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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6-14 아브라함이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기 위하여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까지 동행하는 과정과 주고 받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행동을 개시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그것을 만류하고 그 대신에 수양을 예비해 주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본문 6-7절은
“⑥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⑦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고통의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내시고 계십니다.
그 새 도구로 아브라함의 가슴을 더욱 더 고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찔러져 수많은 상처투성이의 가슴을 더 아프게 고통을 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고의적으로 이삭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부드러운 칭호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삭으로 하여금 질문까지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슬픔이 최극도의 상태에까지 오르게 하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거룩한 사람은 백절불굴의 용기로 이 공격까지 버티어 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길을 가는 일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자기의 확신을 동요시키거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된 자신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저히 풀릴 수 없는 이 문제를 풀었던 그 방법을 우리가 주시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그가 하나님의 섭리에 피난처를 정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고 하는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본보기는 우리가 모방하도록 제시된 것입니다. 여와께서 명령을 하실 때마다 우리의 목적을 약화시키려고 계속하여 많은 일들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수단들은 실패하고 뾰족한 수는 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할 모든 길목은 다 봉쇄되어 막혀버린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런 진퇴양난의 협곡에서 절망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결방법은 그 사건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무 길도 없는 곳에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오직 우리의 감성들이 감지할 수 있는 것만 바라고 그 밖의 것은 바라지 않을 때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잘못되게 행동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당황하는 일에서도 거기에 구애되지 않고 전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고 따르게 될 때 우리는 그분에게 가장 최고의 존경을 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8절은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일관성과 그의 아들의 겸손함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장애들로 인하여 더 이상 태만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도 자기 아버지의 대답을 들으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의 아들은 하나님이 그분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셨다면 왜 양은 끌고 오지 않고 나무와 칼만 가지고 오셨습니까? 하고 쉽사리 반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정당한 이유 때문에 희생물이 생략된 것이지 아버지의 건망증 때문에 끌고 오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추측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침묵하면서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3. 본문 9-10절은
“⑨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⑩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입니다.
모세는 고의적으로 신자들이 생각해야 될 많은 일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습니다.
그가 제단을 쌓아 올린 것에 대하여 언급할 때 바로 그 직후에 이삭을 결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그때만 해도 그는 나이가 중년쯤 되었을 때라 자기 아버지보다는 더 힘이 세었던지 그렇지 않으면 서로 맞붙어 겨룬다면 거의 비슷한 힘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아이를 묶기 위하여 힘을 사용하였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죽기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빠져나가려는 아이를 억지로 결박시켰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오직 그는 자원해서 그 자신을 복종시켰던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미 하나님의 명령을 잘 익숙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죽음에 내준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사실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단지 그가 결박되었다고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반론을 제기하면서 자진해서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는 자를 하등에 결박할 필요가 있겠는가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즉 그 거룩한 사람은 이런 면에서 있을 수도 있는 위험을 예측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일을 진행하는 도중에 그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사전에 예방하려고 결박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해설의 간결성은 놀랍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과장해서 장황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체의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여야만 했을 때 그는 언제나 변함 없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견인불발의 정신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광경을 한번만 봐도 온 몸이 풀리고 기진맥진하게 되는 큰 일을 늙은 자기 손으로 충분히 직접 해낼 수 있을 만큼 막강했던 것입니다.
4. 본문 11절은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담하게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손을 번쩍 들어 올렸을 때는 이미 모든 내적인 시험은 완전히 정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승리를 얻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는 천만 뜻밖에 갑자기 아브라함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한 사실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시인들은 일이 절망적일 때는 그들의 우화로서 어떤 신(神)을 소개하는데 그 신은 극도로 어려울 때에 갑자기 나타나는 신이라고 합니다. 이런 조작된 것으로 사단은 하나님이 그분의 종들을 도우시려고 갑자기 나타나실 때 그분의 놀라웁고 굉장한 간섭을 모호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이 사기(史記), 곧 역사적인 기록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분명히 알려져야 하며 기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의 간계로 하나님의 진리가 와전되고 거짓말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또 우화적인 자료로 외곡하여 그 진리를 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죽는 순간에 하나님이 이삭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불러주신 것과 마치 무덤에서 다시 부활된 자처럼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돌려주신 참으로 놀라운 일을 진지함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일 것입니다.
