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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4일 목요일 [(백)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치릴로 성인과 메토디오 성인은 형제로,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나 터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두 형제는 전례서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알파벳의 슬라브 말로 번역하였다. 둘은 체코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에게 파견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로마로 돌아간 두 형제 가운데 치릴로 성인은 수도 서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69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메토디오 성인은 교황 특사로 모라비아에서 활동하다가 885년 무렵 선종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며 자신을 낮춘 이교도 여인의 청을 들어주신다(복음).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5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5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또는, 기념일 독서(사도 13,46-49)와 복음(루카 10,1-9)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시라고 청하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시며 거절하십니다. 당시에 유다인들은 자신들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여기면서, 이방인들을 멸시하여 ‘개’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에서도 그렇지만, 사람을 개에 비유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독설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의 사명이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선포하는 것임을 알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들을 구원에서 제외시키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자주는 아니지만 이방인 지역에 가셨고, 거기에서도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들은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자세입니다. 그 여인은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자칫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지혜롭게 자신의 요청을 반복하는 재치, 딸에 대한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탄복하시며 그 여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도할 때, 그때마다 주님께 감동을 드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 보여 준 간청의 항구함과 강한 믿음, 또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자세는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사랑이 넘치시는 아버지이십니다.(이성근 사바 신부) |
어머니는 위대합니다. 어머니의 힘은 놀랍습니다! 주변에 장애우 자녀나 환우 자녀, 마음이 아픈 자녀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백방으로 뛰어 다니는 어머님들을 봅니다. 참으로 갸륵하고 감동적입니다. 부족한 제가 봐도 그토록 사랑스러운데,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정말이지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노고를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이 혹독함은 반드시 지나갈 것입니다. 잘 견뎌낸 그 고통으로 인해 백배 천배의 상급을 받으실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니, 오늘도 희망하며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성장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 역시 유년 시절 제 어머니의 애물단지였답니다. 맨날 원인도 모른채 시름시름 아팠고, 급기야 생사조차 불투명하게 되었답니다. 어머니는 그런 저를 한번 살려보겠다고, 저를 들쳐엎고 이 병원, 저 병원 백방으로 뛰어다녔답니다. 의료진들만 만나면 ‘제발 좀 살려달라고’ 눈물로 하소연했답니다. 밤만 되면 부속 성당으로 달려가 기도로 밤을 지새웠답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틈만 나면 “엄마의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셨으니, 잘 살아야된다!”는 말씀을 늘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어슴푸레 어린 제 머리맡에서 온 힘을 다해 간절히 기도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언제나 느끼는 바이지만 어머니는 위대합니다. 어머니의 힘은 놀랍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딸 때문에 늘 울고 다니던 한 가련한 이방인 어머니의 깊은 믿음, 간절함, 끈질김이 크게 돋보입니다. 그 어머니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큰 수모를 겪으면서도 끈질긴 간청으로, 마침내 주님의 연민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새삼 어머니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청하기도 전에 미리 구마와 치유의 은사를 베풀어주셨을텐데, 그날따라 예수님의 반응은 냉랭합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코 복음 7장 27절) 의도적인 주님의 냉대는 이방인 여인의 입에서 더욱 애절한 부르짖음을 자아냅니다. 예수님의 약간은 의외의 냉담한 반응 앞에서도 그 여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극도로 자신을 낮추고 이스라엘을 들어높이며 외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코 복음 7장 28절) 어머니는 딸의 위한 은총을 얻기 위해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딸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방황하는 자녀들, 주님과 교회를 멀리 떠나 있는 자녀들, 여러가지 질병이나 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자녀들의 치유와 회심을 위한 우리의 기도도 좀 더 간절해지고 끈질겨져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계속 두드려라, 안 열리고 못 배긴다.
제가 첫 보좌를 할 때 잠을 잘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꼭 전화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 힘들기도 했습니다. 혹은 술에 취해 상담 좀 하자고 사제관에서 소리소리 지르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날도 새벽 2시쯤 밖에서 “신부님, 신부님!”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100% 술에 취한 남성의 목소리였습니다. 눈이 떠지지도 않았고 몸이 천근만근 느껴졌습니다.
