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 부산진성과 동래성, 밀양성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북상을 시작하자, 경상 순찰사 김수는 제승방략의 동원체계에 따라 군사를 모집, 정해진 위치에 대기하라고 각 고을에 통지하였고, 이에 따라 문경 이하의 수령들은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지휘할 총지휘권자인 순변사 이 일이 며칠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고, 이 지역의 지휘관인 박홍과 이각은 행방불명되어 연락이 되지 않았다.
장수도 나타나지 않은데다가 연일 큰 비가 쏟아지고, 군량마저 바닥이 나자 군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고, 마침내는 야음을 틈타 도주하기 일까지 벌어졌다.
더구나 일본군이 내습해 온다는 유언비어마저 돌기 시작하여 일반병사들 뿐만 아니라 수령방백들마저 하나 둘 도망하여 이 일 등이 문경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군사들이 모두 흩어진 뒤였다.
이 일은 문경을 거쳐 23일에 상주에 도착했다.
이 때 상주 목사 김 해는 산 속으로 달아났고, 판관 권길이 혼자서 상주 일원을 지키고 있었다.
이 일은 창고를 열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군사를 모집하여 농민 8백여 명과 휘하에 데려온 군사 60여 명을 합해 군대를 편성하였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사실상 최초로 편성된 조선의 주력군이었다.
23일 저녁 개령 사람이 이 일에게 적이 왔다고 알렸다. 그러나 이일은 이 정보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개령 사람을 옥에 가두었다.
이때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 제 1번대는 19일 밀양을 접령한 후 21일에 대구로 진출하여 무혈입성하고 24일 낙동강을 도하하여 선산에 진출하여 이날 저녁 상주 남쪽 20여리 지점인 장천에 진을 쳤다.
다음날 아침 적이 오지 않았다고 해서 갇혀 있던 개령사람을 [민심을 혼란케 하였다]라는 죄명으로 처형하였다.
이 일은 24일 아침부터 군사들을 상주성 북쪽의 북천(北川) 강변으로 거느리고 나가 산을 의지하여 진을 치고 진 가운데 대장기를 세우고 그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종사관 윤섭과 박지, 그리고 판관 권길과 사근찰방 김종무 등은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게 하여 대장의 위세를 갖춘 후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일는 적이 어느정도까지 진출했는지 알아보지도 않았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와중에 그 주변지역에 보초도 내보지 않는 등 전술상의 원칙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군은 몇 차례나 척후병을 보내 조선군의 상황을 일거수일투족까지도 정찰하고 있었다.
훈련을 받는 군사들이 정찰을 하고 있는 일본군 척후병들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아침에 죽은 사람이 생각나 감히 보고할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훈련을 하던 중 상주성 안 두 어 군데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이일은 급히 군관을 보내 알아보내도록 하여는데, 다리 밑에 숨어 있던 일본군 저격병이 조총으로 쏜 뒤 목을 베어 가지고 사라졌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이일군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기세가 꺾였다.
잠시 후 일본군 본진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조선군을 사면에서 포위해 압박해 들어왔다.
대부분이 농민들인 이일 군은 불시에 일본군의 대규모 기습 공격을 받자 크게 동요했다.
적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쉴새없이 조총을 쏘면서 근접해 왔고, 이일군은 활로 응사하였으나,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 안되어 후퇴를 거듭했다.
이일이 '나가서 싸우라'고 독전하였으나 뛰어나가는 자는 몇 사람 되지 않고 도망치는 자가 더 많았다.
한성에서 데려온 60 여 명의 군관들만이 겨우 가까이 온 일본군을 향해 활로 응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일은 단신으로 말을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격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절대적으로 불리해지자 산길을 타고 전장을 탈출했다.
군관 두명이 이일을 따라 도주에 성공하였다.
남은 군사들은 장수가 도망친 뒤에도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순변사 이일은 그 길로 문경에 이르러 패전을 조정에 알리고 조령에 있던 조방장 변기와 충주의 신립 진영으로 갔다.
26일 일본군 선봉이 문경을 공격했다.
성은 비어 있었고 백성들은 보이지 않았다. 성 안을 수색하고 있던 일본군이 관아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화살이 쏟아졌다.
