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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반격
그곳에서는 시테섬이 자리잡고 있는 노트르담 성당이 잘
보였다.
시체가 발견된 곳은 노트르담 성당이 마주 보이는 강 건너
쪽이었다.
시체는 자루 속에 넣어진 채 얼어붙은 강 속에 반쯤 처박혀
있었다. 강을 따라 달리고 잇는 위쪽 차도에서 내던져지는
바람에 얼어붙은 수면이 깨어지면서 거기에 처박힌 것 같았다.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미국인 관광객이었다. 자루 속에
넣어진 채 반쯤 강 속에 들어가 있는데다 그 위에 눈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었는데
용케도 그 미국인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해서 자루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안에는
벌것벗은 여자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시체는 새우처럼 웅크린
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고 손발도
묶여 있었다. 목에도 줄이 칭칭 감겨 있었는데 젊은 동양계
여인이었다. 신원을 밝힐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전날 그러니까 1월 16일 파리 경시청은 한 건의 실종신고를
접수한 바 있었다. 실종자는 생제르맹 데 프레 거리에 거주하고
있는 오유린이라는 한국인 유학생이었고, 신고자는 그녀가
하숙하고 있는 집주인인 러시아 출신의 노파였다.
그 노파가 유린의 방을 노크한 것은 지난 13일 저녁때였다.
응답이 없자 그녀는 아래층으로 도로 내려왔다가 이튿날 아침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려보았다. 응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방을 비우지 않는 그녀가 웬일일까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피치 못할 일로 외박했거니 여기고 그냥
돌아섰다.
그 다음 날도 유린의 방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함께 하숙하고 있는 유무화라는 아가씨도 며칠 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16일 오후 노파는 마침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강제로 다락방 문을 열었다. 방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침대 시트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보고 노파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허둥지둥
내려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다녀가더니 얼마 후에 사복 차림의
형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노파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다음
방안을 살피고 나서 돌아갔다.
세느강에서 건져올려진 피살체의 사망 시간은 13일 밤 9시에서
12시 사이로 밝혀졌다. 사망 원인은 질식사였다. 실종 신고가
들어온 한국인 유학생의 실종일과 피살체의 사망일이 같은
날짜인 점, 양쪽이 모두 젊은 동양계 여자라는 점에 경찰은
주목했다. 노파는 시체를 한 번 확인해 달라는 경찰의 말에
처음에는 펄쩍 뛰었다가 그 집에 하숙하고 있는 일본인 청년이
함께 동행해 주겠다는 말에 비로소 경찰을 따라나섰다.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곳까지 따라들어간 그들은 피살체를 보고
오유린이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같은 하숙생인 유무화가 며칠째 종적을 감추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녀를 찾아나섰다.
밀라노행 열차는 오후 6시 15분에 출발했다.
동림과 무화는 제네바역 앞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다가 출발 10분 전에 밀라노행 국제열차에 올랐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들어온 그들은 이제 이탈리아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 열차는 한쪽에 통로가 나 있었고, 그 통로를 따라 방이
잇대어 붙어 있었다.
그들은 일등 칸에 들어가 앉았다. 방안에는 세 명씩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서로 마주보며 놓여 있었다.
그들은 창가에 서로 마주보며 앉았다. 열차가 출발할 때까지도
그 방안에는 그들 외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무화는 일어나
출입문 쪽에 커튼을 쳤다. 문도 안으로 걸어 잠갔다. 이제 통로
쪽에서는 방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다. 스팀이 들어와
방안은 따뜻했다. 날이 어두웠기 때문에 바깥 풍경은 어둠 속에
잠겨버리고 불빛들만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열심히 담배만 피워댔다. 무화는 남자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남자는 한사코 그녀의 시선을 피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어둠 속의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아마 어둠 속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이마에는 두 줄의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그를 정말 죽일 건가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녀를 쏘아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죽이면 정말 인하를 돌려줄까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다는 뜻인지 아이를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약속을 지킬 사람들이 아니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어리석게 그들의 약속을 믿고 있어요.
도대체 나보고 어쩌자는 거요?
그가 화를 바람에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의 곁으로
자리를 옮겨앉았다.
그녀는 몸을 움츠린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더이상
그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매우 의미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응하지 않아 안타까왔다.
국제열차는 어둠을 가르며 계속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국경역인 도모도소라역에 도착하자 이탈리아 관헌들이 차에
올라탔다. 열차는 다시 출발했고, 달리는 차 속에서 이탈리아
관헌들은 패스포트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노크소리에 커튼을 젖히고 문을 열어주자 두 명의 사복 차림의
사나이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이탈리아 관헌임을
증명하는 마크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아가씨는 한국인이고 당신은 일본인란 말인가?
작달막하게 생긴 그가 패스포트를 들여다보고 나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네, 그래요.
무화가 영어로 대답했다.
두 사람 어떤 사이인가요?
우린 결혼할 사이예요.
그녀가 동림의 팔짱을 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잿빛머리의 늙은 일본 남자와 젊은 한국인 처녀의 결합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패스포트를 돌려주고 나서 밖으로
사라졌다. 무화는 아까처럼 출입문을 잠그고 문에 커튼을 쳤다.
보세요. 알프스의 눈이에요.
그녀가 그의 곁에 붙어앉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창밖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달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 백설의 알프스는 신비스럽고 장엄해 보였다. 열차는
알프스 산맥을 숨가쁘게 넘어가고 있었다.
아주 조용하게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와 그녀의
상체를 감싸안았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품에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내어 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소리를 죽이느라고 무진애를 써야 했다. 그는 눈물에
흥건히 젖은 여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댔다. 두 사람의
얼굴이 포개지면서 뜨거운 눈물이 그들의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으면서도 남자 쪽에서도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사람 죽이지 말아요.
그녀가 울먹이는 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그는
그녀를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그럼 내 아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당신의
친구는......?
무슨 수가 있을 거예요.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방법은 없어.
그가 내빝듯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선생님은 모두 죽기를 바라시는 거에요?
그렇지는 않아.
그는 힘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의 지혜를 빌리고 싶어.
정말이세요?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더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나한테는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지혜가 없어요. 내
아들도 못 구하고 있는 처지야.
그녀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그는 힘을
느꼈다.
저한테 특별한 지혜는 없어요.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다고
보고 싶지는 않아요. 틀림없이 방법은 있어요. 용기와 지혜만
있다면 그 방법을 실천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서도 그는 신선한 힘을 느꼈다. 그런 힘을
느끼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사건에 휩쓸리고부터는 절망적인
기분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그 방법이라는 게 뭐지?
황표 그 사람을 우리 쪽에 끌어들이면 어때요?
