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명현들은 조정에 있기보다 지방으로 나가기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는 파당의 명분만을 앞세운 채 나라의 명운을 생각하지 않은 몰염치한 신료들의 동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성균관 대성전(文廟)에 배향된 열네 분 조선의 명현들은 대개가 향리로 내려가 후진을 양성하면서 생애를 마치곤 하였다.
임금은 떠나간 그들이 그리워 편지로 다시 부르기도 하고, 더러는 승지나 내관을 보내서 간곡히 부르기도 하지만, 떠나간 명현들은 때로는 병칭을 하고, 또 때로는 노부모의 공양을 내세우며 왕명을 사양하곤 하였다.
조선 주자학의 거봉 퇴계 이황도 조정으로 부르는 왕명을 여러 차례 사양하였다. 명종 임금은 그를 사모하여 송인(宋寅)을 도산으로 보내 퇴계가 거처하는 산수를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였다. 중국의 곡부(曲阜)나 추현(鄒縣)이 산수가 좋아서 이름 난 고장이 아니라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현이 태어났기 때문에 더 뜻 깊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명종 임금은 송인이 그려온 도산의 풍경을 거처의 벽에 붙여두고 하염없이 바라보며 퇴계를 그리워하였고, 때로는 문신들을 불러 마치 과거를 보듯 시를 짓게 하였는데 (초현부지(招賢不至: 불러도 오지 않는다)라는 시제를 주면서 시를 짓게 하였다. 이는 도산의 풍광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풍광 속에 숨어 우주와 인간의 도를 깊숙이 궁구하면서 벼슬길에 나서기를 굳이 사양하는 퇴계 이황의 인품을 그리워하였음이라고 짐작된다.
그 뒤 선조가 즉위하자 이황은 사부(師傅:왕의 스승)로 예우 받게 되면서 잠시 도성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 영향으로 그의 제자들이 조정에 대거 등용됨으로써 사림(士林) 정치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그리고 도산은 다시 향리로 내려간다.
명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선조는 또한 퇴계가 그리워 간곡한 말로 다시 부르기를 반복하였으나, 퇴계는 병이 들어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상경치 못한다고 아뢰면서 일생동안 연구한 성리학의 요체를 열 폭의 그림에 담아서 해설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다. 조선 성리학의 체계를 일목요연한 그림으로 설명한 셈이다.
<성학십도>를 올리면서 “신은 지극히 우루한 몸으로 헛된 이름이 잘못 알려져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경연의 막중한 자리에 나가 자리를 더럽히곤 하였습니다. 신은 성학(聖學)을 권도(勸導)하여 임금의 학덕을 도야하여 요순시대 같은 덕치(德治)를 이룩하시기를 바라오며 전현의 것에 외람되게 신의 의견을 덧붙여 <성학십도>를 만들어 삼가 써서 받들어 올립니다.
신은 질병에 얽힌 몸으로 눈이 어둡고 손이 떨리어서 글을 단정하게 쓰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다행스럽게 버리지 않으신다면 경연관(經筵官)에게 내리시어 상세하게 논의하여 바로잡고 수정하여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바르게 쓰게 하여 해당관서에 보내어 병풍을 만들어서 평소 거처 하시는 곳에 펴 두시고, 별도로 조그만 하게 수첩을 만들게 하시어 항상 책상위에 놓아두시고 살피시어 경계를 삼아주신다면 신의 간절한 충성심에 그 보다 더 고마울 때가 없겠습니다.” 하였다. 비록 몸을 떨어져 있어도 자신을 그리워하는 임금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퇴계 이황의 아름다운 심성을 헤아리게 된다.
오늘 우리들도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등, 수많은 인연을 마련하면서 살고는 있지만, 편지 한 장 제 때 쓰지 못하는 삭막한 삶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소통이라는 말은 그럴 듯하게 쓰고 있지만, 마음에서 울어나는 소통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역사를 읽으면 몇 월 며칠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를 외는 것은 시험에는 필요할지 몰라도 삶에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역사가 흘러가는 내면에 담긴 이야기들…, 이를테면 임금이 헤어진 신하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신하는 임금에게 진심을 다한 충언을 보내는 조선시대의 소통을 정말 본 받아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주석:성균관대성전에 모셔진 우리의 명현은 열여덟분이십니다. 그 높으신 어른들의 諱字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신라시대/ 설총, 최치원, 고려시대/ 안향, 정몽주, 조선조/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 이렇게 열여덟분이십니다. 그렇니까 조선조에서 문묘에 배향되신 분은 열네분입니다. 이를 일러 東國文廟18賢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