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92
5월16일[부활 제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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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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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ULm4gOBFDA (김홍주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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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께서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죄, 우리의 연약함을 못 견뎌하시는 분이십니다!>
젊은 사제 시절, 저희가 운영하던 아동 보육 시설에는 초딩 꼬마들도 간간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하늘같은 중고생 형들과 함께 사느라 고생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꼬마들에게 보호 본능 내지 측은지심이 느껴져 더 각별히 챙기곤 했습니다.
가끔 연피정이나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형들로부터 시달릴 꼬마들을 생각하니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은 꼬마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있을 때는 그나마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곤 했는데, 이래저래 불안함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안그래도 어린 나이에 부모와 분리된 친구들인데...이제 겨우 정붙이고 마음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데...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장시간 자리를 비운다니, 아이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일종의 분리불안증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금방 돌아올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라며 다독이고 그렇게 떠나곤 했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분리로 인해 걱정이 태산인 제자들과 오늘 우리를 향해 손수 우리의 등을 다독다독 두드리시면서 안심시키십니다.
내 일시적인 부재로 인해 너희는 근심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 걱정을 하지 말거라. 그 근심은 잠시뿐이란다.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란다. 내가 즉시 다시 돌아올 것이란다.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주님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곧 돌아 온다 해놓고, 안 돌아 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주님께서는 200퍼센트 확실히 돌아오실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셨습니다. 승천하시자마자 약속하신 대로 즉시 당신의 대리자요 우리를 악으로부터 영원히 지켜줄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가운데 머무시도록 배려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참삶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참삶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겠지요.
중재자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짓 논리에 휩싸이지 않고 참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죄,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나약함을 못 견뎌하시는 분이십니다. 큰 측은지심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당신께 합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꿰매주십니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올무에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잔잔하고 깊은 영적 샘터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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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mtaI9twC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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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비유에 들어있는 삼위일체 신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데 왜 떠나야 할까요? 그것은 사랑이 삼위일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름을 받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가지에 성령의 수액을 넘겨줄 수 없습니다.
이별 영화의 대명사인 ‘카사블랑카’(1942)에서 이러한 상황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지배하는 모로코의 도시 카사블랑카를 배경으로 합니다. 카사블랑카는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통행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릭은 카사블랑카에서 유명한 나이트클럽과 도박장을 소유하고 있는 냉소적인 미국 국외 거주자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유럽을 둘러싼 정치적 혼란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이때 파리에서 릭의 전 애인 엘사가 남편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릭이 소유한 ‘통행증’을 얻기 위해 카사블랑카에 있습니다. 이 통행증만 있으면 독일 점령 유럽과 중립 포르투갈을 자유롭게 여행 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탈 수도 있습니다. 릭은 나치가 파리를 침공했을 때 엘사가 갑자기 그를 파리에 남겨둔 것에 대해 여전히 앙심을 품고 있습니다. 사실 엘사는 독일에 대항해 싸우던 남편이 죽었다고 믿어서 릭과 사랑에 빠졌던 것인데 남편 빅터가 살아 돌아와 결국엔 빅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릭과 엘사의 과거 관계를 알고있는 빅터는 독일군에게 발각되고 잡혀가면서 자기 아내 엘사를 릭에게 부탁합니다. 엘사도 릭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릭은 자신의 친구 고위 경찰에게 자신이 빅터에게 통행증을 전해줄 때 잡으면 더 큰 공을 올리게 될 것이라며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릭이 만든 함정이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독일군 서장의 서명이 있어야 하는데 서장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둘을 떠나보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스트라사 소령이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릭은 그를 총으로 사살합니다. 그리고 릭은 빅터와 엘사가 행복할 수 있게 영원히 떠나보내 보내줍니다. 경찰서장 루이는 릭의 친구였기 때문에 웃으며 릭이 피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합니다. 둘은 진정한 우정 관계를 시작합니다.