그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을 죽일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
저들에게 대항하자는 거예요. 그 사람도 우리도 모두 막다른
골목까지 와있어요. 똑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뭉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절박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이해하고 통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잖아요. 그리고 세 사람이 뭉치면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에요.
열차는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하이웨이를 따라 달리고 있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멀리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그 사람과 우리는 본질적으로 달라요. 그 사람은
도망자이지만 우리는 도망자가 아니요. 그런 사람한테 무얼
기대한다는 거지?
그 사람은 조직에 대해 열쇠를 쥐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우리보다도 조직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그녀의 말은 옳은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가 그
자신보다도 판단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그는 차츰 경이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조직을 돈을 가지고 도망중인가 봐요. 아주
많은 돈인가 봐요. 그 돈을 미끼로 쓸 수 있을 거에요.
그 사람이 협조해 줄까?
그 사람도 현재 막판에 몰려 있어요. 그 사람하고 며칠 함께
지내면서 느낀 건데...... 그 사람 돈만 많이 가지고 있다뿐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요. 그 돈때문에 더욱 그러는 것
같아요. 돈에 짓눌려 어쩔줄 모르는 사람 처음 봤어요.
도망치는데도 지쳤나봐요. 저보고 죽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어요. 한국에 몹시 돌아가고 싶어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지금
도피 생활에 한계를 느끼고 있어요. 저를 만나고 싶어하는 건
불안을 잊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아요. 제가 그 사람을 잘 설득해
보겠어요.
불빛이 갑자기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더이상 그녀의
의견에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밀라노에서 로마행 열차로 바꿔타야 했다.
밤늦은 시각인데도 밀라노 역은 장터처럼 붐비고 있었다. 10분
전 11시였다.
그들은 긴 여행에 지쳐 있었다. 그러나 온 것만큼이나 더 가야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 명의 감시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시야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자들을 묵살해
버리기로 했기 때문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로마행 열차는 23시 50분에 있었다. 로마까지는 아홉 시간이나
걸리는 긴 여행이다. 출발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들은 역 구내에 있는 스낵코너에 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주린 배를 채웠다.
잠깐 기다리세요. 파리에 전화를 걸고 오겠어요.
그녀의 움직임이 빨랐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미처 막지
못했다. 홀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수배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국제전화를 걸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전화국은 대합실 한쪽에 있었다. 무화가 전화국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검은 장미가 어느 새 다가와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거긴 뭐하러 들어가기? 어디다 전화걸려고 그러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두 사나이가 그녀를 위협적인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이거 놔요!
무화는 앙칼지게 쏘아붙이면서 여인의 손을 뿌리쳤다.
경찰에 전화거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너무 다정하게 굴지 마. 저 남자하고 말이야.
그녀가 스낵코너 쪽을 턱으로 가리켯다.
무화는 거기에 대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밀고
전화국 안으로 들어갔다.
전화국 안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녀는 파리의 생제르멩 데 프레 거리에 있는 러시아계 노파의
집에 국제전화를 신청했다. 혹시 그 하숙집에 오유린에 대한
소식이 들어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녀가 그 시간에
그곳에다 전화를 신청했다는 것은 매우 잘한 짓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주 적절한 때에 전화를 걸었다고 할 수
있었다.
5분쯤 기다리고 있자 전화국 직원이 그녀를 가리키며 8번
박스로 들어가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그녀가 8번 박스로 들어가
수화기를 집어들자 러시아 노파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화가 이름을 대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노파가 너무 빠른
어조로 많은 것을 지껄여댔기 때문에 무화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번쯤 듣고 나서야
그녀는 오유린이 살해되었으며 경찰이 그녀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빨리 와! 빨리 오란 말이야!
노파는 큰 소리로 외쳐댔다. 무화는 노파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어디서 죽었다는 거예요? 좀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끔찍해! 생각만 해도 끔찍해! 세느강에 빠져 죽었어! 경찰이
그러는데 목졸라 죽였대! 자루 속에 넣어가지고 강가에다
던졌어! 여기 경찰이 기다리고 있어! 전화 바꿔줄 테니까
기다려!
마드모아젤...... 파리 경시청의.......
프랑스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화는 그만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동림은 무화가 창백한 얼굴로 허겁지겁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숙집에 전화걸었는데...... 유린이.......
무화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떨면서 더듬거렸다.
동림은 그녀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유린이 죽었대요.
그녀는 가까스로 그 말을 꺼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이상한 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울지 않는 게 좋겠어. 태연히 침착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돼요. 보는 눈들이 많으니까.
그녀는 울음을 몇번씩이나 삼켰다.
그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곤란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야.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야.
목졸려 죽었대요. 세느강에서 시체를 건져 올렸대요. 경찰이
나를 찾고 있어요.
도망가요. 그 아가씨가 죽은 이상 그들의 지시에 따를 필요가
없잖아.
싫어요!
그녀는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그들의 지시에 따르지도 않을
거구요.
경찰에 신고할 거요?
아뇨!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하고 함께 행동하기로 했잖아요.
나는 당신의 목숨까지 책임질 수 없어요.
언제 제 목숨까지 책임져달라고 했나요.
담배에 불을 붙이는 그녀의 손 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자 그는 그녀의 한쪽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아무리 악마들이라고 해도 연약한 여자를 그렇게
죽이다니...... 세느강에 버려져 있었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런 일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몸을 떨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침착해요. 놈들이 눈치를 채면 위험하니까 침착하게
행동해요.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슬퍼해요.
그의 냉담한 말에 그녀는 그의 손을 홱 뿌리치면서 몸을
도사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차갑게 쏘아붙였다.
인하도 이미 죽었을지 몰라요. 저자들이 인질까지도 무참히
죽인다는 거 이제 증명됐잖아요.
그 말에 그는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한참
그렇게 쳐다보는 그 눈에 물기가 번지는 것 같더니 이윽고 그는
고개를 돌려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경련이 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자신이 너무 잔인한 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진정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인하는......
살아있을 거예요.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가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는 더럭 겁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엉뚱한 행동을
취할까봐 적이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그는 의외로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가봐요. 당신 갈 데로 가요. 당신이 나하고 함께 있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안 돼요. 저들이 감시하고 있어서 안 돼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제발 도망쳐요. 우리가 함께 행동해야 할
이유는 없어졌어요. 내 아들이 주겅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지시에 따르면서 기다릴 거요. 더이상 나와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위험해요. 제발 가줘요.
그럴 수 없어요. 난 가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은 제
도움없이는 안 돼요. 그들의 지시대로 따르면 안 돼요. 그들의
지시대로 따른 결과가 결국은 유린의 죽음으로 나타났어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결국 인하도 죽어요. 인하를 살리고
싶으면 그들과 싸워야 해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그들과 대항할
수 있어요.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의 두눈은
얼어붙은 듯 한동안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선생님만 허락하신다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더이상 경련이 일지
않고 있었다.