현감 신원길이 20여 명의 결사대와 함께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한 것이다. 신길원은 곧 잡혔고, 끝내 항복하지 않아 참살을 당했다.
소백산맥 최고의 요새인 조령은 조선군이 지키지 않고 있었다.
척후를 보내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은 유유히 조령을 넘어 28일 전군이 충주 남쪽 단월역에 진출했다.
조선 조정의 초기 대응
조정에 박홍의 장계가 도착한 날은 17일이었다.
곧이어 [적선은 400 척에 불과하고 일본군은 모두 합해 1 만명을 넘지 못한다] 라는 김성일의 거짓 장계가 도착하여 조정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한숨이 끝나기도 전에 김수의 [적선 400여 척이 부산포에 상륙했다]라는 장계가 도착하였다.
하나같이 정확하고 일치되는 보고가 아니었기에 조정은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여기서 잠깐 조선의 공무연락체계에 대한 아주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당시 조선의 긴급통신체계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봉화이고, 다른 하나는 파발마였다.
하지만 봉화는 개전 초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봉화가 제대로 작동하였다면 14일 아침에는 조정에 일본군 침입사실이 보고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작동된 것은 결국 파발마밖에 없었고, 박홍의 장계는 파말마에 의해 릴레이되어 4일 만에 조정에 전달될 수 있었다.
어쨌던 사태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한 조정은 대응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부산진과 동래성 함락 소식이 전해졌다.
조정은 북진해 오는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시키는 일이 급해졌고, 영남지방으로부터 조선의 내륙으로 접근하는 길목인 중로(中路), 동로(東路), 서로(西路) 등 삼로(三路)와 조령, 중령, 추풍령 등 3대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강구하였다.
먼저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중로(中路)로 나가 경상도 부산 - 밀양 - 대구 - 상주 - 문경 - 조령으로 소맥산맥을 넘어 충주 - 경기도 용인 - 서울로 오는 일본군을 경상도의 요충이며 주진이 설치되어 있는 상주에서 요격하도록 했다.
다음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하여 동로(東路)로 나가 부산 - 경주 - 영천 - 안동 - 영주 - 죽령으로 충청도 단양 - 충주 - 경기도 양평 - 서울로 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경상좌도를 방어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조경을 우방어사로 하여 서로(西路)로 나가 김해 - 함안 - 창녕 - 금산 - 추풍령으로 충청도 영동 - 청주 - 경기도 죽산 - 용인 - 서울로 오는 적군을 막기 위해 경상우도를 방어하도록 했다.
조정은 이어 유성을 도체찰사, 김응남을 부체찰사로, 김여물을 종사관으로 임명하면서 전시체제로 돌입하였다
일본군 쾌속 진격 - 10여 일만에 경상도 전역 석권
고니시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 1번대는 17일 양산과 울산을 돌파하고 18일 밀양에 도착 19일에 밀양성을 점령한 후 청도, 대구를 거쳐 23일 인동으로 진격하였고, 24일 낙동강을 도하하여 24일 선산을 지나 25일 상주 외각까지 진출했다.
가토 키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제 2 번대는 4월 18일 부산에 상륙하여 19일 언양을 치고 21일 경주로 진격했다.
경주성에는 판관 박의장과 장기현감 이수일 등이 거느린 관군이 있었으나, 일본군이 몰려오자 그대로 무너져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경주성을 무혈점령한 2번대는 계속 북진을 하여 4월 22일에는 영천을 돌파한 후 신녕, 군위, 용궁을 점령하면서 북상다가 점촌 - 문경 방면으로 진로를 전환하였다.
일본군 제 3 번대는 20일 김해성을 격파하고 21일 창원을 위협하였다.
창원마산포에 경상우병사 조대곤의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조대곤은 김해성을 구원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일본군이 창원방면으로 진출하자 진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3번대는 창원에 이어 낙동강을 도하하여 영산, 창녕, 현풍 등 낙동강 동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경상우도로 진로를 전환하여 27일에는 성주(星州)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침공 10여 일만에 경상도지역을 석권하고 충청도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앞에는 소백산맥이라는 험준한 천험의 장벽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당시 소백산맥에는 3곳의 관문이 있었다.
