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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복과 행복나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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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사/ 역사/세계군사♠ 스크랩 [한국전쟁] 6.25전쟁의 주요 전투
혜천 추천 0 조회 132 09.07.01 17: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25전쟁의 주요 전투

 

 

 

6?25전쟁은 외형상 남한과 북한과의 전쟁이지만, 전쟁지도 및 전쟁수행의 주체와 무기체계, 장비, 지휘관
들의 면면을 고려해 보면, 이는 미?소의 대리전 성격이 강한 전쟁이었다. 전투의 전개양상도 밀물과 썰물처럼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가 38도선으로 퇴각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가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37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가 다시 반격으로 올라가는 등 쫓고 쫓기는 가운데 진
행된 이른바 목숨을 건 ‘술래잡기식 전쟁’이었다.


그렇지만 전선교착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시 유럽전선에서 ‘1,000km에 달하는 서부로의 행진’을 연상하
듯, 한국전쟁에서도 300km 달하는 38도선을 중심으로 피아 150여만 명 이상의 군대가 첨예한 대치상태
속에서 진지전과 고지쟁탈전의 전투양상을 보여 주었다.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진지전에 의
한 무제한의 소모전이 진행되면서 ‘핵전쟁을 치른 미국’이나 ‘핵보유국인 소련’을 비웃듯, 고전적 제한전쟁
의 극치를 보여주였다.


3년여 동안 치러진 큰 전투만 해도 154회에 달하고, 작은 전투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233회에 이른다. 이
중 미국을 비롯한 유엔 16개국이 참가한 주요 전투만도 49회에 이른다. 이들 전투는 모두가 단순히 전투국
면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1개 전투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정도로 중요한 전투도 있었다. 그러기에
한국전쟁기 주요 전투를 선정하는 데에는, 이에 합당한 기준과 원칙이 절대로 필요했다. 이러한 취지에 따
라 다음과 같은 기준을 선정의 준거로 삼았다.

 

즉 ① 전술 작전면에서 전쟁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전투, ② 군사?정치면에서 전쟁 진행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전투, ③ 피?아의 주력이 지향된 전장의 전투, ④ 작전단계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전투가 그
주요 기준이다. 이외에도 작전 지속능력과 전투력 보존력, 그리고 차후작전에 대한 기여도를 고려하여 균형
있게 선정하였다.


이와 같은 기준에 의해 선정된 주요 전투는 육군의 경우 춘천전투, 오산전투, 다부동전투, 인천상륙작전,
평양탈환작전, 초산전투, 장진호전투, 지평리전투, 현리전투, 그리고 백마고지전투 등 10개 전투를 선정하였
다. 이 중 국군이 실시한 전투가 6개였고, 유엔군이 실시한 전투가 4개였다. 또 방어전투가 7개이고, 공격전
투는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반격작전에서 치러진 3개 전투, 즉 인천상륙작전, 평양탈환작전, 초산전투 등이
다. 한국과 유엔군이 북한군 및 중공군과 싸운 전투는 각각 5개로 동수를 이루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이들 전투결과 양측이 입은 인명피해로는 유엔 측이 24,000여 명인데 비해 공산측은 약 80,000여 명으
로 유엔군 보다 3배가 넘는 피해를 당했다. 이는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 이후 전개한 중공군의 인해전술식
무리한 공세와 화력의 열세에서 오는 병력 손실이 주요 요인이었다.


해?공군의 경우 위와 같은 기준으로 각각 2개의 전투를 선정하였다. 해군은 대한해협전투와 영흥도상륙
작전을, 공군은 승호리철교폭파작전과 351고지근접지원작전을 선정하였다. 이외에도 한국전쟁에서 중요한
전투가 많이 있음에도 위의 기준에 준하여 선정하였기에 누락된 전투가 많겠지만 이점 양해를 구한다. 내용
전개는 전투 개시 일자순으로 정리하였다.

 

 

육군의 10대 주요 전투

 

국군 제6사단의 춘천전투(1950. 6. 25~30)
춘천전투는 6?25전쟁 발발 당시, 중동부 전선의 춘천과 홍천 북방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6사단이 전
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공격을 받고 춘천, 어론리, 현리, 말고개 일대
에서 치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과 말고개의 지형적인 이점을 최
대한 이용하여 5일 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북한군 2개 사단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북한군 2군단은 ‘춘천-홍천’ 축선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었다. 따라서 춘천전투는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의 안시성 전투에 비유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북한군 선제타격계획에 커다란 타격
을 준 전투였다.