황씨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 보겠어요.
그것은 그녀가 두번째로 하는 말이었다. 열차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올 때도 그녀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 사람을 죽인다 해서 인하를 찾으 수는 없을 거예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듯 빛나기
시작했다.
1월 18일 아침 파리.
한국 시간 1월 17일 저녁 9시에 출발한 서울발 파리행 KAL기는
정시보다 15분 늦은 파리 시간 18일 아침 8시 40분경에
드골공항에 도착했다.
눈은 그쳐 있었고 곳곳에서는 제설작업이 한창이었다.
노경감과 마형사는 입국 수속을 마치고 출구 쪽으로 향했다.
경감은 초행길이 아니기 때문에 별로 두리번거리지 않았지만
마형사는 파리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호기심에 아득 찬 눈으로
여기저기를 살피면서 따라왔다.
출구 저쪽에서 한 사나이가 경감을 발견하고 손을 번쩍
쳐들어보였다.
살레 부장이었다. 경감도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출구를
빠져나간 그는 살레 부장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마형사도
살레 부장과는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반갑게 인사했다. 살레
부장은 그들에게 브리앙 차장을 소개했다.
조금 후 그들은 브리앙 차장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전화를 받고 브리앙 차장이 발신처를 찾아갔는데 교외에 있는
레소레 호텔에 투숙한 손님이 건 전화로 확인됐습니다. 신원도
확인됐는데 바로 찾고 계신 김명기라는 자였습니다.
살레 부장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하고 브리앙 차장이 말했다.
어디로 도주했나요?
살레 부장은 두손을 벌려보였다.
모릅니다. 갈만한 도주로를 차단하고 검색을 벌였지만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공항과 항만, 그리고 국경역에서도 검색을
실시하고 있지만 아직 걸려들지 않고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이미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잇으니까 어디에 숨어 있지 않는
한 수사망에 걸려드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 여권을 가지고
오래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겁니다.
만일 그가 다른 여권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되면 문제가 달라지지요. 다른 여권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나요?
경찰이 추적하고 있는 걸 알면 그 여권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게싲요. 김명기라는 이름으로 된 여권도 실은 위조여권입니다.
적어도 두개 이상의 위조여권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위조여권의 인적사항을 알고 계십니까?
모릅니다.
경감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인물은 어떤 인물입니까? 본명은 뭡니까?
트라이어드에서의 위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경감은 그 물음에 답하기가 몹시 난처했다. 살레 부장은
추동림이 국제 마약조직인 트라이어드의 대원인 줄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물음을 회피할 수도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려면 긴 설명이 필요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는 매우 불행한
사나이입니다. 본명은 추동림이라고 합니다.
시내로 통하는 고속도로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그래서
차들은 몹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같은 날 아침 로마.
밀라노를 출발한 열차는 아홉 시간의 긴 여행 끝에 마침내
로마역 구내로 천천히 들어섰다. 플랫폼에 서있는 전자시계가
아침 8시 5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림과 무화는 따로따로 열차에서 내려 한 사람은 역광장을
가로질러 가고 한 사람은 택시를 타고 포폴로 광장으로 향했다.
동림은 광장을 가로질러 간 다음 길을 건너가려다가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금테안경의 동양인이 열심히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여자와 잿빛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화를
따라간 모양이었다.
동림은 길을 건너갔다. 그때까지 그는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길을 건너자 그는 재빨리 지하도로 내려갔다. 트렁크가
움직이는데 많은 장애가 되었다. 동양인이 허덕거리면서 뒤따라
왔다. 동림은 도로 계단을 올라갔다.
왜 이러는 거야?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동양인이 그의 곁으로 따라붙으면서 영어로 물었다.
다리운동을 좀 하는 거요.
허튼 수작하지 마. 그런 짓하면 재미 없어. 여긴 내 구역이나
다름없어. 로마에는 내 부하들이 쫙 깔려 있어. 신호만 하면
달려올 거야. 잠자코 내 뒤를 따라와. 조금 떨어져서 따라와.
내가 지정한 호텔에 들어가 있어.
지하도에서 벗어난 동양인은 다시 길을 건너 돌이 깔린 좁은
길로 들어갔다. 그 뒤를 동림은 10여 미터쯤 떨어져서 따라갔다.
이윽고 동양인은 제노바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삼류호텔로
들어갔다. 동림이 뒤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그 동양인은
프런트맨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잇엇다. 이탈리아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했다.
동양인이 벨맨에게 뭐라고 말하자 벨맨이 동림의 트렁크를
받아들고 그를 방으로 안내했다. 동양인은 따라오지 않았다.
10분쯤 지나자 동양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오른손을 코트
주머니 속에서 빼지 않았다. 그 속에 권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동림과 거리를 유지하고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경계가 심해졌다고 동림은 생각했다.
조금 후에 전화벨이 울렸다. 동양인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동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나서 그가 말했다.
내 부하 네 명이 이리로 올 거야. 그들이 너를 보호해
줄거니까 안심하고 그들과 함께 행동해.
동림은 그들의 손길을 벗어나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무기가 될만한 것이
없을까하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만년필과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수첩을 펴놓고 무엇인가
부지런히 적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동양인이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동림이 대꾸하지 않고 계속
끄적거리고 있자 그가 다시 물었다.
유서를 쓰고 있는 거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동림은 영어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 게 무슨 필요가 있어.
동양인이 빈정거렸다.
나한테는 가족이 있으니까. 당신은 신사니까 이 유서를 내
가족들한테 전해줄 수 있겠지.
동림은 수첩에서 유서를 적은 페이지를 찢어냈다.
이걸 꼭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는 그것을 들고 동양인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의
오른손에는 종이쪽지와 함께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동양인은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긴 했지만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였다. 종이를 손에서 놓는 것과 동시에
동림은 만년필 끝으로 상대방의 왼쪽 눈을 힘껏 찔렀다.
날카로운 펜끝은 사정없이 눈알을 파고 들었다.
으악!
동양인은 비명을 지르면서 두 손으로 왼쪽 눈을 움켜쥐었다.
그의 비명은 너무도 처절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동양인은
눈을 감싸쥔 채 의자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동림은 동양인이 고통에 못이겨 몸부림치는 것을 잠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미 그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동양인은 그 고통
속에서도 코트 주머니 속에 오른손을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동림은 구두 끝으로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동양인은 몸을
우그리면서 경련했다.
그놈은 지금 어디 있지?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다른 쪽
눈도 찔러버릴 테다.
누, 누구 말이야?
그가 헐떡거리면서 물었다.
동림은 허리를 굽혀 만년필 끝으로 그의 목을 찔렀다. 조금만
힘을 가하면 그것은 사정없이 목을 뚫고 안으로 들어갈
판이었다.
