 문제는 써낸 것이 과연 좋은가 하는 점, 수준 높은 서예 예술 작품인가 하는 점입니다.그저 '길다'를 위해 '길다'는 정도의 서예 실력이면 가치도 의미도 없고, 몸집이 큰 사람이라면 누구나 '길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6、배너입니다. 현수막은 세로가 좁고 가로가 긴 서화양식으로 가로피, 가로피라고도 합니다.
현수막은 역사의 전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지만 옷감은 천을 가리킨다.《후한서 권85·동이열전 제75·왜》와 같은 남자 개경면 문신은 그 문장으로 대소별존비의 차이를 좌우한다.그 남자의복은 모두 현수막이 연결되어 있다.여자가 굴욕을 당하고 홑이불처럼 옷을 입혀서 관을 썼으며 단주행신에 중국 용가루처럼 쓰였다.▶청사고·지78="행상, 색수소어.좌우에 각각 하나, 앞이 평평하고 뒷이 중풍하며 위아래로 수렴한다.현수막은 석청포, 펠트, 유유시"라고 말했다.
북송(北宋) 시대에 이르러 현수막은 서화(書畵)의 품격을 뜻하는 '횡피(橫披)'로 불렸다.' "'자는 고대의 관차 양쪽에 잡아끌었던 비단 현수막을 뜻하는 말로, 현수막에 간단한 도형이나 글자가 있다.
'횡피'는 북송대 서화가 미불(米 的)의 '화사·당화부오대국조(畵史·唐畵副五代國朝)'에서 "형호화는 필중우장숙이 한 축, 함가(艦家)는 횡피(橫 。)가 있다."'횡피'는 분명히 서화 현수막을 가리킨다.서화의 횡피품식에 대해 송나라 사람 조희곡은 '동천청록집(洞天淸錄集)'에서 "횡피는 미씨 부자(父子)에서 시작됐으며, 비고제야(非古制也)"라고 했다.여기서 미씨 부자는 바로 미불, 미유히토 부자를 말한다.미불은 서화뿐 아니라 서화 장식, 품행 디자인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미불은 가로걸이를 좋아하며 감상하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친구가 책을 구할 때 '지음구자, 석 자 가로걸기만 한다'고 한다.아직 '짠돌이'인 모양이다.
'횡비'라는 말의 유래와 출처에 대해서는 고대의 전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청·이어(淸·李漁) 《한정우정기·기완부·제도제일·스크린축》에만 "10년 전에는 병풍과 서화 두루마리들을 만들었다.건반, 투방, 횡비 등 세 가지 형식만 있다"고 말했다.한마디로 횡비(橫批)가 횡피(橫 ")인 것 같은데, 찾아보니 '비'와 '피'는 서로 다른데, 이 어의 '횡비(橫備)'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오늘날에도 횡비의 '비'자를 제시·평론하는 의미로 해석했는데, 이는 영련 상단에 사용할 때 영련의 내용을 보완·개괄·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그러나 어쨌든, '횡비'는 근대 사람들이 '횡비'한 것에 속한다속칭 혹은 와전된 것으로 이렇게 '약속성'이 되어 있다.
오늘날의 관습에 따르면, '배너'와 '횡피'는 완전히 같은 개념이 아니다. 가로피는 '배너' 중의 하나로, 입구에서 위쪽으로 쓰이거나, 영련에서 위쪽으로 쓰일 때는 '횡피'라고 부르되, 단독으로는 '배피'라고 한다.서재나 청당 벽에 걸리면 흔히 현수막이라고 한다.현수막은 사투리와 관습에 따라 횡토(橫土) 횡토(橫頭) 횡액(橫 ") 횡포(橫 ") 횡포(橫 ") 등으로 불린다.
현수막의 폭은 일정한 규정이 없고 벽면 크기에 따라 자율적으로 배치한다.보통 현재 가정에 걸려 있는 현수막은 세로 30~60㎝, 가로 100~200㎝ 정도만 있으면 된다.