개전 이후 3일간이나 춘천을 확보하며 선전했던 국군 제6사단은 비교적 사단의 편제를 유지하면서 홍천,
횡성, 원주, 제천을 거쳐 7월 1일 충주로 철수하였다. 5일간에 걸친 춘천지구 전투에서 제6사단은 적 제2사
단의 서울 진출을 봉쇄하였으며, 적 제2, 제12사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또한 김일성은 춘천전투의
패전을 물어 7월 초에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을 최현(崔賢) 소장으로, 12사단장 전우 소장을 최충국(崔忠
國) 소장으로 교체하고 2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해임하고 김무정(金武亭) 중장을 후임으로 임명하는 인사조
치를 단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적 살상 6,800명, 포로 120여 명, 전차와 자주포 18대를 파괴한 반면, 아군은
전사 200명, 부상 350여 명, 그리고 1,300여 명의 실종자가 나왔으나, 실종자의 대부분은 대부분 부대로 복
귀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수도권을 포위하기 위하여 2개 사단을 ‘춘천-홍천-이천-수원’ 축선으로 우회기동시
키려던 당초의 작전계획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
를 얻게 되었다.


 

스미스특수임무부대의 오산전투(1950. 7. 5)
오산전투는 한국전쟁 초기에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고 한국군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국에 최초
로 파병된 부대가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이다. 이 부대가 남하 중인 전차 1
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4사단 소속 2개 연대와 오산 북방 죽미령 일대에서 교전을 전개한 방어전투가
바로 오산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밀려드는 북한군의 보?전부대를 맞아 보?포 협동
으로 6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나, 적의 전차부대를 막지 못하고 안성을 경유하여 천안으로 철수하
였다. 이 전투는 미 지상군부대가 한국전에서 최초로 싸운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 부대들이 안성을 거쳐 천안에 집결했을 때 스미스 대대원의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하여 총 손실은 150여
명에 달하였다. 적의 손실은 전사 42명, 부상 85명, 전차파손 4대였다.

오산전투는 미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로서, 북한군으로서는 미 지상군의 참전이 처음으로 확인된 전투였
다. 북한군은 그때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고, 미국의 참전 가능성에 관해서 생
각지도 않았는데, 오산에 있는 미군을 보고 몹시 놀랐다. 미군도 이 전투를 통해 이제까지 과소평가 했던 북
한군의 전력을 새삼스럽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군 제1사단의 다부동전투(1950. 8. 3~30)
다부동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한 직후부터 반격으로 전환할 때까지 국군 제1사단
이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제3, 13, 15사단)의 8월
공세를 27일 간에 걸쳐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
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지역으로 이
동하였다. 따라서 다부동전투는 1차 세계대전시 프랑스 수도의 관문으로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덩
(Verdun)전투에 비유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동양의 베르덩전투라고도 한다.


8월 말까지 국군과 유엔군이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예비대를 확보하여 끊임없는 역습을 감행했
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동강 방어선에서 역습은 방어 성공의 결정적 요소였던 것이다.


특히,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다부동 일대의 방어선을 확보함으로
써 8월 최대의 위기였던 대구 방어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또한 배속된 미 제27연대와 협동작전을 효과
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국군의 위상 제고와 함께 차후 작전에서 한?미 연합작전에 기여하였다.


결국 다부동전투를 통해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군 제1
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공세 이전의 계기를 포착하여 다른 유엔군 부대들과 함께 반격작전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미 제10군단의 인천상륙작전(1950. 9. 15~16)
인천상륙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9월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하