이 만년필이 다 들어가기 전에 말해. 나를 한국에서 이곳으로
보낸 그자는 어디 있지. 미스터 Y라는 암호를 가진 그 한국놈
말이야. 그놈은 틀림없이 유럽에 와있어. 그렇지? 그놈이 있는
곳을 말해 봐!
펜 끝이 목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자 검붉은 피가 잉크에 배어
흘러나왔다.
내...... 내일...... 레오나르도 공항에.......
동양인은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똑똑히 말해 봐! 알아들을 수 있게 똑똑히 말해 봐!
동림은 더 깊이 만년필을 찔러넣었다.
내일...... 3시......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해...... 아직 오지 않았어...... 내일 오후 3시.......
누가 어디서 온다는 거야?
그 사람이 한국에서.......
무슨 비행기야?
JAL기.......
틀림없나?
틀림없어...... 그만...... 살려줘요...... 제발.......
동림은 상대의 코트 주머니 속에서 권총을 빼냈다.
그자의 진짜 이름은 뭐지?
진짜 이름은 모릅니다...... 그냥 뱅커로 통하고 있습니다.
제발 살려줘요.......
살려주고 말고.
동림은 만년필을 끝까지 밀어넣었다.
동양인은 몸부림치다가 차츰 움직임이 둔해져 갔다.
동림은 잠시도 그곳에서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짐을 들고
급히 방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데
프런트맨이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벌써 가십니까?
동림은 트렁크를 흔들어보이며 히히하고 웃었다.
서두르면 더욱 의심을 살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천천히
호텔을 빠져나왔다. 마침 호텔 앞에는 빈 택시가 서있었다. 그는
택시에 올라탔다.
갑시다. 트레비 분수가 있는 쪽으로!
택시가 출발하자 호텔 안에서 벨맨이 한 명 뛰쳐 나왔다. 그는
멀리 사라져가는 택시를 향해 주먹을 흔들며 뭐라고 소리쳐댔다.
빈 택시라도 있었으면 그것을 집어타고 뒤쫓아갈 기세였지만 빈
택시가 나타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벨맨은 포기하고 도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벨맨인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프런트맨의 눈짓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프런트맨이 눈짓을 보내자 그는 즉시 5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505호실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주먹으로 방문을 쾅쾅
두르리자 안에서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때 옆방에서
미국인 노부부가 나와 겁에 질린 얼굴로 505호에서 비명소리가
여러 번 났었다고 말해 주었다.
벨맨이 아래 층으로 내려왔을 때 잿빛머리의 그 동양계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프런트맨이 노인이 택시를 타고 떠났다고
일러주었다. 벨맨이 밖으로 뛰여나갔을 때 그 노인이 탄 택시가
모퉁이를 돌아 차량의 홍수 속으로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벨맨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프런트맨은 505호 실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빨리 올라가봐!
그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벨맨에게 말했다.
두 명의 벨맨이 마스터 키를 들고 5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마스터키로 505호실 문을 열었을 때 동양인은 방문
앞에까지 기어와 있었다. 그가 기어온 곳의 카핏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프런트맨은 그 동양계 노인이 타고간 택시 번호를 외고
있었다.
노인을 트레비 분수 앞에 내려주고 골목을 빠져나온 젊은 택시
운전사는 무전기의 신호음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차를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히 그의
택시 번호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무전기를 들고 거기에
응답했다.
제노바 호텔 앞에서 태운 손님, 지금 함께 있나?
아니다. 조금 전에 트레비 분수 앞에 내려주었다.
그 사람은 살인자다! 빨리 가봐!
나보고 그 사람을 잡으라는 거야?
아무튼 가봐! 그 사람이 거기에 있으면 미행할 수 있는
데까지 미행해 봐!
미행해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경찰이 보이면 즉각 체포하라고 말해줘.
운전사는 방향을 돌려 다시 트레비 분수 쪽으로 가보았다.
그러나 그 동양계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분수 주위에는 관광객들로 들끓고 있었다.
운전사는 무전으로 그 살인자를 찾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만년필에 참혹하게 찔린 동양인은 병원으로 실려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레오나르도...... 라는 한 마디였다.
경찰은 그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어떤 행동을 취하기가
너무 막연했다.
트레비 분수에서 택시를 내린 동림은 다른 택시로 바꾸어 타고
역으로 향했다.
역 대합실 한쪽 구석에 한 시간쯤 앉아 있자 유무화의 모습이
보였다.
겨우 빠져나왔어요.
무화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미행은 없소?
미행을 따돌리느라고 이렇게 늦었어요.
황가한테서는?
아직 연락이 없어요.
테베레 호텔에 예약은 돼 있었소?
네, 609호실에 투숙했어요.
그녀는 테베레 호텔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쪽지를 그에게
주었다.
그들은 어디에 투숙했소?
바로 옆방에 들었어요. 610호실에 투숙했어요. 몰래 빠져
나왔는데 그 외국인이 저를 발견하고 쫓아왔어요. 상관하지 않고
도망쳐 왔어요. 그쪽은 어떻게 됐어요?
그자는 지금쯤 아마 죽었을 거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해치웠어요. 만년필로.......
그들은 역 대합실을 나와 한참 걸어가다가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그들은 점심 식사를 시켰다.
그자한테서 들었는데...... 내일 오후 3시에 내 아들을
납치한 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할 거라고 했소.
JAL기편으로.......
사실일까요?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어요.
어떻게 확인하죠?
그 검은 옷 입은 여자의 입을 열게하면 돼요.
그들은 피자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그 외국인이 항상 붙어 있어서 쉽지 않을걸요.
그자를 유인해 내어 따로 떨어져 있게 하든가 그자를 먼저
없애버리든가 해야겠어요.
그녀는 동림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시간이 없어요. 황가한테서 연락이 오면 그를 설득시키는데
시간이 또 필요할 거요.
어떻게 그 동양인을 죽였는지 말씀해 주세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
듣고 싶어요.
그녀는 포크를 놓고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는 그녀를
쏘아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가 그 동양인을 어떻게 죽였는지 이야기하는 동안 그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에 대해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이야기가
별로 무섭지가 않았고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그가 조금도 무섭게
생각되지 않앗다. 무섭게 생각되기는 커녕 오히려 해야할 일을
당연히 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윽고 그가 이야기를 모두 끝냈을 때 그의 결단력과 담대함에
그녀는 크게 감동하고 말았다. 그와 함께 그처럼 선량하게 생긴
사람의 어디에 과연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 있는 잔인함과
용기가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로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소. 사람을
죽인다는 건...... 상대가 누구이든...... 정당한 일이 될 수
없어요...... 결코 정당한 일이 아니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기 때문에 한 일 아니예요?
