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관한 시
ㄱ 가는 길 ㅡ 김소월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ㅡ 도종환
공룡발자국 ㅡ 이종섶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 15 ㅡ 신 정일
같이 살고 싶은 길 ㅡ 조 정권
고향길 ㅡ 신경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ㅡ 김재진
길 ㅡ 김기림.김명인.김소월.김용택.문인수.문태준. 박남준.박목월.경림
안도현.유치환.윤동주.윤 제림.이응준.이하석. 정희성.천상병.
길에 대한 회상 ㅡ 엄원태
길은 아름답다 ㅡ 신경림
길을 걷다가 ㅡ 김경선
길처럼 ㅡ 박목월
ㄷ 들길을 가다 ㅡ 시경에서
ㄹ 뤽상부르 공원의 오솔길 ㅡ 네르발
ㅂ 밤길 ㅡ 주병률
빛나는 길 ㅡ 헤세
ㅅ 산길 ㅡ 맹문재. 문인수
산책 ㅡ 김완수
새벽길 ㅡ 박후기
쓸쓸한 길 ㅡ 백석
시골길 또는 술통 ㅡ 송수권
ㅇ 역광의 외길 ㅡ 조 양래
움푹 패인 길 ㅡ 강미정
ㅈ 저녁길 ㅡ 헤세
집으로 가는 길 ㅡ 권혁웅
ㅊ 처음 가는 길 ㅡ 도종환
ㅍ 풍경의 깊이2 ㅡ 김 사인
ㅎ 황토길 ㅡ 박용래
가는 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호베마(네덜란드) ㅡ 미델하르니스의 길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잇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 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공룡발자국 이종섶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잎들, 쳐다보는 순간 납작 엎드려 숨을 죽인다
갓 태어난 바위에 남아 있는 오래된 편지지와 빛바랜 글씨들,
뜨거운 심장 하나 얻기 위해 얼마나 울었던 것일까
떨어진 눈물이 지은 깊고 동그란 집
그들은 모여 살았으나,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한번 갔던 곳은 다시 가지 않았고 뒤돌아보는 법도 없었다
육중한 몸이 발을 데이며 걸어갔을 길의 끝은 언제나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그날의 흉터를 아직도 씻어주지 못한 바람은 눈물만 훔치다 눈알이 짓무르고
억겁의 세월이 흐른 뒤
그의 저작을 파헤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땐 이미 메마른 감정으로 실어증을 먹고사는
허물 벗은 꽃잎 떼들만 발견할 뿐
식지 않는 탄식이 저 딱딱한 책을 펼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다 마지막 발자국에 누워
잠들면, 바람이 넘기다 만 책갈피가 찢어지고
한번 베인 바람이 결을 만들며 자진하는 저녁
발은 모양을 남기지 않는다, 자신의 무게를 남겨 눈물 한 줌씩 박아놓는 것이다
한 시대가 끝나리라는 것을 직감한 어느 전언,
발로 쓴 피눈물들이 허무하게 굳어 있다
내 뒤에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다
너무 딱딱한 길을 걸어왔거나 내가 너무 가볍거나
<시와 문학> 2008년 여름호
너무 딱딱한 길을 걸어왔거나 내가 너무 가볍거나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15
1 충북 충주 목계나루에서 섬강이 남한강과 만나는 강원 원주 홍호리까지의 남한강길
2 경북 봉화 이황선생이 걸었던 청량산에서 도산서원에 이르는 퇴계 오솔길
3 전남 구례 피아골 입구에서 경남 하동까지의 섬진강 길
4 강원 정선군 광하교에서 나리소까지 남한강의 절경 동강길
5 충북 괴산군 청천면 선유구곡에서 화양구곡까지 길
6 전남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에서 월출산 아래 누릿재 넘어 영암읍까지 삼남대로길
7 문경새재 길
8 강원 양양군에서 홍천으로 넘어가는 구룡령 옛길
9 전북 임실 덕치섬진강 진메 마을에서 순창군 동계면 평남리까지의 섬진강 길
10 강원 평창 대관령 넘어 관동대로를 따라 가는 길
11 남강 상류 화림계곡 거쳐 함양 상림에 이르는 길
12 경남 통영 미륵섬 일주 길
13 전북 고창 해미에서 선운산 넘어 선운사 가는길
14 전북 부안 내변산에서 직소폭포 거쳐 내소사에 이르는 길
15 강원 삼척 용화해수욕장에서 임원을 거쳐 호산리까지 가는 길(관동대로 차마고도)
신 정일 추천
2008년 7월 11일 금요일 동아일보
모네
같이 살고 싶은 길 조정권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들다가 지워버린 길
더디 더디 물감 들지만 찬비 떨어져
