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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8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가나안 정복전쟁을 앞두고 요단을 건넌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를 도우면 내가 이 전쟁에서 가나안 거민을 쉽게 물리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군대장관은 나는 네 편도 아니고 적군 편도 아니라고 하면서 단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다름 아니라 네 신을 벗기는 일이라는 말을 합니다(수 5:13-15).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신발을 잘 갖춰 신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시점에 힘을 무력화시키는 할례를 행하라고 하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너희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지점임이 분명합니다.
나는 과연 내 신을 벗고 주를 따라가고 있는지요?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 주옵소서.
나의 신발을 벗는 것은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며 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내 안에 있는 영적 쓰레기들은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처리하듯 주님의 무덤에 연합되어 장사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하 19:9-15
제목 :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든 믿음의 사람들, 아브라함과 다윗 그리고 나.
9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10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11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12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13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14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15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 나의 묵상
압살롬 편에 섰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과의 전쟁에 패하자 자기들의 집으로 도망하였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의견이 분분하여 서로 주장하였다.
다윗이 우리를 주변의 원수들과 특히 블레셋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지 않은가?
그 다윗이 지금은 압살롬을 피하여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
하지만 우리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던 압살롬은 이번 전쟁에서 죽었는데 우리가 이렇게 손을 놓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는가?
이런 말이 다윗의 귀에도 들렸다.
이에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당신들이 유다의 장로들에게 전하시오.
나 다윗의 귀에도 온 백성들이 다윗을 왕으로 다시 모시자는 말이 들리는데 너희는 왜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 일에 손을 놓고 있느냐?
당신들은 내 골육인데 어찌하여 왕을 모시는 일에 앞장서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아마사에게도 알리라고 한다.
너는 나의 골육이다.
네가 요압을 이어서 반드시 군지휘관이 될 것이다.
이렇게 다윗은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이에 그들이 다윗에게 전하기를 왕은 모든 신하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 전갈을 받고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요단에 도착하였는데 왕이 요단 건너는 것을 돕기 위하여 유다 백성들이 길갈에 모였다.
압살롬이 그술에서 돌아와 자기 아버지를 반역하고자 그 마음에 음흉한 마음을 먹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지파 사람들 중에서 다윗 왕에게 소외를 받는 이들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었다.
늘 홀대를 받는 이들에게 압살롬은 친구처럼 대하며 그들을 안아준 것이다.
그렇게 자기들의 서운함을 알아주고 다독거려주는 압살롬이 그들에게는 왕이었다.
그렇게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서 반역을 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두 사람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데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다윗 한 사람이었다.
이를 다윗은 알았다.
(삼하 5:12)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
그리하여 다윗은 자기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하여 예루살렘 곧 왕도를 선점하였음에도 그를 대하여 싸우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세우신 자신을 예루살렘 왕도로 이끄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이는 그와 함께 믿음이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
사실 그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이후로도 숱하게 그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친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어디 이뿐인가?
그는 자신의 목숨에 해를 당할까봐서 애굽으로 내려갈 때도 그랬고, 블레셋으로 내려갈 때도 그런 것처럼 자신의 이복누이였던 아내 사라를 당당하게 아내라고 말하지 못하고 누이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의 본심을 속이는 것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렇게 그는 아내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었던 자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르셨다.
무슨 일로 인함인지 살펴보자.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계속해서 실수를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때가 되자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주셨다.
그 아들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이다.
나도 아들 둘을 낳아서 키웠지만,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100세, 그것도 생식 기능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낳은 아들이다.
그것은 곧 죽은 사람이 아들을 낳은 것과 같다.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생리도 다 끊어졌고 여자로서 가치가 없는 나이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 이삭을 주신 것이다.
이처럼 100세에 딸도 아니고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아들을 얻었으니 그 아들이 어찌 귀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으랴?
하여 아브라함은 이전에 하나님께 보이던 사랑이 많이 식어지고 아들에게 그 사랑이 갔던 것 같다.
이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못하고 아들 이삭을 하나님으로 섬겼던 것이다.
이는 선악과 앞에 서 있는 아담과 같다.