그녀가 그의 행위를 두둔하려고 하자 그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이유가 될 수 없어요. 나는 지금까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사람을 적잖게 죽여왔어요. 월남전
때부터...... 사람을 죽이게 됐어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왜 나한테는 그 어쩔 수 없는 이유라는 것이 자꾸만
생기는 걸까요? 그게 내 운명일까요? 내가 내 과거를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기는 처음이오. 내 아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결코 자랑할 일이 못되었기 때문에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그에게 그의 과거를 들려달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그의 과거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왠지
그녀에게만은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거의 같은 시간, 파리.
네 명의 사나이들은 샹젤리제 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막 점심 식사를 들고 있었다.
살레 부장과 브리앙 차장은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고 있었지만 노경감과 마형사는 벌써부터 양식에
질려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고 있었다.
설렁탕 생각이 간절한데요.
마형사의 중얼거림에 경감은 포크를 집어들었다.
먹어둬. 차츰 나아질 거야.
그들이 한국말로 자기끼리 대화를 나누자 살레 부장이 무슨
말인가 싶어 그들을 쳐다보았다. 브리앙 차장은 열심히 고기를
썰고 있었다.
참, 한국 유학생이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더군요.
살레 부장이 생각난 듯 말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보시겠습니까?
브리앙이 식사하다 말고 의자 위에 코트와 함께 놓아둔
르몽드지를 집어 여기저기 뒤적이더니 그것을 경감에게
내밀었다.
여깁니다. 한국에서 유학온 여학생인데 자루 속에 넣어져
세느강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경감은 신문을 받아들고 거기에 실린 젊은 여자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안경을 낀 그 얼굴은 몹시 연약해 보였다.
쯧쯧......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까지 와서 살해되다니, 정말
안 됐는데요.
마형사가 혀를 차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같은 동포로서
볼 때 그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불어를 모르닌 내용을 알 수 있나. 영어로 번역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경감의 요청에 브리앙 차장은 그 기사를 영어로 바꾸어 재빨리
읽기 시작했다. 그는 불어 못지 않게 영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다.
납치되어 살해된 모양입니다.
기사를 다 읽고 나서 브리앙이 말했다.
마형사는 수사관의 본능으로, 피살된 오유린의 인적사항과
행방을 감춘 유무화의 인적사항을 수첩에다 적어넣었다. 한국
아가씨들이 한 명은 참혹하게 살해되었고 또 한 명은 행방을
감추었는데 같은 한국인으로서, 더구나 수사관의 입장에서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브리앙이 그 신문기사를 오려서 마형사에게
주었다.
우리 한국 유학생이 피살됐다니까 왠지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는군요. 우리 소관은 아니지만.......
경감이 살레 부장의 눈치를 보면서 말하자 살레는 충분히
이핼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같은 국민이 피살됐는데 당연한 일이죠.
필요하다면 그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경감은 굳이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고 그 정도로 인사해
두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친 브리앙이 잠자코 밖으로 나가더니 다른
신문을 하나 사들고 돌아왔다. 르 휘가로지였다. 그 신문에도
한국 유학생 피살사건이 실려 있었는데 르몽드지에 실린 것보다
좀더 크고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피살자 외에 또
한 명의 한국 여성, 그러니까 유무화의 사진까지 실려 있었다.
프랑스 경찰은 오유린의 피살을 전후해서 행방을 감춘 유무화를
찾고 있는데 그녀가 로마에서 하숙집으로 국제전화를 걸어온
것을 포착, 인터폴과 이탈리아 경찰에 그녀를 수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 아가씨 너무 불쌍한데요.
마형사가 오유린의 사진을 가리키며 말하자 경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로마지역 인터폴 책임자인 눈치오 부장은 3시경에 심복인
카르딜레의 보고를 받았다.
제네바 호텔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피살자가 수배중인
트라이어드 간부 같다고 해서 병원 가봤습니다. 피살자는 병원에
운반되는 도중에 숨이 끊어졌는데 가보니까 수배중인 중국인
왕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끔직하게 살해된 것은 처음
봅니다. 범인은 만년필 하나로 왕을 해치웠습니다. 왼쪽 눈에
만년필에 찔린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목에 만년필이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만년필 하나가 다 들어갈 때까지 그것을 목에 밀어
넣었더군요. 만년필로 해치운 것을 보면 범인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왕의 권총 케이스가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범인이 권총을 빼내간 것 같습니다.
눈치오 부장은 몇 올밖에 남지 않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범인은 도망쳤나?
네, 신원은 밝혀지지 않고 늙은 동양인 남자라는 것만
밝혀졌습니다. 다행히 목격자가 있어서 지금 몽타즈를 만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왜 갑자기 동양인들이 말썽을 부리고 있지? 잡아다가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다 집어넣으면 알맞을 것들이 말이야.
눈치오 부장은 동양인을 몹시 싫어했다. 흑인보다도 더
싫어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인을 제일 혐오하고 있었다.
트라이어드 간부가 살해됐으니 우리가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됐군.
네, 그렇습니다.
국제 마약조직인 트라이어드 간부가 살해됐으니 자연 수사가
국제적인 성격을 띨 수 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책상 위에는 다른 동양인들에 대한 수배
의뢰서가 도착되어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김명기라는 한국인에 대한 수배의뢰서였고, 다른 하나
역시 유무화라는 한국인 아가씨를 찾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이제 트라이어드 간부인 왕가의 피살사건이
겹치게 된 것이다.
한국인 김명기와 유무화에 대해서는 그는 이미 부하들에게
수배 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한 사건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각기 다른 사건의 관련자들인 것
같았다. 그들에 대한 수배를 의뢰해온 사람은 파리지역 책임자인
살레 부장이었다. 그는 살레 부장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데데하고 무례한 데가 있는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고, 그런 감정을
공적인 일에까지 끌여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눈치오 부장의
생각이었다.
이번에 피살된 중국인 왕가는 오래 전부터 1급 수배리스트에
올라 있는 마약계의 거물이었다. 그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전역에 조직을 확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는
마약 외에 네 건의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눈치오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국인 김명기에 대한
수배의뢰서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팩시밀리로 전송되어온
것이었다. 거기에는 김명기라는 인물의 사진과 함께 그가 중요한
마약사범임을 강조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눈치오 부장은 이윽고 파리의 인터폴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그는 급하다고 말했다. 살레 부장은
외출중이었다. 급히 연락해줄 것을 부탁하고 전화를 끊은지
10분쯤지나 살레 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배중인 한국인 김명기가 혹시 트라이어드계 아닌가요?
눈치오는 설명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갑작스런
물음에 살레는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침착을
되찾고
네, 트라이어드계라기보다 거기에 관련이 되어 있지요. 하고
말했다.
내 직감이 맞군요.
