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의 멸망과 오호십육국의 탄생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제국은 없다. 흥망성쇠란 작게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크게는 왕조의 운명에서도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서진 왕조만큼 허무했던 제국은 없다. 서진 왕조는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통일 왕조의 하나였다. 한 사람의 수명보다 짧았던 51년. 짧았지만 굵을 수도 있다. 진(秦)과 수(隋)왕조가 그랬다. 서진 왕조의 비극의 소재가 바로 그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황실을 비롯한 상류계층이 하나같이 나약하고 부패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서진 왕조의 태생적 비극이었다. 후한 말 이후 계속된 군웅 시대를 마감했던 서진 왕조는 외견상 매우 화려해 보였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도층이 그만큼 사리와 위선으로 치달았던 왕조도 찾기 어렵다.
서진 왕조는 소위 "먹물"들이 합심해서 일으키고 경영한 나라였다. 나라를 경영하는 데는 먹물도 필요하지만 "군홧발"도 필요하다. 먹물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맡겨서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먹물들은 따지기는 좋아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들의 이념은 고결하고 그 주장은 정당하지만, 그 동기는 불순한 경우가 많다. 그들의 행동은 이름을 드러내고 사리를 추구하는, 그래서 세속적이고 공리적이다. 후한 말 외척. 환관 등 구세력을 매도하고 비판하며 반정부 운동을 벌였던 소위 청류파(淸流派) 지식인들 중에도 뭔가 불순한 동기를 감추고 있던 사악한 위군자(僞君子)가 많았다. 이런 위군자들이 서진 정권을 장악하고 귀족으로 군림했다. 서진의 실질적인 창업자 사마의(司馬懿,179~251)도 이런 청류파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위나라 2대 명제(明帝, 조비)가 군주독재권을 강화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측근정치였다. 후한 명문으로 조조의 모신이며, 조비의 사우(師友)였던 사마의가 등장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는 오나라를 공격하고 오장원 전투에서 제갈량에 잘 대처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세웠다. 238년에는 요동의 공손씨(公孫氏)를 토벌했다. 명제가 죽자, 조상(曹爽)과 사마의가 8살인 폐제(廢帝)를 보좌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조상이 촉나라 정벌에 실패한 것을 계기로 249년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일파를 몰살시키고, 사마씨의 시대를 열었다. 사마의(司馬懿:179~251), 장남 사마사(司馬師: 208~255), 2남 사마소(司馬昭: 211~265) 3부자가 음험하고 주도면밀한 공작을 거듭한 끝에 사마소의 장남 사마염(司馬炎: 武帝236~290) 때인 265년에 이르러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서진 왕조를 열었다.
서진을 건국한 사마염은 위나라의 멸망이 황권 강화를 위해 지나치게 황족 종친들을 억압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황족 종친을 우대할 목적으로 총 27명에 이르는 사마씨 일족 모두를 군과 현 단위의 왕으로 봉했다. 이것으로 사마염은 제후국들이 황실을 보호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상은 분권화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사마염 사후 태자 사마충(司馬衷)이 제위를 잇자 정치는 외척 양씨 일족의 차지가 되고, 가황후가 사마위와 협력해 양씨를 처치하고 사마량에게 정권을 맡긴다. 하지만 정권이 의도대로 운영되지 않자 가황후는 사마량과 사마위를 죽인 뒤 정권을 독차지한다. 가황후가 사마휼을 폐위시키고 독살하는 전횡을 일삼자 사마륜과 사마경은 가황후를 척결한다. 이후 16년간 제후국들은 골육상잔의 비극인 '팔왕의 난'을 일으켰고, 제후국은 황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후한에서 위.진에 이르는 시기는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대전환기였다. 이 거대한 전환적 고리에 힘차게 그 존재를 과시한 것이 화북 일대에서 부락 생활을 하던 유목 호족(胡族)이었고, 그들로 하여금 역사 전면에 나타나게 만든 것은 서진 왕실인 사마씨들이 벌인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었다. 이 두 가지는 400년간 지속된 한 제국이 후세에 남긴 아픈 유산이었다.
304년, 팔왕의 난과 대기근으로 농민들의 반란이 한창이던 때, 산서 지역의 흉노족 유연(劉淵)이 한(漢)을 세운다. 유연은 흉노의 재기를 꾀하며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뒤 병사했고, 이어서 아들 유총(劉聰)이 낙양을 공략한다. 낙양성 함락에 성공한 유요(劉曜)와 석륵(石勒) 등이 왕공과 백관, 백성 3만여 명을 죽이고 회제를 평양으로 압송해 살해하자 이는 서진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한왕 유충은 이민족 최초로 중원을 차지한 패자가 되었으며,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개막을 알렸다.
