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등등으로 살아왔다고 - 유안진

[미소.]

기타등등으로 살아왔다고

유안진

지나가는 얼룩무늬 군복이 내 20대를 안다고 윙크했다

정류장 표시판에 붙은 과외지도 쪽지가 내 대학시절을 안다고 반가워한다

시내의 불심검문이 내 대학노트를 읽어봤다고 실룩 웃는다

공중전화 수화기가 내 손과 귓불의 촉감을 기억한다고 따스하다

눈바람 속 빨간 우체통이 내 가슴속 불씨를 살려냈다고 으스댄다

얼어붙은 검은 미끄럼길이 내 낙방과 굴욕과 수모를 다 안다고 번들거린다

TV 속의 흘러간 유행가가 내 눈물로 울대를 적셨다고 객쩍어한다

헌책방 쾨쾨한 냄새가 내 실연을 부채질했다고 미안해한다

묵은 신문의 자살기사가 내 만용을 비웃었다며 씁쓸해한다

출입구 없는 맹토(盲土)에 세워지고 무너지기 바쁜

봉쇄수도원의 침묵을 조롱하는 마녀들처럼

때 없이 마주치는 추억들은 허드레, 기타등등(其他等等) 뿐이다

주어와 목적어와 본문이 완전 삭제된.

유안진

경북 안동 출생. 1967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시집 『달하』 『누이』,『다보탑을 줍다』,『거짓말로 참말하기』,『알고(考)』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