때 놓치면 조금 서운한
예쁜 길 눈에 넣고 싶은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가령 늦가을 淸平쯤에서 加平으로 차 몰고 가다
풀들 스치며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는
오른편으로 굽어 숨는 길
목적지 없는 마음만이 궁금해서 한번 들어가보는
그냥 무작정길
한 오리쯤 가다보면
바람만 혼자
쓸고 있는 길
저녁고요 속으로
내려와 흘러다니는 낙엽들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일주일에서 한 열흘쯤만
단풍 들키는 길
그런 길들과 이제는 같이 놀아주고 싶다 살아주고 싶다
연애걸고 싶다 킬킬거리고 싶다
마누라 몰래 데려다가 새살림 채리고 싶다
고향길 신경림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 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미 수북한 쇠전 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 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도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 되어 떠나려네
남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김재진
갑자기 모든 것 낯설어질 때
느닷없이 눈썹에 눈물 하나 매달릴 때
올 사람 없어도 문 밖에 나가
막차의 기적소리 들으며 심란해질 때
모든 것 내려 놓고 길 나서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 위를 걸어가도 젖지 않는 만월같이
어디에도 매이지 말고 벗어나라
벗어난다는 건 조그만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것
남겨진 흔적 또한 상처가 되지 않는 것
예리한 추억이 흉기 같은 시간 속을
고요하고 담담하게 걸어 가는 것
때로는 용서할 수 없는 일들 가슴에 배어올 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 위를 스쳐가는 만월같이
모든 것 내려놓고 길 떠나라
미국 그랜드 캐니언
길 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흐려
때없이 그 길을 너머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도쿄 긴자 사거리
길 김명인
길은 제 길을 끌고 무심하게
언덕으로 산모퉁이로 사라져가고
나는 따라가다 쑥댓잎 나부끼는 방죽에 주저앉아
넝마져 내리는 몇 마리 철새를 본다
잘 가거라, 언덕 저켠엔
잎새들 떨군 나무들
저마다 갈쿠리손 뻗어 하늘을 휘젓지만
낡은 해는 턱없이 기울어 서산마루에 있다
길은 제 길을 지우며 저물어도
어느 길 하나 온전히 그끝을 알 수 없고
바라보면 저녁 햇살 한 줄기 금빛으로 반짝일 뿐
다만 수면 위엔 흔들리는 빈 집뿐
길 김소월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였소
오늘은
또 몇십 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길 김용택
사랑은 이 세상을 다 버리고
이 세상을 다 얻는 새벽같이 옵니다
이 봄
당신에게로 가는 길 하나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 길가에는 흰제비꽃이 피고 작은 새들 날아갑니다
새 풀잎마다 이슬은 반짝이고
작은 길은 촉촉이 젖어
나는 맨발로 붉은 흙을 밟으며 어디로 가도
그대에게 이르는 길
이 세상으로 다 이어진
아침 그 길을 갑니다
길 문인수
여러 날 여러 땅을 기어 갔다
나팔꽃 넝쿨의 무더운 먼 길을 본다
간밤에는 그 오랜 어둠
바람이며 빗줄기까지도 부여잡곤 하였던지
등엔 또 꽃붉은 상처를 지고
절망절망 전다
담벼락 아래
또 앞이 막히는 삶을 본다
제 몸이라도 비틀어 허공을 뚫고 있다
알타이 시
길 문태준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다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길 박남준
길이 빛난다
밤마다 세상의 모든 길들이 불을 끄고 잠들지 않은 것은
길을 따라 떠나간 것들이 그 길을 따라
꼭 한번은 돌아오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길 박목월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산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
뵈일 듯 말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남한산성
