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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보다 길게 설명된 공간, 성막에 담긴 하나님의 설계도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는 창세기 단 두 장만에 끝났습니다.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 사람까지 만드신 이야기 전부가 두 장이면 충분했던 겁니다.
그런데 광야의 이 천막 하나에는 13장을 쓰셨습니다. 우주를 만드신 이야기보다 더 길게 설명하신 공간, 거기에 숨겨진 구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성막 하나를 제대로 보면 성경 전체가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에덴이 왜 그렇게 끝났는지 보이고, 레위기가 왜 그토록 자세한지 보이고, 예수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보이죠. 성경 전체의 설계도가 여기 있었습니다. 이 설계도 안에 감춰진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지금부터 함께 확인해 보겠습니다.
모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기둥을 세우고 마지막 고리를 걸고 마지막 휘장 자락을 팽팽하게 당겨 매다는 순간이었습니다. 몇 달째 밤낮없이 이어진 작업의 끝이었고 손바닥에는 이미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었으며 이마에는 마른 땀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하늘에서 구름 하나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이 아주 느리게 성막 지붕 위로 내려앉았습니다. 지켜보던 백성들도 그 광경 앞에서 하나같이 숨을 죽였고 아이를 안고 있던 사람들조차 발걸음을 멈춘 채 진영 전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습니다.
모세가 조심스레 한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하지만 발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보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나눴던 바로 그 모세였는데, 이 작은 천막 문 앞에서는 어쩐 일인지 더 이상 한 걸음도 안으로 내디딜 수가 없었던 겁니다.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요?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왜 굳이 천 조각과 나무판으로 엮은 이 작은 공간에 내려오려 하셨는지, 그 안에 무엇을 두고 누구와 무엇을 하려 하셨는지, 그 궁금증을 품으신 채로 지금부터 함께 그 답을 하나씩 열어보겠습니다.
모세가 진영 바깥에 작은 천막 하나를 따로 세웠습니다. 회막이라 불렀습니다.
미쉬칸(장막): 친구처럼 대면하시던 모세의 회막과 광야의 침묵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마다 홀로 들어가는 곳이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매번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오랫동안 아무도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은밀하고 특별한 자리였습니다. 모세가 천막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구름기둥이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와 문 앞에 멈춰 섰습니다. 진영 곳곳에 있던 백성들이 그 광경을 보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저마다 자기 장막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그 시간만큼은 진영 전체가 숨을 죽였습니다. 그 정적은 꽤 오래 이어졌을 겁니다. 그 천막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는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성경은 그 장면을 단 한 문장으로 또렷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짧지만 무게가 실린 한 문장입니다. 친구와 이야기하듯 말입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었습니다. 천사들조차 그 얼굴을 감히 마주 보지 못하고 날개로 눈을 가리는 그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광야의 낡은 천막 안에서 모세와 마주 앉아 정말 친구에게 말하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던 겁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막의 히브리어 이름 미쉬칸(Mishkan)이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쉬칸은 샤칸(Shakan)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잠깐 들렀다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이사를 와서 그 자리에 눌러앉아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 자체에 자신의 마음을 새겨 넣으신 셈이었습니다. 이름 하나에 담긴 뜻치고는 참 무겁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 마음이 든 적 없으신가요? 분명 기도는 드렸는데 집에 도착하면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고, 아까 그 기도가 정말 하나님께 닿긴 한 건지 자꾸 되묻게 되는 순간 말이죠. 목소리가 천장에 부딪혀 도로 돌아오는 것 같은 그 허전한 기분 다들 아실 겁니다. 성막이 보여주는 그림은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먼저 사람 곁으로 내려와 마주 앉으신 분이었던 겁니다. 어쩌면 우리의 기도가 하늘까지 힘겹게 올라가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곁에 앉아 계신 그분께 조용히 건네는 대화였을지도 모르죠.
하루의 열기가 서서히 잦아들고 바람이 서늘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동산 안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같은 시간에 반복되는 소리였고, 아담과 하와는 그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낯설지 않은 익숙한 발소리였을 겁니다. 그 발소리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창세기 3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날이 서늘할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아담과 하와가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매일 저녁 하나님이 직접 동산 안을 걸어서 아담에게로 오셨던 것입니다. 매일 반복된 일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 하나님이 아담에게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는 구절입니다. '경작하다'와 '지키다'. 이 두 단어를 그저 텃밭을 가꾸는 말로만 읽고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데, 사실 여기엔 훨씬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원어를 알면 전혀 다르게 읽힙니다. 이 두 단어, 히브리어로 '아바드(Abad)'와 '샤마르(Shamar)'가 나란히 등장하는 곳이 성경에 또 있습니다.