여 전개한 작전이다. 이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특별히 편성된 유엔 해군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261
척의 대함대를 동원하여 미 제10군단(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17연대)을 인천
으로 상륙시킨 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에서 제7합동상륙기동부대의 제90공격부대는 인천을 방어하는 북한 인천경비여단과 제18사단
및 제31사단을 격파하고, 당일 월미도와 인천시가를, 다음날에는 인천해안 교두보를 확보하여 서울로 진격
할 발판을 구축한 다음 미 제10군단장에게 인계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9월 15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02:00
경 월미도에 상륙돌격을 감행할 미 제5해병연대 제3 대대 상륙단의 선견공격대(先遣攻擊隊)가 인천수로로
진입하기 시작하여 얼마 후 미 해군정보장교 크라크(Clark) 대위가 밝혀주는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
무난히 인천항에 이르렀다. 이들은 05:00시에 고속항 모부대의 함재기들이 월미도와 인천 내륙지역에 맹렬
한 공중폭격을 실시하고, 이어 구축함과 로켓트포함에서 포탄을 퍼붓는 동안 상륙주정(LCVP) 7척에 분승,
제1파를 구성하여 해상에 설정된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 제1해병사단은 D일 아침 만조시간에 맞춰 월미도를 탈취한 데 이어, 오후 만조시간에 맞
춰 인천시가지에 상륙하였다. 이날 인천에 상륙한 병력은 약 13,000명에 달했으며 450대의 차량을 포함한 다
량의 장비와 보급품도 양륙되었다. 해병 제1사단은 상륙한지 24시간 만에 해안교두보를 확보하였다. 해병 제
1사단장은 사단지휘소를 인천시가지 동쪽에 설치하고 18:00시에 공격함대사령관으로부터 작전지휘권을 인
수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자 미 제10군단은 공격 다음날에 인천지역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서울로 진격
하여 9월 27일에는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 작전과 더불어 실시된 낙동강 전선에서의 반격작전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미 제7사단의 제31연대는 수원비행장을 확보하고 수원비행장 남쪽고지에 차단진지를 형성, 임무를
수행하던 중 9월 26일 22시 26분에 오산 북쪽에서 미8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린치(Lynch)특수임무부
대와 연결을 이룸으로써 남침한 북한군의 전력을 일시에 무력화 시킬 수가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특징적인 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천상륙작전은 상륙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천연적 장애요인을 극복하고 성공한 상륙작전
이다. 또한 상륙작전의 가치와 기습의 의미를 일깨워 준 대표적인 작전이다.


둘째, 인천상륙작전은 또한 태평양 전쟁 시의 미 해군 및 해병대의 상륙작전 경험을 맥아더 장군 자신의
전략적 안목과 결합시켜 적의 최소예상선과 최소저항선에 투사시켜 결정적 승리를 달성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인천상륙작전은 적의 전투력을 격멸하는 데 있어서 병참선의 차단이 효과적이며, 특히 신장된 병참
선의 경계는 전방전투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넷째, 인천상륙작전은 전략적 대포위기동의 대표적 전례이며, 미 해군 및 해병대의 전문화된 상륙전 능력
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 작전은 개전 이후 그때까지 수세 일변도였던 한국군 및 유엔군의 입장을 공세적으로 전환시키게 된 획
기적인 작전이었다.

 


미 제1군단의 평양 탈환작전(1950. 10. 15~20)
평양탈환작전은 북진 당시 서부전선으로 진격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중부전선으로 진출
한 국군 제7사단 제8연대와 함께 평양을 포위공격하여 북한군 제17사단과 제32사단으로 주축으로 편성된
8,000여명의 혼성부대를 격퇴하고 평양을 탈환한 공격작전이었다. 이 작전에서 국군 제1사단은 평양 동측
방으로 진입하고 미 제1기병사단은 남쪽에서 흑교리로 진격하였으며, 국군 제7사단 제8연대는 북쪽으로
진입하여 3면에서 포위공격을 가하여 평양을 탈환하였다. 이 때 국군 제1사단은 맨 먼저 평양시내로 돌입
하여 평양 첫 입성의 영광을 안았다.


38선을 돌파한 미 제8군의 최대 목표는 적의 심장부인 평양 탈환이었고, 이 임무는 미 제1군단에게 주어
졌다. 이에 따라 평양을 목표로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이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만은 국군이 먼저 점령해야 한다.”라는 지시에 따라 제7사단과 제8사단도 뒤늦게 평양 점령 경쟁에 합
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평양탈환적전 부대는 미 제1기병단과 국군 제1사단이었다.