릭이 사랑하는 여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카사블랑카에 범죄자로 남아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사랑하니까 떠나야 하는 영화의 대명사입니다. 떠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성령으로 상징되는 통행증이 엘사와 남편에게 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께 머물러야만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가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엘사의 남편 빅터의 관점에서 봅시다. 그에게 죄는 독일에 저항하지 않는 릭입니다. 그는 독일에 저항함으로써 의로워진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독일이라는 악을 심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죄는 목숨을 걸고 그들을 보내주려는 릭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에 저항함으로써가 아닌 자신이 릭의 목숨값으로 받은 통행증이 바로 의로움입니다. 또한 릭이 독일군 장교를 처단한 것처럼 악의 심판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린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힘으로 악에 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께서 교회에 맡긴 성사라는 통행증을 받고 의로워지면 됩니다. 그러면 이미 심판을 이긴 것입니다.
사랑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신비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도 잘 떠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릭은 엘사를 떠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빅터는 죽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릭의 친구 루이가 아니면 통행증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배우자를 위해, 자녀를 위해, 친구를 위해 주님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은총을 직접 받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줄 것이 없으면서 붙어만 있으려고 하면 언젠가는 원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성령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서 흘러오는 수액과 같습니다. 포도나무에서 가지로 수액이 흘러들지만, 사실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가 계시고 그분이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성령의 거름으로 포도나무를 키웁니다. 그래야 가지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우리를 떠난 분을 볼 수 있을까요? 만약 아버지가 매일 집에만 있다면 자녀들은 좋을까요? 불안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밖에 나가야 돈을 벌어오는지 압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버지가 안 보이는 것을 기뻐합니다. 물론 규칙적으로 만나주기는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주 가버리신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 제대하고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서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고생하시며 저를 키우셨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의 일하는 곳까지 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자리는 그분이 일하는 곳에서 그 일에 참여할 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떠나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여 당신이 계신 곳에 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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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이슬람은 라마단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월절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절이 지나고 부활 축제기간 중이었습니다. 요르단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려고 이스라엘로 많이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이라서 국경에 직원들이 평소보다 적었습니다. 부활절이 지나고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많이 왔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것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1시간이면 충분했는데 이번에는 3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여러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상황이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짜증을 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짜증을 낸다고 상황이 바뀔 리는 없었습니다. 새치기 하는 분들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새치기한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분도 보았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요르단에 왔으니 요르단의 법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새치기하는 분들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나는 성지순례를 왔지만 저분들은 생존의 문제가 달린 것이니 기꺼이 자리를 양보한다고 하였습니다. 맞았습니다. 우리는 늦게 이스라엘에 도착해도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가는 분들에게는 기다리는 버스가 없었습니다. 저도 성지순례의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짜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면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나가면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다리면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마침 강의 내용이 ‘도마복음’이었습니다. 평소에 듣고 싶었는데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2시간 동안 기다리면서 강의를 들으니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이 제게는 기쁨이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이 사자와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이 사자에게 먹히면 불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가 인간에게 먹히면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는 육체의 욕망이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욕망에게 사로잡히면 불행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물이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명예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권력이라는 사자가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었습니다. 재물이라는 사자는 가난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명예라는 사자는 비움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권력이라는 사자는 겸손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요르단에서 넘어오는 이스라엘 국경에서 저는 사자와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이 많았던 분들은 사자에게 물어뜯기는 모습이었습니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감사와 기쁨이 많았던 분들은 사자를 온순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자를 가난과 비움 그리고 겸손으로 따듯하게 받아들이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욕망, 명예, 권력에 젖어있던 간수는 사도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난, 비움, 겸손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사자의 우리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의 길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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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난 강론)
아이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이에게 어머니의 몸은 천국과 같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느끼지 않습니다. 배고픔에 대한 걱정도 없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몸에서 보호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어머니의 몸에서 10개월을 머물면 이제 아이는 또 다른 세상을 향해서 떠나야 합니다.
아이에게는 생명 줄이었던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도 끊어야 합니다. 아이에게는 죽음과 같은 그 순간을 우리는 탄생이라고 이야기하며 축하합니다. 매년 태어난 날을 생일이라며 축하합니다.
생명 줄이었던 탯줄이 끊어지면서 아이는 스스로 숨을 쉬고, 스스로 먹게 됩니다. 어머니의 몸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하늘을 봅니다. 어머니의 몸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바람을 느끼게 됩니다.