훗날 민수기에서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맡은 일을 설명할 때 정확히 똑같은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말이 아니라 성전을 섬긴다는 뜻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의 "동산을 맡겨 경작하며(아바드, עָבַד) 지키게(샤마르, שָׁמַר) 하시고"라는 표현은 단순한 농경 활동을 넘어섭니다.
원어적 연관성: 구약 성경 전체에서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와 '샤마르'가 짝을 이루어 결합해 나타나는 대표적인 곳은 성막에서 레위인과 제사장의 직무를 묘사할 때(민 3:7–8, 8:26, 18:5–7 등)입니다.
우연이라 보기엔 너무 정확합니다. 아담은 정원사가 아니라 첫 번째 제사장이었고, 에덴은 정원이 아니라 첫 번째 성전이었던 셈입니다. 하나님이 매일 저녁 그 성전 안을 걸으며 아담을 찾아오셨던 것, 그것이 바로 성막보다 훨씬 오래전에 이미 시작된 미쉬칸의 첫 장면이자 원형이었던 겁니다.
챕터 3: 에덴의 원형: 정원사가 아닌 제사장 아담, 그리고 다시 짜여진 휘장의 그룹
성경 전체는 에덴동산을 성전의 모형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들을 촘촘히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회복될 에덴과 연결되어 집니다.
동쪽 입구와 그룹(케루빔): 아담이 쫓겨난 후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과 불칼을 두어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3:24). 성막과 솔로몬 성전의 유일한 출입구 역시 동쪽을 향해 열려 있으며, 지성소 휘장과 속죄소 위에는 거룩한 곳을 지키는 존재인 '그룹(Cherubim)'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생명나무와 순금 등잔대: 성소 안을 비추는 순금 등잔대(메노라)의 형태는 가지, 꽃받침, 꽃 등이 달린 '나무 형상'으로 설계되었으며, 이는 에덴의 생명나무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보석과 강: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신 강(창 2:10)과 하윌라 땅의 금, 베델리엄, 호마노(창 2:11–12)는 훗날 대제사장의 흉패에 들어가는 보석들, 그리고 에스겔 47장과 요한계시록 22장의 성전 보좌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 강과 보석으로 정확히 이어집니다.
그 걸음은 어느 날 뚝 끊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하나님은 그들을 동산 밖으로 내보내셨고, 동쪽에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길을 막으셨습니다. 서늘한 바람 속에 함께 걸었던 그 동산이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린 겁니다.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단절이었습니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훗날 성막의 휘장을 짤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위에 그룹을 수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에덴의 문을 닫았던 바로 그 그룹이 성막의 휘장 위에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쫓아내신 것으로 끝내신 게 아니라, 돌아올 길을 이미 다시 짜고 계셨던 거였습니다.
성막 앞에 섰습니다. 가로세로로 둘러쳐진 흰 휘장이 사방을 빙 둘러 막고 있었습니다. 그 울타리를 한 바퀴 돌아보면 이상한 점 하나가 눈에 띕니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딱 동쪽 문 하나뿐이었던 겁니다. 다른 입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것이었죠. 뒷문도 없고 옆문도 없었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위한 별도의 입구 같은 것도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이든 평민이든 족장이든 이 문 하나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예외는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문을 지나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아름다운 장식이 아니라 놋으로 만든 커다란 번제단이었습니다. 그 위에서는 불이 밤낮없이 타올랐고, 제물을 끌고 온 사람은 반드시 자기 손으로 직접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 손으로 직접 양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는 일이었습니다. 레위기는 이것을 '안수하라'고 기록합니다. 그 손 아래 양의 온기가 느껴지고 숨이 서서히 멎어가는 것까지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을 겁니다. 내 죄가 바로 그 순간 이 양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번제단을 지나면 놋으로 만든 큰 대야, 물두멍이 서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 물에 손과 발을 씻었는데, 이 대야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면 마음이 사뭇 다르게 움직일 겁니다. 출애굽기는 회막 문에서 수종 들던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다고 분명히 적어둡니다. 광야에서 거울은 놋을 갈고 닦아 만드는,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물건 중 하나였을 겁니다. 이집트에서부터 애써 들고 나온 소중한 물건이었을 그 거울을 여인들은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자기 얼굴을 비추던 그 거울이 이제는 제사장의 손발을 씻는 대야가 된 거였습니다.