북한의 심장부 평양을 목표로 한 미 제1군단의 평양탈환작전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한 이래 만 11일
만인 10월 19일 국군 제1사단의 제11연대와 제12연대,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의 제5기병연대가 동평양을, 국
군 제1사단 제15연대와 그 뒤를 따른 국군 제7사단 제 8연대가 본평양을 각각 점령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은 평양에서 후퇴하여 청천강 북쪽으로 물러서게 되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한?
만 국경선으로 향한 진격작전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심장부를 점령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
을 최대한 살리지 못하였다. 즉, 북한의 주요 수뇌부는 이미 평양을 버리고 함경도나 중국지역으로 들어간 후
중공군의 지원을 요청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군 제6사단의 초산전투(1950. 10. 23~26)
초산전투는 한?만 국경선으로 향한 진격작전이 개시된 후,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희천으로부터 초산으
로 전진하던 중, 초산천 연변에서 북한군 제8사단 소속의 혼성부대를 격퇴하고 압록강연안의 초산을 탈환
한 공격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제7연대는 10월 26일 고장을 출발하여 초산으로 향하던 중 초산천 연변에
서 저항하던 북한군 연대규모의 혼성병력을 2시간 동안의 교전 끝에 격퇴시킨 후, 초산으로 돌입하여 압록
강변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한?만간 국경선에 도달한 최선봉부대가 되었다.


장병들은 지난 9월 16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지 41일 만에 조국통일의 최선봉으로써 국군과 유
엔군을 통틀어 가장 먼저 국경선에 도착했다는 자부심과 긍지로써 온통 마음이 들떠 있었다. 대대는 신도
장에서 만주 통천구(通川溝)로 통하는 뗏목나루가 있음을 발견하고 57미리 대전차포로 이를 파괴해 버렸
다. 대대는 제일 먼저 국경선에 도달한 제1중대를 신도장을 중심으로 배치하여 압록강변 경계임무를 수행토
록 하고 대대주력은 초산으로 일단 철수하였다.


이보다 하루 앞서 제7연대가 고장으로 진격하던 10월 25일, 온정리에서는 제2연대가 벽동을 목표로 진격
을 개시하여 북진(北鎭)으로 진격하던 도중에 동림산 기슭에서 적과 조우, 격전을 벌이었다. 이들이 북한군
일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곧 중공군으로 밝혀졌다.


선두인 제3대대가 분산되자 예비인 제2대대가 투입되었으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이날 오후 포로가 된
중공군 병사는, “그들이 10월 17일부터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제2연대는 26일 중공군에
게 온정리를 피탈당하고 퇴로가 차단되어 붕괴된 채 태평방향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 지 41일 만에 국경선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국
경선에 위치한 압록강변의 초산을 확보하여 북진통일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전 국민들에게 큰 감격을
안겨주었다.

 

 

<중략>

 

 

해군의 2대 주요 전투

 

대한해협전투
6?25전쟁 발발 2개월을 앞두고 대한민국 해군은 해군 전장병과 국민의 성금으로 전투함을 구입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의 유일한 전투함이자 현대식 장비와 무장을 갖춘 백두산함(PC-701)은 4월 10일 진해에 입항
한 후 국내의 주요 항구를 순방하여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고 6월 24일 진해항으로 귀항하였다.


진해 통제부사령장관의 지시를 받은 백두산함은 1950년 6월 25일 15시 YMS-512정을 지휘하여 진해항
을 출항하였다. 해전경험도 없이 훈련에만 주력하였던 백두산함 대원들은 부산앞 오륙도 등대를 보면서 북
상하였다. 북상하던 백두산함은 20시 12분에 경에 거리 약 7km되는 수평선상에서 검은 연기를 목격하였다.
백두산함 최용남 중령은 최대속도로 정체불명의 선박에 접근하도록 명령하였다. 수평선상의 괴선박의 모
습은 드러나기 시작했고, 함장은 전투배치 명령을 하달하였다. 괴선박은 국적과 선명도 표시하지 않은 채
침로 180도, 속력 10노트로 남하하고 있었다.


백두산함은 괴선박에게 국기를 게양할 것과 국적을 제시할 것, 그리고 출항지와 출항시간 및 목적항구를
제시할 것을 국제발광신호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30분에 걸쳐 계속된 요구에도 괴선박은 응답이 없었다.
근접하여 정치명령을 수차로 보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기에, 신호등으로 조명을 시작한 결과, 국기와
선명도 표시되지 않은 선박의 갑판 뒤쪽에는 중기관총 2정과 수병복을 착용한 수많은 무장세력이 승선해 있
었다.


6월 26일 00시 30분 적선 좌현에 3인치 주포로 사격을 개시하였다. 갑작스러운 포격을 받은 적함은 급선회
를 시작하였고, 백두산함은 거리를 더욱 좁혔다. YMS-518정도 백두산함의 좌현 후미에서 37mm포로 사격
을 개시하자 적함은 57mm포와 중?경기관총으로 대항하여 치열한 포격전이 개시되었다.