하나는 소백산과 도솔산 사이의 죽령으로 경상도 영주와 충청도 단양을 잇고 있고, 다른 한 곳은 주흘산과 백화산 사이의 조령으로 경상도 문경과 충청도 괴산-충주를 잇는다.
마지막 한 곳은 또 하나의 백화산과 황학산 사이의 추풍령으로 경상도 금산과 충청도 옥천을 잇고 있다.
소백산맥은 침공하는 일본군으로서는 큰 장벽이었지만 수비하는 조선군에게는 하늘이 준 천연의 지형이었으므로 당연히 조선군은 이 관문을 지켜야 했다.
26일 조선의 3도 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이 부장 김여물과 80여 명의 군관을 이끌고 충주에 도착했다.
충주목사 이종장이 충청도 군현의 군사 8,000 여 명을 모아 놓고 신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터진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조선의 정예병들이었다.
(※주:이 당시 신립의 휘하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한국과 일본의 기록을 유추했을 때 8천명정도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정설입니다.
하지만 이 중 알려진 대로 얼마정도가 기마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이 있습니다. 이 문제 역시 한국과 일본의 기록으로 볼 때 최소 4천명은 되었으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훈련상태나 무장 상태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신립은 충주의 단월역에 군사를 주둔시킨 후 충주 목사 이종장과 부장 몇 사람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으로 내려가 지형을 살폈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등이 「적군은 대병력이고 우리는 병력이 적으니 정면으로 싸우면 전세상 불리할 것 같으니 마땅히 부근의 험하고 중요한 지형을 지키고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적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면 좌우에서 일제히 공격하여 격멸하고 만일 적의 공격을 당할 수가 없으면 차라리 물러가 한성으로 들어가서 지키는 것이 좋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충주목사 이종장 역시 「적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우리가 넓은 평지에 있는 것은 옳지 못하고 험한 곳을 지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이다. 그러므로 넓은 들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니 조령의 험한 곳을 의지하여 깃발을 많이 세우고 연기와 불로 적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적을 기습하여 승리하는 방책으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신립은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에 맞아 들여 용맹한 기병으로 물리치는 것이 이기게 될 것이요, 또한 적은 이미 영 밑에 와 있다고 하니 우리가 영위에까지 나가서 진지를 확보하기에 앞서 적과 서로 부딪치게 된다면 사세가 위태롭지 않겠소. 뿐만 아니라 우리 군사들은 모두 훈련이 미숙한 새로 뽑은 군사인데 더구나 그들은 평소에 의사가 소통되지 못하였으며 상하가 단합도 충분하지 못한 즉 이제 사지(死地)에 넣지 않으면 그 투지를 드높일 수 없을 것이요」라며 조령 방어를 포기하였다.
김여물은 신립이 새재를 포기한다는 생각이 굳어지자 「그렇다면 새재의 여러 곳에 깃발을 꼽고 허수아비를 배치하자. 그러면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 이라고 조언했지만 신립은 이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신립은 원래 야전의 명수였다.
북방의 여진족 니탕개와 싸울 때에도 야전에서 기병으로 적을 물려쳤다.
기마전으로 명성을 떨친 신립이 기병대를 거느리고 방어전을 택하기보다는 야전을 택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주변이 논들인 저습지대를 결전장으로 삼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태반의 조선병사들이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들이었고, 그나마 대부분이 일본군의 조총과 무력 앞에서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는 일이 많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군사들을 사지로 넣어 전투력을 높일려는 생각은 전술상 아주 틀렸다고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상주에서 패한 이일이 충주 단월역 신립의 진영으로 왔다.
그가 신립에게 「적은 경오(庚午), 을묘(乙卯)때의 왜적과 다르고 북쪽 오랑캐 같이 치기 쉬운 적이 아니니 물러가서 지키는 것만 못하다」하자, 신립이 크게 노하여 책망하고 말하기를 「그대는 또 다시 우리 군사까지 망쳐 놓으려는 것인가」하고 이일과 변기 두 장수를 선봉으로 삼아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신립은 군사를 이끌고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26일 일본군 선봉이 상주를 출발하여 함창을 거쳐 문경에 도착하였다.