‘저러다 가시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누가 이기나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러나 끈질긴 분이었습니다. 이정도면 주임 신부님도 깨셨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주임 신부님이 ‘보좌가 좀 나가보지 왜 안 나가?’라고 생각하실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급기야 그분이 큰 돌을 성당 문에 던져 쾅 하는 큰 소리까지 났습니다. 정말 순교하는 마음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들어드렸습니다. 막상 나가니 한 마리 순한 양이 되어 한탄을 늘어놓더니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드릴 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지치지 않고 청하면 반드시 그것을 받게 되리라고도 하셨습니다. 지치지 않는 힘은 ‘믿음’에 있습니다. 아기는 두 발로 일어서려고 하면서 수천 번 넘어져도 지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언젠가는 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엔 반드시 보상이 따릅니다. 이것이 짐승과 인간의 차이입니다.
성당 사제관 앞에서 그렇게 끈질기게 소리 지를 수 있었던 이유도 믿음 때문입니다. 그 끈질김 앞에서 버티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울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견뎌내야 합니다. ‘저러다 가겠지!’라는 생각도 들지만, 주임 신부님처럼 ‘빨리 나가보지 그래?’라고 말하며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청을 계속 들으면 오래 못 버티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하느님도 우리 청원을 계속 들으실 때 당신 안에서 ‘이 정도면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느님을 사랑이요, 자비로 만드는 본성의 소리입니다. 하느님도 그 소리를 견뎌내기 어려우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고 꾸준히 청하기만 하면 하느님도 오래 못 버티십니다.
저도 연옥에 가지 않게 해 달라고 비르짓다의 7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면 순교자의 지위까지 올려준다는데 안 바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2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쳐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저는 이 기도를 20년이 넘게 매일 바치고 있습니다. 12년이 힘들 줄 알았는데 바치다보니 안 바치면 서운해서 안 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런 기도 바쳐서 순교자의 지위에 오른다고?’하는 의심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꾸준히 바치는데 안 들어주실 리가 없지.’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기도를 꾸준히 하면 그 믿음도 더 커지는 것입니다. 여행 갈 때 기도를 많이 하고 가면 그 기도를 했기 때문에 좋은 여행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됩니다. 주님께서 그 믿음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의인의 기도는 잘 들어주십니다.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라면 한두 번만 기도하면 들어주십니다. 분명 하느님도 인간을 차별하십니다. 차별하신다기보다는 합당하게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의 힘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더라도 우리에게는 꾸준함이 있습니다. 꾸준히 기도하면 반드시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믿음만 있으면 그것은 얻어내지 못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믿음이 우리를 주님께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방 여인을 ‘강아지’ 취급하십니다. 그러나 이방 여인은 자녀들에게 주는 빵이 있다면 자신에겐 부스러기라도 반드시 주실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참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딸이 치유되는 것을 넘어 주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기도하며 지치지 맙시다. 어차피 청하기로 했다면 죽기 살기로 청합시다. 내가 죽기 전에는 이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청합시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엔 반드시 보상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끊임없이 청하고 있다는 말은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갖기 위해 죽기까지 바칠 청원을 적어도 하나는 갖고 있어야합니다. 한 기도를 죽기까지 바치고 왔다면 그것이 그 사람이 의인으로 인정받는 보증이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14일)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다녀와서 3월부터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묵상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위해 기도하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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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성 치릴로 (Cyril)
신분 :^신부 선교사
활동연도 : 826/827-869년
같은이름 :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루스 키릴로스 시릴로 시릴루스 시릴
성 메토디오 (Methodius)
신분 : 대주교 선교사
활동연도 : 820/825?-885년
같은이름 : 메토디우스
슬라브 민족은 본래 동부에 있는 대 평야, 즉 중앙 아시아 지방에 정착했으나, 그 후 차차 발칸 반도를 거쳐 중앙 유럽 즉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민족이 그리스도교의 빛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이 발칸에 진출할 때부터였으나 당시는 소란스러운 시대였으므로 전 민족이 그리스도교를 봉행할 수는 없었다.
특히 중부 유럽지방에 진출한 이들은 귀화의 은총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복음의 씨를 뿌릴 수 있는 성인들을 파견하셨다.
그 중에 유명한 분은 치릴로와 메토디오 두 성인이다.