길 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피는가 하면
큰 물에 우정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행복한 동행> 2007년 2월호
길 안도현
걸어가면서 부르튼 발바닥은
걸어가면서 가라앉힐 수 있지만
어느 날 내 마음 속 물집은 아무래도
터뜨릴 수 없다 터뜨린 수 없다
그냥 홀로 한국소처럼 먼 하늘에다 두 눈알을 박기 전에
산 넘고 물 건너 그대 만나러 왔더니
지나온 땅 빼돌리고 저무는 벌판 끝으로 달아나 눕는 길
도쿄대 정문 은행나무길
길 유치환
등성이 넘어 풀잎을 밟고 오솔길을,
원수도 처음 이 길로 하여 찾아 오고
사랑도 이 길로 갔으리니,
아득히 산하를 건느고 전원을 지나,
눈물겹게도 면면히 따르고 불러 얽힌 인간 은수의 이 잇닿음을 보라.
가도 가도 신에게로 가는 길은 없는 길.
필경은 나도 나의 자위에서 돌아 서
그 위에 표표히 나타나 사라질 길이여
시집 <예루살렘 닭>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윤제림
꽃 피울려고 온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을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다려오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꽃 뒤에 가 숨는다
흠칫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가는 짐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론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배 용준 < 외출>
독일 함부르크
길 이응준
길을 걸으며 길을
생각할 수 있다면 길을 바라보면
길만 떠오르고 지난 길은 다 사라져 버렸으면
길에서 길을 버리지 못하고 저 길을 가지고 싶은 맘
한걸음도 바로 걷지 못할 때 길은 잠언이 되고
길은 절벽이 되리라
길은 우리의 고향이고 길은 우리의 관이고
길은 사랑이고 저주라는 걸 길에서
끝이 없는 길에서 알게 되더라도 길이 길이고 길
아닌 것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되는 날
길에서 뼈를 묻고 사라지는 하찮은 먼지의 길이 길이
되어 안다면 그 정도가 겨우 그 정도가
우리가 길을 가는 이유고 죽어서 하나의 길이
되는 이유라고 길은 말한다 길은 저끝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눈물 앞에서
길이 되라고 한다 살아서 길을 가다가
죽어선 길이 되라고 가르친다
길 이하석
나무 사잇길이 밝게 부르는 것 같다
흐르는 마음이 닦아서 편편해지는 게 길의 힘이어서
산비탈도 길로 내려서면 나른해진다
길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집에서 나와
가출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기척에도 귀 기울이며
사람들은 제 설레임들을 몰래 그 길에 내어 널어 말린다
사람들이 오간 기억으로 길은 굽이친다
아침에 길 쓸며 제 갈길 닦은 이는 제 길의 은짬에서 낮에 죽고
누가 그를 길 없는 비탈로 밀어올리는지 가파른 산길이 새로 생겨난다
그 길은 추억들로 환해지다 닫히리라
바람도 한동안은 그 길로 해서 산자들의 마을길을 기웃거리리라
아침에 또 누가 그런 바람이 부산하게 다녀간 길을 쓴다
길 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17인 신작 시집 <마침내 시인이여> 1984년
길 천상병
길은 끝이 없구나
강에 닿을 때는
다리가 있고 나룻배가 있다
그리고 항구의 바닷가에 이르면
여객선이 있어서 바다 위를 가게 한다
길은 막힌데가 없구나
가로막는 벽이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한다
그러니
길은 영원하다
길에 대한 회상 엄원태
1
치자꽃 마른 열매는
네 입술처럼 까칠하다
내 거기 입맞춘다면
향기 오래 아프리라
길은 네 입술에 그물처럼 갈라터진 것
평생을 떠돈다 한들
거기에 다 이를 수는 없으리라
2
치악산 첩첩 흑백으로 드러나는 늑골들
만종분기점에서 새 길 만나 접어든다
길은 어디서나 아득해서, 죽음 지척이다
폭설 너머 희고 어두운 설악의 윤곽
저 빗장뼈들 컴컴하게 추운 돋을새김이다
검고 푸른 게 너의 고통이라면
온몸으로 떠안으며 거기로 가고 갈 수밖에
3
<화양연화>를 보던 오후가 저문다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곤 하던 그것이
화면이던가, 음악이던가
어떤 마음이 소용돌이무늬, 지문이었던가
사랑의 체험 한 복판에는 이상한 구멍이 생긴다
몸의 한 부분을 잘라낸다는 증거?
