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과 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문제들!
2. 요한일서 3장 9절에 대한 수상한 견해
사도 요한은 거듭난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한일서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것은 요한일서 1장 8절부터 2장 1절과 비추어 볼 때 거듭난 사람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구절들은 어떤 뜻일까요?
이 구절에 대해 무디 스미스는 이런 특이한 주장을 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반대자들에게서, 도덕적 해이함과 무도한 죄악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니까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뻔뻔함을 보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확인해 주고(8절), 그들 자신의 표어를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역으로 인용하여(9절) 그들이 주장하는 자칭 완전함뿐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말까지도 모두 허위임을 보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요한일서 3장 9절이 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미혹된 자들에 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일서 3장 9절에만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5장 18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특히 "우리"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므로 이 해석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 대해,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견해는 거듭난 자는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죄는 신자의 삶의 양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즈와 존 스토트를 비롯해서 F. F. 브루스와 데이비드 잭맨이 이 견해에 동의하고 저도 이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현재 시제에 근거한 이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일례로, 캐런 좁스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크루즈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현재 시제 용법은 범죄의 습관적이거나 비습관적인 성격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저자가 범죄를 완결된 행동이 아니라 진행하는 행동과정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택한 용법임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요한이 말한 죄가 '종말론적 심판으로 이끄는 죄'인 '배교' 즉 '사망에 이르는 죄'를 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거듭난 자는 다른 죄들을 지을 수 있어도 사망에 이르는 죄는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비성경적인 교리에 근거를 둔 해석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의 해석이 붕괴됩니다. 그러므로 옳은 해석이 아닙니다.
한편, 제가 여러분과 함께 파헤치고자 하는 것은 이런 해석이 아니라 이 구절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해석인데, 두란노 강해 주석시리즈에서 제인 하지스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본 절에서의 논지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부친의 본성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 '새사람'(혹은 "새 자아", 엡4:24, 골3:10)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새로운 피조물이다. ... 죄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그의 중생한 존재의 차원에서 갖게 되는 본성으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
또, 워치만 니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그러나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면 그릇된 생각에 빠지기 쉽다. 요한은 이것으로써 이제는 죄가 우리 역사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우리가 다시 범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죄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의 속성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새로운 출생에 의하여 우리 안에 심겨졌다. 그리고 그 생명의 속성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또, 제시 펜 루이스는 『영과 혼』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설교에서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또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죄인들과 연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죄를 대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분명히 의인(롬5:9)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 것은 영이다. 혼은 의롭게 되지 않았다."
또한, 데릭 프린스는 『속죄』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나 데릭 프린스는 이 책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약 오십 구 년 전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렇다면 데릭 프린스는 구원받은 후로 현재까지 죄를 전혀 범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분명히 말하건대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요한일서의 성경 구절은 범죄하지 못한다고 한다. 나의 결론은, 사도 요한이 말하는 바는 개인이 아니라 개인 안에 들어 있는 새사람이 범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새사람은 썩지 않을 씨로 태어났기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존경하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을 수 있는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 본문은 속사람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우리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부모의 본성을 타고났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하나님의 본성을 타고났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잘못을 행하는 본성이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수많은 과실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속사람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나의 속사람은 내가 죄를 지을 때 내게 동의한 적조차 없습니다. 나의 속사람은 내가 그렇게 하지 않도록 애를 썼으며, 내가 죄를 졌을 때 나의 심령(heart)은 울었습니다.
나는 내 육신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락하고 과실도 범했습니다. 다만 내 영은 내 육신에게 동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씨앗은 내 영에 있는 것이지, 내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의 육신이 당신을 지배하도록 계속 허락한다면 당신은 계속 과실을 범할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마음(natural mind)이 당신을 지배하도록 계속 허락하고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과실을 범할 것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거듭난 자의 특징이요 증거라고 오래도록 외쳤왔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정말로 이런 뜻인지 아닌지 알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 21-23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더구나, 2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이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래서 '진짜 영은 죄를 안 짓는가 보다'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음과 동일시된 속사람이 과연 영입니까? 아닙니다. 겉사람 즉 육신의 반대이므로 인간의 내면 즉 영과 혼입니다. 그러므로 영이 죄를 안 짓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 요한일서 3장 9절에 나오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는 표현은 실제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영은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거듭난 사람이 전과 달리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지, 혼과 육은 죄를 짓지만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이드 존즈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 안에 있는 새로운 본성에 대하여서만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마다 지를 짓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요한이 지금 새로운 본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저들은 요한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새로운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새로운 사람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저들의 과거 모습과 현재 모습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현재의 우리의 모습, 그리고 우리의 인격 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본성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의 '자'는 믿는 자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 난 나, 중생한 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새로운 본성이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듭났기 때문에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이 구절은 나에 대한 내용이지 나의 새로운 본성에 대한 내용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와 같이 인격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옳은 견해가 아닙니다.
