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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주현대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산강촌
자! 그럼, 무아의 진리에서 개고의 진리로 넘어갑니다.
皆苦의 단어 뜻은, 많이 쌓여서 고통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개짜가 무슨 개짜지요? 여러 皆짜지요? 여러개는 모이고 쌓임을 뜻합니다.
무아의 뭉티기가, 다시 쌓여서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 쌓였다고 하죠?
색 수상행식이죠? 이것이 생명을 설하는 다섯 뭉터기 오온이죠?
그리고 부처님이, 色, 즉 빛이라는 단어를 왜? 그곳에 사용했겠어요?
그 모인 물질이, 다시 쌓이고, 변하고, 쌓여서, 생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 물질은 함께한다. 물질이 고통 받습니까?
뜻과 생명을 가진, 有情과 중생들이 받겠죠? 이것을 생명 또는 생물이라 하죠?
물질에서 여러 느낌들이 쌓인것.이것이 생명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때 그시절 생명의 설명입니다.
너무나 현대 과학적인 설명이 아닙니까?
이것이 만물의 이치요, 생물학 아닙니까?
그런데 물질을, 왜? 생명을 지칭하는 오온에 넣었겠어요?
이 뜻을 단어로도 진화론을 상세하게 다 설명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을 해야겠지요? 사실인지 거짓인지.
그것을 무아에서 설명이 다 되었지요?
이것들이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2,000년전의 불법의 답이 다 풀린 것입니다.
님 처럼, 골치아프고, 햇갈리게, 팔만 사천 경전의 작은 点들을 볼 이유가 없겠죠?
그것은 팔만 사천개의 경전으로, 퍼즐 맞추는 방법이에요.
그리고 님은 点을 풀고있어요. 점이 이어진게 뭐죠? 줄인 線입니다.
線을 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点을 보면 헷갈립니다. 그래서 제가 전체를 보라 한 것입니다.
무상 두글자만 머리에 가지면 다 풀립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단계적으로 쌓여서 얻은 느낌들이기에, 그 느낌들이 높으면 높을 수록 고통을 더 얻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받아들여 수행에 임하라는 뜻입니다.
처음 물질만 존재하게 된, 지구는, 더 많은 변화와 모임의 결정체들이 쌓이게 됩니다.
망상은 무엇이죠? 인간의 마지막 의식이 일으키는 현상이죠?
망상은 어디에서 쌓인 것이지요?
당연히 색에서 변하고, 모이고, 쌓인 것이죠?
그래서 제가 망상을 없애려면, 색만 있어야 한다고 비유한 것입니다.
색이 없어야, 의식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체의 색이 무엇이죠? 단백질입니다.
그 단백질이 모여서 수많은 세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세포수가 70조에서 100조입니다. 이 세포들이 쌓인 것이 인체입니다.
이 단백질 분자들은, 또 더 많은 원자들이 쌓여서 이루어졌겠죠?
원자는 다시 원자핵과 전자들의 쌓임입니다.
그 입자들은 다시 쿼크들과 렙톤(전자)이 당기고 미는 힘으로 쌓인 것입니다.
이것들이 유기물질이 되어서 원시 생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물질의 기가 변하여, 유기 물질이 되면서 느낌들이 생긴 것이죠?
그 느낌들이 발전하게 되겠죠? 계속 쌓여 온 것입니다.
의식이 진화하기 시작하죠? 어디까지? 우리들의 지금의 이성까지.
그래서, 처음부터 제가, 일체개고는 생명의 이치입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말하는 번뇌 망상이 뭐죠?
너무나 많이 쌓여서, 고등동물이 된, 인간 의식이 일으키는 현상입니다.
이것 역시, 단백질이 일으키는 현상이죠?
그래서 이 번뇌 망상을 없애려면, 최초의 단백질만 남겨야 일어나지 않겠죠?
그래서 죽지 않으면, 번뇌 망상을 없애지 못한다고 한, 저의 말이 이런 뜻입니다.
근데 주인공이 죽으면, 영화는 끝나겠죠?
주인공을 안죽여야죠? 그럼 어떤 방법이 있겠어요?
넘는 방법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넘어라, 넘어라 한 것입니다.
근데 말입니다. 이게 정말 어렵거든요? 제가 넘는 방법을 모르면서 말했겠어요?
대승의 견지로, 넘는 방법을, 나중에 님들의 근기가 있을 때 설할 게요.