비슷한 경험을 군대에서 했습니다. 훈련소는 마치 어머니의 몸과 같았습니다. 같이 훈련받는 군인들은 모두 동기입니다. 매일 같이 먹고, 같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제식훈련도 하였고, 사격훈련도 하였고, 격파훈련도 하였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새로운 부대로 갈 때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체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3년간 지낼 부대로 갔습니다. 부대는 훈련소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이제 훈련은 없었고, 모든 것이 실전이었습니다. 동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과 같다는 고참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업무를 가르쳐 줄 사수가 있었습니다. 제대를 앞둔 사수는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무반에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수는 곧 제대하고, 이제 비로소 스스로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 됩니다. 비슷한 경험을 2년 전 뉴욕에서 했습니다.
주교님께서 뉴욕의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업무를 맡겨주셨습니다. 신문은 중학교 때 배달은 해 보았지만 제작과 경영은 전혀 경험이 없었습니다. 한국은 제게는 어머니의 몸과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있고, 동료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도와줄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거주자 등록증도 받고, 운전면허 시험도 보고, 신용카드도 만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려는데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고,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2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려울 때 힘이 돼 주는 동료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뉴욕의 생활과 문화에 적응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관에 처음 들어가면 캄캄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제는 뉴욕에 처음 오는 신부님을 도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아이에게 탯줄을 끊는 것이 탄생인 것처럼 주님께서 떠나시면 제자들은 비로소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훈련소를 떠나야 군인이 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떠나시면 제자들은 시련과 박해를 이겨내는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뉴욕에 살면서 뉴욕의 주민이 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떠나시면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꽃은 피었다 지기 마련이고, 사람은 나올 때가 있으면 들어갈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역사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하려했던 사람들 때문에 본인은 물론 공동체가 수렁에 빠지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가 다 될 것을 예감하십니다. 구원의 역사에 또 다른 협조자가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바쳐서 함께 했던 제자들을 떠나야 하고, 하느님 나라 운동에서도 떠날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주님의 ‘비움’이 바로 참된 자유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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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5-11: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리라.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5절) 제자들은 이 말씀 때문에 슬픔에 잠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7절) 말씀하신다. 그분이 떠나시는 것은 당신이 영광 속에 계시며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도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온갖 다양한 선물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이제는 성령 안에서 뵙고, 제자들이 눈으로 그분을 뵐 때와 같이 그분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9절)이라 하시는 것은, 당신이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당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을 믿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오신 빛을 거절한 것이다. 빛을 피하여 어둠 속으로 숨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그분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그분이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의로움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것을 우리들의 의로움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주님을 믿고 있으므로 그 의로움이 세상의 그릇됨을 밝혀줄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되며 그때 이 세상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단죄되며, 주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고, 원수들의 죄는 단죄받을 것이다. 세상의 우두머리는 사탄이다. 사탄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그릇된 방법으로 다스려 하느님을 거스르게 하기 때문이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더욱 아버지와 아들을 잘 알게 하여 주실 것이고, 당신의 인도하에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성령께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나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고 깨어있는 삶이 중요하다.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삶이란 이렇게 깨어있을 때 가능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이다. 순간순간의 우리의 삶이 기쁘고 아름답게 이어나갈 수 있는 삶으로 언제나 성령 안에 잠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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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보호자께서 오시면>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5-7)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고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의 ‘죽음의 시간’이 곧 닥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지상에서의 사명을 마무리하신 일입니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왜 이렇게 나의 ‘죽음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슬퍼하기만 하느냐?”라는 뜻입니다.
앞의 1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분명히 물었습니다.(요한 13,36)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묻는 사람이 ‘지금’ 없다는 뜻이고, 당신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슬픔에만 빠져 있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는 “떠난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입니다. 여기서 ‘근심’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별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 없이 슬퍼하기만 했습니다. <그 당시에 제자들에게는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기만 한 것을 크게 잘못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부활 신앙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의 임종과 장례 때에 슬퍼하면 안 되는가? 이별을 슬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라는 말씀은, 당신이 지금 하시는 말씀은 중요한 ‘계시’라는(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떠나시지 않는 것은 제자들에게 해롭다는 뜻이 아니고, “내가 떠나도 너희의 영적인 이로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라는 말씀은, “내가 떠나도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신다.”, 또는 “나는 떠난 뒤에도 성령을 통해서 너희와 함께 있겠다.”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의 “떠나지 않으면... 오지 않으신다.”라는 표현 때문에, 예수님과 성령이 마치 임무 교대를 하듯이, 또는 서로 마주치는 것을 피하듯이 그렇게 엇갈려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 말씀의 뜻은, 당신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 제자들이 따로 성령을 받지 않아도 되지만, 이제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변화하시면, 늘 제자들 가운데에 당신이 현존하신다고 해도 제자들을 위해서 따로 성령 강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라는 말씀은, 앞의 14장에서 하셨던 약속 말씀을 다시 확인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교리서에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복음서에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신다고 표현될 때도 있고, 예수님께서 보내신다고 표현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뜻은 모두 같습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16,8-11)
여기서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라는 말씀의 뜻은, “너희가 성령을 받게 되면, 너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박해자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입니다.