자격이 없다고 느껴서 새벽 기도를 슬며시 접었던 날이 있으신가요? 오늘은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예배당 문앞에서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던 적도 있으실 겁니다. 뜰의 순서를 가만히 보면 하나님은 자격을 먼저 갖추고 오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문 안에 제단부터 놓으셨고 피로 먼저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깨끗해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면 그 자리에서 씻기는 구조였던 겁니다. 재료마저 안으로 들어갈수록 놋에서 은으로, 은에서 순금으로 바뀌었으니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귀해지는 셈이었습니다. 순서 자체가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챕터 4: 뜰의 구조: 자격이 아니라 피로 먼저 들어가는 문, 그리고 여인들의 거울
휘장을 걷고 성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풍경이 완전히 바뀝니다. 햇빛이 사라지고 창문 하나 없는 어둠이 시작됩니다. 이 방 안을 밝히는 빛은 단 하나, 금으로 만든 등잔대에서 흔들리는 불꽃 하나뿐이었습니다. 낮과는 완전히 다른 조용한 세계였습니다. 그 불은 밤에도 결코 꺼지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매일 기름을 채우고 심지를 다듬었습니다.
오른쪽에는 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엔 지파마다 하나씩 배정된 떡이 매주 새것으로 다시 올려졌습니다. 상이 차려져 있다는 건 곧 식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열두 지파를 자기 식탁으로 늘 초대해 두고 계셨던 셈입니다. 휘장 바로 앞엔 작은 금 제단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위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향이 조용히 피어올랐습니다. 시편은 이 향을 두고 "내 기도가 주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라고 노래합니다. 향 연기가 피어오를 때마다 백성의 기도도 함께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던 겁니다.
등불, 떡, 향. 이 세 가지가 성소 안에 나란히 자리하며 무려 수백 년을 그렇게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그 수백 년 뒤 한 사람이 나타나 정확히 이 세 자리에 서서 담담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고, "나는 생명의 떡이라" 하셨습니다. 등잔대의 자리에서, 진설병의 자리에서 이것이 바로 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유가 아니었던 겁니다. 수백 년 전부터 정확히 그 자리에 놓여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물건들 앞에 서서 처음부터 자신이었다고 선언하신 거죠. 성막을 모르면 그저 예쁜 표현으로만 들리지만, 성막을 알고 나면 이 말씀은 완전히 다르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읽어도 마음에 잘 닿지 않는 밤이 있으실 겁니다. 분명 눈으로는 읽고 있는데 그 뜻이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시간 말이죠. 성소 안의 등불은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습니다. 떡도 단 한 번 치워진 적이 없었고, 향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여기 다른 민족의 신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었습니다. 이집트에도, 바빌론에도, 가나안에도 각자의 신전이 있었고 구조도 이스라엘 성막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이 좁아지고 가장 깊은 곳에 가장 거룩한 방이 자리했습니다. 그 방 안에는 어느 신전이든 예외 없이 금으로 빚은 신의 형상, 즉 신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성소 문을 열어보면 정작 그 자리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조각도 없고 그림도 없고 어떤 형상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빈자리 자체가 메시지였습니다.
대신 그 자리엔 나무로 짠 궤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법궤였습니다. 아카시아 나무에 순금을 입힌 궤였고, 그 뚜껑 양쪽엔 금으로 빚은 그룹 둘이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두 날개 사이 그 빈 공간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였던 겁니다. 다른 민족은 그 자리에 신을 만들어 세웠지만 이스라엘은 그 자리를 그대로 비워두었습니다. 형상으로는 담을 수 없는 분이 앉으시도록 말입니다. 그 궤 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곧 율법이 들어 있었습니다. 지켜지지 못한 채 이미 깨어진 약속이었습니다.
챕터 5: 성소의 비밀: 세상의 빛이자 생명의 떡, 닫혀있던 휘장을 향한 예고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백성들은 이미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돌판은 궤 안에서 끊임없이 이 백성이 언약을 어겼다고 조용히 고발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 위엔 뚜껑이 하나 덮여 있었는데, 히브리어로 카포렛(Kapporeth), 즉 '덮는다'는 뜻을 가진 말이었습니다.
대제사장 단 한 사람만이 1년을 통틀어 오직 하루, 이 방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손에 짐승의 피를 들고 들어가 그 뚜껑 위에 조심스레 피를 뿌렸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실 때 보이는 건 깨어진 율법이 아니라 그 위를 덮은 피였습니다.
같은 죄를 같은 말로 수년째 적어 내려가던 기도 노트를 가진 분이 계셨습니다. 용서받은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밤마다 그 일이 다시 떠올라 잠을 설쳤다고 하셨죠. 카포렛을 알고 난 뒤부터 그분의 노트엔 조금씩 다른 문장이 적히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대신 "감사합니다, 이미 덮어주셨습니다"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건 우리의 실패가 아니라 그 위에 덮인 피였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마음을 짓누르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카포렛 위에 조용히 올려놓아도 괜찮을 겁니다.