(현감 신길원이 20 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기습하였으나 곧 잡혔고 끝내 항복하지 않아 참살을 당했다.)
27일에 문경을 출발하여 조령을 넘었다.
28일 아침에는 안보역을 지나 정오경에는 충추 남쪽 단월역에 다달아 척후로 하여금 조선군의 상황을 정찰케 하였다.
신립도 27일 정찰병들로부터 일본군이 새재를 넘었다는 정보를 들었으나, 직접 말을 타고 새재를 정찰한 결과 일본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정찰병을 허위보고죄로 참형에 처했다.
그날 밤 충주성 안에서 작전을 계획하였는데 한신(韓信)의 고사에 따라 탄금대 부근에서 배수진을 치기로 결정했다.
신립은 바다를 건너와 북상하는 적의 피로한 틈을 타서 이들을 평지로 끌어내어 갑자기 몰아치는 이소격중의 묘법을 쓰기로 하였다.
28일 아침 일찍히 신립은 군사 8,000 여 명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떠나 탄금대로 출발하였다.
신립은 남한강과 달천이 합치는 중간지대의 저습지에 진을 치고 적이 남쪽 산간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탄금대 동남쪽 들판은 습지였다. 더욱이 며칠 전에 비가 와서 발이 푹푹 빠졌다.
이때 군관 이운룡이 배수진을 보고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고 울면서 만류했다.
신립은 크게 화를 내며 그에게 곤장 30대를 내렸다.
조선군의 진용은 총지휘관인 도순변사 신립 장군, 순변사 이일, 조방장 변기,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등이 대오를 정비하고 있었다.
한편 적은 정오부터 공격준비를 시작하였다.
좌익대장 마쓰우라의 3,000병력, 우익대장 종의지의 5,000병력, 중앙에는 대장 고니시(小西行長)의 직할부대 7,000 병력이 합하여 1만 5천명이 공격에 직접 참가하였다.
예비대는 아리마, 오오무라,고지마등이 거느리는 3천 7백명이 충주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적은 좌익부터 달천 우안의 본도를 따라 전진하고 나머지 부대는 충주 본 가도를 따라 탄금대에 접근하여 삼면에서 포위 공격하려 하였다.
신립이 명령하여 진을 치던 지역의 서쪽과 북쪽은 달천과 남한강이 막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에는 지금은 달천강의 제방을 하고 관개가 되어서 옥토가 되어 있으나 당시는 늪으로 되어 있고 갈대가 우거진 갯벌이어서 군사활동이 적당치 않았으며 더욱이 기마병이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기는 불편한 지역이었다.
신립 장군은 종사관 김여물에게 장계를 초하게 하였는데, 김여물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전투가 준비된 복장으로 붓을 잡고 장계를 썼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급박함을 짐작하게 한다.
전세가 더욱 급하게 되자 신립은 1차로 기병을 돌격시켰다.
일천기의 군사가 일제히 칼과 창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공격하였다.
적은 보병이라 조선군이 조금 우세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전세를 파악한 신립은 다시 2차로 1천명을 혼전하는 싸움터에 진격시켰으나, 피아의 사상자만 내고 일진일퇴하였다.
신립은 3차로 2천명의 기병을 모두 돌진시키니 말의 돌진소리, 조총소리, 인마의 고함소리가 탄금대 벌판을 뒤덮었다.
하지만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마병은 일본 조총부대의 말 그대로 '밥'이었다.
일본군의 대기마전술은 기마대책용 목책을 세워 기병의 접근을 막은 후에 조총 사수들을 일렬로 사선(射線)에 늘어세운 후 멀리서 달려오는 적들에게 일제사격을 퍼붓어 화망을 구성하여 한꺼번에 적을 물리치는 부대 단위 전투였다.
(※주 : 이 전술을 일본에서 처음 사용한 무장은 오다 노부나가로 그는 이 전술로 일본 제일의 기마부대라는 다케다가(家)의 기마병을 전멸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 전국시대 전술상의 획기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개봉한 일본영화<카케무사>의 마지막 장면이 바로 이 전투를 묘사한 것입니다.)
전세를 지켜보던 신립은 김여물을 남겨 놓고 직접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였다.