이를테면, 잘라내어버린 흉곽 한쪽?
자기 안의 쓰라리고 달콤한 죽음?
중국 태산 7412 계단
길은 아름답다 신경림
산벚꽃이 하얀 길을 내며 내 꿈은 자랐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가지리라
착해서 못난 이웃들이 죽도록 미워서
고샅의 두엄더미 냄새가 꿈에서도 싫어서
그리고는 뉘우쳤다 바깥으로 나와서는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이제 거꾸로 저 길로 해서 돌아가리라
도시의 잡담에 눈을 감고서
잘난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귀를 막고서
그러다가 내 눈에서 지워버리지만
벚꽃이 하얀 길을 갈대가 우거진 그 고갯길을
내 손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면서
거리를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되어서
잊어버리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내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다 길따라 가면 새도 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이를 것만 같아서
길 끝에서 험준한 벼랑이 날 기다릴 것만 같아서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을 아름답다
미당 서정주 고향 질마재
길을 걷다가 김경선
생을 걸으며
마음의 깊이도 사랑의 결말도
쉬 결론 내릴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생의 갈피갈피마다 젖은 풀잎이 무성하고
피고 진 흔적이 난무한 저 길 복판
태양이 진 언덕 위로 서리가 내리고
마른 갈잎도 간직 되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발아하지 못한 꽃씨를 품고
몸을 내던지는 꽃잎,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대지는 겨울 내내 출렁거리며 암내를 풍기는
아, 생이란 것 결국 썩어 발아하는 것
생이라는 슬픈 길을 걸을 때
성에가 낀 창을 후후 불던 꽃잎도
스스로 꽃 피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염려는
어수룩한 눈물바람인 것인데
생이 기막히다는 것 생이 막막하다는 것
다시 꽃피울 틈을 위해
떨고 있는 건 겨울의 노래에 불과하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길처럼 박목월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산 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
뵈일 듯 말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 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 나가다
...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
길은 실낱 같다
보성 녹차밭
들길을 가다 詩經
들길을 가다 보니 북나무만 무성하구나
혼인한 까닭으로 그대에게 와서 살지만
그대 날 돌보지 않으니 난 친정으로 가려네.
내가 들길을 가다가 소루장이를 뜯었지
혼인한 까닭으로 그대에게 와 머물러 있지만
그대는 날 돌보지 않으니 난 친정으로 가려네
들길을 가다가 순무를 뽑았지
옛 혼인을 생각 않고 새 짝을 찾고 있는 건
부자라서가 아니라네, 사람이 달라 그러는 것이지.
타국으로 시집간 여자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들길을 돌아다니며 부른 노래다.
우리 농촌 들길에도 논두렁 밭두렁에도 베트남에서 필립핀에서 시집온
눈물 삼키며 들길을 헤매는 슬픈 아낙이 없기를
계용묵의 백치아다다가 생각난다
뤽상부르 공원의 오솔길 네르빌(1808-1856)프랑스.
