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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4월30일
성 비오 5세 교황
Saint Pius V, Pope
St.Pope PIUS V(Michael Ghisleri)
San Pio V (Antonio Ghislieri) Papa
(Papa dal 17/01/1566 al 01/05/1572)
Born:17 January 1504 at Bosco, Italy as Michael Ghisleri
Died:1 May 1572, apparently of a renal disorder
Beatified:1 May 1672 by Pope Clement X
Canonized:22 May 1712 by Pope Clement XI
Pio = devoto, religioso, pietoso (signif. Intuitivo)
=devout person, religious, pietoso (signif. Intuitivo)
1504년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리아 근처에서 태어났다.
도미니꼬회에 입회하여 신학을 가르쳤다.
주교와 추기경이 된후 1566년에 교황이 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부터 시작된 교회 개혁을 강력히 추진했고
신앙 전파를 향상시켰으며 거룩한 전례를 쇄신했다.
1572년 5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요한 복음 주해]에서
(Tract. 124,5: CCL 36,684-685)
교회는 베드로가 고백한 그 반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쌍한 인류를 끊임없이 위로해 주시지만
이 일반적 위로 외에 또 다른 특별한 위로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때가 차자, 즉 그렇게 할 시간이 이르렀다고 하느님께서 생각하실 때,
그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하느님으로 계시면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인간 예수 그리스도 곧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재생의 물을 통하여 온갖 죄의 씻음을 받은 이들이 영원한 단죄에서 해방되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또 그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고통스럽고도 위험한 시련속에 길을 걸어가야 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육체적 영신적 위로를 얻어 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앞에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간다 해도
이 현세 생활에서의 나약성 때문에 아무 죄 없이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청하는 죄의 용서를 더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주님은 애긍 시사라는 유익한 치료제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인생의 역경에 직면하는 동안 복된 희망 속에서 이것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므로 이 교회의 대표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한 인간이었고,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더 풍부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사도, 첫 사도였습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그에게 전해졌을 때
그는 온 교회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현세에서 여러 가지 시련들,
말하자면 폭풍, 심한 비 그리고 태풍으로 흔들리지만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오는 이름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보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먼저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주님이 뜻하시는 바는 베드로가 고백한 그 반석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으며 그 기초 위에 베드로 자신도 세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이미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는 베드로를 통하여 천국의 열쇠 곧 죄를 묶고 풀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름으로써 악에서 구출되고
죽기까지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더 잘 따르게 됩니다.
(가톨릭홈에서)
1. 생애
교황 성 비오 5세는 1504년 1월 17일 북쪽 이탈리아의 보스꼬 마렌고(Bosco Marengo) 촌락에 있는
안토니오 기슬리에리 가문에서 출생하여 영세때에 미카엘이라는 본명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을 동경하여 부근의 도미니꼬회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5세로서 도미니꼬 수도회의 입회 허가를 얻어 더욱 면학과 기도, 고행등 신심행사에도 더욱 주력 하였다.
1528년 제노바에서 사제가 된 후 여러 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였다.
1550년 코모(Como)의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코모는 스위스 국경 근처여서 이단자들이 많았다.
이후 종교 재판에 상당히 관여하였고 1556년 수트리(Sutri)와 네피(Nepi)의 주교,
1557년 3월 15일 추기경이 되어 1558년에 로마 교회의 이름 난 종교 재판총관이 되였다.
종교 재판을 완화시키고 정치와 외교적으로 기울어진 교황 비오 4세와는 불편한 관계였다.
교황의 서거 후 19일간 지속된 콘클라베에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수표를 얻었다.
그러나 교황이 된 비오 4세의 친척편애 통치하는 방법과 같이 일치 하지 못하니까
1559년에 신임을 얻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몬도비"(Mondovi)의 주교좌로 옮겨 교구를 부흥시켰다.
그리고 1565년 12월 9일 비오 4세가 서거하자, 카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의 지지를 받아,
1566년 1월 7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 추기경 축일:11월4일
우선 교황은 트렌트 공의회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교황청을 수도원과 비슷하게 꾸미고 검소한 식사와 생활을 하였다.
족벌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도미니꼬회원이었던 조카 미켈레 보넬리(Michele Bonelli)를
추기경에 임명하여 국무 장관으로 삼았다.
교황은 종교 재판과 금서목록을 강화시켜 이단 근절에 힘쓰고 이탈리아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교황은 주교들의 정주(residentia)를 강조하여 장기 출타 시에는 사목직과 성직록을 박탈하기도 하였다.
