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산악지대에 투하된 미군 특전대는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적을 만나
용감히 싸웠다. 십수명의 사상자를 낸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이 병 종 서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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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카에다 잔당을 색출하기 위한 미군의 아나콘다 작전에 참가한 존 채프먼 공군상병은 전장에서 한번 쫓겨났지만 곧바로 돌아갔다. 3월 4일(월요일) 동트기 직전 채프먼과 소규모 수색팀을 태운 치누크 헬기는 아프간 산악지대에 착륙을 시도하던 중 적군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총탄세례를 받은 헬기는 기우뚱거리며 가까스로 안전지대에 착륙했다.
채프먼과 그의 팀은 다른 헬기로 바꿔 타고 기지로 돌아갔다. 팀 전열을 재편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곧 첫 착륙시도 때 헬기에서 떨어진 해군 특수부대 실(SEAL) 소속 하사관 닐 로버츠의 시신을 회수하기 위해 사지(死地)를 향해 다시 날아갔다. 채프먼의 중대장이 유가족들에게 들려준 뒷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미군에서 제일 강인한 특전요원들로 이뤄진 이번 공격팀 6명은 빗발치는 총탄세례 속에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전우들이 바위 뒤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채프먼은 납작 엎드려 엄호사격을 했다. 그는 적에게 총을 난사하다가 가슴에 몇발을 맞았다. 전우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싸우다가 자신이 숨진 것이다. 하루 해가 저물기 전 그의 전우 다섯명이 더 목숨을 거두었다. 브래들리 크로스 병장, 매슈 커먼스 일병, 마크 앤더슨 상병(이상 육군 레인저 대원들), 필립 스비타크 상병(비행 엔지니어), 그리고 공군의 낙하산 구조요원 제이슨 커닝햄 등이었다.
‘미군은 죽거나 부상한 전우를 전장에 버려두지 않는다.’ 가장 위험한 임무만을 수행토록 선발된 정예군인인 미군 특수부대원들에게 이 전사의 법도는 곧 자신의 명예가 걸린 문제다. 존 채프먼의 부친인 유진 채프먼은 거기서 자부심과 위안을 얻는다. “그것은 당연한 임무다. 전우를 뒤에 남겨둘 수는 없다”고 채프먼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미군 특수부대원들은 보통 혈기방장한 한창 나이의 청년이 아니다. 상당수가 로버츠나 채프먼처럼 30대 가장들이다. 적의 전선 안에 침투해 공습을 유도하는 훈련을 받은 공군 전투 통제요원으로 10년 이상 복무한 채프먼은 이제 군복을 벗고 어린 두딸과 시간을 보낼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런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돌입했다. “그는 두딸의 아버지로서는 집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고 그의 누이 로리는 설명했다. “그러나 미국인으로서, 특수부대 요원으로서는 전쟁터에 가고 싶어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채프먼의 사명감은 숭고하기는 하지만 전우애로 맺어진 미국의 정예 특수부대원들 사이에서는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채프먼 같은 군인들을 기꺼이 사지로 보낸 군 수뇌부의 결정이 오히려 더 놀랍다. 근년 들어 미국의 동맹국이나 적성국을 막론하고 미국은 공습전이 아닌 지상전은 치를 엄두도 못낸다는 속삭임이 점점 커져왔다.
1993년 서투른 기습작전의 실패로 병사 18명을 잃고 소말리아에서 허둥지둥 철수한 미국의 약한 모습을 보고 용기백배한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을 상대로 차츰차츰 테러 수위를 높이다가 마침내는 본토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조지 W. 부시 대통령 정부는 다른 신호를 보내고자 한다. 샤히코트 산맥에 은신한, 정확한 병력은 알 수 없지만 대규모의 알 카에다와 탈레반 전사들에게 수천명의 미군 지상군을 보냄으로써 부시와 그의 전쟁 지휘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서는 인명 희생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보여줄 참이다.
아나콘다 작전은 미군 병사 수천명이 희생된 2차대전 때의 타라와 전투나 이오지마(硫黃島) 전투와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그러나 전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영화관에서 본 것이 전부인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지난주 부상병들이 전해준 전투장면들은 너무나 생생하고 사실적이며 충격적이었다. ‘블랙호크 다운’이나 ‘우리는 군인이었다’(We Were Soldiers) 같은 영화의 전투장면이 아무리 실감난다 한들 픽션세계는 진짜 전투 앞에서는 새발의 피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진짜 전투가 그렇듯 이번 전투는 공포와 혼란 속에서 시작됐다. 이번 작전의 대다수 병사들은 실제 전장에서 총탄세례를 받아본 경험이 없다. 그런 그들이 영하의 추위와 고산증에 시달리며,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적들을 상대로 실전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뜻하지 않은 격렬한 반격에 직면한 일부 대원들은 겁에 질렸다. 그러나 그보다는 용감히 싸운 대원이 더 많았다.