소녀가 지나갔다
새처럼 경쾌하고 민첩하게
손에는 빛나는 꽃을 들고
입에는 새로운 노래를 담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나와 마음이 통하여
나의 깊은 밤 속으로 와서
단 한 번의 눈길로 내 마음을 밝혀줄
하나뿐인 여자!
그러나 어림도 없는 일 ㅡ 내 청춘은 끝났다...
잘 가라, 나를 비추던 부드러운 빛이여ㅡ
향기여, 젊은 아가씨여, 조화여...
행복은 지나갔다 ㅡ 도망쳐 버렸다
밤길 주병률
겨울 해 떨어지고 추워져 외진 산길을 걷는다
야생으로 차茶밭이 흔한 길이다
가을은 가고 겨울에 남은 부용꽃 마른 잔대를
마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쓸쓸해진다
이별을 하고 난 뒤에 바라다보는 빈 하늘 같다
밤에는 모두 어디로 가서 자는지
산짐승들은 기척이 없고 풀들은 죄다 고개를 숙였다
길에게도 옛 생각이 있다는 듯
먼 옛날 한 번은 다녀갔던 길이라고
걸음을 뗄 때마다
제법 귀에 익은 발자국 소리를 낸다
여기서부터 청석골까지는 시오리
이 땅의 차나무로 실하게 묻혀서
죽어야 세상에 다시 나겠다던 그를 만나면
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다는 그곳이
춥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세월이 너무 많이 가서
덧없다고 말하기는 늦은 저녁 때
하동역 경전선 철교 거뭇한 불빛도
선한 차茶빛이 되는 길이다
빛나는 길 헤세
길, 길
멀리 돌아 나간 길에
푸른 하늘이 깃발같이 그립다
인생은 길이다
사랑은 길이라
쉬어서 쉬어서
오늘도
우리는 길을 걸어 보리니
백두산
산길 맹문재
노새똥이 널린 네팔의 산길에서 발견한 것은
길을 달고 있는 길들이었다
어떤 길은 빨래가 널린 길을 달고 있었고
어떤 길은 아낙들이 피사리를 하는 길을 달고 있었고
외양간과 안방이 하나인 길을 달고도 있었다
옥수수를 키우는 길
멍석을 펴놓은 길
거머리를 키우는 길
폭포를 늘리는 길
히말라야의 구름을 쳐다보는 길도 있었다
길 위의 아이들은 맨발이었고
남자들 대신 여자들이 낫을 들고 있었고
광주리를 엮는 노인의 손은 개의 졸음처럼 느리기만 했다
학교를 가리키는 다랑논들은 작았고
마을의 제단은 아이들의 키만큼 낮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노인들에게 인사를 잘했고
아낙들은 땅바닥에 둘러앉아 저녁을 손으로 비벼 먹었다
닭들은 알을 제때에 낳았고
염소들은 애처롭게 울면서도 길을 잃지 않았고
개들은 소와 닭과 사람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컸다
산에서 나온 길들은 우물가에서 한숨 쉬었고
비가 내리면 개와 소와 닭들이 젖지 않도록 먼저 젖었다
길들은 저녁 때가 되면 모두 산으로 돌아갔다
산길 문인수
중턱의 활엽 그늘 아래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짐만큼이나 무거운 식곤증을 안고
다시 산길을 오르면서
가파르고 거치른 욕망 같다는
그런 생각을 자꾸 하였습니다
땀을 흘리며
몸의 살도 마침내 다 흘러내리고 말 것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긴 산길은 그러나
중간에서 다 먹어 버린 듯 짧게 끝나고
산꼭대기에는 앙상한
허기 같은
흰 고사목들이 무리를 이루고 서서
일행은 서로
저마다의 허무한 뼈를 바라보며 적막하였습니다
노고단
산책 김완수
마른 나뭇잎이 떨어진 길에서
추위에 떨며 그을린 나무들이 서성이고
그 나무들이 떨어뜨린 나뭇잎의 길을 따라가면
나무들이 마음 주고픈 옹달샘에 닿을 수 있나
오래된 돌담의 이끼들이 돌들의 말로 자라