<성령께서 직접 사람들을 가르치신다는 뜻이 아니라, 제자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도 그들이 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말씀들은, 신앙인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그 일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항상 일은 신앙인들이 하는 것이고, 성령께서는 일하는 신앙인들을 도와주십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아무 일도 안 하면, 아무 도움도 못 받게 됩니다.>
‘보호자’는 성령이고, ‘세상’은 박해자들입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라는 말씀의 뜻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은 것은 죄라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고”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신앙인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죄인은 믿지 않은 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라는 말씀의 뜻은, “내가 아버지께 가는 일은(나의 승천은) 곧 내가 의롭다는 것을 (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고, 나를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단죄한 그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의 뜻은, “그들은 자신들이 나를 심판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의 부활은 사탄이 심판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일이 될 것이고, 동시에 사탄의 하수인이었던 그들도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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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공생활 때 제자들은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분께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마르 8,32; 9,32; 10,32 참조) 예수님과 이별을 앞둔 순간까지도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 찬 것은, 그분께서 떠나시는 뜻을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앞날이 불안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반대와 위협에서 제자들을 지켜 주셨고, 이별의 때가 되자 그들을 보호해 주실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하신 것은 어리석고 나약한 제자들이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받은 뒤에는 진정한 ‘복음의 증거자’로 새롭게 바뀔 것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리의 영”(요한 15,26; 16,13)께서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죄”임을 아는 유다인들에게 다음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그분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 그들이 불의한 자로 단죄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어 영광 속에 드높여지시고 “의로움”이 드러났다는 사실, 세상은 자신이 예수님을 ‘심판’하였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악과 어둠이 ‘심판’받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옷 벗김과 매질을 당한 바오로와 실라스가 감옥에서도 찬미가를 부를 수 있게 하신 분이시며, 복음을 받아들인 간수와 그의 온 집안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신 보호자 성령께서(제1독서 참조) 우리 가정과 이웃에게 찬미와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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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우리가 주님을 구세주로 모시게 된 경로는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이는 오랜 천주교 신앙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았고, 어떤 이는 친구나 지인의 권유로,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의지로 홀로 성당을 찾아가 예비 신자 교리를 공부하여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방법과 과정이 어떻든 우리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을 알리신’(『가톨릭 교회 교리서』, 204항 참조) 하느님께 다양하게 응답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감옥에 갇힌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세례를 받은 간수와 그의 가족은 특별한 체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예수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기뻐합니다. 이렇게 어떠한 경로든 세례를 받은 모든 이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2코린 5,7) 살아갑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시련을 겪고 흔들리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어려운 여정을 걸어가신 성모님과 함께, 또한 많은 신앙의 증인의 모범을 통하여 ‘우리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히브리서 12장 2절 참조) 충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보호자, 성령께서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 신앙을 굳건하게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에게서 흩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실 것’(요한 11,52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께 기도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 거룩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예수님께 다가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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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고통 중에 드리는 기도와 찬미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복음을 전하던 바오로는 점귀신이 붙은 어떤 여종에게서 악령을 몰아낸다. 여종은 자신의 힘으로는 악령을 쫓아내지도 못하고, 악령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악령의 노예가 되어 모든 것을 악령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악령이 나가기 전까지 여종은 얼마나 악령에 시달렸을까?
그런데 이제 악령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까? 그렇지만 여종이 악령에 사로잡혀 점을 쳐줌으로써 돈을 벌었던 주인은 바오로가 여종에게서 악령을 몰아냄으로써 물질적인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필리피의 군중들과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를 박해하고 고발한다.