고통을 만드는 것은, 분명히 번뇌 망상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번뇌, 망상이 없어면 안되겠죠? 없으면 죽음인데?
다만 수행을 하려면, 이것들을 거꾸로 없애야 하겠지요?
인체가, 가속기가 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먼저 번뇌와 망상부터 벗겨나가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무심까지.
이것을 설명한 것이, 사성제요 팔정도요, 8만 사천경입니다.
다시!
이것은 무엇에서 출발한 것이냐? 빛이라고 하는 색, 즉 물질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심은 단백질 덩어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말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많이 모이면, 모일 수록, 쌓이면 쌓일 수록, 더 무겁다.
물질에서 느낌으로, 그 느낌들이 다시 의식으로 진화 발전하여, 쌓인 것이죠.
그러니 모든 생명의 이치가 일체개고 되는 것이지요.
만물과 모든 법칙엔, 뭉티기가 모여 이것을 풀면 내가 없고, 인간은 너무 많은 느낌이 쌓인 식을 가지고 있으니, 더 많은 고통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알면 알수록, 골치가 더 아프죠?
다만 수행들에게, 많이 알면, 알수록, 번뇌 망상은 더 많아지니, 삼법의 진리를 알려면, 그리고 삼법인을 꿰뚫어 보려면, 이 망상들을 모두 없애고, 그리고 빛으로 색으로 무심후의 수행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자 !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우리가 색으로 부르는, 물질은, 빛 (광자) 입자, 소립자들, 즉 전자와 중성자 양자들이 변하고, 쌓이고, 힘으로 뭉쳐서, 물질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모두 확인한 사실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겠죠?
이 오온을, 다시 유식학자들은 8식으로 나눕니다.
생명을, 물질과 7가지 느낌들로 세분화 해서 나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前오식과 後삼식으로.
이것들이 모두 물질을 기초로해서 진화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서양의 철학으로는, 가시적인 것, 즉 감각적인 것과, 또다른 현상인 무시적인 것, 초감각적인 것을 불법의 후삼식에 들어가겠죠?
이 후삼식을 초월하는 수행이 무심 수행입니다.
이 무심이후에서 일어난 일들을, 님은 경전으로 설하려 합니다.
무상이라는 단어가 이것을 보고난 후를 설하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이 무상과 삼법인이라는 단어를 만든이가, 바로 부처님을 바로 보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상이라는 단어가 나올 수가 없어요.
또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모두 다르지 않다고 하죠?
그래서 물질과 의식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가 없다고 했죠? 그 뭉치가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망상을 없앤다고, 의식이나 물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어야 망상이 살아지겠지요?
그런데 깨달음이 죽은 자가 하는 것이 아니지요? 산 자들이 하는 일이지요?
이것이 무심으로 가는 수행입니다.
반대로 생각합시다.
내가 색만 남도록 하는 일입니다. 다만, 여기서도 진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진아가 깨달을 수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데아를 넘은 것, 즉 초감각을 초월한 행위가 이 무심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경전으로 담을 쌓고, 벽을 쌓고, 울타리까지 칩니다.
그 경전 울타리에 갖혀서 꼼짝을 못하면서,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친, 담과 벽과 울타리에 갖혔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중국의 뜻글자로, 삼법인을 표현한 것, 정말 표현을 잘한 것입니다.
이런 것보면 우리는 중국 선승들 정말 존경해야 합니다.
자, 반야 심경의 마지막 구절을 봅시다.
이것은 중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행승들을 위한 주문입니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세가세, 어서가세, 어서 함께 가세. 춤추는 저 언덕 넘어로.
가자가자, 우리 모두 함께가자, 번뇌 망상도 없고, 고통도 없고, 색 수상행식이 없는,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을 찾아서. 그곳에는 영원한 자유와 영원한 행복이 있는 곳.
지금은 21세기 입니다,
21세기는 21세기 사람들에 맞게 방편으로 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은, 님들과 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뒤엔, 말없는 다수들이 있어요, 누가 있는지 몰라요.
물리학자, 신부, 목사 그리고 선승들, 그리고 각 방면으로 엄청난 기술자들이 다 있어요.
저는 경전들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 안 무서워요, 하지만, 책 경전 들고있는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요.
그들은 저희들을 관조만 합니다. 얼마나 우리들이 황당하다고 하겠어요?
저는 경전에 답 없다고, 이런 불법 공부한 지가 십년이 다 되어가요?
그런데 아직도 무서버서 나서질 못했어요. 근기가 부족하면 바로 총맞습니다.