무심코 지나는 누구에게든 등을 돌려세워
오래된 일과 오래되지 않은 일을 말할 수 있다면
돌들이 마음 주고픈 시냇가에 닿을 수 있나
혀짧은 새의 지저귐을 음악으로 연주하며
우리가 악기의 목젖을 툭 건들어 보았을 때
새의 지저귐이 쏟아져 나와 빈 나무가지마다 매달린다면
새들이 마음 주고픈 하늘에 닿을 수 있나
우리들 마른 마음에 불을 지펴 마음마다 큰 화로가 되어
별밤에 알밤을 모아 차가운 손금을 데우는 마음으로
한량없는 바다처럼 한 몸이 되어 남실댄다면
우리가 마음 주고픈 마음에 닿을 수 있나
새벽길 박후기
쓸쓸한 길 백석
거적장사 하나 山뒷옆 비탈을 오른다
아 - 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쓸쓸한 길이다
山가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라간다
이스라치전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이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뜨물같이 흐린 날 東風이 설렌다
시골길 또는 술통 송수권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르느와르 ㅡ 초원의 비탈길
역광의 외길 조양래(1959 - )
난 오늘도 외로움의 끝까지 헤매며
강둑을 홀로 걸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홀로이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곧잘 떠올리며
죽음이 두려우면 슬픔에 의존하며 그렇게 강둑길을 홀로이
언제나 우리 게으른 일상이 그렇듯이
내가 보는 수면은 주름진 물비늘로 빛났다가
힘을 잃은 채 금세 수평으로 되돌아왔다
난 햇볕에 따사로운 양지보다는
역광으로 향했을 때 가려 보이는 어스름의 우수에 평생을 바쳤다
사람들이 그저 우수 지나치며 아늑한 양지를 택했을 때
나는 눈부신 역광의 우수에 대해
모든 고뇌에 대해
내 모든 의지를 다해 반역을 가하려 애썼다
오늘도 난 햇빛이 가는 방향 대신
햇빛을 거스리는 역광을 향해
맑고 한적한 긴 둑길을 걸으며
더러 강둑에 앉아 술병을 비우며 시에 대한 집착을 갖고
햇빛이 가리는 어스름을 살피려 애썼다
간간이 지나오는 둑길의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쳤으며
내 되돌아봤을 때 그들은 양지쪽을 향해 무심히 갔다
패기도 사랑도 안식 속엔 금세 생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격정도 희열도 아늑하면 금세 권태로워져버리는 것을
난 평생 역광의 그 가시광선을 향해 가려 한다
지나온 길 민들레 냉이꽃 지천으로 흐드러졌어도
그 따사로운 안식은 날 권태로 잠재우는 봄날의 오수
난 그 권태를 등지며 오늘도 역광 외길을 간다
우수의 햇살에 눈이 시린
굽이굽이 강둑 길을
반짝이는 물비늘에 눈이 시린 먼 강둑 길을
문학과 창작 .1999년
움푹 패인 길 강미정
성난 빗물이 지나간 곳이
알 수 없는 환부를 지닌 채
흘러가지 못하고 머뭇거린 곳이
길이 되기도 한다
웅덩이에 빠진 바퀴를 빼려고
몇 번이나 부르릉거리며 바퀴를 돌려도
헛돌며 웅덩이는 더 깊이 패이는 것처럼
가슴 그 어디쯤에도
길이 패이고 웅덩이가 깊어지는 곳이 있다
이 깊게 패인 곳에 머무는
머뭇거린 마음이 길이 되기도 한다
성난 빗물만 살고 있다는
그대의 가슴에 닿고 싶어서
아픈 내 눈은 그대에게로 넘쳐흘러 갔지만
한번도 그대의 가슴 쪽에 이르지 못해
내 가슴 오래 아팠던 것처럼
오래 앓아 누웠던 시간이 길이 되기도 한다
서로가 알 수 없는 환부를 지닌 채