공격은 계획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정보당국은 적군 병력을 약 2백명으로 추정했다. 이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진짜 병력은 8백명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공격개시 시각은 3월 2일(토요일) 동틀녁으로 계획됐지만 적군은 가만히 앉아서 공격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이른 새벽 아프간 병사들이 1렬 종대로 집결지에 모여 미군 특수부대 지휘관들의 이동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첫 포탄이 터지면서 어두운 밤하늘을 찢었다.
“그들은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아프간 병사 사이드 와히둘라(35)는 말했다. “우리는 알 카에다가 동굴 속에 그렇게 많은 인원과 무기를 갖고 있는 줄 몰랐다.” 박격포와 로켓포 공격에 우왕좌왕하던 아프간군은 후방에서 두번째 기습공격을 당하고 혼란에 빠졌다. 미군 1명(스탠리 해리먼 일등준위)과 아프간군 병사 3명이 사망하고 약 40명이 부상했다.
그러나 미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새벽공격을 강행했다. 치누크 헬기들이 미군 경보병 요원들을 산기슭에 내려놓았다. 원래 이들은 진군하는 아프간 병사들(두어시간 전 계곡에서 기습공격을 당한 바로 그 부대)에게 쫓겨 달아나는 적군을 가로막는 ‘차단병력’으로 투입된 것이었다. 이때 美 정보기관이 아무래도 계산착오를 일으킨 것 같다. 제10 산악사단의 1개 중대 병력(약 80명)은 적진 한가운데에 투입됐다. “우리는 곧바로 총격을 받았다.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왔다”고 로버트 힐리 병장은 말했다. “그들이 우리를 찾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헬기 소리가 나자 우르르 몰려왔다.”
데이비드 스미스 병장은 소대원들이 헬기에서 내려 집결하자마자 박격포 공격이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총탄세례를 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미군 병사들은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우리는 모두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고 스미스는 말했다. 그의 소대원 9명이 파편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윌리엄 새키샛 병장은 왼쪽 고관절 부위에 파편을 맞았다. “마치 야구 방망이로 얻어맞는 것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일부 젊은 대원들은 자신만만하게 전투에 임했다. “처음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길 때 우리는 웃고 있었다”고 웨인 스탠턴(20) 상병은 말했다. 그 웃음은 진짜 웃음이라기보다 초조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처음 몇차례의 공격은 무작정 퍼부어대길래 그저 우리를 겁주려는 짓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겁이 나기 시작했다”고 스탠턴은 말했다.
형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이제 웃는 자는 알 카에다 전사들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고 다리에 부상을 입은 스탠턴은 말했다. “적은 우리보다 7백m나 높은 곳에 있었다. 우리의 소화기로는 그들을 쏠 수 없었다.”(“그들은 우리에게 손까지 흔들었다”고 스미스 병장은 돌이켰다)
공습유도 목표물 설정을 맡고 있는 전방 관측병 로버트 매클리브 병장은 좀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숨어 있던 메마른 모래 강바닥에서 기어나왔다. 적군이 산등성이를 따라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적군이 더 많이 있었다. 어느 순간 그들이 동쪽 산등성이에서도 오고 있었다. 누가 나팔이라도 불어 동료들을 전부 불러낸 것 같았다”고 매클리브는 말했다.
적군의 사격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들은 모두 산등성이를 넘어와 갖고 있는 무기를 총동원해 우리에게 쏴댔다”고 매클리브는 말했다. “그런 뒤 산등성이 반대편의 동굴로 후퇴했다가 반시간쯤 뒤 탄약을 보충해 다시 나왔다.” 박격포 공격은 점점 더 정확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지형에서 20년을 싸워왔다”고 스탠턴은 말했다. “오랫동안 박격포를 다뤄온 탓에 정확히 어디에 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 머리 속에는 격자눈금이 들어 있는 셈이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지역이었다.”