현수막의 글자 수는 제한이 없으나, 많으면 많을수록 적다.필자가 체득한 바에 따르면 글자수가 적은 현수막의 경우 세로 30~40㎝, 가로 100~130㎝ 사이의 자폭이 가장 이상적인 글자수는 네 글자로 빽빽하게 배열해 너비가 균등하고, 다음으로 세 글자가 적으며, 두 글자 이하 또는 다섯 글자 이상, 열두 글자 이하는 되도록 쓰지 않고 배열하는 것이 좋지 않다.필자의 경험은 현수막을 많이 써도 글자는 적어도 글자는 적을까 봐 두렵다.
책장은 '책엽(策葉)'이라고도 하며, '화협(畵 ")'은 서화 작품을 페이지별로 장정하여 책으로 만든 오래된 성품이다.
당대 이전에는 책을 읽고 서화를 감상하는 것이 장권(長權)이 많았지만, 장권(長權)이 길어서 읽기 편하지 않았고, 특히 한 장(章)을 읽고 감상하는 것이 편치 않아 장권 한 장을 따로 떼어내기도 했다.한쪽 페이지는 열람이 편리하지만 여전히 정리·배열이 쉽지 않아 당나라 후기에 이르러 한쪽 페이지를 책으로 묶어 '잎' 또는 '선풍엽'이라 불렀다.돌풍엽이란 뒤돌아보면 빠르고 회오리처럼 생긴다는 뜻이다.이후에 불경·도경을 베껴 보존하였는데, 기본은 모두 다이런 방법으로 '경접기' 또는 '범집게'라고도 불린다.
화집(畵集)이란 이름은 송나라 때 서예가 황정견이 예장집에 시 5수, 제정방화집(題鄭防畵集)을 쓴 데서 유래했다.
당송(唐宋) 이후, 특히 명나라 때 책장이 패션이 되면서 많은 유념자들이 당시나 선인들의 단편, 수찰, 부채면과 같은 서화를 모아 책으로 제본하였다.현재 우리나라 각급 박물관에는 대량의 명청책 페이지가 보관되어 있는데, 대부분 명청 사람들이 선인의 소폭의 작품을 책으로 제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가옥 건축업이 발전하면서 서화를 걸 수 있는 벽이 넓어졌고, 책장은 장권과 같이 관람 기능이 약화되어 소장·공모 위주로 바뀌었다.
책 페이지의 표구 형식은 크게 세 가지 형식으로 다양하다.
(1) 세로로 심을 그려 좌우로 접은 것을 '나비옷'이라고 한다.
(2) 가로로 중심을 그리며 위아래로 접히는 것을 '포장옷'이라고 한다.
(3) 경서, 비첩에 많이 쓰이는 것을 '경절장'이라 한다.
한쪽 면을 같은 크기의 부지로 끼워 책자로 만든 책자도 흔치 않다.
책 페이지의 페이지 수는 모두 짝수이고, 개봉본의 크기도 엄격한 규정이 없으며, 일반적으로 4절, 8절, 12절, 16절, 24절의 자가 많다.
책장은 두 종류로 나눌 수도 있는데, 하나는 집적책장, 다른 하나는 백지책장이다.집성책장은 서화(書畵) 단편이 있은 후 이를 표구하고, 여백책장은 백지로 표구한 후 서화가 혜묵(惠墨)을 초대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책장은 내용이 매우 풍부하여 모든 서화의 소재는 다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공문·주절·가보·지계를 책장에 표구한 것도 영척간이지만 사람을 매료시킨다.근대에는 서양의 회화·의례의 영향으로 책장도 화가의 스케치북과 축제집회 서명부가 되어 책장의 내용을 더욱 넓히고 풍부하게 만들었고, 책장도 일반 화선지보다 약간 비싸 자연스럽게 서화를 소장·놀이·관람할 수 있는 최고의 용품이 되었다.
8. 부채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적어도 3,4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부채, 옛 이름은 à(sha), '설문' : " 》, 부채야."옛 ' "'과 ' "'을 합쳐 '방언·잡석'이란 구름을 가리켜 "부채는 스스로 관장하는 것을 동(東)이라 하고, 스스로 관장하는 것을 서(西)라고 불렀으며, 지금의 강동(江東)은 부채라고도 한다"고 했다.역사적으로 부채는 오명선(五明線은 '오명선(五明線)'이다.