수도원을 정비하고 후밀리아티(Humiliati)와 같은 수도원들은 폐쇄하였다.
신학교를 세우고 지방 종교회의를 열었으며 성직자들의 회의를 독려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밀라노에서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에 옮긴 카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이었다.
교황은 전례 갱신에도 노력하여 두 개의 업적을 남겼다.
1568년에 로마 성무일도와 1570년에 로마 미사 경본을 만들었다.
교황은 1567년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의 박사로 공포하고
1570년 성인의 전집 17권을 출판하며 불가타 성서의 새출판을 계획하였다.
이런 식으로 교황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해 로마 가톨릭 안에서 개혁(Counter-Reformation, 반종교 개혁)
을 조직적으로 시행해 나갔다.
영국의 여왕 엘리사벳 1세를 1570년 2월 25일에 Regnans in excelsis(천상의 통치)라는 칙서로 파문하고
프랑스에서 위그노 파의 근절을 위하여 드 메디치의 가타리나를 지원하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축일:1월28일.인창동성당게시판1590번.
*불가타 성서:405년에 라틴어로 완역되어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된 성서(聖書)의 이름
*프랑스 위그노 파: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위그노로 불렀다.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축일:10월7일
오스만투르크와의 대립에 있어서 교황은 유럽인들과 연합하여
유럽과 그리스도교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스페인, 베네치아, 교황령의 함대들이 고린토 만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소위 1571년 10월 7일 레판토[Lepanto] 전투) 대승하였다.
이 승리를 로사리오 기도의 덕분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이 승전을 기념하여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10월 첫 주일에 지내게 하였다.
(후에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변경되었음).
이듬해 봄에 비오 5세는 병을 얻어 1572년 5월 1일 세상을 하직하였다.
로마 시민은 그가 너무나 엄격한 인물이라는 소문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등극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서는 성인을 잃었다고 진심으로 슬퍼하였다고 한다.
1672년 5월 10일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고, 1712년 5월 22일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2. 업적
비오 5세가 1566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1572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산산이 분열된 교회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막중하고도 힘겨운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서방국가들은 부패와 종교개혁, 새로 생긴 군소 국가 사이의 치열한 싸움,
그리고 오스만투르크(터어키)의 침략 위협 등으로 온통 혼란의 도가니였다.
1545년 전임 교황은 이러한 시급한 문제들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했었다.
공의회에 모인 학자들은 18년에 걸쳐 토론하고 확인하고 단죄하는 작업을 통해
가톨릭이 취해야 할 행동방향을 결정했다.
그후 비오 5세는 교황좌에 오름과 동시에 공의회를 정착시키고,
공의회가 요구하는 철저한개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을 맡았다.
사제를 올바르게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를 세우도록 했으며,
새로운 미사경본과 성무일도, 교리서 등을 발간하고,
청년들을 흡수하기 위해 크리스챤 교리위원회를 설립했다.
또한 교회 내의 부조리를 막기 위한 법 제정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밖에도 병원을 세워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도 하고 구제사업을 시행하기도 했으며,
정기적으로 돈을 주어 가난한 로마의 수도원에 잔치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개혁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의 반대에 부딪혔다.
비오 5세의 치하(治下)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하면 터어키(오스만 투르크)의 왕 세림 2세가
대군을 거느리고 이탈리아와 그 외 그리스도교의 여러 나라를 침범하여 온 사실일 것이다.
용감무쌍한 터어키 군 앞에는 대항하는 적이 없고, 전 유럽이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해 전 유럽이 단결할 것을 바라는 교황의 희망에
프랑스와 네덜란드간의 분쟁은 큰 장애요소였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유럽은 단일 함대를 조직하여
그러나 비오 5세는 매괴신공( 로사리오 기도)을 친히 바치기도 하고 전 신자들에게도 기도를 바치도록 하였다,
적군을 레판토에서 맞아 싸우게 된 오스트리아의 태자 돈 요한은
1571년 10월 7일 기적적인 대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3. 신심과 수덕적 태도
교황의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그는 조금도 수도자로서의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버리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종래의 호화스럽던 교황의 의식주를 되도록이면 간단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므로
교황청을 방문하는 자는 마치 수도원과 같은 감을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그가 교황에 피선되자, 시민들은 전례대로 성대한 교황 취임식이 곧 있으리라 기대하였으나
시일이 경과해도 아무 소식이 없더니,
취임의 대식전은 중지되고 그의 경비는 모조리 빈민구제 및 경영 곤란한 수도원 원조의 목적에 기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민들은 모두 놀라는 동시에 새교황의 자선박애의 정신에 감탄하였다 한다.