오늘날에도 여종의 주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악을 행하도록 하며, 그들을 통하여 돈을 벌고 착취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과 포주가 아닌가? 그처럼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방해하는 이들에게 앙심을 품고 그들을 박해한다. 그리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고통과 박해 속에서 살아간다.
그처럼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10-12) 하고 말씀하시며 행복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다가 박해를 당하고 불행이 닥쳐올 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신다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라. 시련과 고통은 악에서 비롯되며,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행복과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신다.
바오로와 실라는 지하 감옥에 갇혔으며 차꼬까지 채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지켜주실 것을 굳게 믿었다. 그들은 차꼬까지 채워진 상태에서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도하였다. 밤, 밤은 기도에 적절한 시간이요, 특히 하느님을 찬양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시편 119,62 참조)
바오로와 실라는 자신들의 석방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고통 중에 기도하고, 박해 중에 더욱더 주님을 찬미하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기도와 찬미, 찬양을 들으시고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신다. 그리하여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문이 열렸다. 그러나 바오로와 실라는 도망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감옥 안이나 밖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진이 일어나 감옥문이 열리자 간수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살하려고 하였다. 바오로와 실라가 그를 찾아와 격려하자 틀림없이 자기 앞에 나타난 신들이라고 생각하였다.(14,11.15 참조) 그래서 간수는 자신이 신들의 진노에서 벗어나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였다.
바오로와 실라는 그에게 중요한 그 구원의 복음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주님께서는 바오로와 실라가 감옥에 갇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의 기도와 찬미를 들으시고 그에 응답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도 이끌어주시고, 기도와 찬미, 찬양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응답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지켜주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굳게 믿자.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도 함께 계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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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떠나 보면 알거야>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 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합니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낯섦을 동반합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성령께서 오시어 모든 그릇된 생각들을 바로잡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편협함에 갇혀 하느님까지 거부하는 죄의 속성을 바로잡아 주실 성령은 어쩌면 우리에게 힘겨운 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존 습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을 수 있는 변혁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바꾸어 새로움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감히 포기하지 못하는 기존의 삶을 부둥켜안은 채 철저히 성령과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살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박병규).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성령이 오시어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해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을 만든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야기(루카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습니다. 그는 집을 나가서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자신의 주제를 안 것이고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다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아버지의 사랑과 품이 얼마나 큰지를, 아니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 보면 알게 됩니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 보십시오.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 중심의 편협한 삶에 갇혀 나 자신을, 이웃을, 하느님을 거부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죄로 말미암은 관계의 단절이 있다면 지금 서둘러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있을 때 잘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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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화가 중 하나로 뽑힙니다. 대상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전통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빛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대상의 색과 형태를 포착하여 그리는 인상주의로 당대 미술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년에 화가에게 치명적인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백내장으로 인한 시력 악화로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을까요? 만약 포기했다면, 명작이라고 평가받는 그의 ‘수련’ 연작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누구나 어떤 어려움으로 힘든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이때가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봐야 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좌절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새로움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을 만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생각에 절망과 포기의 연속이었지만, 주님께서 보여 주신 부활이라는 새로움은 그들에게 새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에 근심이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없는 새로움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들은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성령을 통해 또 다른 삶, 새로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신다고 하셨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많은 은사와 열매를 받은 제자들은 새롭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기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 좌절과 절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을 봐야 할 때였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실라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바로 믿음만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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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렇게 떠날 수 있기를>
요한 16,5-11 (성령께서 하시는 일)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떠날 수 있기를>
늘 그렇듯이
언젠가
떠나겠지요
나 머물던
그 모든 곳에
고운 빛
선한 기운
따뜻한 느낌
아름다운 만남
다만
남길 수 있기를
나의 님께서
나에게
늘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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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디로 갈거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늘은 주제와 좀 동떨어진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제자들을 나무라는 오늘 말씀인데 제자들이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이유가 자기들도 거기로 따라가야 하는데 그러기 싫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도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오늘은 어디로 갈 건지를 일부러 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옛날에 ‘어디로 갈거나’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거나. 이 강을 건너도 내 쉴 곳은 아니오. 저 산을 넘어도 머물 곳은 없어라.’
그때는 이 노래가 우리의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과도 어울려서, 그리고 꽤 철학적인 가사가 마음에 들어 가끔 흥얼거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저 감상에 젖어 흥얼거린 것이고, 어디로 가는지를 지금처럼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요.