마침내 백두산함의 포탄이 적함의 중앙하부에 명중하였고, 적함은 좌현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때 적
함은 한줄기 발광을 비추며 백두산함을 찾기 시작하였다. 함장 지시에 따라 최후의 1발을 명중시켰다.
적함이 백두산함의 선체에 집중되는 순간 백두산함의 조타실 중앙하부에 명중되었다. 조타수 김창학 삼
등병조는 파편상을 입고도 끝까지 키를 잡고 있었으며, 주포 전화수 김춘배 삼등병조 역시 다리 관통상을
입고도 전화기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김종식 소위도 적탄의 파편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치열한 포격전이 끝날 무렵 적함은 침몰되어 갔으며, 6월 26일 01시 25분 완전 침몰과 함께 승선하고 있던
600여명의 무장병력도 수장되었다. 백두산함은 4시간동안의 전투 끝에 약간의 사상자를 낸 채 6?25전쟁의
첫 해전을 통쾌한 승리로 장식하고 진해로 귀항하였다.


대한해협전투의 승리는 거의 무방비상태로 놓여있던 부산항의 안전을 확보한 전략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부
산은 군수물자와 증원 병력이 남한으로 들어올 수 있는 주요 항구였다. 따라서 북한 무장 게릴라 600명이
부산항을 점령하였더라면 전쟁의 양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영흥도(靈興島)상륙작전

인천의 교량이 되는 영흥도는 인천 상륙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므로 한국해군은 영흥도 탈환작전을 전개하
였다. 북한군은 영흥도에 정규병력 약 30명 내외로서 좌익계열 청년을 동원하여 M1, 99식, 칼빈, 38식 등 소
총으로 경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상륙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중대장 중위 장근섭(張瑾燮) 이하 90명으로 편성하고 각 소대는 제1, 2분
대에 각각 8명, 제3분대에 9명으로 편제하고, 자동소총 20정과 탄약 500발을 캐나다 구축함 아싸바스칸
(Athabaskan)에서 차용하였다.


아군 함정의 함정지원 하에 8월 20일 06시 주력부대(제1소대, 제3소대)는 옥도함에 탑승하여 D지점으로
향하고, 제3소대는 C지점으로 향하였다. 각각 PC 702함을 떠나 영흥도 북방 2개 돌출지점에 상륙을 감행하
였다. 이 때 적의 집결지를 맹렬히 포격하였다.

 

 

<중략>

 

 

 

공군의 2대 주요 전투

 

 

승호리철교 폭파작전
전쟁 발발 당시 우리 공군은 한마디로 ‘전투장비가 없고 싸울 수 없는 공군’이었다. 그러나 공군은 남진하
는 적의 탱크를 파괴하기 위해 연락기에 폭탄을 싣고 조종사가 목측투하 하는 불굴의 전투투지를 보였다.
이후 1950년 7월 2일 최초로 우리 공군에 F-51(Mustang) 전투기 10대가 미 공군으로부터 인계된 이후

미 공군과 연합 혹은 단독작전을 정전 시까지 지속하여 북한군 및 중국군에 대해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1950년 7월 3일 최초출격을 감행한 한국군의 F-51전투기는 정전 시까지 총 8,495회의 출격을 실시하였
고 기간 중 적 건물 1,770동, 차량 459대, 교량 및 철교 124개소, 탄약 및 연료집적소 1,285개소, 포진지 521개
소, 철도차단 1,014개소, 적 벙커 1,329개소 등을 파괴하고 적 병력 88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공군작전이 승호리 철교 폭파와 351 고지 근접지원작전이다.
승호리철교는 평양 동부 10킬로미터 지점인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철교로서 중국으로부터 평양까
지 수송된 보급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북한군 후방보급로의 요충지였다.


미 제5공군은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이미 기존 승호리 철교를 폭파, 차단하였으나 북한은 기존 철교 위
치에서 하류 방향으로 북쪽 200미터 지점을 우회하여 새로운 철교를 가설한 후 주위에 밀집된 대공방어망
을 구축하였다.


미 제5공군은 이 철교를 폭파하기위해 미 전폭기를 수차례 출격하였으나 실패하자 이 임무를 한국 공군
에 이양하였다. 임무를 부여받은 공군 제10전투비행단장 김신 대령은 한국공군 최초의 100회 출격달성자인
김두만 소령에게 임무를 부여하였다.