또한, 성경에는 혼과 몸뿐 아니라 영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신명기 2:30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루아흐-영)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다니엘 5: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루아흐-영)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시편 78:8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루아흐-영)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루아흐-영)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물론 이것은 거듭난 사람의 영에 대한 구절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영은 물론이고 거듭난 자의 영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악한 영"(삼상 16:14, 18:10, 19:9)과 "더러운 영"이 나옵니다(계16:13, 18:2). 그런데 천사만 타락하여 악하거나 더러운 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타락했고, 거듭난 자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히6:4-6). 그러므로 사람의 영도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즉 거듭난 사람의 영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권면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34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고린도후서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바울은 처녀는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한다고 했고,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했습니다. 이는 영이 더럽혀지거나 거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입니다. 그리고 둘 다 거듭난 신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또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이 구절의 앞에서는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했고, 뒤에서는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흠"은 죄를 뜻합니다(눅1:6, 살전3:13, 히9:14). 그런데 온 혼과 몸뿐 아니라 영이 흠 없게 보전되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도 죄를 지을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영이 죄를 짓지 못한다는 것은 이치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쉬운 예로, 개가 사람을 물었다고 합시다. 이때 개의 혼이 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육이 가서 문 것입니다. 물론 동물은 죄가 없지만, 만약에 죄라면 동물의 혼과 육이 함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사람도 원리가 같습니다. 영과 혼이 분리되어 있다면 "영은 죄를 안 짓는다."라는 말이 가능하겠지만, 사람은 영과 혼이 결합되어 영혼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영과 혼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처럼, 선을 행해도 영과 혼이 함께 행하고, 죄를 지어도 영과 혼이 함께 행합니다. 그러므로 "영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해긴 목사님에게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영은 범죄하지 않고 혼과 육만 범죄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의 영이 버림받을 수 있습니까? 공의로운 하나님이 어떻게 무죄한 영을 지옥에 보내실 수가 있습니까? 영만 천국에 가고 몸과 혼은 지옥에 가는 이런 분리구원이나 심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은 죄를 짓지 못한다"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끝으로, 쐐기를 박는 차원에서 세계적인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상)』권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혼이 죄를 지을 수 있거나, 영이 죄를 지을 수 있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혼에 지정의를 포함시키기 때문에 혼이 죄를 지을 수 있음에는 대체로 동의한다(우리의 혼이 죄를 지을 수 있음은 벧전 1:22; 계 18:14과 같은 구절에 암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분설 주장자들은 대체로 영은 혼보다 순결하다고 생각하고, 새로워진 후에는 죄로부터 자유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유명한 설교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이해는 성경이 실제로 증거하는 바가 아니다. 바울이 몸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깨끗하게 하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했을 때, 그는 우리의 영에 더러움(혹은 죄)이 있음을 분명히 전제했다. 몸과 영이 거룩해야 할 결혼하지 않은 여인에 관한 바울의 권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전7:34). ...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신다'(잠16:2)는 사실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영이 범죄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 논한 구절들도 있다(시32:2; 51:10을 보라).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영혼(루아흐-저자 주)을 다스리는 자가 있다고 인정한 사실은(잠16:32) 우리의 영이 언제나 순수한 부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소욕이나 방향을 취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그러므로 거듭난 영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이 견해를 이렇게 열심히 반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난 사람의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주장이 믿음에 따르는 행함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영은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은 영은 거룩하기 때문에 몸으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영지주의나 니골라당의 주장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물론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구원파적인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과 설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해긴 목사님은 믿지 않은 죄만 회개하면 된다고 가르치시고 그 외의 죄들에 대한 회개의 필요성을 성경대로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제가 보기에 믿음에 따라야 할 행함도 충분히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책과 설교를 통해 충분히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저자들은 모두 이 진리를 집요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해긴 목사님 책은 그런 강조가 너무 약합니다. 구원받았지만 버림받은 사모님에 대한 유명한 간증 외에 그 진리에 대한 강조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제가 해긴 목사님을 무지 존경하기 때문에, 전에 오래도록 목사님이 회개나, 행함이나, 거룩이나,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저처럼 강조하지 않는 것을 보고, '혹시 내가 잘못하고 있거나 균형을 잃고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 아니냐?'라는 고민과 갈등에 빠졌을 정도입니다. 그러다 요한계시록 해석이 부어질 때, 해긴 목사님이 훌륭하고 탁월한 선지자요 교사시지만 사도는 아니시므로 성경을 해석하는 부분에 있어서 사소한 오류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음의 말씀 바로 알기』라는 책에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궁금한 분들은 그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여전히 케네스 해긴 목사님을 무지 좋아하고 무지 존경합니다. 그 정도로 인품이 훌륭하고, 그 정도로 영적으로 바르고 깊게 들어간 분은 교회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백 권에 달하는 그분의 책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 제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한국어로 더빙되거나 자막처리된 해긴 목사님의 설교영상들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일종의 공허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분이 전하는 믿음의 말씀이 틀려서가 아니라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도의 입장이라면 이런 설교만 듣고 내 영이 만족할 수 있을까? 이런 설교만 듣고 어떻게 살지? 믿음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어떻게 믿고,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선포하고, 어떻게 병 고치고 ... 이런 것들만 주로 듣고 어떻게 나의 영이 살 수 있나? 복음과 회개, 믿음, 거듭남, 순종, 거룩,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물론 이 주제는 해긴 목사님도 충분히 강조하셨다), 이런 진리들을 반복해서 듣고 자신을 살펴야 영이 살 수가 있지!