미군 공군기들이 속속 도착했다. F16·F18 같은 빠른 전폭기를 비롯해 속도는 그보다 느리지만 살상능력은 뛰어난 아파치 헬기, AC130 공격용 헬기, A10 공격기 등이 기관총과 로켓포를 발사했다. 그러나 공중공격은 잠깐의 휴식시간만 벌어줬을 뿐이다. 적군은 일단 동굴로 후퇴했다가 다시 나타나 학살극을 재개했다.
옴짝달싹 못하는 미군은 헬기 구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헬기는 오지 않았다”고 스탠턴은 말했다. “너무 위험했다.” 언덕 너머로 헬기가 나타났다가 적군의 총격에 쫓겨 후퇴하고는 했다. “우리는 모두들 지원병력이 왜 안 오지 하는 생각만 했다”고 매클리브는 말했다. 탄약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병사들은 춥고 지친 데다가 고산병으로 인한 어지럼증까지 겹쳐 정신이 멍했다. “신발 한짝을 벗어 벌을 잡는 줄 알았지 호박벌 벌집을 건드리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매클리브는 말했다. 판초를 쓰고 앉아 있던 그의 허벅지·팔·손가락에 난 상처들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둠이 미군을 살렸다. 적군은 미군의 예광탄 발사를 유도해 위치를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적군이 쏜 예광탄 덕분에 AC130 헬기들의 공격 목표물이 되면서 그들의 기관총과 박격포는 대부분 침묵에 빠졌다. 육중한 치누크 헬기들이 도착해 부상자를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부상병 구출작전은 자정 무렵에야 끝났다. 부상자는 총 27명이었다. “숨진 사람이 없다는 게 신기했다”고 타지 무어 병장은 말했다.
피를 흘리면서도 적군의 총격 때문에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동안 무어는 한가지 이상한 모습을 발견했다. 일부 알 카에다 전사들이 밝은 오렌지색 깃발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미군이 아군 공격기의 오인사격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무어는 적군이 그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점에 감탄했다. “마치 우리가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고 그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첩자들이 미군의 공격계획을 미리 입수했는지도 모른다. 미군이 이용하는 아프간 대리병사들은 충성심이나 사리분별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아나콘다 작전 첫날 호되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중부사령부는 야전 지휘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다음 며칠 동안 병력과 헬기를 증파했다. 고공에서 B52를 비롯한 군용기들이 수백개의 정밀유도탄을 투하했다. 전장에는 약 7백명의 적군이 죽어 널브러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 고급 지휘관이 기자들에게 말했다(과거에 그런 수치는 믿을 게 못됐다). “그 작자들을 무더기로 죽이고 있다.”
미군 병사들의 용기가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른 것은 전투 셋째날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확실치 않고 일부 내용은 엇갈리지만 미군 병사들은 한 동료를 데려오기 위해 특단의 모험에 나섰던 것 같다. 월요일 오전 5시 30분, 치누크 헬기 두대가 수색팀을 투입하기 위해 산악지대를 향해 떠올랐다. 그중 한대는 착륙을 시도하던 중 적군이 로켓으로 쏜 유탄(榴彈)을 정면에 정통으로 맞았다.
유탄은 터지지 않은 것 같았지만 소화기 공세가 이어지면서 치누크는 즉시 이륙해 5백∼6백m쯤 떨어진 곳에 추락하다시피 착륙했다. 그 뒤 특공대원들은 대원 가운데 하나인 해군 실의 하사관 로버츠가 실종됐음을 깨달았다. 총에 맞은 것인가, 아니면 착륙이 실패한 혼란의 와중에 헬기에서 떨어진 것인가.
당시 현장 모습은 상공에 떠 있던 프레더터 정찰기의 카메라에 실시간대로 잡혔다. 카불 외곽의 바그람 공군기지 본부에서 고위 간부들은 적군 세명이 로버츠를 질질 끌고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로버츠가 용케 구조요청 전파신호장치를 켠 것을 보면 적어도 잠깐은 숨이 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를 데려오기 위해 구조팀이 급파됐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좀 확실치 않지만 두번째 지원용 헬기도 첫번째 구조팀으로부터 1.5km쯤 떨어진 곳에 착륙한 것 같다.