어디로 가는 것과 관련하여 옛날의 저는 이 세상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 세상을 넘어 어디로 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게 되면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복음의 주님처럼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히 말하지만, 어느 정도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고, 초월하였기에 죽음에 초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너무 지나친 얘기라면 한 발은 이미 저 세상에 있고 다른 한 발은 아직 이 세상에 있다는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양다리 걸치기인데, 보통 양다리 걸치기는 안 좋은 뜻이지만 지금 저의 경우는 이 세상을 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 한 발 딛고 있지만, 심정적으로 발을 확실히 담그고 있는 곳은 언젠가 가야 할 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몇 주 전 한 형제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일 저일 벌이기보다는 하나라도 성공 모델을 만드는 것이 후배들에게 이롭지 않겠냐는 충고를 들었는데 저를 콕 찌르는 말이긴 하지만 여전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제겐 오래전부터 그것에 동의할 수 없는 지론이 있는데, 그것이 저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늘 경계했던 것이 제가 시작한 일 제가 끝까지 붙잡고 있으려 하거나 제가 시작한 일이 성공적이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안주란 편안함에 대한 안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일에 안주하는 것도 있고 남자에게는 일에의 안주가 더 경계해야 할 것일 겁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젊었을 때도 제가 시작하고 하던 일을 즉시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더욱 그러해야 할 때이고,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제게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떠나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죽는 것은 두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선종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닥치면 떠나길 두려워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를 늘 물으며 살아야 하고, 간다면 골로 가지 않고 아버지께 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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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삶>
- 보호자 성령과 함께 하는 삶 -
참으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영적승리의 삶을 소망할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영적승리의 삶도 선택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선택의 은총입니다. 선택의 은총이요 선택의 행복입니다. 참으로 보호자 성령과 함께 살아갈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예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잠깨어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고 나가면 맨먼저 보는 밤하늘 하늘이요 다음엔 늘 거기 그 자리의 영원한 도반 불암산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살라고 눈들면 별들이요, 땅의 꽃처럼 살라고 내려다 보면 무수한 꽃들입니다. 요즘의 한국은 어디나 신록에 꽃들 만발한 천국같습니다. 아무리 나눠도 새롭고 좋은 다음 시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앞뜰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애기똥풀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이들이야 말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요 제 주변에는 이런 영적도반들이 많습니다.
어제 파코미오 원장 수사의 영명축일이 마치 내 영명축일인 듯 기쁘게 지낸 영적승리의 하루였습니다. 어제의 강론을 축일 선물로 드렸고, 다음 내용이 축일 선물로 보낸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성모님’을 ‘장모님’으로 보낸 오타 덕분이었으니 전화위복입니다.
“왜관 피정집 장모님께서도 기뻐 축일 축하드립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 난감했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니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성모님이 장모님이라면 ‘성모님의 사위’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성모님의 사랑은 없을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유쾌하고 좋은 축일 선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 강론을 축일 선물로 보낸 것이지요. 바로 이런 유우머의 덕담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불가의 성철 대선사가 제자들에게 주었다는 다섯가지 수행지침이 생각납니다.
1.많이 먹지 마라.
2.많이 말하지 마라.
3.많이 자지 마라.
4.간식하지 마라.
5.많이 책보지 마라.
영적승리의 삶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구체적 수행 지침들에 공감했습니다. 얼마전 의사분의 충고도 잊지 못합니다. “당뇨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간식하지 말고 체중을 줄이세요.” 이 또한 저에게는 명심해야할 수행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먹는 대로 됩니다(I am who I eat)”. 적게 먹어 병이 아니라 지나치게 먹어 병입니다.
어제 강론에도 인용했고 어느 자매와도 나눈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얼굴은 사람입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 순수로 빛났던 젊음의 얼굴들이 욕망대로 무절제의 삶을 살다 보면 괴물같은 노년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은 한폭의 그림같습니다. 평생 그려가야 하는 인생 그림이듯 평생 꼴잡아가는 얼굴입니다.