눈치오는 살찐 턱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늘 아침 중국인 왕평이 살해됐습니다.
그래요?
살레 부장의 놀라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눈치오는 말을
이었다.
네, 만년필로 참혹하게 살해됐습니다.
만년필로요?!
왕평에 대해서는 살레 부장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오래전부터 그 악한을 추적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범인은 도주했는데...... 동양인으로 밝혀졌습니다. 목격자가
있어서 지금 몽타즈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 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몽타즈가 작성되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럴 게 아니라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로마에 직접 오시겠다는 겁니까?
네,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눈치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살레 부장이 당장 로마로 오겠다는 말을 듣고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가 그렇게 서두르는 것으로 보아 꽤나 다급한
사정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파리 놈들이 이리로 오겠다는 거야. 서두르는 것이 뭐가 있는
모양이야. 맞을 준비를 해야겠지.
부장의 카르딜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생각난 듯
말했다.
왕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는데 레오나르도라는
말이었답니다.
레오나르도라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을 가리킨 말 같습니다.
공항에 누가 도착한다는 거야 아니면 떠난다는 거야?
시간은?
그런 건 말하지 않았답니다.
눈치오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리에서 거구를 일으켰다.
그것만 가지고는 너무 막연해. 하지만 공항에 인원을 배치할
필요는 있겠지.
검은 장미는 초조해졌다. 왕으로부터 연락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정 연락처로 되어 있는 곳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무화가 도주한 바람에 문제는 심각해져 있었다.
왕에게 그 사실을 빨리 알려야 하는데 갑자기 그와의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잿빛머리는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자기 생각을 제시할 줄 모르는,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는
로보트 같은 인간이었다. 로마의 여인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는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더욱 가슴이 답답해왔다.
저 방에 가있어!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저 방에 가
있어!
그녀가 소리치자 사냥개가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밀로
610호실로 사라졌다. 그는 그녀가 아무리 모욕을 줘도 모욕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심지어 따귀를 갈겨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사냥개였다.
이년 잡히기만 해봐라.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말테야!
로마의 여인이 성난 암캐처럼 방안을 빙빙 돌아가고 있는데
옆방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날쌔게
옆방으로 뛰어들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사냥개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쳐다보았다.
나...... 무화예요.
유무화의 목소리에 그녀는 멈칫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어디 있지?
로마의 여인은 숨을 죽이고 물었다.
그건 알 필요없어요.
뭐라고? 너 지금 죽으려고 환장했니?
죽긴 왜 죽어. 난 살 거야.
그러지 말고 빨리 와. 지금이라도 오면 용서해줄 테니까 빨리
와. 유린을 살리고 싶으면 빨리 와. 전화가 여러 번 걸려왔어.
황가한테서 온 전화일 거야. 일부러 받지 않았어.
무서워서 못가겠어요. 그 남자를 보면 난 질식할 것 같아요.
무서울 것 없어. 이제라도 오면 용서해 주겠어. 빨리 와서
황가의 전화를 받아.
당신 말을 어떻게 믿어요. 당신 같은 악마의 말을 믿느니
차라리 멀리 도망가겠어요.
그러면 오유린은 어떻게 되지? 유린을 죽게 내버려둘
셈이야?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지금까지는 그애 때문에 내가
곤혹을 치렀지만 이젠 그렇제 하지 못하겠어. 유린이 죽건 살건
난 모르겠어.
그래? 알았어. 그렇다면 좋아. 그렇다고 해서 네가 안전할 줄
아니? 넌 어디를 가든 우리 손을 벗어날 수 없어. 절대 벗어날
수 없어. 세계 전역에 우리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넌 알아야 해. 오유린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될 거야.
너때문에.......
악마!
외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로마의 여인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바들바들 떨었다.
협박이 더이상 먹혀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로부터 두 번 다시 전화가 걸려오지 않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당신은 내 마음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수화기를 들자마자 무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보다는 훨씬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왜 이해할 수 없어. 난 누구보다도 무화의 현재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이해해. 같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는
거야. 내가 하고 싶어서 이짓을 하는 줄 알아? 전혀 그렇지
않아. 나도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야.
나도 하루 빨리 이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죽지 못해 이짓을
하고 있는 거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시키는 대로 하는 수
밖에 없어. 그러다가 기회를 봐서 탈출하는 거야. 내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무화를 아끼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그러니까 무화도 당장은 괴롭겠지만 우선 시키는 대로 하는게
자신을 위해서도 좋을 거야. 그것이 유린을 살릴 수 있고 무화도
구할 수 있는 길이야. 이 조직은 정말 무서운 조직이야. 단순한
범죄조직이 아니야. 같은 한국인으로서 무화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내 말대로 해.
그녀는 협박 대신 무화를 회유했다. 그것이 먹혀 들어갔는지
무화는 아까처럼 반발하지 않고 수그러든 태도를 보였다.
잘 알아들었어요.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그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 외국인을 내보내세요. 내 눈에 뜨지 않게 해줘요.
사실은 그 사람이 무서워서 도망친 거에요. 그 사람이 거기에
있는 한 난 거기 안 들어갈 거예요.
알았어. 당장 내보내겠어.
내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돼요.
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거지?
난 지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있어요. 그 사람을 지금
당장 멀리 보내버려요. 리스본쯤에 보내버려요.
알았어. 보내지.
내눈으로 직접 확인하겠어요. 그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것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거기에 가지
않겠어요.
로마의 여인은 무화가 이상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그 이상한 요구에 대해 곰곰 따져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여유도 없었고, 어떻게 하든 무화를
빨리 돌아오게 하는데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무화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거지?
그 사람을 공항으로 보내세요. 그 사람을 여기서 만나서 그
사람이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겠어요. 그렇게 하려면 물론 그 사람을
만나야겠지요. 하지만 그 기회를 이용해서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공항에서 그 사람이 나를 해치든가
납치하려고 하면 나는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할 거예요.
공항에는 경찰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즉시 체포되고 말
거에요.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아야 해요.
지금 누구하고 있지?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야?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 남자 친구예요. 그 친구가
공항에서 나를 지켜줄 거예요.
황금의 초생달은 어디 있지?
몰라요. 나보다도 당신들이 더 잘 알 거 아니예요?
알았어. 공항으로 보내겠어.
그리고 또 있어요.
또 뭐지?
그 남자를 보내고 나서 다른 남자를 끌여들여서는 안 돼.
당신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난 당신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거예요.
알았어. 나혼자 있을 테니까 빨리 와줘.
앞으로 나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문하지 말아요.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다시는 협조하지 않을 거예요.
알았어. 절대 건드리지 않겠어. 그대신 나도 요구조건이
있어.
뭐예요?
그 남자 친구를 여기에 데리고 오면 안 돼.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아요. 그 외국인을 빨리
공항으로 보내줘요.