이 두 분은 테살로니카 시의 레오라는 고관의 자손으로서 형제였다.
테살로니카는 옛적에 성 바오로께서 전교하시던 곳이요, 현재는 살로니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 당시는 각국과 거래하는 일대 무역 항구로서 그 시외에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곳에서 성장한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의 풍습과 언어를 습득했고, 후에는 그들의 사도로서의 소양을 얻은 것이니,이 역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테살로니카에는 훌륭한 학교가 적지 않아서 이 두 분은 마음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메토디오는 재질이 풍부하며 아버지와 같이 관리가 되었으나 곧 출세하여 테살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세속 생활을 싫어하여 관직을 은퇴하고, 엄격하고 경건한 생활을 택했다.
그의 동생 치릴로는 콘스탄티노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역시 재능이 뛰어 나고 학식이 출중한 청년으로, 궁중에 근무하여 영예그러운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그도 오히려 이를 싫어하고 은퇴해 어떤 조그마한 섬에 숨어 살았다.
그가 다시 발각되어 궁중에 되돌아갔을 때 황제는 명령으로 철학 교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당시는 회교와 유다교와 논쟁이 벌어진 때였다.
그는 황제 미카엘의 칙서를 받고 그 해박한 지식으로 이교도들과 논쟁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갔다.
그곳에서 성공리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곧 그 형 메토디오와 더불어 흑해(黑海) 지방의 민족을 회개시키기 위해 파견되었고, 그곳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862년,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이 미카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의 원도를 간청했다.
그 내용은 그들이 천주교를 봉행하기는 하지만 대세를 억눌려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교리에 무지하니 이를 인도하고 가르칠만한 지도자를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다시 치릴로와 메토디오를 모라비오에 파견했다. 그들은 이를 대환영했다.
치릴로는 이미 사제의 품을 받았었고, 형제는 협력하여 많은 신자들을 교도하고 강론과 교회 예식으로써 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들은 슬라브족이 아직 글자를 가지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고 자기들이 창안한 치릴로식 알파벳을 사용하여 이것으로 성서와 전례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슬라브 문학의 시조는 성 치릴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모라비아 인들은 훌륭한 천주교 신자로 양성한 두 형제는 그 곳에 3년 동안 체류하고,
그 후 교황의 축복도 받고 자기들을 비난하는 이들에 대한 변명도 할 겸 로마로 향했다.
이에 교황 아드리아노께서는 이 두 분을 매우 반갑게 영접하시고 모라비아에 있어서의 그들의 수고를 치하하시어 메토디오를 사제로,치릴로를 주교로 승급시키려 했으나, 치릴로는 장구한 세월동안 활동과 노고에 힘이 쇠진해 로마에 있는 어떤 수도원에 은퇴하여 수도 서원을 발한 후 50일만에 하늘로 향했다.
때는 869년 2월 14일이었다.
한편 메토디오는 주교로서 모라비아로 돌아갔다.
아드리아노 교황은 모라비아와 판노니아를 독일 교계에서 독립시켜 대교구로 승격시켰고, 메토디오를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레라트에서 대주교로 착좌시켰다.
870년, 독일의 왕 루도비꼬와 독일 주교들은 라티스본 시노드에서 메토디오를 쫓아내기로 결정하고, 그를 가두었다.
그는 2년 후에 교황 요한 8세에 의해 석방되어 자기 교구로 돌아갈수 있었다.
요한 교황은 정책적으로 전례에서 슬라브어 사용만 제한하였던 것이다.
메토디오는 878년에 재차 로마로 소환되었는데, 또 다시 그의 정통성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교황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해 주고 또 슬라브어 사용을 다시 인가하였다.
그 후 그는 치릴로와 함게 시작했던 성서 번역을 계속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노블로 갔다.
독일 교회와 메토디오간의 투쟁은 그의 일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이윽고 이 모든 투쟁은 그가 스타레 메스토에서 서거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참으로 힘든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885년 4월 6일)
그러나 그와 치릴로는 "슬라브의 사도들"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의 전례는 오늘의 러시아 전례가 되었으니, 러시아, 세르브스,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그대로 전해오는 것이다.
그들의 축일이 전세계로 확대된 것은 1880년, 레오 13세에 의하여 비로소 이루어졌다.