잠든 마음의 이마를 짚어보며
희고 찬 물수건을 얹어주고 가는
느리고 따뜻한 손길이
서로에게 고요한 길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가슴 한 쪽이 몹시 쓰리다거나
그립다거나 하는 말들이 무수히 생겨나
사랑한다 말하는 그대가
움푹움푹, 패인 길이 되기도 한다
저녁길 헤세
저녁 늦게 먼지 이는 길을 나는 걸어갑니다
별 그림자가 기우뚱하니 떨어집니다
그리고 포도 덩쿨 사이로
시냇물과 길 위에 달빛이 보입니다
불렀던 옛 노래들을
또 한번 나직이 불러봅니다
수많은 방랑의 그림자가
내 길 위에 포개집니다
옛 바람과 눈과 햇살이
나에게 울려옵니다
여름밤과 파란 번갯불이
폭풍과 고된 방랑
누렇게 몸을 그을리고 이 세상의
풍요함을 가득히 마시고
계속 앞으로 끌려가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가는 오솔길이 어둠 속에 가라앉을 때까지
집으로 가는 길 권혁웅
우리집은 골목과 골목 , 다시 골목과
골목을 지나쳐야 해 머리와 목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걸어야 해
구불구불 늘어선 담장들을 걷다 보면
거대한 짐승의 내장을 지나치는 느낌이야
내가 소화되고 있다는거
하루하루가 녹아서
내 뒤에 젖은 발자국을 만들고 있다는거
집으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내면이야 헐어버린 위벽을 훑어가듯
담모퉁이에는 범퍼가 긁은 자국이 있어
나는 이탈리앙 베이커리에서 식빵
방학약국에서 겔포스 , 버드나무 슈퍼에서
디스 플러스를 사가는 중이야
이미 골목과 골목에 관해서는 말했군
머리와 목을 늘어뜨리고 천처히
걷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군
골목과 골목은 길이 아니야 그건
집들이 비워놓은 울짱 바깥이야
내 안의 구멍으로 식빵과 겔포스
담배 연기가 천천히 흘러가듯
나는 다시 골목과 골목을 지나치고 있어
저기가 내집이야 나는 문을 닫고
양변기처럼 구부려 잠들거야
처음가는 길 도종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 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풍경의 깊이2 김사인
이길,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작은 보따리로 울고 간 길
그리하여 슬퍼진 길
상수리와 생강나무, 찔레와 할미꽃과 어린 풀들의
이제는 빈, 종일 짐승 하나 지나지 않는
환한 캄캄한 길
열일곱에 떠난 그 사람
흘러와 조치원 시장통 신기료 영감으로 주저앉았나
깁고 닦는 느린 손길
골목끝 남매집에서 저녁마다 혼자 국밥을 먹는
돋보기 너머로 한번씩 먼데를 보는
그의 얼굴
고요하고 캄캄한 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년
황토길 박용래
낙엽진 오동나무 밑에서
우러러보는 비늘구름
한 권 책도 없이
저무는
황토길
맨 처음 이 길로 누가 넘어갔을까
맨 처음 이 길로 누가 넘어갔을까
쓸쓸한 흥분이 묻혀 있는 길
부서진 봉화대 보이는 길
그날사 미음들레꽃은 피었으리
해바라기 만큼한
푸른 별은 또 미음들레 송이 위에서
꽃등처럼 주렁주렁 돋아났으리
푸르다 못해 검던 밤하늘
빗방울처럼 부서지며 꽃등처럼
밝아오던 그 하늘
그날의 그날 별을 본 사람은
얼마나 놀랐으며 부시었으리
사면에 들리는 위엄도 없고
강 언덕 갈대닢도 흔들리지 않았고
다만 먼 화산 터지는 소리
들리는 것 같아서
귀 대이고 있었으리
땅에 귀 대이고 있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