그 외 비오 5세는 결코 교황의 복장을 새로 맞추지 않고 전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만족하며
때때로 모자없이 맨발로 로마의 성당을 순례하였다고 한다.
비오 5세의 등극(登極)은 마침 트렌트 공의회의 직후였었다.
그러므로 그는 수많은 주교들과 신학박사들이 그 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세밀히 실행하도록 하고,
종교개혁의 미명하에 전「유럽」의 종교계를 혼란 속에 빠지게 한 신 교파에 대항하기 위하여
우선 공교요리를 편찬하도록 하고, 1567년 이를 경향 각지에 배부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써 참된 성교(聖敎)의 쇄신과 혁신의 실적을 올려
교황청부터 주교, 다음은 사제, 수도자, 최후에 평신자 등의 순서대로 점차 신앙생활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는 조금이라도 악이라 불리우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처단하였다.
일요일에 노동하는 자는 주일을 모독하는 자로 단호 배격하고,
신성 모독 등의 대죄에 대해서는 추상과 같이 엄벌을 가하였다.
비오 5세는 인간을 천사처럼 취급하고 그의 연약함을 돌보지 않았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도
실로 이 같은 점에 기인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의 선임자인 제교황들에게는 누구나 다소 친척을 등용하는 악폐(惡弊)가 있었으나
그는 깊이 이 점에 대해서 경계하였다.
독일의 세뻬르트 레프레르 두 박사의 편찬으로 되어있는 교황사(敎皇史)라는 서적에는
제1대의 교황 성베드로 부터 제259대 교황 비오 11세 까지의 초상화가 있는데,
그중에는 화려한 교황의 모습을 갖춘 모상이 있기도 하고 오른손을 들어 강복을 주는 모상도 있는가 하면,
집필과, 설교하는 모습 등 가지가지로 되어 있으나, 성 비오 5세 교황은 장궤 합장한 태도로 그려져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당시의 로마시민에게 비오 5세 처럼 경건한 교황은 지금까지 본 일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한 그리스도교 제국을 침공해온 터어키의 왕 세림 2세 에게,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국의 무력에는 꼼짝도 안하지만
다만 저 교황의 기도의 힘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신앙이 깊고 열심한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
비오는 ’경건한’이란 뜻이다.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리아 교외 보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귀족의 후손인데,
원래 이름은 안토니오 미카엘 지스리에리였다.
그는 14세 때에 도미니칸이 되었고, 1528년에 사제가 되었는데,
그 이후로 16년간 철학과 신학 교수를 재임했으며,
1556년에는 바오로 4세에 의하여 네피와 수트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557년에 추기경이 된 지슬리에리는 1566년에 비오 4세를 계승하여 교황에 등극하면서부터
트랜트 공의회의 칙서들을 실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새 교리서를 완성했고(1566년), 성무일도서를 개정했으며(1568년), 미사경본을 다시 펴냈고(1570년),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집을 새로 발간케 하는 한편, 그를 교회 박사로 선언하였다.
그의 재임기간은 주로 프로테스탄트와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1570년에는 잉글랜드의 엘리사벳 1세를 파문했다.
또한 그는 크리스챤 수도회의 일치를 도모하였으며, 크리스챤 국가들의 동맹을 호소한 인물이기도 하다.
1712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칼빈주의
영어 Calvinism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칼빈(1509∼1564)이
인간의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반대하여 일으킨 종교사상.
칼빈주의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한 결과,
인간에게는 이미 의지의 내적(內的) 자유가 없고 인간은 하느님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미리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따라서 천국으로 예정된 선택받은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법은 없다.
칼빈주의의 요점은 그의 저서≪그리스도교 요강≫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하느님은 절대무한(絶代無限)한 존재로 우주에서 하느님만이
참된 유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피조물은 하느님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윤리적 종교적 의지의 자유를 철저히 부정하는 절대적 `예정설’이다.
그의 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함을 외적(外的)으로 결부시키려는 점에 있고,
그것이 이 신앙의 유일한 구원의 전제가 된다.
따라서 전례나 성사도 구원에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선택받은 자들만의 단체이며 내부에는 사제직이나 교계(敎階)제도도 없고,
교단은 공화적(共和的)으로 조직되어 국가로부터 독립된다.
국가는 관념적으로 신정제(神政制)를 취해야 된다고 하였다.