사람은 하나님 곧 선(善)을 택하기보다 악을 택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본성이며 또한 그의 본성을 닮은 모든 아담의 후손들의 본성이다.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보다 아들 이삭을 더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신다.
(창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번제로 드릴 제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왜 하필 독자 이삭을 드리라고 하시는지.
그날 밤 아브라함이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었겠나?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아브라함은 다음날 일찍이 일어나서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서 모리아 산을 향해 나아갔다.
산 아래에 도착을 한 아브라함 일행은 두 종을 거기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여기서 두 종을 산 아래에 머물게 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 정상까지 같이 갈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 이삭에게 지우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곧 십자가를 지고 모리아 산 곧 골고다까지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함이다.
이삭을 번제로 드린 모리아 산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골고다와 같은 장소이다.
그곳이 곧 다윗이 심판의 제사를 드렸던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며,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던 예루살렘이었다.
한편 자신의 목숨에 연연하여 아내를 누이라 속이면서 팔아먹었던 아브라함의 옛 사람을 죽이는 자리가 바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그 자리이다.
이랬던 아브라함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또한 그 번제의 자리였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기술한다.
(히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은 믿음이었다.
그 언약은 다름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자손 곧 씨를 주기로 하셨는데 그 씨는 이삭으로 말미암는다는 약속이다.
그렇기에 비록 그가 이삭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것으로 믿은 것이다.
그 믿음은 그동안 육신으로 살던 아브라함의 옛 사람을 죽인 제사였다.
그는 그 믿음으로 이삭을 결박하고 제단 위에 벌여놓은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칼을 들어 높이 쳐드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외쳐 부르셨다.
그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증명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삭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순간이다.
이 믿음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또한 다윗의 믿음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갸기 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하고 기록한 것이다.
나는 언약을 비롯한 복음에 문외한이었다.
그저 교회에 잘 나가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교회는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역에 대한 열정과 열심이 생기면서 신학을 하고 싶은 열망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서 늦깎이로 신학생이 되었고 목회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복음을 잘 알지 못하였다.
그저 열심히 사역을 하고 내 힘과 열정을 다하여 하나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큰 상급을 주실 거라 믿고 진이 빠지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그런 차에 나도 알 수 없는 고난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런 고난의 시기에 함께 내 귀에 들린 것은 곧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나를 정말 힘들게 하는 고난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나에게 복음은 아주 선명하게 들렸고 그 복음을 통하여 내가 붙잡고 있던 손을 펼 수 있었다.
이 땅에서 하는 사역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짜 하나님의 뜻은 내가 이 땅에서 얼마나 열심히 사역을 하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는가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 후로 날마다 아들이라는 존재 자체이신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고, 그 묵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묵상을 하지만, 이 묵상이 나의 의가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나 역시 아담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이 있기에 조금만 잘 하는 것이 있어도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자기주장의지가 발동한다.
하지만 내가 묵상을 쉼 없이 하는 것은 나의 자랑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의 은혜요 성령이 소원을 두고 행하시기 때문이다.
정말 티끌 같고 먼지와 같은 존재, 그것은 곧 없음이다.
아벨의 뜻이 바로 ‘없음’이다.
그 아벨은 이 땅에 죽으러 와서 잠시 살다가 형 가인에 의해 죽임 당한 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다.
하지만 그 역시 이 땅에 죽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라는 점에서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없음의 존재인 아벨에게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주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 역시 하나님께서 모든 언약의 원형으로 주신 창세전 언약을 굳게 붙드는 자로 오늘을 살아간다.
나의 의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죽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아들과 아버지의 창세전 언약이 오늘 나를 그 나라로 인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믿음의 조상이라 불렸던 아브라함, 그의 혈통을 따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의 믿음은 만물 안 곧 이 땅에서 살 때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들 안에도 부인할 수 없는 악을 쫓아가는 부정함이 있었음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좇아갈 때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바뀌어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위대하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 같은 없음과 무력함의 존재야말로 두 말해 무엇하리요?
여전히 넘어지고 자빠지며 무릎이 깨지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무례한 자를 당신의 아들로 삼아주셨기에 오늘도 감사로 나아갑니다.
나의 작은 입술을 열어 주를 찬양하오니 나를 받으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