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8일 나해 연중 제4주일
-전삼용 신부
복음; 마르1,21ㄴ-28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카파르나움에서,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 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 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나를 변화시키는 말: 고마운 사람의 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말의 권위는 말에 ‘사람을 바꿀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피 흘림 없이 말만 했기 때문입니다.
왜 피 흘림과 함께하지 않는 말에는 권위가 없을까요? 하느님의 피 흘림이 성령이십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4 참조).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의 권위를 말하다가 예수님께서 악령을 몰아내시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십자가의 피 흘림이 생기게 만드는 감정이 ‘감사’입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는 항상 덜 고통스럽고 더 기쁘고 행복한 방향을 선택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행동은 ‘옳고 그름’이 아닌 ‘기분’이 좋을지, 나쁠지에 대한 자기 판단으로 이뤄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 공부하려다 어머니가 공부하라고 하셨을 때 안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하게 되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저는 저를 기쁘게 하고 싶었습니다. 왜 어머니가 아닌 나 자신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을까요? 어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인이 되니 부모가 얼마나 어렵게 자녀를 키우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되지 않는 이상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우선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도 감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어떨까요? 사실 그럴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에게는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은 ‘불안’입니다.
불안을 없애주는 대상에게 감사가 일어납니다. 만약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내 안의 자아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아를 기쁘게 하려고 삽니다. 문제는 자아의 정체가 뱀이란 데 있습니다. 뱀의 소굴에 갇혀 지옥을 살게 됩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심리학자 ‘아른힐 레우뱅’의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라는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자아에 봉사하며 살게 되었는지 잘 적었습니다. 레우뱅은 점점 부모와 친구와의 사이가 단절되자 자기 생존이 최우선이 됩니다. 이때 혼자라는 불안함을 해결해 준 유일한 존재가 있는데 자기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선장’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 때 선장은 유일한 구세주가 됩니다. 처음엔 선장에게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문제는 선장은 워낙 잔혹한 존재라 결국 레우뱅은 조현병에 걸려 벽지까지 뜯어먹는 상황에 이릅니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미쳐가는 것도 결국엔 자아에 감사하면서부터라는 사실입니다. 감사하면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러면 보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문제는 자아는 잔혹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자아에게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감사한 존재를 외부에서 찾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아의 말보다 그 사람의 말을 더 따라주게 됩니다. 이렇게 자아에게서 해방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충고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박한상은 자기를 나무란다고 부모를 살해하였습니다. 부모의 말은 옳았습니다. 그런데 박한상은 너무 부자였던 부모가 자기를 키워준 것에 대해 어떤 감사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닌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자기만을 기쁘게 해주는 일에서 해방되려면 무조건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서 감사를 찾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지 않은 사람에겐 감사가 생기지 않습니다. 불안은 피 흘림으로만 안정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도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베테랑 군인이 희생하였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도 라이언 일병의 귀에 대고 “값지게 살아. 값지게…. ”라고 속삭입니다.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서 “여보, 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라고 묻습니다.
값지게 살라는 밀러 대위의 말엔 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 피에 감사했기에 그 한마디가 평생 라이언을 변화시켰습니다. 모든 변화는 내가 감사하는 이가 해준 한마디 말씀입니다.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성당/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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