성 안토니노 (Antoninus)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소렌토(Sorrento)
활동연도 : +830년
같은이름 : 안토니누스 안또니노 안또니누스
성 안토니누스(또는 안토니노)는 이탈리아 남부 안코나(Ancona)의 피체눔 태생으로 젊어서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수도원에 들어간 듯하다.
그러나 베네벤토(Benevento)의 시코 공작의 파괴 공작에 따라 이 수도원을 떠나 소렌토로 가서 그곳의 주교인 성 카텔루스(Catellus, 1월 19일)와 함께 지냈다.
그들은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함께 성 미카엘(Michael)의 환시를 보았다.
그 후 소렌토 주민들이 그에게 함께 지내기를 요청해서 그는 독수생활을 포기하고 성 아그리피누스(Agrippinus) 수도원에 정착하여 원장이 되었다.
그가 운명할 때 자신의 육신을 소렌토 시내나 시외에 묻지 말라고 유언했기 때문에 그의 수도자들이 성벽 속에 안장했는데, 1354년과 1358년에 사라센인들이 침략했을 때 안토니누스 성인에게 기도하여 침략군을 물리치고 승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소렌토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발렌티노 (Valentine)
신분 : 신부 의사 순교자
활동지역 : 로마(Roma)
활동연도 : +269년
같은이름 : 발렌티누스 발렌띠노 발렌띠누스 발렌타인
로마 순교록에는 발렌티누스라는 두 명의 성인을 2월 14일에 기념하고 있다.
한 사람은 로마(Roma)의 사제이며 의사인 성 발렌티누스(Valentinus, 또는 발렌티노)로서 클라우디우스 2세 황제의 박해 때인 269년에 순교하여 플라미니아 거리(Via Flaminia)에 묻혔다.
다른 한 사람은 로마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테르니(Terni)의 주교인 성 발렌티누스로 로마에서 순교하였고 그의 유해는 후에 테르니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그의 순교에 대해서는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순교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두 명의 순교자가 실제로 현존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주장이 다르다.
두 명의 발렌티누스가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또 다른 이들은 테르니의 발렌티누스가 로마로 이송되어 처형되었는데, 그로 인해 로마와 테르니에 두 개의 전통이 생겨난 것이지 실제로는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
본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달리 전해진 것일 뿐 동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더 많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 발렌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어떤 관리의 감시를 받게 되었는데, 그 관리에게는 앞 못 보는 양녀가 하나 있었다.
성 발렌티누스가 이 양녀의 눈을 뜨게 해주자 이에 감동된 그녀의 아버지를 비롯한 전 가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널리 퍼져 마침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어 성 발렌티누스는 참수를 당했다고 한다.
성 발렌티누스의 축일을 연인들의 축일로 기념하게 된 것은 14세기부터이다.
연인들이 이날 서로 주고받는 특별한 형태의 축하 카드도 성행하였다.
이날을 선택하게 된 것은 이 시기가 새들이 짝짓기하는 기간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기사도적 사랑의 표현에서 나타난 것으로도 생각된다.
즉 이 전통에 따르면 매년 2월 14일이 되면 젊은 여인들이 ‘발렌틴’(Valentin), 이른바 자신들을 흠모하여 시중을 드는 기사를 선택하고 이 기사들은 젊은 여인들에게 선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관습은 아직도 영국의 몇몇 지역에서 존속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념하는 발렌타인 축일의 여러 가지 의미와 형태는 상인들이 상업적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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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발렌타인 데이라는 연인들의 명절은, 로마의 풍요의식을 없애기 위해,곤봉에 맞고 목잘려 죽은 한 신부를 천주교가 수호성인으로 내세우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4세기초부터 로마인들은 매년 루페르쿠스 신 앞에서 젊은 남자들의 통과의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상자에 담겨있는 십대 소녀들의 이름을 임의로 뽑았다.
제비뽑기에 뽑힌 소녀는 동반자가 되어 일년동안 서로 즐기고(때로 성적인 즐거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게 하였으며,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제비를 뽑았다.
그로부터 8백년이 지난 후 이 관습을 종식시키고자 마음먹은 초대 교부들은 루페르쿠스 신을 대신할 ’연인의 성자’를 찾았다.