만약 내가 평신도라면 나는 저 교회에 다닐가? 아마도 아닐것 같다. 부흥회에 참석해서 자주 은혜받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안수기도도 받겠지만 교회는 사랑하는교회에 다닐 것 같다.'
죄성하지만,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해긴 목사님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만약 해긴 목사님이 살아 계시고 집회를 하신다면 필히 참석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말씀과 성령과 은사에 대한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집회에 임한 임재나, 성령의 나타남이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경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제가 그분의 설교를 통해서 과연 내 영혼이 다 채워지고, 신앙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을까? 라는 면에서는 솔직히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뒤, 21년 4월 24일 "new creation"이라는 교회 인터넷 카페 회원이 "신앙상담"란에 "교회를 옮기는 문제에 대해서"라는 상담 글을 올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약 2년 동안 '믿음의 말씀'을 따르는 교회를 출석했습니다. 하지만 출석하는 내내 영적으로 공명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고민한 적이 많았습니다. 특히 말씀을 매우 강조하지만 한계가 너무 분명했습니다. 최근에 변 목사님 설교를 듣고 내적으로 크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씀 말씀 하지만 정작 말씀이 말하려는 진짜 깊은 의미와 진리를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구나.'
실제로 제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설교를 하실 때 거의 대부분
1. 자신이 따르는 믿음의 말씀 교회의 목사님 설교를 요약해서 설교의 내용으로 삼습니다.
2. 해당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의미를 드러내려고 하기보다는 주로 믿음의 말씀 서적의 내용을 요약해서 설교하십니다.
3. 대부분의 설교 내용이 믿음의 말씀에서 강조하는 내용(교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즉, 치열하게 해당 본문의 의미를 드러내려는 노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최근 들어 다시 되돌아보니 말씀의 깊은 의미는 도외시한 채 믿음의 말씀 교리만 설교해 오셨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AFC 그리스도의 대사들 교회의 경우 학교를 만들었는데 그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범주에서 설교가 벗어나지 않습니다. ... 이런 한계를 느끼는 게 괜히 느끼는 게 아니겠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론이 글이 다 해긴 목사님에게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상담 글에 이렇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놀랍네요. 저는 금주 영과 혼에 대한 시리즈 설교준비를 하면서 바로 그 점을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이 게시물은 놀라운 성찰을 담고 있고 정확한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복음과 진리는 믿음의 말씀 그 이상입니다. 장로교의 교리의 안경으로 성경 전체를 보면 안 되듯이, 믿음의 말씀의 안경으로만 성경의 복음과 모든 진리를 보아서도 안 됩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제가 심히 존경하는 하나님이 사람이지만, 이 점은 아쉽습니다."
옳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저는 죽는 날까지 그분을 존경하고 흠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완벽한 롤모델은 아닙니다. 우리의 롤모델은 예수님과 바울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믿음의 말씀과 성령과 은사에 대해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죄를 끊어버리는 회개, 행함이 따르는 산 믿음,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거듭남, 천국에 들어가는 필수적인 조건인 순종과 거룩, 이미와 아직의 구원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야 할 필요성, 죄와 싸우면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 등을 집요하게 끊임없이 강조하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영혼들에게 최고로 안전하고 최고로 유익이 된다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