1952년 1월 12일 07시 40분 강릉기지를 이륙한 F-51 전투기 5기 편대는 편대장의 지휘아래 표적상공
에 도착하였고 우선 로켓탄과 기총으로 적 대공포진지를 무력화한 후 500파운드 폭탄 10발을 투하하였으
나 폭탄이 교각사이의 모래바닥과 물속에 떨어져 폭파에 실패하였다. 같은 날 14시에 이륙한 윤응렬 대위
가 지휘하는 3기 편대가 재차 임무를 시도하였으나 이마져도 실패하였다.


첫날 임무에 실패한 김신 대령은 참모들과 숙의 끝에 8,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하여 3,000피트에서 폭탄
을 투하하는 현재의 미군 전술로는 철교폭파가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에 4,000피트 상공에
서 강하하여 1,5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로서는 조종사에게는 매우 위험과 모험이 따
르는 저고도 폭격방안을 구상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1952년 1월 15일 제1편대장 운응렬 대위와 제2편대장 옥만호 대위가 이끄는 6대의 F-51전폭기는 표적 상
공에 도착하였다. 먼저 제1편대가 적의 심한 대공포화를 피해가며 편대장기를 선두로 기수를 목표에 맞춰
진입하여 로켓탄을 발사하자 철교의 경간 2개에서 검붉은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이어 제2편대가 표적을 향
해 진입하자 1편대는 2편대를 엄호하기 위해 잔여 로켓탄과 기총을 대공포 진지를 향해 발사하였다. 그리
고 2편대가 정확한 조준 하에 폭탄과 로켓탄을 표적에 투하하자 2개의 교각경간이 파괴되며 철교의 중앙에
2개의 큰 구멍이 생겼다. 이로서 승호리철교는 한국 공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날 F-51기 6대는 폭탄 12발, 로켓탄 20발, 50밀리 기총 4,700발을 사용하여 철교경간 2개를 절단하고
포진지 6개소, 보급품 집적소 1개소, 벙커 3개소, 건물 1동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날의 전공은 2월
21일 미 제5공군 각 비행단의 전대장 회의에서 소개되었고 김신 대령은 이 자리에서 축하 박수 세례를 받았다.
351고지 근접지원작전 1953년 3월, 동부해안 전선 고성지구 351고지를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15사단은 적이

수개월에 걸쳐 이 고지를 점령하고자 기도하였으나 결사적으로 이를 방어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7군단 예하

53연대 제2대대는 최후 수단으로 동 고지의 후방을 기습할 목적으로 야간을 이용하여 동굴을 파며 접근하여

고지가 적의 수중에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에 아군 15사단은 연일 적의 동굴에 야포공격을 가함과 동시에

동굴파괴를 위한 공작대를 편성하여 적의 공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인근 강릉에 위치한 공군 10전투

비행단에 항공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15사단에 전술항공통제관으로 파견 근무 중인 배상호 중위와 2일간에 걸친 작전협의를 실시하였으나
첫째, 공격표적인 동굴이 지상으로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과 둘째, 공격표적 전방 350미터 거리에 육군진지가
있어 아군진지를 오폭할 가능성이 있고 오폭 시 아 지상군 손실이 너무 커서 역효과가 발생한다는 점 때문
에 근접지원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10전투비행단 비행전대장 장지량 대령은 몇몇 장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감행할 것을 결
심하였다. 결국 10전투비행전대는 4개 편대로 F-51 16대를 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무장은 500파운
드 폭탄 2개, 50밀리 기관총 1,000발을 항공기에 각각 탑재하고 표적상공을 향해 강릉기지를 이륙하였다.


표적상공진입시간은 편대 순으로 10:25, 10:35, 11:00,11:35분으로 정하고 제1편대가 10:00시에 강릉기지를
이륙하여 20분이 지난 시점에 351기지 상공에 도착하였다. 육군 야포가 적 화력진지를 제압하자 10:30분에
1편대가 편대장을 필두로 표적에 500파운드 폭탄을 연속을 투하하였고 동시에 T-6기에서 표적에 명중하
였음을 알렸다. 1편대 공격이 끝나자 2편대가 동일 표적을 향해 급강하 폭격을 계속하였다. 3,4편대가 이미
표적상공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표적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으나 재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날 공군은 적 건물 15동, 동굴 2개소, 벙커 20개소를 파괴하였고 참호와 교통로 90미터를 소실시켰다.
이로써 육군 제15사단이 장악하고 있던 전략요충인 351고지에 대한 적의 위협은 제거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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