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MBY VS PIMFY 지역이기주의 궁상의 고찰
NOT IN MY BACK-YARD의 약어, 그 뜻은 "제발 내 집 뒤뜰에는 가져오지 마시오."
PLEASE IN MY FRONT YARD의 약어, 그 뜻은 "제발 그 좋은 시설물을 꼭 우리 고장에 세워 주시오."
대한민국 총선과 대선의 민심은 님비와 핌비현상이였다. 나는 말한다! 민심은 천심이 아니라는 것을 즉 우리 민심이
도덕성과 인간성 회복이 되는 날이 바로 천심이라는 것을 나는 또 죽어서도 다시 주장할 것이다.!
보수대 VS 진보
기득권 VS 비기득권
지배층과 VS 피지배층
부익부 VS 빈익빈
선 VS 악
이와 같은 대결구도는 동서고금 늘 존재하며 공존해왔다. 이것을 뿌리쳐 흔들수 있는 것은 절대 없다!
(필자는 미치광이 유토피아주의자다.)
옛부터 모순과 대립은 언제나 우리에게 시름을 안겨주었던 인류의 화두이다.
태어나면 죽고, 만나면 헤어지고,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늘 이러한 모순과 대립이라는 것은
우리 동양사상이나 서양사상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동양사상에서의 음양오행설은 양의 기운과 음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야 순조롭다 또는 자연스럽다.
말 그대로 자연을 닮는다라는 뜻이다. 이 뜻을 다시 곱씹어보자면 보수나 진보, 기득권과 비기득권, 지배층과 피지배층
부인부와 빈익빈, 선과악 이러한 현상들이 조화가 이루어질 때 인류가 좀 더 발전적인 형태로 지향되지 않을까한다.
(구체적으로 진술하자면, 즉 나눔과 궁휼의 이타심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위에서 밝혔다시피 나는 미치광이 유토피아주의자이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종교인에 가깝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죽을만큼 아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 어릴적 기억이 희미하지만
적어도 유년시절 초등학교 때부터 생각해 왔을것이다.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저 넓고 넓은 광활한 우주공간속에서 아주 작은 태양계의 지구라는 행성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있는것인가? 왜 무엇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죽음을 맞으며 무엇때문에
인류는 서로 죽이고 서로 빼앗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은 아직까지 미제로 남은 나의 화두이다.
장황하게 글을 서술한 것은 이 말은 하려고 했던 것이다.
모든 만물은 변한다.!
인간은 죽는다. 우리들은 죽음을 새롭게 발견해야만 한다.
죽음은 인류 최고의 발견이며 선물이며 우리에게 진정성을 개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뜻은 역설적발언이다.)
나는 끝없이 생각해보았다. 선만 존재하는 그러한 세상... 어찌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이 또한 불가능한 상상일 것이다. 모든 만물이 선하기만 한다면 자연적 순환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자연생태계 역시 존재불가능하며 인간 역시 존재불가능하다.
또한 모든 것이 규칙과 불문법 또한 존재 할 필요가 없다. 선만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 모든 구조와 체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사회가 존재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선의 행동에 동참 해야 할 것이다.
그 중 단 한 사람이 악을 행했다면 그 사람을 처벌하게 된다. 처벌 한다는게 선한것인가?
이것 또한 비합리적인 처벌일것이다. 선한 모든 사람이 그 악한 한 사람을 처벌한다는 것은 선과악이
내재되있다는 소리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되면 아주 단순논리적 딜레마가 발생한다.
설사 처벌하더라도 곳 제2의 악한자와 제3의 악한자가 생길 것은 자명한일이다.(시간문제)
이것 또한 유토피아의 판도라의 상자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 궁극의 점에 도달하였다.
인간 사회 또는 자연계는 선과악 모든 존재태는 모순과대립의 조화가 가장 이상적인것을 발견했다.
어찌보면 회의주의자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회의주의가 아니라는 것은 통찰력이 있는자이면
금세 알수 있을 것이다.
고로 내가 도출해낸 최고의 방법은
교육이다.
사람들은 내게 말하겠지 그걸 누가 모르는가? 당연히 교육이 제일 중요하지 하겠다.
옛부터 철학자나 종교지도자들은 있는 그대로 말을 하자 않았다. 왜냐하면 진리가
어떻게 그렇게 가깝고 쉽냐고? 그래서 늘 선각자들은 비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쉽게 얻는것은 쉽게 버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비유를 들어왔던 것이다. 자각하기 위해서는 자기스스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정도로 생각하면 삼척동자도 알아 들었을것이다.
또 예를 들자면
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를 들어보았는가?
알기쉽게 예를 들어보겠다.

(1)심우:동자승이 소를 찾고 있는 장면입니다. 자신의 본성을 잊고 찾아헤매는 것은 불도 수행의 입문을 일컫는다고 한다

(2)견적:동자승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간다. 수행자는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본성의 발자취를 느끼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3)견우:동자승이 소의 뒷모습이나 소의 꼬리를 발견한다. 수행자가 사물의 근원을 보기 시작하여 견성(見性)에 가까웠음을 뜻한다.

(4)득우:동자승이 드디어 소의 꼬리를 잡아 막 고삐를 건 모습이다.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불성(佛性)을 꿰뚫어보는 견성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5)목우:동자승이 소에 코뚜레를 뚫어 길들이며 끌고 가는 모습이다. 얻은 본성을 고행과 수행으로 길들여서 삼독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 소도 점점 흰색으로 변화된다.

(6)기우귀가:흰소에 올라탄 동자승이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무애의 단계로 더할 나위없이 즐거운 때이다.

(7)망우재인:소는 없고 동자승만 앉아 있다. 소는 단지 방편일 뿐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모두 잊어야 한다.

(8)인우구망:소도 사람도 실체가 없는 모두 공(空)임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텅빈 원상만 그려져 있다.

(9)반본환원: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어 있는 산수풍경만이 그려져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이는 우주를 아무런 번뇌 없이 참된 경지로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10)입전수수:지팡이에 도포를 두른 행각승의 모습이나 목동이 포대화상(布袋和尙)과 마주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육도중생의 골목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뜻으로 중생제도를 위해 속세로 나아감을 뜻한다
옛 선승들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선문답을 자주 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의 뜻이 십우도의 요체가 아닐런지 모르겠다.
(참고로 나는 독실한 크리스찬이다. 단지 공부차원으로 유교, 불교, 도교를 공부했을 뿐이다.)
이 예 또한 곰곰히 생각해보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진실로 이타심을 발휘해야 할 때가 이제 도래한것이다.
이 사회는 진정한 인물이 없어? 이 사회는 암울해! 정말이지 희망이 없어!
이러한 경망된 생각보다.....
내가 먼저 그러한 인물이 되어보자라는 결심이 우리 사회는 진정으로 필요할때가 온것이다.
나의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해 근거를 제시하며 난잡하게 진술한 내용보다는
당부드리고 싶은 말은 ... 이타심, 궁휼, 사랑, 희망, 교육 를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스타렉스 김님에게: 제가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부득히 하게 자주 못왔습니다. 이 글을 통해 죄송하다는 뜻을 전합니다.)
첫댓글 글이 난잡하고 길지만 한번 읽어보시고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