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사
낙가산 보살사(洛迦山菩薩寺)는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한국사찰전서>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28년(567년)에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조사가 창건하였으며, 신라 혜공왕 14년(778년) 진표율사의 제자인 융종대사가 중창하였다. 그 후 고려 태조 원년(918년) 태조의 다섯번째 아들 증통국사가 중수했다. 또한, 보살사 중수비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대에는 토전이 하사되었고, 조선조 세조 4년(1458년)에 어명으로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사는 또한 청주 근교에 남은 있는 사찰 중 가장 오래된 고찰로 사바세계에서 고뇌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워진 절로 유명하다. 법주사를 창건했던 의신조사는 수행을 하면서 중생들을 교화할 새로운 도량을 찾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극한 기도에 화답하여 노파로 화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관세음보살은 새로운 도량자리를 일러주고, "나 또한 이곳에 항상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한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보살사는 영험있는 관음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때 고찰답게 극락보전(도유형문화재 제56호)ㆍ2존병립상(도유형문화재 제24호)ㆍ보살좌상ㆍ괘불ㆍ5층석탑(도유형문화재 제65호) 등의 유물이 있다.
보살사 입구
보살사 요사채
보살사 요사채
보살사 극락보전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56호
아미타삼존불을 모신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건물로 기단은 2단의 석단(石壇)에서 현재 단정한 막돌 바른층 쌓기의 3단 석단으로 정돈되었으며, 기단 위 초석은 보살사 창건 당시에 사용된 원형 초석에 원주(圓住)를 올렸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우주(隅柱)가 평주(平柱)보다 굵고 높은 편이며, 두공(枓?)은 정연하게 배치되어 조선중기 건축의 시대적 특징을 보여준다.
창호는 측면의 협칸 없이 정면 3칸이 개방된 정자형(丁字形) 분합문(分閤問)이 달려 있으며, 처마의 수막새와 암막새에는 범자문(梵字文)과 기년명(紀年銘)이 장엄되어 있다.
보살사 병립불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호
1970년 사월초파일 행사 중 보살사 경내에서 발굴된 병립불상(竝立佛像)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일광이불상(一光二佛像)이다. 병립상은 대좌와 광배는 물론 두 불상이 한 돌에 나란히 부조(浮彫)된 모습으로, 동일한 조각수법에 동자(童子)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에 넓적한 육계가 솟아 있으며, 젖살이 가시지 않은 도톰한 얼굴에는 천진스런 미소가 가득하다. 코는 심하게 마멸되었으나 양 귀는 정제된 모습으로 어깨까지 흘러내려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여 고불(古佛)의 모습이 남아 있다. 신체는 3등신으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굴곡의 모습을 가지나 탄력과 힘이 없는 단아한 자태가 돋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옷주름이 신체에 비해 굵게 표현되었으며, 양발은 가지런히 정면을 향하고 있다. 수인은 두 상이 대칭적인 모습으로 우상(右像)은 왼손으로 시무외인을 취하고 오른손은 쌍구형의 보주를 받들고 있으며, 좌상(左像)은 오른손을 시무외인하고 왼손은 복대의 띠 주름을 쥐고 있다.
3등신 동자의 애리한 신체에 천진한 미소와 상호의 표현에서 순진무구한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단아한 묘사와 고부조의 세련된 기법에서 고불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석가불(釋迦佛)과 다보불(多寶佛)의 병존불좌상(竝尊佛坐像)과도 연관성이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한국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보살사 극락보전내
극락보전 내부는 중앙 탁자 위에 아미타삼존불을 비롯해서 석조이존병립불상ㆍ석조지장보살좌상 등의 고색창연한 불상과, 아미타후불탱ㆍ칠성탱ㆍ지장탱ㆍ신중탱의 후불탱화 및 조선후기 범종 1구가 봉안되어 있다.
불화는 모두 조선후기 작품으로 신중탱은 충청도 화원인 금호약효(錦湖若效)의 20세기 초 작품이며, 지장탱과 칠성탱은 금어(金魚) 호영(湖映)의 1935년 작품이다. 후불탱은 원래 1759년 화원(畵員) 광성(廣成)이 그린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였으나 현재는 근래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극락보전은 자연석의 주춧돌, 기둥과 지붕의 비례, 기년명 와당 등을 통해 조선중기이후 건축구조가 남아 있으며, 1683년 일륜(日輪)대사의 중건과 1872년(고종 9) 중수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살사 극락보전 동종
이 종의 상대(上臺)는 아무런 장식없이 견대(肩帶) 위에 범자문과 두개의 용뉴(龍?)를 배치했으며, 중대(中臺)에는 선을 조출(彫出)시켜 4구의 보살상과 4구의 유곽(乳廓)을 구성하였다.
유곽은 마름모꼴로 이중의 톱니문으로 돌렸고 내부 팔판연화문(八瓣蓮華文) 위에 9개의 유두(乳頭)를 배치하여 기존의 범종양식을 고수하였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4구의 보살상이 합장한 모습으로 조출되었으며, 보살입상의 머리에는 원형두광이 표현된 유려한 자세를 보여준다.
당좌는 없으며 하대(下臺) 역시 소문(素文)으로 중대의 신부(身部)를 잇기 위한 이음새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반적으로 조잡한 조선후기 범종으로 전체높이 62.5㎝, 구경 39㎝의 중종(中鍾)이다.
보살사 명부전
명부전내 지장보살상
명부전 좌측의 시왕상
명부전 우측의 시왕상
보살사 삼성각
보살사 오층석탑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65호
극락보전 앞에 있는 조선시대 오층석탑으로 2층 탑신에 ‘강희계미(康熙癸未)’라는 조성연대를 나타낸 음각명문이 있어 1703년(숙종 29)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지대석 위에 3단으로 된 받침을 하고 그 위에 중판복엽(重辦複葉)의 복연화문(複蓮花紋)이 화려하게 장식된 단층 기단을 취하였다. 초층 탑신의 각면에는 우주(隅柱)를 새겼으며, 가운데에 2개의 사각형과 내원(內圓)을 음각하고 그 안에 범자(梵字)를 음각하였다. 초층 옥개석은 1매석이고 층급받침은 2단으로 표현하였으며, 전각부(轉角部)는 반전되지 않아 둔중한 느낌을 준다. 2ㆍ3ㆍ4ㆍ5층의 탑신과 옥개석도 모두 1매석으로 구성되었고, 조각수법도 초층과 동일하다.
상륜부는 5층 옥개석과 같은 돌로 되었는데, 노반(露盤)이 생략된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그리고 그 위에 연봉이 장식되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게 세워진 석탑으로 조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조선후기의 석탑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체 높이는 348㎝이다.
보살사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청주IC를 나와 십리 숲길이 펼쳐진 대로를 지나면 청주시외버스터미널 사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시내방향으로 직진한 뒤 상당공원 입구에서 충북도청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25번국도 보은 방향으로 직진한다. 삼영LPG주유소를 지나면 동부우회도로가 나타나는데, 청주공항 쪽으로 좌회전하여 2km 정도 직진하면 오른쪽으로 포도원교회 입간판이 있다. 이곳이 보살사 입구인데 예전에는 포도밭이 많았으나 지금은 도시의 확장으로 많이 줄어들었다. 구불구불한 시골길 같은 도로를 따라가면 보살사 주차장이 나타난다.
첫댓글 정갈하고 고즈넉해 보여 마음도 편안해지는 느낌입니다. 생각보다 청주에도 사찰이 많으네요. ^*^
종산대종사님이 주석하시는 보살사가 생각보다 수수한 모습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