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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베리 ‘군주론’(새로읽는 고전:88)
◎수단방법 안가리는 ‘세태’
정치란 도대체 무엇일까
○15세기 도시국가 반목·갈등·혼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목적을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라고 할지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는 이 말은 마키아벨리의 정치 이론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식은 그 이면을 알지 못하면 항상 표면적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이 말을 구성하는 중요한 낱말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목적’과 ‘수단’이다.만약 목적이 여기서 개인의 단순한 사적인 이익을 말한다면,이 말은 목적 달성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권세와 모략과 중상 등 비도덕적 방법이 허용된다는 권모술수론을 핵심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목적은 국가질서이다.15세기 이탈리아는 다섯의 도시국가로 나뉘어 동맹과 전쟁,반목과 갈등을 거듭하는 극도의 혼란상태에 처해 있었다.이러한 정치적 무질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강력한 국가였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정치의 영역에서 정치적 공동체의 확고부동한 토대,즉 국가를 구축할 수 있는 정치기술을 서술하고 있는 근대의 고전이다.우리가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국가는 사실 근대의 산물이다.국가는 사회의 악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과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질서로 발전된 것이다.이런 점에서 보면 ‘군주론’은 사실 최초의 국가론이다.
○강력한 국가만이 당시 무질서 해결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세울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그것은 하늘로부터 땅,이상으로부터 현실,이성으로부터 권력으로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삶과 현실을 바라보는 개념의 체계를 패러다임이라고 한다면,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고대와 중세의 이성 중심적 또는 신 중심적 패러다임으로부터 권력 중심적 또는 인간 중심적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마키아벨리는 도덕적 설교와 예언을 통해 신국을 건설하려고 시도한 사보나롤라의 도덕정치를 평가하면서 “장미의 화환만으로는 혁명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비폭력적 민주운동을 종종 장미의 혁명에 비유하지만,사회의 질서가 어지러운 상태에서 권력과 폭력을 배제한 순전한 도덕정치는 오히려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국가를 신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인간에 의해 만들어져야 할 것으로 파악한다.인간이 국가를 구성한다는 이 단순한 진리는 당시만 하더라도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획기적인 것이었다.국가가 인간의 손으로 빚어져야 할 예술작품과 같은 것이라면,국가를 건설하고 구축하는 데는 일종의 정치적 기술과 예술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그것은 바로 현실의 논리를 올바로 읽어내는 기술이다.
○국가는 세속적 산물… 통치술 필수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삶과 있어야 할 삶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그러므로 당위적으로 있어야 할 것만을 바라보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시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실존을 보존하기보다는 오히려 파괴할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원리가 권력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군주론’은 권력을 획득하고 보존하고 확대하는 방법과 기술을 다룬다는 점에서 권력론이다.
정치를 하늘로부터 땅으로 끌어내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 있는 세 가지 문제점을 함축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세가지 질문
첫째,국가와 정치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전제조건에 기초하고 있다.항상 선만을 바라는 인간은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자기보존을 위해서는 도덕법칙에 따라 행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우리가 이러한 현실 논리를 받아들인다면,공동생활을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은 어떤 것인가?
둘째,권력과 국가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선다.정치적 수단은 본래 도덕적 가치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국가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군주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중상 모략 살인 전쟁과 같은 비도덕적 수단을 요청하는 목적이 과연 신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셋째,군주는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절대적 권력을 가진 지배자이다.만약 어떤 상태가 질서이며 또 무엇이 정당한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군주라고 한다면,일반 국민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가?
정치와 인간의 본성,정치와 도덕,정치인과 절대권력에 관한 세 가지 물음을 가지고 읽으면,‘군주론’은 인간 자신에 관한 문제를 항상 새롭게 제기하는 고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키아벨리는 누구/이탈리아 정치사상가/일평생 공화주의 견지
마키아벨리(1469∼1527)는 피렌체를 당시 서양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던 로렌초 메디치가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에 태어나서 메디치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 이탈리아의 정치적 위기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사유한 정치사상가이다.그가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가에 관해서만 논하고자 한다”고 밝혔듯이 그의 저서는 모두 국가 정치와 연관되어 있다.대표적인 저서로는 ‘군주론’(1513),‘디스코르시’‘정치와 국가지배에 관한 논고’(1531) 외에 ‘피렌체사’(1525) 등이 있다.마키아벨리는 1527년 신성동맹의 패배로 메디치가 물러나고 공화제가 복원되었을 때 메디치의 동조자라는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나지만 그는 전생애에 걸쳐 공화주의자로 남아 있었다.‘군주론’이 국가질서의 확립에 초점을 맞춘 실천적 공화주의자의 권력이론이라면 ‘디스코르시’는 질서가 확립된 이후에 시민 자유의 보장에 관심을 기울인 이론적 공화주의자의 정치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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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년 9월 21일 ∼ 1498년 5월 23일)는 이탈리아의 도미니쿠스회 수도사·설교가·종교개혁가이다. 사보나롤라는 설교를 통해 피렌체 시를 개혁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또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도덕을 비난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이탈리아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보나롤라는 페라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475년에 도미니코수도회에 들어가기 전에 인문주의, 철학, 의학을 공부했다. 1482년에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회에 파견되어 높은 학식과 금욕 생활로 명성을 얻었고, 그 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공화주의 사상과 정치적 자유주의를 기조로 한 설교를 했다. 1490년에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당시 지배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를 공격하고, 교회와 속세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설교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는지, 피렌체의 포르노그라피가 불타없어졌다고 한다.[1]
1494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입해 메디치가의 통치가 무너지자, 샤를 8세의 침략을 예언했던 사보나롤라의 권위가 높아졌다. 사보나롤라는 피에로 데 메디치의 망명 후에는 중간계급을 주체로 지도자가 되어 정권을 잡아 피렌체에 귀족 정치를 배격하고 신정 정치적 민주정을 도입하고, 종교개혁을 실현하려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대립하게 되었다. 1495년에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에게 로마에 와서 그가 주장하는 예언 능력을 보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건강이 나쁘고, 로마로 가는 도중에 폭행당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교황의 명령을 거절했다. 이에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더 이상 설교를 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사보나롤라는 1496년에 렌트에서 다시 설교를 시작했고, 교황은 불복종의 죄를 물어 그를 파문했다.
사보나롤라는 대(對) 피사 전쟁의 실패, 메디치 파(派)의 모략으로 인심을 잃었고, 그 뒤에도 계속 교황에게 도전하자 교황은 피렌체 시 당국에 사보나롤라를 로마로 보내거나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 피렌체 시를 예배 금지시킬 것이라고 위협했다. 사보나롤라는 시 당국에 굴복해 교회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화형당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를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선구자라고 하는 사람, 또 로마 가톨릭 교회 정통 복귀 운동자라고 하는 사람 등 일치하지 않으나, 16세기 르네상스의 미술·문학·사상(思想)에 미친 영향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