신립은 벌떼 같이 덤벼드는 적병을 어찌할 수 없어 되돌아오니 종사관 김여물이 말을 타고 최후의 총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립이 웃으며 하는 말이 「그대를 이 위기에서 살려 볼까하오」하니, 김여물은 빙긋이 웃으면서 「이 사람이 어찌하여 죽음을 피하는 사람이 되오리까」하고 같이 말을 달려 총돌격의 선두에 서서 깊이 적중으로 들어가니 적진이 크게 흔들렸으나 이미 전세를 돌리기에는 늦었다.
신립과 병사들은 밀리고 밀려 상당수가 남한강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충주목사 이종장과 조방장 변기의 지휘 아래 굳게 뭉쳐서 배수진을 끝까지 지키다며 필사의 힘을 다하여 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군의 두번째이자 사실상 가장 큰 규모의 정규군이 궤멸하였고, 사실상 한양까지의 문이 열려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순변사 이일은 신립의 뒤에 따라 가면서 조총을 피하다가 사잇길을 쫓아 산중에 들어 간 다음 적병 수 명을 만나서 활로 쏘아 죽이고 한강을 넘어 북으로 달아났다.
이일은 사람을 시켜 장계를 급히 조정에 올리게 하니 조정에서는 비로소 충주전투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패전의 소식을 접한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혼란의 와중에 일어난 참극
탄금대 전투 이전에 있었던 상주 전투를 위해 김수의 명령에 따라 병사를 거느리고 집결지로 향하고 있던 용궁 현감 우복룡은 도중에 영천 근처에서 밥을 지어 먹고 쉬고 있었다.
그 때 하양 군사 백여 명이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우복룡의 군사들은 하양군사의 앞을 가로 막고 시비를 걸었다.
'사또 앞에 인사도 않고 건방지게 지나간다.', '적군의 간첩이 아닌가 의심된다' 등 온갖 트집을 잡았다.
수효가 많은 우복룡의 군사들은 하양 군사를 점차 에워쌌다.
그때 구경 삼아 보고 있던 우복룡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우복룡의 신호에 따라 용봉 군사들은 모두 순식간에 칼을 뽑아 하양군사를 공격하였다.
하양 군사는 불의의 공격을 받아 모두 죽었고, 우복룡은 하양 군사의 시체를 들판에 늘어 놓고 일본군의 시체처럼 꾸몄다.
그리하여 우복룡은 순찰사에게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 백여 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하여다.
순찰사는 우복룡의 보고를 받고 기뻐하며 우복룡의 군사가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고 장계를 올렸다.
승리의 소식을 고대하더 조정에서는 우복룡의 전승보를 듣고 우복룡을 통정 대부로 승진시키고 안동 부사로 임명했다.
하양 군사의 억울한 죽음을 훗날 가족들이 알게 되었다.
하양 군사의 가족들은 관로에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억울한 호소를 들은 관원들은 우복룡의 위세에 눌려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하양 군사의 억울한 사정을 밝혀 주려하지 않았다.
일본군 제 1번대가 조령 부근으로 진출하였을 무렵인 4월 26일, 일본군 제 2번대는 동로를 통한 북진 계획을 변경하여 군위 - 점촌 - 문경을 연하는 중로로 이동하였다.
즉, 제 2번대의 주장인 카토는 안동 - 영주 - 죽령 - 단양 - 충주를 연하는 경로를 따라 북상하는 것보다는 군위 - 조령 - 충주를 연하는 경로를 따라 곧바로 북상하는 것이 한성으로 가는 첩경이라고 보고 제 1군보다 먼저 한성에 입경하기 위해 북상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가토의 제 2번대는 실제로 상주 - 문경 - 조령의 경로를 따라 북상한 고니시의 제 1번대보다 하루 늦게 조령을 통과하였다.
구로다가 이끄는 일본 3번대는 4월 18일 낙동강 하류에 상륙해 김해성을 격파하고 창원, 창녕을 함락시켰다.
일본군은 여기서 두 갈래로 나뉘어 우군(右軍)은 무계 - 개령 - 금산(김천) 으로 진군하고, 좌군(左軍)은 초개 - 합천 - 거창 - 지례 - 금산으로 진군해 금산(김천)에서 합류할 계획이었다.