부채는 황제가 오명선(五明線)을 만들었다는 설과 남조 심약(沈約)이 편집한 《송서·부서지(宋書·布瑞志)》에 '요리생(食生)은 포(布), 백선(白船)은 흔들지 않는다'는 설이 엇갈리고, 부채는 우순(雨順) 시대에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고, 최표 《고금주(高金 扇子)》에는 순위(順爲)가 있다는 설이 있다.《이아》에 기록된 '이목왈비, 이갈대왈선'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초기 부채는 직사각형 모양의 갈대 편물이었으나, 은대에 이르러서는,부채는 색색의 수컷 꿩의 꽁지깃을 사용한 것이다'선'자에는 '우(羽)'자가 있다.최초 부채는 찬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제왕적 예절의 도구로 쓰이거나, 외유할 때햇빛을 가리고 모래바람을 피한다고 해서 '장선'이라고 부른다.서한 이후 부채는 바람을 쐬는 데 쓰이기 시작했고, 깃털 부채는 바람이 부드러워 피부에 잘 스며들지 않아 많은 사랑을 받았다.동한 때는 우선을 실크, 견, 능라와 같은 직물 재료로 바꾸고 선면에 꽃문양을 수놓기도 했다.
부채는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문화이며 죽문화, 불교문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부채의 '가족'은 몇 백 가지나 될 정도로 방대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는 평평한 부채로 접을 수 없고, 다른 하나는 접선으로 접을 수 있다.
평선은 접을 수 없는 부채를 총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달 모양의 부채는 '반선' 또는 '단선', '합환선'이라고도 한다.역사적으로 평선에는 긴 원, 해바라기, 매화, 육각, 현판 등의 다양한 형태가 있었으며 나무, 대나무, 뼈 등의 재료로 손잡이를 만들었다.
평선(平線)의 선면에 그림을 쓴 것은 위진(魏晋) 때로, 당나라 장언원(張彦遠)의 《역대 명화기》에는 조맹덕의 주부 양수(楊修)와 위태조(魏太祖)의 "선(線)을 잘못 그려 파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진서·왕희지전(晋書·王喜之傳)》에는 왕희지(王熙之)가 노부인(王熙之)의 선(禪)을 쓴 가화(歌話)를, 지금의 저장(浙江江蘇興)의 즙채산 남쪽에는 이를 기념하는
남송시대에는 문인 묵객의 선화선이 하나의 패션이 되었다.명청시대에 이르러 이 바람이 더욱 거세져 부채는 문인아사의 필수가 되다시피 했다.
쥘부채는 처음에는 취골선, 집두선, 쥘선, 살선, 나중에는 접이식선, 접이식선, 접이식선이라고 부른다.학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수의 접선이 나왔고, 한 송나라에서 유입되고 한 말 일본 말, 그리고 고려 말 전래 “수입품”는 아니다. 우리 나라의 것이 아니라 직접 생산하다
일본에서 유입된 사료를 말하며 사람들은 송의 곽을 뽐내지 않고 견문에서 나오는 안에 있는 쥘부채를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기 위해 청송으로 종이를 까마귀 : "에 자국의 그림은 소박, 청송, 또는 잡다하다 부인 김 씨는 안마 수변, 모래, 모래 사장을 겸해 꽃과 나무 같은 날씬하고 정교하다. 수금 포인트또 은니를 운기(雲氣)와 월색(月色)의 형상으로 하여 사랑스러웠는데, 이를 왜선(倭船)이라 불렀는데, 원래는 왜국(倭國)에서 유래한 것이었다."고려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은 고려 사신이 절선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문헌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송나라 사람 등춘은 《화계》에서 절선을 '전지광척삼'이라고 칭송하였다.사, 합지 두 손가락만."이런 종류의 사신이 공물을 바쳐 절하다선의 의절은 송나라부터 명나라까지 이어졌는데, 명나라 유원경은 《현혁편》에서 "고려는 부채를 꺾으면 상희(上喜)가 그 권을 펴는 것을 기뻐하고, 명공(命工)을 명했다."접선본토는 남북조 때 이미 접선이 있었다고 하고, 당대에 접선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료도 없고 실물이 없다고 하니 증거로 삼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선면에 서화를 그려 예로부터 서화가, 문인대부가 되었고, 문회우(文會友), 사교성(交交相性)의 일종으로 승도규각(僧道奎閣), 상자시정(商賈市井)까지 두루 섭렵했다.비록 영척간이지만, 서화의 절묘한 정원이다.