웃으면 꽃같은 사람 얼굴인데 웃지 않을 때는 괴물같아 보일때도 많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바로 제가 말씀 처방전 약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대로 살면 꽃같은 얼굴에 영적승리의 삶이 보장됩니다. 바로 보호자 성령께서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이 말씀에 꼭 찍어 드리는 “웃어요!”라는 스탬프입니다. 웃을 때 하늘의 별같은 얼굴이, 땅의 꽃같은 얼굴이 됩니다. 웃을 때 꽃처럼 피어나는 사람의 얼굴들입니다. 기쁨도 기도도 감사도 의식적, 의도적 선택이요 훈련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수행자들의 영적승리의 삶을 위한 구체적 처방입니다. 오늘 복음이 영적승리의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보호자 성령임을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힐 것이다.”
보호자 성령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의 삶임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떠남이 죄요, 주님과 함께 함이 의로움이요 주님과 함께 할 때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바로 성령과 함께 할 때 영적승리에 구원의 삶임을 말해 줍니다. 성령과 함께 파스카 예수님과 일치되어 살 때 죄에서의 해방, 의로움의 성취, 심판에서 벗어납니다.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영적전쟁입니다. 바로 파스카 예수님의 영적승리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다음 복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ㄷ).
바로 영적승리의 삶을 모범을 보여주는 제1독서의 바오로와 실라스 일행입니다. 온갖 고통과 시련중에도 오뚜기 같은 두제자입니다. 무지몽매한 군중의 승리인 듯 하나 바오로와 실라스의 승리요 주님의 승리, 성령의 승리입니다. 깊은 감방속, 발에 차꼬를 채웠지만 이들의 영혼은 자유로웠습니다. 자정 무렾에 이들은 하느님께 찬미가를 불렀고 다른 수인들을 귀기울여 듣습니다.
그러자 즉시 발생한 기적이 상황을 일변시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자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감옥문들은 저절로 열리고 사슬도 풀렸습니다. 마침내 간수의 구원에 까지 이르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두제자의 영적승리의 삶을 보여줍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두 제자들로부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두 제자들은 이 가족으로부터 음식 대접에 환대를 받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니 참으로 통쾌한 영적승리의 기쁨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실 때 백전백승의 승리요, 전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것 없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요약한 영문 한구절이 저에겐 화두처럼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하느님은 구부러진 선으로 곧게 쓰실 수 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사막교부의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구부러진 선으로 곧게 쓰시는 주님을 모시고 성령따라 살 때 언제 어디서나 곧은 삶, 영적승리의 삶에 하느님의 나라, 천국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바오로와 실라스가 그 모범입니다. 탓할 것은 주님과 함께 못하는 내 믿음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하는, 위 잠언 말씀을 입증하는 제 “메꽃들”이란 시입니다.
“이 가지 저 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피어 내며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들!” -1997.8.21.
무려 26년전 제 정주의 꽃자리 여기 요셉 수도원에서 쓴 자작 애송시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끊임없이 하늘 사랑 꽃피어 내듯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써온 강론에 제가 놀라고 감사한 마음 차고 넘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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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요한16,8)
오늘 복음(요한16,5-11)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16,5) 떠나가시기에 앞서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시고, 그 성령께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는 세상 구원을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마지막 히든 카드였습니다. 세상의 구원자, 우리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파견되신 예수님은 땀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 세상에서 하셔야만 했던 모든 일을 끝마치시고, 이제 하늘로 올라가시는 마지막 여정을 앞두고 계십니다.
돌아오는 다음 주일(5.21)이 바로 이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을 기리는 '주님승천대축일'입니다.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과의 이별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마음 안에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이별은 슬픔입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더욱 큰 슬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위로하시면서 제자들을 지켜 줄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지금 우리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또 하나의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보호자, 곧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성령께 나의 모든 존재를 내어맡긴 사람들입니다. 이 성령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우리의 그릇된 생각을 밝혀주십니다.
성령을 청하고 또 청합시다! 그리고 이 성령께 나의 온 존재를 내어맡깁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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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84GBnQuAx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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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 5)
떠남과 보냄
사이에
삶의 방향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보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도
하느님을
보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십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시간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가리키시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방향에는
언제나
성령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
우리를
안내하시고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잘못된 생각에서
우리를
보호하어 주십니다.
지켜야 할 약속들이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다시 잡을
때입니다.
방향 없이
살았던 삶을
반성합니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우리들에게
사랑의 방향을
되찾아 주십니다.
하느님이 없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떠나야 할
때가 있고
가야 할 때가
있음을 배우는
신앙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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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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