오호란 흉노. 갈. 선비. 저. 강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3~5세기 중국의 서.북. 동방에서 중국 내지로 이주해와 활동한 소수민족은 이외에도 정령(丁零), 오환(烏桓), 부여(夫餘), 고구려, 파(巴), 만(蠻), 료(瞭), 호(胡)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호라는 명칭은 당시 화북의 민족 상황을 표현하는 말로는 적당하지 않다. 사실 오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정작 "오호" 라는 말이 없었다. 이 용어는 대체로 4세기 중반 이후 등장하여 6세기 전반에 고착되어 쓰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십육국인 成漢. 前趙. 後趙. 前燕. 前凉. 前秦. 後秦. 西秦. 後燕. 南燕. 北燕. 夏. 後凉. 南凉. 北凉. 西凉 도 마찬가지다. 당시 화북에는 육국 외에도 염위(苒魏), 서연(西燕), 전후(前後), 구지(仇池), 적요(翟遼), 위(魏) 등의 나라가 있었으니 "십육"이라는 것도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이 용어는 북위 말 역사가 최홍(崔鴻. ?~525)의 저서<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 의해 공식화된 명칭일 뿐이다. 오호 십육국은 314년 10월 이웅(李雄)과 유연이 각각 사천과 산서 일대에서 성도왕과 한왕을 칭한 해부터 선비족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 135년간에 걸친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대 세력의 큰 움직임은 화북에 있는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갔다. 즉 320년대의 전조(前趙)와 후조(後趙), 350~360년대의 전연(前燕)과 전진(前秦), 380년대 중기~390년대 중기의 후연(後燕)과 후진(後秦), 410년대 말~420년대 중기의 북위와 하(夏)가 그것이다. 오호십육국 시대와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로마 제국이 쇠퇴하여 동서로 분열되고 게르만 민족의 부족국가가 세워졌다. 유라시아 대륙은 바로 민족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게르만 민족의 부족국가 대부분은 곧 그 하나인 프랑크 왕국에 의해 통합되어 서유럽 세계가 형성되어 갔다. 이 때문에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현대까지 이어지는 유럽의 골간이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오호십육국의 성립에 대해서는 성공한 쿠데타인데도 매우 부정적인 의미인 "난리" . "혼란" . "동란" . "분란"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렇게 오호족과 게르만족은 북방의 소박한 민족으로 남방의 문명사회인 한과 로마 양 제국의 지배에 대항해서 기원후 3세기 유라시아 대륙 동서에서 일어났던 민족의 움직임이지만, 그 평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일련의 역사적 사건이 비난받고 부정되어야 할 일인가? 오호십육국을 진. 한과 수.당 제국 사이의 불안정한 시대를 야기한 악의 존재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호의 중국 이동 후, 그들이 한족과 융합했기 때문에 수. 당의 중국 통일이 실현되었고, 동아시아 각국의 모범이 된 국가체제가 구축되었으며, 불교가 중국사회에 침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의 창조였다. 새로운 중국의 창조였던 것이다.
312년 서진 말기에 흉노족 유연이 영가의 난을 일으킨다. 이때 북방 한족의 90%가 몰살을 당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한족들은 대부분 양자강 이남으로 도망을 한다. 헌데 일부는 지리적인 여건상 남하를 하지 못하니, 옛 서진의 속국이였던 고구려 영토로 대거 이주를 하게 되는거지. 고구려에서 왜 사신도가 나오냐고? 이 서진의 유민들이 대거 도망을 갔기 때문이지. 그리고 산동반도에서 한반도의 산동반도를 거쳐 중국인들이 또 대거 몰려와서 하나의 나라를 세우게 되지. 바로 백가제해.
광개토 대왕비문에는 백잔이라고 표현이 된 나라다. 잔은 삼국지 위서에 그 사용처가 나오지. 바로 남아 있는 중국인 무리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잔이며, 낙랑과 진한 모두 중국인 무리 집단이었기 때문에 백잔, 아잔이라고 불리었으며, 잔국은 진한을 의미를 한다. 이건 모두 본좌가 밝혀낸 것이지. 중국인 무리가 가진 나라는 한반도에서 진한 밖에 없었거든. 그들 중국인 무리가 세운 나라가 진한이니 광개토 대왕비문에서 이들을 잔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것.
한편 흉노의 유연이 세운 한나라에 멸망당한 사마씨의 서진은 남하하여 동진(東晉)을 세우고 남조(南朝)를 열었다. 그러나 강남에는 이미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피란 온 사마씨 황족과 권문세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낭야왕 사마예(司馬睿) 역시 내분을 피해 강남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317년, 서진의 민제가 죽자 왕(王)씨와 사(謝)씨 등 강남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사마예가 건업(建業)에서 동진을 건국했다. 이로써 당시 중국에서는 오호십육국의 북조와 동진의 남조가 대치했다.
311년 6월, 낙양성이 함락되었다. 낙양성에 입성한 유요와 석륵 등은 왕공과 백관, 백성 3만여 명을 죽이고, 궁 안에 불을 지르고, 보물과 재물을 약탈했다. 또한 회제를 생포하여 평양으로 압송해 그곳에서 살해했다. 회제가 죽었다는 소식에 사마업(司馬鄴)이 장안에서 황제로 추대되어 민제(愍帝)로 등극했으나, 316년에 유요에게 장안을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했다.
서진은 사실상 회제의 죽음으로 멸망했으며, 이는 건국 52년 만의 일이다. 이것이 '영가의 난'이다. 한왕 유충은 이민족 최초로 중원을 차지한 패자가 되었으며,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이로써 전통적으로 한족이 지배하던 화북 지역은 한족을 포함하여 5호 즉 흉노, 선비, 저, 갈(羯), 강족 등의 이민족이 통치하게 되었다. 이들은 약 130년간 한(전조), 성한, 전량, 후조, 전연, 전진, 후진, 후연, 서진, 후량, 남량, 남연, 서량, 하, 북연, 북량 등 18개의 나라를 건설했다. 당시 화북 지역에는 실제로 18개의 나라가 건설되었지만, 이 시대에 16국이란 칭호가 생긴 것은 최홍(崔鴻)의 저작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이름을 빌려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