통화를 끝내고 그녀는 잠시 난감한 표정으로 잿빛머리를
쳐다보고 있다가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잿빛머리 사나이는
무표정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모자와 코트를 들고 있어섰다.
압델, 비행기를 타는 척하다가 빠져나와야해. 공항에서
그애를 해칠 생각은 하지 마. 잘못하다가는 경찰에 체포되니까
그 애가 시키는 대로 해. 빠져나오는 대로 빨리 달려와 줘.
압델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는
밖으로 나갔다.
그때 무화는 동림과 함께 테베레 호텔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는 포폴로 호텔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호텔 방안에서 창문을
통해 맞은편 테베레 호텔의 정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윽고 잿빛머리 사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화는
재빨리 망원경을 동림에게 넘겼다. 동림은 망원경을 눈에다
갖다댔다. 잿빛머리 사나이가 막 택시에 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택시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그는 망원경을 눈에서 거두었다.
떠났소.
제가 먼저 나가겠어요. 10분 후에 나오세요.
무화는 거침없이 밖으로 사라졌다.
동림은 그녀가 광장을 가로질러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10분 후에 방을 나섰다.
호텔 밖으로 나온 그는 중절모를 푹 눌러쓴 다음 코트 주머니
속에 두 손을 깊이 찔러넣었다. 그는 광장을 가로질러 가지 않고
건물의 테라스 밑으로 해서 빙 둘러갔다. 될수록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이었다.
이윽고 테베레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무화가 로비 라운지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동림도 라운지로 가서 모자를 벗고
무화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라운지에는 별로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있자 호텔
앞에 대형 관광버스가 와닿더니 한떼의 사람들이 호텔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미국인 관광객들이었다. 그 바람에 호텔 로비와
라운지에는 금방 사람들로 북적대기 시작했다 프런트 계원들과
벨맨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 무화와 동림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609호실과 610호실을 가로막고 있는 벽에는 필요할 때 두 방을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는 문이 달려 있었다. 로마의 여인은
610호 실에 들어가자마자 두 방을 통할 수 있게 그 문에
장치되어 있는 자물쇠를 열어놓았었다.
609호실 열쇠는 프런트에 있었다. 그것은 무화가 외출하면서
거기에 맡겨두었었다. 그녀는 프런트 계원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 열쇠를 찾는 것을 그만두었다.
로마의 여인은 노크소리에 긴장했다. 노크소리는 609호실
문에서 나고 있었다. 610호실에 있던 그녀는 옆방과 통해 있는
문을 지나 609호실로 급히 들어갔다. 계속해서 노크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녀는 문으로 가만히 다가가서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놀랍게도 문 앞에는 무화가 서있었다. 지금 공항에
있어야 할 그녀가 방문 앞에 서있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곰곰 따지고 있기에는 그녀는 너무
초조하고 다급했다. 문 앞에는 무화 혼자 서있는 것 같았다.
그녀 혼자라면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활짝 열지 않고 쇠줄 고리를 걸어놓은 상태에서 조금만 열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밖을 살펴보았다. 복도에는 무화 혼자
서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공항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는 문고리를 벗기면서 물었다.
안에 들어가서 말하겠어. 비켜요.
무화가 거세게 문을 밀어젖히는 바람에 그녀는 하마터면 뒤로
쓰러질 뻔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었을 때 무화 뒤에
황금의 초생달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미처 행동을
취하기 전에 동림의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정통으로
얼굴을 맞은 그녀는 한 바퀴 뒤로 구른 다음 비틀거리며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동림이 그녀의 복부를 세게 걷어차는
바람에 그녀는 무릎을 꺾으며 엎어졌다.
그놈은 죽었어. 동양인 말이야. 내가 죽였어.
그녀는 황금의 초생달이 나직하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동림은 라디오 볼륨을 크게 해서 틀어놓았다.
유린이 죽었어! 유린을 살려내! 이 악마! 네년이 죽였지?
유린을 살려내란 말이야! 불쌍한 유린을 살려내!
무화가 갑자기 여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로마의
여인은 공포에 사로잡힌 눈으로 무화를 쳐다보았다.
세느강에서 시체가 발견됐어! 너희들이 유린을 죽여 강에다
버린거야! 천벌을 받아 마땅한 것들!
무화가 분노에 차서 저주를 퍼붓자 여인은 뒤쪽으로 몸을
끌고갔다. 그러면서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난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남자들이 그런 거야. 난
몰라.
동림은 무화를 밀어내고 여인을 옆방으로 끌고갔ㅁ다. 그리고
무화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갔다. 그는 그 방의 라디오를 또
크게 틀어놓았다.
바른대로 말해줘. 내 아들을 납치한 놈...... 나를 여기에
보낸 놈...... 나를 여기에 보낸 놈...... 그놈은 지금 어디
있지?
동림은 여인으로부터 떨어지면서 물었다.
난 몰라!
그녀가 앙칼지게 쏘아붙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 새 재크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이제 다 틀렸어! 당신은 죽는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아!
우리한테 반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가르쳐 주겠어!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올 거야.
로마의 여인은 칼로 그를 위협하면서 말했다.
동림은 잠자코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걸 버려! 버리지 않으면 쏠 거야.
로마의 여인은 그를 노려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카핏
위로 던졌다. 동림은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권총 끝으로 그녀의
복부를 힘껏 찔렀다. 그녀는 짧게 신음하면서 허리를 굽혔다.
그놈은 어디 있지? 동양인이 죽기 전에 나한테 자백했어.
대답이 일치하지 않으면 넌 살아날 수 없어. 말해봐. 그놈은
어디 있어? 이속에 숨어 있나?
그는 더욱 세게 그녀의 복부를 찔렀다. 그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입을 벌렸다.
그놈이 로마에 온다는 말을 들었어. 언제 어떻게 오지?
몰라요. 정말 몰라요. 전 아무 것도 몰라요.
무화는 옆방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옆방에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안에서는 라디오 소리 외에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20분쯤 지났을 때 문이 열리고 동림이 허탈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극도로 지치고 피로한 모습이었다.
알아냈어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녀가
옆방을 들여다보려고 하자 그는 그녀를 가로막으면서 문을
닫았다.
보면 안 돼...... 안 돼.......
그 여자...... 어떻게 됐어요?
그는 고개를 흔들다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으면서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 틈에 무화는 방문을 열고 옆방을 들여다보았다.
여자가 방바닥 위에 엎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목이 부러졌다.
하고 뒤에서 동림이 말했다. 그는 욕실 안에서 무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화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있다가 가만히 방문을
닫았다.
동림은 휴지로 입을 닦고 나서 욕실에서 나왔다.
그 여자는 죽기 전에야 겨우 입을 열었어요.