제가 왜 불교 공부한 줄 아십니까? 반야심경, 260자의 아름다움에 제가 반했어요.
그리고 이 반야심경을 조금이라도 이해 한다면, 님들의 아함경은 그대로 버려야 합니다.
그게 일체 개공입니다.
일체개공은 말입니다. 무아와 개고를 넘어선 또다른 답이에요.
일체 개공을 이해하면, 무아와 개고를 설할 수있는 것입니다.
진짜 아름다움은요, 감각적인 것이 아니지요? 이것은 싫증이 나죠.
그 감각적인 것을 넘은 것이, 초감각적인 것입니다.
그 초감각적인 것을, 다시 넘은 것이 무심이라 해야겠지요?
즉 유와 무를 넘어선 무심을 넘어야 다시 空이라는 것을 얻을 수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주체인 우주와 같이 무궁무진 합니다.
그러나 앎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보면, 볼 수록, 더 알면 알수록, 더 아름다워지죠.
그래서 감각적인 아름다움 위에, 의식으로 보는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운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무심의 길로가서, 넘은 언덕이 바로, 영원한 자유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은 그 아름다움을 찾자는 것이요, 알고자 하는 지금 우리 모두들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철학입니다. 점보고 통계학으로 궁합보는게 철학 아닙니다.
이 철학이, 모든 인류를 이끌고, 이끌어 왔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종교는 답이 있어요. 그래서 그 답인 경전에 매달립니다.
우린 있는 답 찾지않아야 합니다.답이 있어면 재미 없잖아요?
철학은 답이 없어요. 철학 함만 있지요.
그래서 언제나 철학은 앞선 이성을 만들어 내는 공장입니다.
그 앞선 이성이 물질문명을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만들어 나갑니다.
그래서 인류의 그 어떤 것보다 철학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 학교, 다 없어져도 관계없지만, 철학은 남아있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의 시작이 철학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갈 것이고요.
번뇌와 망상은 이 철학을, 만들어 내는 재료입니다.
다만 번뇌 망상중에서, 불필요한 것을 택하면 안되겠지요.
그리고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은, 철학의 부재로, 여러 불필요한 것들을 택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철학을 하면, 모두 밥굶어 죽지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이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엔 철학을 해야 돈벌고, 임원으로 승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지금 철학을 해야 합니다.
미래는 종교보다 철학의 중요성을 알게 되거든요.
문제가 생기면 답을 찾듯이 말입니다.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되면, 앞으로는 초등학교 부터 철학 공부를 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낮은 철학자지만 백운산인가?
그 분을 모시고 있었지요? 삼성이 실패했습니까?
그리고 예전 대부분 왕들의 책사들이 철학자들이었어요.
미래의 기업 책사들과 아이디어 뱅크가 철학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나올 것입니다.
저희 시대는 아닐 것입니다. 우린,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이지요.
하지만 다음 세대들은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을 평화롭게 이끌려면 그 답밖에 없어요.
여기에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이 우뇌형일 것입니다.
좌뇌형은 따지기 좋아하고 논리적이지요. 하지만 우뇌가 종교와 창의력을 주도 하거든요.
물론 좌우뇌 통합이면 천재가 되겠지요.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뇌형이 70% 입니다. 일본인들은 30%이지요.
그래서 일본인들이 따지고, 이론을 즐깁니다. 우리는 다르지요?
젊은 사람들이 여기와서 놀아야, 한국의 비젼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와 철학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종교 공부하면, 철학을 빠르게 알게되죠, 철학에서 나온 것이 종교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불교는 최고의 철학함과 행위입니다.
높은 아름다움도 즐기고, 돈도 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만, 우리 세대들의, 희생이 있어야 겠지요.
아무튼 많은 도움이 되었어면 합니다만, 항상 부족한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노랑님과 댓글 주신분 모두 사랑합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고, 앎의 싸움은, 싸움이 아닙니다.
서로의 발전을 위한, 경험을 쌓는 일이죠. 저 또한 많이 배우고 나갑니다.
공자님이, 진정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정 아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 제가 불법적으로 해석해서 곡해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마음에 많이 와 닿습니다.
다만, 세상엔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경전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경전과, 수행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
저에게 불편함이 계셨던 여러분들에 조아립니다.
아무튼 저의 글, 끝까지 읽어 주신님들 감사합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이해 하시고, 이젠 이것으로, 접겠습니다.
언제나 맑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山江村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