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식 金鳳植(1915 ~ 1969】 "만주에서 대한통의부 독립결사대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04년 11월 4일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팔원면(八院面) 용성리(龍城里)에서 태어났다.
1924년 7월 20일 국내에서 활동하던 대한통의부원 정문빈(鄭文彬)의 권유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독립결사대(獨立決死隊)에 가입하였다. 정문빈·이운봉(李雲鳳)과 영변군 봉산면(鳳山面) 조양동(朝陽洞)의 최승범(崔承範) 등 11곳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또한 최홍진(崔鴻秦)을 입단시킨 후 이현규(李賢奎) 등 14곳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이해 9월 펑톈성(奉天省)에 있는 통의부 본대로 돌아가 문학빈(文學彬)이 이끄는 제6중대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12월에는 손중엽(孫仲燁)·최병구(崔炳九)·김정호(金貞浩)·최석관(崔錫觀) 등과 함께 평남 벽동군(碧潼郡) 송서면(松西面) 삼서동(三西洞) 최석준(崔石俊)·이창규(李昌奎)·김내진(金乃振) 등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25년 3월 통의부 참사 김포경(金布京)의 지휘하에 동지 김병로(金秉魯) 외 2명을 데리고 모젤식 권총 여러 자루를 휴대하고 국내로 들어와 창성(昌城)·삭주(朔州)·태천(泰川)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친분이 있는 영변의 김준승(金俊承)을 통의부원으로 가입시켰다. 이후 영변군 팔원면 용두동(龍頭洞)에 사는 임인수(林仁洙) 등 4곳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돌아갔다.
1925년 4월 통의부 제6중대 대원인 김경보(金敬甫)·채무식(蔡武植)·이정운(李貞雲)·김병운(金炳雲)·김준승 등과 함께 안주(安州)·박천(博川)·태천·삭주·벽동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후 대원들과 헤어져 김준승과 함께 영변과 개천군(价川郡) 방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지속하였다. 4월 25일 새벽 2시 청색 중국 민병복과 군모에 모젤식 권총으로 무장하고 개천군 한 마을의 구장(區長) 집을 찾아가 밥을 청해 먹던 중 그 집에 와 있던 면서기를 순사로 오인해 처단하려다가 살려주고 그곳을 떠났다.
구장은 곧바로 주재소에 밀고하였다. 주재소에서 개천경찰서에 독립군 출현 첩보를 보고하여 나카타(長田) 경부보 등 4명이 급파되어 주재소 순사 3명과 출동했으며, 덕천경찰서에서도 병력이 파견되었다. 김준승과 함께 용담리(龍潭里) 건지산(乾支山) 기슭의 김덕린(金德麟)의 집에 은신하였는데 일제가 김덕린의 집을 에워쌌다.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 산중으로 피해 9시간 동안 교전하던 중 복부에 총탄을 맞고 4월 26일 오전 9시경 붙잡히고 말았다.
1926년 11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주거침입·강도·공무집행방해·살인미수·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및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등의 죄명으로 12년 형이 선고되었다. 11월 30일 동 법정에서 징역 10년 형이 확정되었다. 재판정에서도 시종일관 여유 있게 항일 활동을 인정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경성형무소에서 옥살이하던 중 1927년 대사령에 따라 8년 형으로 감형되었으며, 1930년 2월 27일 가출옥하였다.
대한민국 박정희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