이 피의 의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다시 뿌려야 했고, 해마다 대제사장이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왜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던 걸까요? 그 답이 바로 대속죄일이라는 하루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욤 키푸르(Yom Kippur)라 불리는 이날 대제사장은 평소 입던 화려한 금실 옷과 보석 박힌 흉패를 전부 벗었습니다. 대신 장식 하나 없는 흰 세마포 옷만 걸쳤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종교 지도자가 이날만큼은 자기 지위를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섰던 것입니다. 향 연기를 먼저 피워 속죄소를 가려야 했는데, 그래야 죽지 않는다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손이 떨렸을 겁니다. 실수하면 목숨을 잃는 자리였으니까요. 그렇게 해마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피를 들고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성막 전체를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부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그저 실체를 가리킬 뿐입니다. 번제단도, 물두멍도, 카포렛도 결국 전부 진짜가 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그림자였던 겁니다. 마침내 그 그림자가 가리키던 실체가 도착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피를 들고 단번에 들어가신 분이었습니다. 해마다가 아니라 단번에,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 말입니다. 오랜 그림자가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챕터 6: 지성소와 카포렛: 깨어진 돌판을 덮는 피의 은혜, 반복된 대속죄일의 의미
유월절이 지난 예루살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낮인데도 어둠이 온 땅을 뒤덮었고 그 어둠은 세 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해가 기울어갈 무렵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한마디가 터져 나왔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한마디였습니다.
숨이 멎는 바로 그 순간 성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시나요?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르던 그 두껍고 무거운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단숨에 찢어져 두 조각이 났습니다. 사람 키를 몇 배는 넘는 천이었습니다. 그 휘장 위에는 그룹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에덴 동쪽에서 불칼을 들고 문을 막아섰던 바로 그 그룹이었습니다. 같은 그룹이 같은 자리에서 아주 오랜 세월을 지키고 서 있었는데, 바로 이 순간 그 문이 마침내 활짝 열렸던 것입니다. 상징이 실제로 완성된 순간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떨리는 손으로 들어갔던 그 지성소, 1년을 통틀어 오직 하루 오직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던 그 방으로 가는 길이 이제 누구에게나 활짝 열렸습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표현합니다. 오랜 기다림이 끝난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제 그 방 안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게 된 겁니다. 더 이상 대제사장이 대신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동물의 피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정해진 하루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값없이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적어둡니다. '거하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케노센(eskenosen)'의 뿌리는 '스케네(skene)', 다름 아닌 '천막'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요한이 이 단어를 아무렇게나 고른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 이것이 본래 의미에 훨씬 더 가까울 겁니다. 광야 한복판에 천막을 치셨던 그 미쉬칸이 이번엔 사람의 몸을 입고 다시 한번 우리 가운데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에덴에서 함께 걸으셨습니다. 쫓겨난 뒤에는 성막을 설계하셨습니다.
챕터 7: 휘장이 찢어지다: 십자가에서 완성된 그림자, 마침내 열린 하나님 곁으로 가는 길
성막으로도 부족해서 결국 사람이 되어 직접 오셨고, 십자가에서 그 마지막 휘장마저 손수 찢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향은 오직 한 가지, 사람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21장은 이 흐름의 결론을 이렇게 적어둡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고 선언합니다. 장막, 곧 미쉬칸이라는 단어가 성경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하나로 잇고 있습니다. 처음과 끝이 정확히 맞물립니다. 더 이상 성막이 필요하지 않은 날, 휘장도 피도 필요하지 않은 그 날이 그렇게 예고되어 있습니다. 에덴에서 시작된 그 걸음이 성막을 지나 십자가를 거쳐 결국 영원한 '함께함'이라는 자리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멀게만 느껴지셨다면, 기도가 천장에 부딪혀 돌아오는 것 같으셨다면 오늘 이 흐름 하나만은 꼭 기억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멀리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던 겁니다.
성소를 이해할 때 더 깊이 바라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제라는 말입니까? 그 엄숙하고 중요한 성소제도가 모형이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실제는 무엇입니까?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하늘의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였다는 것입니다.
“[1]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히 8:1-2)
이 땅에 있는 성소는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멸망되었습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봐야합니다. 그 하늘에서 우리의 구속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머지 않아 하늘이 열리며 우리 주님이 내려 오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 지성소에서 봉사하시는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해야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0-51)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30)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6:2)
성소는 하나님과 만나는 공간적인 장소요, 안식일은 시간속의 시성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놀라운 만남의 장소로 오늘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여 주님앞에 나아가십시다.
그것은 하늘을 준비하는 가장 엄숙하고 경이로운 사건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