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7일 연중 제17주일
어떤 학생이 교수님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교수님, 제가 너무 바쁜 일이 있어서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험 날짜를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교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학생과의 형평성에 맞추어 볼 때, 개인적 사정만으로 너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어.”
교수님이 너무 매정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분이실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교수님이 잘못 판단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학생이 문제지, 교수님에게 문제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왜 하느님을 나쁜 분, 매정한 분으로 만들고, 또 하느님의 활동을 잘못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주님, 제 사업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이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주님, 공부를 많이 못 했어요. 그러니 제가 아는 문제만 나오게 해주세요.”
이런 식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느님이 좋은 분이실까요? 형평성에 맞지 않는 청원이 될 수 있습니다. 정의로운 하느님이 되지 않습니다. 또 기도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하지요. 누구와 대화할 때 계속 부탁만 한다면 친해질까요? 아닙니다. 더 거리감이 생기게 됩니다. 오히려 상대의 말을 잘 들을 때 더 가깝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랑의 말을 듣고,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친밀하게 만들고 그래서 삶 안에서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기도는 과연 바른 기도였을까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 11,2)라고 하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에도 청원 기도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청원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즉,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는 청원이 먼저 이루어지고, 다음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이 나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청원은 어떨까요? 자기 영광이 먼저였고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런 우리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인간이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훨씬 더 선하고 자비로우신 분으로 우리에게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에 걸맞은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기도를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바른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차라리 밑 빠진 항아리는 막을 수 있지만, 코 밑에 가로놓인 입은 막기 어렵다(명심보감).
사진설명: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첫댓글 빠다킹(조명연 마태오)신부님 강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