두번째 헬기는 빗발치는 총격 앞에서 동체착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길고 고되기만 한 그날 두 구조팀은 마침내 합류해 해가 떨어진 뒤 구조될 때까지 살기 위해 싸웠다. 로버츠 하사관의 시신은 회수됐다. 점검 결과 20여명의 대원중 6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아나콘다 작전은 과거의 실패들을 만회하려는 의도로 기획됐다. 美 국방부는 작전실패를 딱 부러지게 시인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면으로 보아 CIA가 기용한 용병임이 분명한 아프간 비정규군이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토라 보라 동굴단지에서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지도부의 숨통을 옥죌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는 점에 대해 분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알 카에다와 탈레반 전사들이 토라 보라에서 남서쪽으로 약 1백30km 떨어진 샤히코트 산맥에서 재집결하는 동안 美 정보당국은 겨우내 관찰하며 기다렸다. 적군이 공격목표가 될 정도로 규모가 커지자 미국은 지상·공중 공격을 개시했다. 이번에는 101 공수부대와 10 산악사단이 적군을 쓸어내고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아프간 병사들과 손잡았다. 미국 관리들은 지난주 이 전투에서 적군을 섬멸시키려면 며칠이 걸릴 것이라고, 그리고 그 뒤에는 다른 치열한 전투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프간의 산악지대에 산재한 알 카에다의 다른 은신처들은 고사하고 샤히코트 산맥의 동굴들을 청소하는 데만도 피깨나 흘려야 할지 모른다. 지난주 토요일 뉴스위크는 알 카에다의 산악요새에서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인터뷰했다. 압둘 라만 베헤슈티라는 사람은 알 카에다에 납치돼 위성접시 안테나 설치작업을 도왔다고 말했다. 알 카에다 전사들은 갖고 있는 14인치 TV로 아랍의 뉴스방송 알-자지라를 시청하고 싶어했다.
베헤슈티에 따르면 1천명 이상의 아프간인·아랍인·체첸인 전사들이 모여 있는 동굴들 속에는 형광램프, 나무를 때는 난로, VTR 등이 잘 갖춰져 있었다. 벽에는 빈 라덴의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전사들이 “선글라스를 쓴 키큰 아랍인”의 손에 입을 맞췄다고 말하면서 베헤슈티는 그가 빈 라덴은 아니었다고 서둘러 덧붙였다. 전사들의 대장은 탈레반 정권에서 농업장관을 지낸 라티프 만수르의 조카 사푸르 라만인 것 같다. 1980년대 소련군의 침공에 맞서 맨 먼저 샤히코트 동굴들을 판 사람이 라만의 아버지였다. 초기 전투에서 양손과 다리에 부상을 입은 라만은 마지막 저항을 할 각오인 것이 틀림없다.
그는 과연 아프간인들이 자신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알 카에다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아프간인들은 서로 선전戰을 치르고 있다. 탈레반과 알 카에다 전사들은 파슈토와 다리에서 인쇄 상태가 형편없는 전단 수만장을 살포하며 국민을 상대로 외국 침략자를 쫓아내는 성전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미국의 지원을 받는 아프간인들은 알 카에다 전사를 한명 체포할 때마다 4천달러의 상금을 준다.
미국은 자칫하면 아프간 라이벌 군벌들 간의 유혈충돌에 휘말려들 소지가 늘 있다. 사실 일부 아프간인들은 현 전투는 한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미국측에서 일하는 아프간 사령관 파드차 칸 자드란은 기만술로 악명높다. 지난해 12월 새로 취임하는 하미드 카르자이 임시 대통령을 축하하러 가던 길에 기습당해 숨진 부족 지도자 수십명의 행렬에 공격을 가한 장본인이 바로 자드란이라는 것이 이곳의 일반적 인식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미국 국민은 부시 대통령의 편이다. 그의 지지도는 80%가 넘는다. 부시는 전쟁을 계속 밀어붙일 심산인 것 같다. 지난주 플로리다의 연설에서 그는 작전 도중 사망한 두 레인저 대원의 유가족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나는 당신들의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말하면서 울먹이지 않으려 애쓰고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당신들의 아들과 오빠는 숭고하고 정당한 대의명분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알 카에다에 붙잡혀 살해된 해군 실 대원 닐 로버츠는 이번 작전에 대한 사명감이 뚜렷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만일 자기가 죽을 경우 뜯어 보라고 부인 앞으로 보낸 편지가 있다. 그 편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실 대원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만일 내가 팀을 위해 일하다가 죽는다면 보람된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다.” 존 채프먼의 경우는 한 친구가 미니 성조기 수십개를 갖고 와 펜실베이니아주 윈저 록스에 있는 그의 집마당 울타리에 꽂았다. 채프먼의 누이 로리는 이렇게 말했다. “오빠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어요.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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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21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