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 고영 그제는 수선화를 심었다.하루 만에 꽃이 피기를 기대했지만 하루 만에 피는 꽃은 없었다. 성급한 건 나 자신일 뿐, 꽃은 성급하지 않았다. 질서를 아는 꽃이 미워져서 어제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을 보기를 기원했지만 하루 만에 민낯을 보여주는 꽃은 없었다. 아쉬운건 나 자신일 뿐, 꽂은 아쉬울 게 없었다. 섭리를 아는 꽃이 싫어져서 오늘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되기를 나는 또 물끄러미 기다리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거리에서 꽃은, 너무 멀리 살아있다. 한 사람을 가슴에 묻었다. 그 사람은 하루 만에 꽃이 되어 돌아왔다. ㅡ계간 《시와사상》 2024년 여름호 ----------------------------------
* 고영 시인 1966년 경기도 안양 출생, 부산에서 성장. 2003년 《현대시》 등단. 시집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딸꾹질의 사이학』 등. 2010년 제1회 〈질마재해오름문학상>, 2016년 천상병시문학상 및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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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를 닮은 당신은 나의 그제이며 어제이며 오늘이며 내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암시하듯 “전말”이다. 이 시의 화자는 “하루 만에 꽃이 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어찌 꽃이 하루 만에 필 수 있는가. 햇볕과 바람과 물과 시간과 정성들의 합일이 꽃인 것을. 그렇게 공을 들인 꽃일지라도 꽃은 영원하지 않아서 지기 마련인 것을. 성급하게 꽃이 피기를 바라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화자는 “또 수선화를 심”는다. 이 심정은 포기할 수 없는 대상를 향한 지극한 마음이다. “가슴에 묻었”을 때 “하루 만에 꽃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 사랑이든 꿈이든 먹먹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사람”은 화자의 가슴에 있고 추억을 함께 하니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 박수빈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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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 -고영에게 / 배영옥 그러므로 함께 별을 바라본다는 건 타다 남은 잔해를 서로에게 보여준다는 의미 언젠가 찰나와 순간의 에너지를 폭발시켜 유성처럼 끝장을 보겠다는 결심 이것은 神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부터 예정된 운명이자 수순, 파·멸과 파·탄의 시나리오 별의 시체를 몸속에서 꺼내어 네게 보여줄까? 죽음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연습이 필요한지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는데 왜 너만…… 별을 향해 걸어갈 내 발자국에는 왜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는지 훗날 네게만 말해줄게
- 유고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 배영옥 시인 1966년 대구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뭇별이 총총』 유고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2018년 6월 11일 지병으로 타계
▶ 이 시는 배영옥 시인의 유고 시집 『백일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에 실린 시로, 고영의 곁에서 죽음을 준비하며 남긴 '고영에게'하는 고백이자 유언 시다. 이 시는 제목에서 모든 것을 말해준다. 「암전」의 사전적 의미는 ‘연극의 한 장면의 전환을 위해 필요한 연극 장치’이다. 시인은 연극을 삶의 재현이라 보았고, 삶과 죽음이라는 인생을 한 편의 모노극으로 보았다. 더 나아가 이 암전을 생(生)과 사(死) 사이의 찰나로 인식했다. 즉, 죽음이 생의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다른 생의 서막)으로 보기 때문에 고영과의 이별은 찰나이며 다음 막에서 다시 오를 생임을 암시한다.
시인은 '함께 별을 바라본다는 건/타다 남은 잔해를 서로에게 보여준다는 의미'이며 '유성처럼 끝장을 보겠다는'것은 둘만의 재회에 대한 '결심'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도 끝장이 날 시간마저 '암전'이라 말함으로써, 두 사람이 다른 생에서 꼭 만날 것임을 인식시킨다. 이는 ‘고영’에 대한 시인의 욕망을 드러낸다. 시인의 유서 시에 답하는 아래의 헌시를 보자.
'그제는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피기를 기대했지만 하루 만에 피는 꽃은 없었다. 성급한 건 나 자신일 뿐, 꽃은 성급하지 않았다. 질서를 아는 꽃이 미워져서 어제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을 보기를 기원했지만 하루 만에 민낯을 보여주는 꽃은 없었다. 아쉬운 건 나 자신일 뿐, 꽃은 아쉬울 게 없었다. 섭리를 아는 꽃이 싫어져서 오늘 또 수선화를 심었다. 하루 만에 꽃이 되기를 나는 또 물끄러미 기다리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거리에서 꽃은, 너무 멀리 살아 있다.//한 사람을 가슴에 묻었다./그 사람은 하루 만에 꽃이 되어 돌아왔다.' -고영,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시 전문-에서 사랑의 아토포스를 본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두 사람을 두고, '백일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고 정의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서로는 생과 사를 뛰어넘는 사랑을 했다. '이런 의미와 결심은 /神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부터' 이미 '예정된 운명이자 수순'이며 '파·멸과/파·탄의 시나리오//'라고 한다. "별의 시체를/몸속에서 꺼내어 네게 보여줄까?//”라고 묻는다. 이는 “죽음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연습이 필요한지/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는데/왜 너만……”이라고 거듭 반문한다.
시인에게 고영은 어떤 존재였을까? 시인은 '별을 향해 걸어갈 내 발자국에는/왜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는지'를 다 안다. 그리고 시인은 죽음을 영접하기 위한 연습을 같이 한 사이인 고영에게 “훗날/네게만 말해줄게”라고 큐피트의 화살을 쏜다. 고영은 자기에게만 말해줄 이 한 마디를 듣기 위해 평생을 견딜 것이다. 치명적인 사랑의 독이 퍼져 고영의 시(詩)살이 오를 것이라 믿는다.
이규리 시인의 애도의 글에서 '시인은 우리보다 조금 먼저 그 곳을 보는 사람'이라 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죽음만한 ‘참’이 있을까? ‘참’에 동참한 고영 시인은 배영옥 시인을 잃고 불멸인 영혼을 얻은 사람, 뮤즈로 하늘과 땅 사이 사다리를 놓고 별을 오르내리는 사람, 삶의 의미와 결심, 그리고 신의 질문과 죽음에 대한 연습까지 함께 한 사람, 가사와 임사를 체험한 사람, 시인은 질병과 죽음에는 졌지만 사랑에는 승리한 사람, 둘은 詩로 하나 된 사람, 세상을 앓았던 별, 이 별에서 지고 저 별에서 빛나는 별의별이다, 그 빛나는 별이 고영의 가슴에 떴다. 수선화로 피어났다.
- 전다형 시인
고 배영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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