그들은 약 200년 전에 순교당한 주교 발렌타인이 그럴듯한 후보자라고 생각했다.
서기 269년, 로마의 클로디우스 황제는 금혼령을 내렸다.
그는 남자가 결혼을 하면 집을 떠나 전쟁에 나가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형편없는 군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제국에는 군인들이 필요했고, 사람들의 평판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던 클로디우스 황제는 결혼제도를 폐지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인테람나의 주교였던 발렌타인은 젊은 연인들을 몰래 찾아오게 해서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진노해 연인들의 친구인 주교 발렌타인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황제는 젊은 주교의 위엄과 확신에 감명을 받아 로마신을 믿도록 개종시켜 처형당하는 불행으로부터 구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발렌타인은 천주교를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섣불리 왕을 개종시키려 했다.
269년 2월 14일 발렌타인은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돌팔매를 당한 후 효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발렌타인은 옥에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간수 아르테리우스의 눈먼 딸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그녀의 시력을 기적적으로 회복시켰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는, 그녀에게 ’당신의 발렌타인으로부터’라는 작별인사를 서명했고, 그 작별 인사는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남게 되었다.
교회의 입장에서 볼때 발렌타인은 루페르쿠스의 인기를 빼앗을 수 있는 이상적인 후보로 보였다.
그래서 496년 교황 겔라시우스는 2월 중순에 거행하는 루페르쿠스 축제를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교황은 로마인들이 운수에 자신을 맡기는 제비뽑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은 존속시켰다.
제비뽑기 상자에는 자원한 독신 여자들의 이름대신에 성인들의 이름이 담겨졌다.
남녀 모두 종이 쪽지를 뽑았고, 자기들이 뽑은 성인의 삶을 모방해서 다음 해를 살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목적을 가진 다른 게임이었다.
여자를 기대했다가 성자의 이름을 뽑는 것은 많은 로마 젊은이들을 실망시켰을 것이다.
전체 행사의 영적인 주관자는 수호 성인 발렌타인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많은 로마인들이 마지못해 기존의 축제를 버리고 교회의 명절로 그것을 대치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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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발렌타인데이’로 유명한 성 발렌티노는 로마인이었고 사제였으며 신앙 때문에 순교했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따라서 독신 생활을 한 사제의 이름이 어떻게 사랑하는 이들의 내밀한 사랑 고백과 동의어가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성 발렌티노가 연인들의 수호 성인이 된 까닭은 알 수 없어도, 왜 특별히 ‘사랑’이라는 덕을 담당할 성인이 있어야 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사랑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갓난아기에게 필요한 영양과 환경을 제공해도 사랑을 주지 않으면 죽게 되었음을 관찰한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심지어 나무나 동물들도 사랑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사랑은 모든 생명체를 생명체로 존재케 하는 생명의 본질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인간을 ‘우주의 본질’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인간은 그 이상의 존재, ‘사랑’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용하지 않고 쌓아 두기만 한다면 결국 우리는 허무가 되고 만다.
사랑은 독점욕이나 의존성, 이기심과 같은 편협한 공간에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본질은 주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깨닫고 있는가?
나는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안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성 노스트리아노 (Nostrianus)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나폴리(Napoli)
활동연도 : +450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주교인 성 노스트리아누스(또는 노스트리아노)는 용맹하게 아리우스주의(Arianism)와 펠라지우스주의(Pelagianism)에 맞서 싸웠다.
성 요한 밥티스타 (John Baptist)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 알모도바르(Almodovar)
활동연도 : 1561-1613년
같은이름 : 요한네스 요안네스 조한네스 조안네스 조반니 존 죤 밥티스타 밥띠스따 밥티스트성 요한 밥티스타(Joannes Baptista a Conceptione)는 에스파냐 톨레도(Toledo)의 알모도바르 델 캄포에서 태어나 톨레도와 바에자에서 공부한 뒤에 삼위일체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1597년에 개혁 삼위일체 수도원을 발데페냐스(Valdepenas)에 세워 2년 후인 1599년에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얻었다.
이들이 소위 '맨발의 개혁자들'이다.
숱한 난관 끝에 이 개혁자들은 그의 생전에 34개의 수도원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