선면 표구, 형식은 다양하지만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1) 현수막, 스크린, 중당, 렌즈로 포장하여 걸기 관상용으로 사용한다.
(2) 주로 소장용으로 표구한다.
(3) 부채살과 함께 손에 들고 놀면서 관상용으로 식힌다.
(4) 장식이나 관람, 전시를 위해 부채꼴 형태지만 일반 부채보다 몇 배 혹은 몇 배 더 크고 큰 작품에 해당한다.
선면에 글씨를 써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선면에 글씨를 쓰는 것이 다른 종이에 글씨를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특히 접부채에 이미 부챗살을 달아놓으면 더욱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경우 부챗살을 빼고 다리미로 면을 평평하게 다려 쓰는 것이 좋다.
선면에 글씨를 쓰는데 획일적이고 일정한 격식이나 장법은 없지만, 구체적으로 선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행, 열의 정렬에 규칙적이어야 하고 반드시 장법이 있어야 한다.무릇 줄과 열을 맞춰야 하는 것은 반드시 맞춰야 하고, 무릇 글자수는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은 반드시 같아야 하며, 평선이든 접선이든 모두 이와 같아야 하며, 이는 자연히 정렬하고 미관적이며 조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선면에 글씨를 쓸 때, 얼마나 큰 글자를 쓸지, 어떤 서체를 쓸지에 대해서는 제한이 없다고 해야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우리 나름의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그러나 이미 부채뼈를 단 접선 위에 소해(小海)를 쓰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 큰 글씨 몇 개를 쓸 수 있고, 우아하다.그러나 큰 글자를 쓰는 것은 편리해야 하지만, 여전히 구해체를 쓰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 종이가 평평하지 않으며, 주름이 너무 많아 구해체의 특징과 스타일을 구현하기 어렵다.
9. 두방(頭方)은 '개방(開方)'이라고도 하며, 서화에서 자주 쓰는 품식은 정사각형이며, 종(縱)과 횡(橫)의 기본이 같다.두각의 자폭은 일정하지 않지만 보통 사람들은 두 가지 흔한 자폭인 큰 자폭과 작은 자폭을 선호한다.오늘날의 화선지 크기로는 66cm×66cm 정도의 것을 말방, 즉 사평방척, 33cm×33cm 정도의 것을 말방, 즉 1제곱척이라고 한다.
'두방' 명칭의 유래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해석이 있다.말(馬)은 과거 술을 담아 곡식을 담던 그릇의 일종이다.서화 작품의 '두방'은 다음과 같다.
(1) 종이 모양은 말뚝의 사각형 또는 준사각형과 같다.
(2) 이전에 대문에 붙였던 '복(福)'자나 길(吉)의 말은 모두 네모난 종이로 써서 '사방복집(四方福集)'이라는 뜻으로, 종이의 크기와 두구(頭口)의 크기가 비슷하여 '두(鬪)'방이라 불렀다.
과거 두방(頭方)에 글씨를 쓸 때는 춘련(春聯)과 함께 방문에 붙였고, 내용은 대부분 복(福)·춘(春)·복록수희(福錄壽熙)·대지회춘(大地回春)·만상갱신(萬象重新) 등 송년(晩年)의 길한 말들이었다.그러나 시와 노래, 명언의 경구를 두방(頭方)양식으로 써서 청사에 걸어놓는 서예품식은 흔치 않고, 특히 대방(大鬪)양이 드물다는 것은 직사각형의 서예양식을 선호하는 관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최근 몇 년 동안 미술 작품의 영향인지, 투방의 형식이 많아졌다.이미 서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품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