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김영삼 김대중 이후 가장 치열했던 대선 후보 경선이었던 2007년 이명박 박근혜 경선 당시, 둘은 딴 세상 사람 같았다.
대구 경북 출신이라는 점 외에는 성별, 성장과정, 성격, 스타일, 어느 하나 같은 구석이 없었다.
그해 늦여름, 경선을 며칠 앞두고 박근혜가 아는 기자에게
“아유, 꽤 되셨는데 늘 막내 같아요”
라는 덕담을 건네기도 하지만, 기자와 헤어질 때까지의 동선이 애초 계획된 것과 한 치의 오차 없이 물 흐르듯 진행되는 듯했다.
이명박도 아는 기자를 보고
“아직도 여기 있어?”
라며 한참 얘기를 나누다 부스를 채 돌지 못한 채 대충 지나치고, 친근감의 표현이겠지만 비공식적 자리에선 처음 보는 기자한테도 대부분 반말투다.
기자들이 쫓아가며 정치 현안 등을 물어보자,
“아, 덥다”
며 양복저고리를 벗더니 부스 칸막이에 팔을 기대고
“노무현 대통령이 왜 저러는 것 같애”
라고 한껏 여유를 부리는 식이다.
두 사람을 각각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약속 시간에 조금 늦었다. 박근혜는
“좀 늦었죠? 죄송합니다. 점심식사는 하셨어요? 의자가 불편하진 않나요?”
라고 말했다.
늦게 온 이명박은 바깥에서 참모와 꽤 오래 회의에 가까운 대화를 나눈 뒤 들어섰다.
“어, 왔어?”
당시 그는 자신을 찾아온 기자에게 직접 커피믹스를 타서 건네기도 했다.
박근혜 이명박의 또다른 점은 지지자들이다.
‘부자 되세요’
(이말은 내가 이명박을 제일 싫어 하는 말이 되었다)
라는 카드사 광고가 최고의 인사말이 됐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시 유권자들은 이명박을 향해 ‘욕망’ 투표를 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치솟는 부동산값과 내수경기 침체 등에 시달린 사람들은 ‘좋든 싫든’ 이명박이 뭔가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억지로라도 걸려 했다.
이명박이 비비케이를 비롯한 온갖 도덕성 의혹에 시달려도 별 치명타가 되지 않던 이유다.
그러나 이는 지지의 층은 넓되, 지지의 정도는 성기고, 지지의 이유가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 돌아설 수 있음을 뜻한다.
그 많던 ‘MB연대’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이유다.
박근혜 지지층은 다르다.
1997년 빗속 유세장에서 사람들이 박근혜 얼굴 보려고 다들 우산을 접고, 3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유세장이 온통 울음바다가 된 사연 등 신화가 무성했다.
‘콘크리트 지지율’은 당시 박 후보의 ‘대변인 격’이었던 이정현 의원이 처음 표현했다.
이명박의 회고록이 둘을 다시 그때로 돌려세운 듯하다.
(차라리 범죄 기록을 썼으면 더욱 잘 팔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둘을 보면, 이란성 쌍둥이처럼 다른 듯 같아 보인다.
현격히 떨어지는 자기 객관화 능력, 지지율에 일희일비하는 점, 자신이 큰 희생을 하고 있다는 착각, 남탓 하기 등 같은 점투성이다.
이명박은 왜 박근혜가 대통령 시절 회고록을 냈을까?
자원외교 국정조사 등 자신을 겨누는 칼끝에 대한 반박, 정치공간 확보 등 일까? 그게 목적이라면 안 내는 게 나았다.
조금만 사려가 깊었다면, 내용은 차치하고 박근혜 정부 이후 내는 게 맞았다.
외교적 논란도 그때쯤이면 덜 했을 터이고. 이동관 전 홍보수석 말처럼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타 나온 시점이 지금이라는 게 아마 맞을 것이다.
박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 분위기 속에 친이계가 국회 안팎에서 나름 ‘바른 소리’를 하며 반사이익을 얻어가던 차에 ‘자화자찬 회고록’으로 ‘이명박 수비’로 급격한 모드 전환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이전까지의 개혁 이미지도 급격히 탈색되고 있다.
반면, 궁지에 몰리던 박 대통령 쪽은 ‘공공의 적’을 만나 코너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가졌다.
박근혜는 이명박에게 고마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