모세 또한 사자(使者)의 소리를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자가 아브라함의 손을 내뻗치게 했던 똑같은 신앙의 지시하에 이제는 그 손을 다시 거두어 들이게 하려고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중대한 일에서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않고 무슨 일을 수행한다거나 포기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본보기에서 절대로 우리의 육신적인 감성들이 옳은 길이라고 선언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분의 순수한 뜻으로 우리가 해야될 일과 그쳐야 될 일에 대하여 우리가 취해야 될 태도를 알려주시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주 변경하신다고 해서 그분의 일관성 없는 것으로 대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신앙을 관련시키려는 데에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5. 본문 12절은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입니다.
지금 모든 것들이 언제나 하나님에게 제시되고 있는데 어떻게 새삼스럽게 하나님에게 알려질 수가 있겠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여기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방법으로 스스로 낮추시고 지금까지 실험으로 입증했던 것이 지금 그분에게 알려졌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에 근거하여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위약성에 근거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간단하게 아브라함이 바로 이 행동으로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고 있으며 입증해 주었는가를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제기되는데 아브라함이 이전의 경우에서 자기의 경건성에 대하여 많은 증거를 이미 제시하지 못했단 말인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토록 심한 상태까지 시험을 받게 의도하였을 때 그는 마침내 그의 정말로 심한 시험을 다 이루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가벼운 시험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의 오직 유일한 독생자마저 아끼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한 것을 보여준 것과 같이 그와 똑같은 경외에 대한 공통적인 증거를 모든 경건한 자들이 자신을 부인하는 행동으로 보여주도록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속되는 전쟁을 부과해 주고 계시므로 때가 되기도 전에 하나님의 구출을 원하는 자가 없도록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6. 본문 13절은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수양에 관하여 세상의 여섯째 날에 창조된 것이라고 꾸며대고 있는 것은 마치 그들의 다른 공상적인 것들과 같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 처음 창조된 것이든지 다른 곳에서 끌어온 것이든지 간에 그 양이 기적으로 그곳에 있게 되었다는 점에 대하여 우리는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종으로 하여금 기쁨과 흥겨움으로 즐거운 희생제를 드릴 수 있게 하시려고 그 양을 주시는 것을 의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은 감사를 하도록 교훈하고 계십니다. 더욱이 그 수양이 이삭이 죽을 자리에 대신 들어섰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굴욕에 대하여 계획이 무엇인가를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를테면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가 죽었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희생제물이 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더 교묘한 우화적인 해석들이 인용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런 우화들이 과연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7. 본문 14절은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입니다.
1) 아브라함은 그 때에 감사하는 행동으로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그에게 마련해 주신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은혜에 대한 기념비를 그의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그는 최고의 절정에 이르는 걱정 가운데서 피난처를 찾아서 하나님의 섭리로 피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그렇게 했던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 수양까지도 거기에 우연히 방황하다가 이르게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곳에 오게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곳의 이름이 바꿔졌습니다. 그것이 실수로 된 것이 아니고 뜻하신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능동태 동사를 ‘그가 보게 될 것이다’ 라고 ‘수동적으로’ 번역하는 자들이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굽어살피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그분의 도움을 뻗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그분이 그들에 의하여 보여지게 된다고 합니다. 전자는 순서적인 면에서 선행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그분의 은밀한 섭리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결정하시고 작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하여 후자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그분의 손을 우리에게 뻗치시고 참 실험적인 증거들로 그분 자신을 가시적(可視的)인 상태로 나타내주신다고 하는 말입니다.
2)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최고의 위기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그가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이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인물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땅의 모래같이 확산시킬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순간 그의 인간적 소망 땅에 기반을 둔 소망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를 피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망은 무너져 내리지만 하나님의 계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어려움에 처하기 일쑤입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소망, 사랑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것은 무너져 내려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하나님의 약속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