4월 17일 조정에서는 조경을 경상우도 방어사로 임명하였고, 조경은 충청도 오른쪽을 거쳐 오면서 군사를 불려 약 500명을 확보했다.
조경이 거창에 도착했을 때 무과 출신의 무장 정기룡이 여기에 합류했다. 조경은 정기룡을 돌격장으로 임명하여 정기룡은 기마 수십기를 이끌고 선봉으로 나섰다.
조경은 조방장 양사준, 돌격장 정기룡등과 함께 5백여 명을 이끌고 거창으로 남하하던 중 4월 23일에 신창에서 구로다군 좌군과 조우하였다.
조선군측에서는 돌격장 정기룡이 선두에서 일본군에게 맹공을 가하여 적군 10여 명을 참살하였으나, 일본군의 본대가 밀려들자 금산(김천)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 때 경상감사 김수가 군사 400여 명을 모아 조경 휘하로 보내 금산을 방어하도록 했다.
그러나 금산 방어선이 저절로 붕괴되자, 조선군은 추풍령으로 물러나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4월 28일 일본군이 밀려왔다.
돌격장 정기룡이 말을 타고 적진에 난입하여 일본군 수십 명을 해치우는 동안 양쪽에서 일본군의 복병이 나타나 조경을 생포하였다.
정기룡은 급히 말을 뒤로 돌려 조경을 구출한 후 황간으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조경군이 서로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였으나, 조경이 신병으로 치료를 받게 되어 더 이상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낙동강 서안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북상을 하던 구로다군의 우종대는 4월 27일에 성주를 유린한 다음, 김천에서 좌종대와 합류하여 추풍령을 통화했다.
이로써 일본군 3번대는 그다지 큰 저항을 받지 않는 가운데 청주가도(淸州街道)를 따라서 한성을 향해 북상하였다.
4월 26일 이일의 상주 패전 보고를 접한 조정은 서둘러 도성수비 대책을 수립하고, 병조에서는 도성 안의 군사를 징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신립의 충주패전 보고가 올라오자 도성수비를 포기하고 왕의 피란을 결정하는 한편, 한강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이양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도성을 지키게 하고, 김명원을 도원수, 신각을 부원수로 임명하였다.
도원수 김명원은 제천정(보광동)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순찰사에게도 한강 방어전에 동참하라는 통문을 보내는 한편, 이제 막 무과에 급제한 신임 무관 50여 명과 군사 천 여명을 한강의 도섭이 가능한 지역에 배치시킨 다음, 나룻배를 모두 강 북안에 계류시켜 왜군의 도하공격을 대비하게 하였다.
4월 30일 새벽, 선조는 이양원과 김명원에게 도성 및 한강 방어를 일임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한편 탄금대에서 신립의 조선군을 격파한 일본군 제 1번대는 충주성에서 경주, 영천, 군위 등을 점령하고 조령을 넘은 일본군 2번대와 합류하였다.
일본군 2번대는 충주에서 방향을 바꾸어 음성, 죽산, 용인 방면으로 북상하여, 5월 2일 정오경에는 한강 남안에 도착하였다.
가토가 이끄는 1만 1,700 여 명의 일본군은 강 남안에서 조총을 쏘아대면서 조선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김명원은 적의 세력을 보고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무기를 강물에 밀어넣으라고 명령한 뒤 자신은 백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전선을 이탈하였다. 이 때 종사관 심우정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총지휘관인 김명원이 전선을 이탈하자 휘하의 군사들도 전의를 상실하고 부대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다만, 강원도 조방장 원호의 군사가 홀로 여주 북쪽의 언덕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쪽의 일본군들은 쉽게 도하를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강원도 순찰사 유영길이 불가항력을 자인하고 원호의 군사에게 강원도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토는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이 없자 병사 한 명을 시켜 북안에 매여 있는 나룻배를 가져오게 하여 이를 타고 수 명이 도하한 다음, 다시 여러 척의 나룻배를 남안으로 가져가 차례로 도하를 완료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은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쉽게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유도대장 이양원은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한양 방어를 포기하고 양주로 퇴각했다
이 무렵 충주 - 양근 - 용진을 거쳐 북상한 일본군 1번대는 북한강을 건너 5월 3일에 동대문 방면으로 진입하여 텅 빈 도성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이 때 일본군 제 2번대도 남대문으로 입성하여 도성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양의 크기
서울의 성곽은 전투용이 아니라 왕도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도성의 기능이 더 컸다.
