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암 월출산 산행은 천황사에서 천황봉을 경유하여 도갑사로 하산하는 정통 종주코스인데
수석공원을 방불케 하는 능선길이 계속 이어지는 탓에 흔히들 이 코스 산행을 구냥 예술행위 라고들 한다.
요즘은 각 지방 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도심지 인근의 산길이나 숲길에 조각공원과 탐방로 등을 만드는
생태예술길 조성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다.
강진과 영암의 경계선상에 800 고지로 우뚝 치 솟은 월출산은 원래는 구림리 라는 지명을 따서 구림 월출산
으로 불리었으나 월출산에 있던 세개의 움직이는 바위 즉 동석을 중국 쨩쾌놈들이 굴러 내려 버렸는데 그 중
바위 하나가 스스로 제 자리로 올라 간 연유로 신령스런 바위라 하여 영암이라 불렀고 그 유래로 현재의
지명인 영암이 만들어 져서 영암 월출산으로 불리어 졌고 가수 하 춘화가 부른 영암 아리랑 덕분에
달 뜨는 월출산은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어 그 보답으로 영암 아리랑 노래비도 이곳 영암 땅에 세워져 있다.
천황사와 초석만 놓여져 있는 목탑지를 거쳐 구름다리를 올려다 보면서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느라 숨이
목구녕 꺼증 치밀어 오르는데 갑자기 핸펀이 삐리리 울린다.
이젠 전화할 년도 없는지라 혹시나 딸아이 전화가 아닌 가 하여 핸펀을 펼치니 대구에서 이비인후과를
개업하고 있는 친구 녀석이다. 올만에 예폔네 델꼬
제 고향땅 안동에 있는 하회마을에 와서 하얀 백사장과 부용대를 건너다 보노라니 고다꾜 2학년 때 돌삐와
함께 이곳으로 놀러 왔던 기억이 나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가만히 년도를 따져 보니 고딩 2학년 이면
흐미 47년 전 얘기다. 난 내 인생에서 47년 이라는 세월이 정녕 지나 갈 수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질
못했다.
천황봉 목전에서 강 대장님을 비롯한 우리 느림보 삐이팀 최정예 요원 12명이 점심상을 펼쳤는데
사또밥상도 이토록 버라이어티 하진 않을 것이다. 강 대장님께서 홍어 삼합을 준비해 오셨는데 구색을
오리지날리로 맞추어 오셨다. 640미리 참이슬 한빙이 눈 꿈쩍 하는 사이에 바닥을 보인다.
내가 가져 간 의성 육쪽마늘과 된장을 함께 먹었으니 필경 응답이 오리란 확신이 들어 슬그머니 좌석에서
일어 나 바위 뒤에서 예폔네님께 전화질을 한다.
밤 아홉시 반 경이면 집에 도착할 예정이고 오늘은 경천동지 할 사건이 터질 예정이니 목욕재계하고
정갈한 이부자리 펼쳐 놓곤 학수고대만 하고 있으라고.
이비인후과 박 원장은 예폔네를 잘 만났다. 극성스레 똑똑하다.
2009년도에 박 원장이 전화를 하여 딸이 서울에 있는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는데 부조는
일전 한푼도 않내도 좋으니 제발 머릿수만 쬼 채워 달라고 사정을 한다. 대구에서 평생 병원만
운영을 한 탓에 서울엔 친구나 친지도 별로 없고 본시 의사들은 남의 경조사에 잘 가질 않은 탓이려니
했는데 막상 식장엘 가서 사회자가 양가 집안을 소개하는 걸 듣고서야 무슨 일 인지 대충 감이 잡힌다.
박 원장의 딸이 우리나라에서 세 손꾸락 안에 드는 재벌가의 며느리라 된다. 물론
회장 후계자가 되는 정손은 아니지만 곁가지 라도 재벌 아들은 재벌 아들이라서 그런지 신랑쪽 테이블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신부쪽 테이블은 낯 익은 동창놈 몇 놈이 고작이다. 결혼식 내내 혼자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대구 촌꾸석에서 남의 콧구녕이나 쑤셔서 겨우 먹고 사는 시골의사가 무슨 재주로
서울에 있는 재벌가와 혼맥을 맺을 수 있을까? 역시 해답을 못 구하고 약 달포가 지나서 여동생 가족과
식사를 하다 내 조카와 박 원장의 딸이 같은 학교 같은 과 출신이란 생각이 펀득 들어 조카에게 대충
인적사항을 얘기하니 흐미나 나이는 한 두살 위인 언니지만 동기 동창이라고 한다. 조카 하는 말이
박 원장 따님은 재벌가와 혼인을 할 정도의 스펙을 충분히 쌓았다고 한다. 처음에 대구에서 올라 왔었을 적만
해도 촌년 그 자체 였지만 방학만 끝나고 오면 모습이 바뀌기 시작하더란 것이다. 방학을 이용하여
성형외과에서 전신을 우라까이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못 살던 시절엔 양복 우라까이란 말이 있었다.