잘 하셨다고 말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어요.
그는 무화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 동양인 남자가 말한 게 맞아요. 그 여자도 그렇게
말했어요. 내일 오후 3시에 그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한다고 했어요. 그자의 암호는 뱅커이고 이쪽에서 마중나갈
사람의 암호는 블랙 로즈...... 검은 장미 그 여자가 나가기로
돼있어요.
그가 차츰 허탈감에서 벗어나고 잇는 것이 무화의 눈에 뚜렷이
보였다.
그 여자가 죽었는데 어떡 하죠?
다행히 놈은 그 여자의 얼굴을 몰라요.
그럼 어떻게 만나죠?
미스터 Y라고 쓴 푯말을 들고 출구에 서있으면 그자가 접근할
거라고 했어요. 그자가 접근하면 암호로 확인하면 돼요. 무화,
당신이 블랙 로즈를 맡아봐요.
제가요?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결심한 듯
알았어요. 제가 한 번 해보겠어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죠?
하고 말했다.
그 다음 스케줄은 이제부터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그때 방안의 전화벨이 울렸다. 무화가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어머, 사장님!
음, 나야. 약속대로 와주었군.
그것은 황가의 목소리였다.
아침에 왔는걸요.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걸었더니 받질 않더군. 어디 갔다
왔지?
거리가 너무 좋아서 마냥 돌아다니다 왔어요.
그래 지금 혼자 있나?
혼자서 사낭님을 기다리지 누구와 함께 기다리겠어요?
혹시 수상한 사람이 미행했다거나 주위에 어슬렁거리지
않았어?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사장님, 빨리 만나요. 뵙고
싶어요.
그렇게 나를 보고 싶나?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잖아요.
지금 그리 가지.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저기.......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그녀는 당황해서
동림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한테서 온 전화예요. 10분 안에 이리로 온대요.
어떡하죠?
차라리 잘 됐는지도 몰라요. 그를 설득시키려면 시체를 보여
줄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말을 믿지 않을 테니까.
그 안에 공항에 나갔던 외국인 돌아오면 어떡 하죠?
그 자의 이름은 압델이요. 공항에 갔다 오려면 시간이 상당히
걸릴 거요. 그 안에 어떤 결정을 봐야겠지.
동림은 욕실로 숨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마침내 차임벨 소리가 들려왔다. 무화는
구멍으로 밖을 내다본 다음 문을 열었다.
눈 앞에는 황씨가 서있었다. 불안과 반가움이 엇갈리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두 눈에 차츰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도 미소를 지었지만 얼굴이 그만 일그러지고
말았다.
방 안으로 들어서서 휘둘러보던 그는 비로소 안심이 가는지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안 돼요. 이러지 말아요.
그녀가 그를 밀어냈다. 그는 코트를 벗고 그녀를 다시
껴안으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이래?
그는 굶주린 야수처럼 그녀에게 덤벼들어 어거지로 그녀의
입을 덮쳤다. 그때 그의 목덜미에 차가운 감촉이 와 닿았다.
그 아가씨를 풀어줘.
뒤에서 들려오는 것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황가가 소스라치게
놀라 무화를 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꼼짝 마! 손을 들고 의자에 가서 앉아!
그는 자기를 겨누고 있는 총구와 낯선 남자를 보았다. 총을
들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단호한 결의의 빛이 서려 있었다.
황가는 절망적인 눈으로 무화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자 다리가 후들거려 서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두손을 쳐들고 의자에 가서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술이 말라붙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권총을 든
사나이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황표씨, 우리는 초면인데 나는 당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여기까지 온 사람이야.
금방이라도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나올 것만 같아 그는 무서운
나머지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무화! 이럴 수가 있어?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무화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무화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도 그럼 일당이란 말이야?
그렇지는 않아요. 저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거에요. 죽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하세요. 여기 이분은 살인전문가예요.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의자 밑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면서 두 손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살려주십시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저를 죽이면 돈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돈은 얼마나 남았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5백만 달러 넘게 남아 있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돈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꼴보기 싫으니까 일어나 앉아.
황가는 심하게 경련하면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황표씨, 내 말을 잘 들어요.
갑자기 동림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황가는 숨을 죽이고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은 유무화씨야. 이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난 당신을 죽였을 거야.
황가는 무슨 말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를 거요. 그걸 알려면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겠지. 거기에 대한 설명은 무화씨가 할 거요. 하짐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길게 설명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당신을 설득시킬 시간도 없어요. 무화씨의 말을 듣고 당신이
알아서 결정하시오.
동림의 무화를 돌아보자 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그 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우 절제된 언어를
구사하면서 요령있게 이야기해 나갔다. 유린이 납치된 이야기를
말할 때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다가 마침내 유린이 세느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의 그 울음은 백 마디의 말보다도 훨씬 큰 효과를
황가에게 안겨준 것 같았다.
그 놈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들입니다. 하고 그는
흥분해서 말했다.
동양인을 살해한 부분에 대해서 동림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황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자는 왕평이라는 자로 로마 지역 책임자입니다.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을 관할하고 있는 아주 잔인한 놈입니다.
그자와 그자를 돕고 있는 한국 출신 여자가 이 지역에서 가장
악명이 높습니다.
그 여자의 암호가 뭐요?
블랙 로즈라고 합니다.
그 여자도 내가 제거했소.
동림이 너무 간단히 말했기 때문에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저 방에 들어가봐요. 거기에 그 여자가 누워 있으니까.
황가가 의혹에 찬 얼굴로 옆방으로 건너갔을 때 동림은 굳이
그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황가가 도망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황가는 창백하게 질려서 돌아왔다. 비로소 그의
얼굴에는 신뢰와 복종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블랙 로즈가 맞나요?
네, 맞습니다.
황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림은 더이상 권총을 들고 있지 않았다. 황가 역시
아까보다는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동림은 그에게 다가가 담배를
권한 다음 거기에 불까지 붙여주었다.
나는...... 내 아들만 찾을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어요...... 그애만 찾을 수 있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고...... 내 자신도 버릴 수
있어요...... 더이상 버릴 것도 없지만.......
선생님은 너무 희생이 커요.
무화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동림은 머리를 흔들었다.
나보다 무화씨의 희생이 너무 커요. 무화씨는 순전히 나를
위해서 지금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거예요. 무화씨가 아니라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아마 황씨 당신까지 죽였을
거고, 결국은 아이도 찾지 못한 채 개죽음 당하고 말았을거요.
무화씨는 용기있고...... 천사 같은 여자요.
정말 그렇군요. 무화양은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나는 두 분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나도 도망다니는데
지쳤습니다. 더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럴
바에야 맞서 싸우겠습니다. 이제 난 혼자가 아니고 동지까지
얻었으니까요.
황가가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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