칼빈주의는 너무 엄격했던 처음의 절대적 예정설이 완화되면서 급속히 교세가 확장되었으며
변증법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이 칼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설은 막스 베버(Max Weber)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노동의 쾌락과 노동의 성과를 하느님의 선택받은 증표로 보는 칼빈주의의 구원사상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정신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칼빈주의의 노동윤리, 즉 `세속생활의 금욕주의’라는 윤리가
자본주의의 발생기에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퓨리턴에게 인민주권(人民主權)의 사상을 불어넣음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촉진시켰다.
칼빈의 사상과 이념은 제네바를 중심으로하여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의 라인강 지방으로 전파되었으며
특히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위그노로 불렀다.
이들은 가톨릭 교도들과의 충돌로 위그노전쟁(1562∼1598)을 일으켰으며,
1598년의 낭트칙령으로 위그노파의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트리엔트공의(公議會)
라틴어 Concilium Tridentinum
영어 Council of Trent
1545∼1563년까지 약 18년간에 걸쳐 이탈리아의 북부 트리엔트(현 Trento)에서 개최된 공의회로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敎義)를 명백히 하였고, 교회개혁을 추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소집되었고, 율리오 3세를 거쳐 비오 4세의 재위기간에 폐회되었다.
세리판도(G. Seripando), 소토(Dominicus de Soto), 라이네스(D. Lainez), 살메론(A. Salmer n),
그로퍼(J. Gropper), 베르타노(P. Bertano),
포스카라리(A. Foscarari) 등 저명한 신학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가톨릭 고유의 교의르 확립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대체로 다음의 3기로 구분된다.
① 제 1 기 :
1545년 개회되어 1548년 정회(停會)될 때까지 약 3년간의 기간으로 이 동안 공의회는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고 한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서와 성전 (聖傳)모두가 신앙의 원천임을 재확인하였다.
아울러 불가타역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성서의 해석권은 교회만이 갖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또한 프로테스탄트의 은총절대설과 정의 가산설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에 대한 정의를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성사에 대한 교리도 제1기에 규정되었다. 황제 칼과 교황 사이의 관계 악화로 중단되었다.
② 제 2 기 :
교황 바오로 3세의 후계자 율리오 3세가 1551년 개회하여
다음 해 독일 제후들의 봉기로 좌절될 때까지 약 1년간의 기간으로
성체성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現存)’과 `실체변화(實體變化),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赦罪),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되었다.
제2기에는 제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지방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황제의 입김으로 프로테스탄트들도 참석하였다.
③ 제 3 기 :
가장 성과가 많았던 회기로 제2기가 끝난 뒤 약 10년 후인 1562년에 개회되어 이듬해 폐회되었다.
이 회기 중 가장 중요한 심의대상은 성체성사와 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것들이었고
이에 관한 교리가 규정되었다.
그밖에도 모든 성인의 통공, 성인유해의 공경, 연옥, 대사, 성화상의 사용, 교구신학교 설립,
주교의 임명, 교구 시노두스, 강론 등에 관한 교령이 반포되었다.
예딘(H. Jedin)이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한 교회의 교도직으로 응답한 최고의 대답이었다"고 한 바대로
프로테스탄트가 제기한 문제를 수렴하여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에 대해 명확히 함으로써
교회의 영성생활에 기반을 제공하였고,
그 뒤 계속된 교회의 개혁에 기초를 닦아 놓았다.
공의회의 신앙고백은 공의회가 폐막된 1년 후인 1564년
<트리엔트 신앙고백>(Professio fidei Tridentina)이란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그밖에 공의회 에서 마무리짓지 못한 문서들은 후임 교황들에 의해 차례로 발표되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불가타
라틴어 Vulgata
영어 Vulgate
405년에 라틴어로 완역되어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된 성서(聖書)의 이름,
불가타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고 있다는 뜻으로,
예로니모(Sophronius Eusebius Hieronymus)가 번역하였다.
시편을 제외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였고,
신약성서는 이미 번역되어 있던 라틴어 역본(譯本)을 그리스어 원본과 대조해서 정정한 것인데,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 신빙성을 공인받았다.
1907년 성 비오 10세는 베네딕토회 수사들로 구성된 불가타 위원회를 로마에 설치하여
새로운 개정판 간행을 촉진하였다.
[참고문헌] S. Berger, Histoire de la Vulgate,
1893/ W.E. Plater and H.J. White, A Grammer of the Vulgate 1926.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축일:9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