방어전투를 위한 성채로서는 길이가 너무 길었다.
한양성을 쌓았을 때 전체 길이가 흙으로 쌓은 부분이 13KM(43,000척), 돌로 쌓은 부분이 5.8km(19,200척)로 모두 18.8km였다.
성벽의 높이는 험한 산 위에 돌로 쌓은 것이 4.5m 였다.
성은 서울 주변 백악, 인와, 목멱(남산),낙산등 4산을 이어 쌓았고, 동쪽에 흥인지문(동대문), 서쪽에 돈의문(서대문), 남쪽에 숭례문(남대문), 북쪽에 숙청문 등 4대 문과 그 사이에 동북쪽의 홍화문(동소문), 서북쪽의 창의문, 서남쪽의 소의문, 동남쪽의 광희문 등의 4소문이 있었다.
성을 쌓는 데 11만 8,000 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세종 때 증축 되어 전체 길이가 27km가 되었으며 성벽의 높이를 평균 12m 로 했다.
성벽 위에 적과 싸울 수 있는 성가퀴도 4,664개소나 만들었다.
한양성을 지키기 위해 무려 70 리에 이르는 이 성의 성가퀴에 활을 쏘는 사수 1명, 조수 1명, 예비병 1명 등 3명씩의 군사를 배치해도 모두 1만 4,000명의 병력이 필요했다.
일본군 점령 지역 군정 실시
한양을 함락한 일본군 제 1,2,3 번대 주력에 이어 모리 요시나리의 제 4번대 주력까지 입성하여 한양에는 일본군 병력 6만명이 주둔하였다.
제 5번대 이하 일본군 병력도 계속하여 부산에 상륙, 예정된 점령지역으로 진공해 들어갔다.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 재정비를 겸한 휴식을 취하면서 앞으로의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초,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면 조선의 왕을 포로로 잡거나, 아니면 항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고, 조선왕을 인질로 조선전역의 치안을 확보하고 조선군을 명을 치기 위한 선도부대로 삼으려 했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미 피난을 가버리고 빈 성만을 점령하게 되자 조선군의 협력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이에 5월 10일, 제 2군을 임진강 방면으로 보내 조선군의 반응을 살피면서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5월 16일,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성 점령의 보고를 받고 아직 대마도에 머물고 있던 제9군과 5천명의 증원군을 부산에 파견하고 제9군으로 하여금 부산지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5월 중순,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가 한성에 도착하여 제 1군을 평안도 방면으로 제 2군을 함경도 방면으로 북진을 계속하기로 협의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추인을 받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3일, 지휘체제를 개편하여 제 3군과 제 4군을 구로다 나가마사 지휘의 제3군으로 통합하고 기존 제 5군을 제 4(후쿠시마 마사노리), 제 5(하치스카 이에마사), 제 6군(쵸소카베 모토치카)으로 분할하고, 기존 제 6군은 제 7군으로 서열을 바꾸는 한편 기존 제 7군은 예비대로 전환시켰다.
이와 함께 다음과 같이 분지(分地)를 실시하여 점령지에 군정(軍政)을 실시하는 한편 남해 연안에 부산, 동래, 김해 등 전략 요충지에 왜성(倭成)을 12개의 본성과 6개의 지성으로 쌓는 한편, 현물납세(現物納稅)를 받게 시작하는 등 본격적인 장기 지배체재로 돌입하였다.