양복을 오래 입어 빛이 바래면 양복을 뒤집어서 새로이 재봉을 해서 입었는데 기리까이란 일본 비속어는
바꾸어 끼운다는 의미다.
원래 미대 음대 같은 예체능계는 70년도만 해도 쳐다 보지도 않던 별 볼 일 없는 학교 였었지만 대가리
나쁜 부잣집 아이들이 이곳 예체능계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이곳은 복마전이 되고 만다. 할아버지의
돈찔이 당락을 가르게 된 것인데 내 친구 박 원장 예폔네는 홍익대 인근과 압구정동 쪽을 휘 젓고 다니며
딸 아이 미술 과외에 올인을 하여 결국은 재수 삼수를 하여 명문대 미대에 합격을 하였고 얼굴 등을
우라까이한 뒤에는 미스나오시(물청소)를 깨끗하게 하여 얼굴세탁을 한 덕분에 재벌집 아들의 시선을
끌게 된 것이다.
천황봉을 지난 능선길을 걷노라니 포경수술을 깨끗하게 하고 밑엔 부달 같은 바위덩이를 깔고 앉은 남근석이
보이고 참으로 묘하게도 약이 바짝 오른 좆대바위를 달래 줄 여근석이 오래지 않아 나타 난다.
베틀굴이라고 하는데 묘한 산신의 섭리를 보는 듯 하다.
우리나라 도처에 깔린 남근석 치고 조껍띠기가 붙어 있는 포경바위는 본 적이 없다. 바지를 입지 않던
유인원 시절엔 껍띠기를 벗기면 바위에 긁히고 가시에 찔려서 큰일 난다. 옷을 입으면서 할례를 하게
되었는데 할례는 생후 일주일 되는 유태인 애기만 했던 탓에 독일놈들이 학교에서 유태인 아이를 찾아
낼 적에 우선 바지를 벗겨 보았다고 한다.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 외에 1945년도에 새로이 발굴된 도마복음이란 경전에 할례에 대해서
나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할레를 함이 옳으냐 아님 그냥 두어야...
예수님 가라사대 할례란게 필요할 일이면 그 아이의 아버지 부터 어머님 뱃속에서 할례를 하고 나옴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세월이 바뀌어서 요즘은 세간에서 하는 말이
남의 방이나 베틀굴에 들어 갈 적엔 모자를 벗고 들어 가야 하고 남의 배 위에 오를 적엔 최소한 백근(
60킬로)의 체중을 유지함이 예의라고들 하는 세상이 되긴 되었다.
천황봉 정상에선 우리 느림보의 원년멤버이신 시나브로님과 현지에서 도킹을 하여 금릉경포대 쪽으로
함께 하산을 한다. 여수가 고향이시고 용띄생으로 사진촬영에 관심이 많은 분 이시다.
마지막으로 비록 허공으로 띄울 예정이지만 사랑하는 제 고명딸에게 편지 한통 써 보께요.
애비가 능력 없는 분당 거지 족속 인지라 싸구려 분당 미술학원에서 헐값으로 겨우 과외를 한 너를
아직 어두컴컴한 대학 정문에서 최선을 다해 실기시험을 잘 보라며 네 등을 떼 밀어 넣고는
물바케츠와 미술도구를 들고 들어 가는 네 뒷모습을 보노라니 눈물이 사정없이 쏟아 지는 통에
비틀거리며 앞을 가릴 수가 없어 얼결에 콘크리트 정문 기둥에 한쪽 팔을 짚고는 네 할머니 돌아 가셨을 때
보다 더 설비 울었다. 아니 대성통곡을 하노라니 발 아래도 눈물 콧물이 쏟아 지는데 사람의 몸에서 그리도
많은 분비물이 쏟아져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못난 애비 원망 않고 당당히 합격하고 4년 내내 장학생으로, 대학원 다닐 적엔 조교를 하여 학비를 반으로
줄인 것도 모잘라 또 50프로 장학금을 받았는데 시집 갈 적엔 혼수품 하나 변변히 못해 주었구나.
금년 3월 27일 느림보 산악회를 따라 산행을 갔다 탄천을 건너 집으로 오는 길에 건강한 손주놈을 낳았다는
네 서방의 전화를 받곤 탄천 다리밑에서 상가집의 곡비 처럼 꺼이 꺼이 울다가 주민들이 신고를 하여
지구대에 붙들려 갔었다. 사랑하는 딸아 행복하게 잘 살아 다오.
분당 탄천 다리 밑에서 설비 울어 제키는 검은등 뻐꾸기 돌삐 드립니다.
첫댓글 사랑하는 딸래미가 결혼하여 아들 낳고 잘 살아주니
그보다 더 기쁜일이 어디 있겠어요.
나이들고보니 자식 잘되는거보다 더 좋은 일이 없더이다.
그게 부모 마음이고 우리들 어버이 마음이 아니겠는지요.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자꾸만 뒤돌아봐지는 인생사입니다.
월출산 천황봉에 올라 옛 산친구를 뵈오니 그보다 더 반가울 수가 없더군요.
묵은 장맛같은 옛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늦가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