제 1군(고니시 유키나가) : 황국 - 평안도
제 2군(가토 키요마사) : 흑국 - 함경도
제 3군(구로다 나가마사) : 녹국 - 황해도
제 4군(후쿠시마 마사노리) : 황국 - 강원도
제 5군(하치스카 이에마사) : 청국 - 충청도
제 6군(쵸소카베 모토치카) : 적국 - 전라도
제 7군(고바야카와 타카가게) : 백국 - 경상도
제 8군(우키다 히데이에) : 청국 – 경기도
제 9군 : 후방 치안 및 예비대
P.S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사료로 본 임진왜란>
<한민족전쟁통사-3(국방군사연구소)
<한민족전쟁사총론>
에서 인용한 내용들입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위의 책들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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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겁니다. 전혀 대비된 모습이 아니군요. 초반에 몇몇의 용사들이 분전을 하나 개별적인 저항이었습니다. 조직적이지 못했고 비효율적인 저항인 까닭에 기능을 못했군요.
저항다운 저항은 동래성과 탄금대전투를 끝으로 거의 산발적인 수준으로 변합니다. 제승방략이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모르나, 대비치고는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10만 조선 기병은 다 어딜 갔는지.....가동이 되면 왜군은 관광보낼수 있는디...
첫댓글하하하...누가 미쳤다고 모든 병력을 한전선에 다 보냅니까??전에도 말했을 텐데요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경상도에서 모인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막을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신립과 이일을 보냈다고 그리고 그 사람들의 전쟁수행능력을 조선조정에서 알수있습니까??북방에서 활약한 것을 보고서 보낸거고
그리고 국방부 논문을 본적이 있는데 실록만을 참고로해서 전혀 동명이인의 인물을 동일인물로 취급하는 것을 보고서 웃었습니다 식년무과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을 보고서 그리고 그 논문에서는 제승방략에 대해서 오히려 좋게 평가하고 있더군요 다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체제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지만
패전이라는 것이 한두사람의 문제로 올수도 있으나 이 사람들의 패전이후에도 계속 밀립니다. 왕성탄 전투, 평양성전투 등등, 줄줄히 밀려납니다. 하도 이일이니 신립이니 하길래 좀 가져와 본 것입니다. 그리고 논문은 시간나시면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인터넷 검색하듯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일일히 카드
다 뒤져가면서 볼라면.. 논문이 아무리 허술하니 해도 학위논문은 그런대로 인정을 한 경우니 대체로 낫습니다. 그리고 한두가지의 실수를 바라보고 논문전체를 폄하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나도 어깨번호가 틀려서 핀잔을 많이 들었으나 대체로 맞는 사실을 쓴 경우는 인정해야 합니다.
첫댓글 하하하...누가 미쳤다고 모든 병력을 한전선에 다 보냅니까??전에도 말했을 텐데요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경상도에서 모인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막을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신립과 이일을 보냈다고 그리고 그 사람들의 전쟁수행능력을 조선조정에서 알수있습니까??북방에서 활약한 것을 보고서 보낸거고
이 사람들이면 그 정도 병력을 맡겨도 제대로 해낼 것 같으니 맡겨둔거고 그 사람들의 전쟁수행능력=조선의 군사력입니까??
그리고 국방부 논문을 본적이 있는데 실록만을 참고로해서 전혀 동명이인의 인물을 동일인물로 취급하는 것을 보고서 웃었습니다 식년무과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을 보고서 그리고 그 논문에서는 제승방략에 대해서 오히려 좋게 평가하고 있더군요 다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체제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지만
그리고 그곳에서도 저런 자료뿐만 아니라 최근자료 심지어 소설들에 나온 자료들도 올라옵니다 소설들의 경우 대부분이 욕을 먹고있고 국방부나 역사학자들의 자료들의 경우 여러가지 오류지적을 많이합니다
패전이라는 것이 한두사람의 문제로 올수도 있으나 이 사람들의 패전이후에도 계속 밀립니다. 왕성탄 전투, 평양성전투 등등, 줄줄히 밀려납니다. 하도 이일이니 신립이니 하길래 좀 가져와 본 것입니다. 그리고 논문은 시간나시면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인터넷 검색하듯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일일히 카드
다 뒤져가면서 볼라면.. 논문이 아무리 허술하니 해도 학위논문은 그런대로 인정을 한 경우니 대체로 낫습니다. 그리고 한두가지의 실수를 바라보고 논문전체를 폄하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나도 어깨번호가 틀려서 핀잔을 많이 들었으나 대체로 맞는 사실을 쓴 경우는 인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