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보통 할머니의 장례식
당일치기 지방 취재 전날 자정 넘어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이 나이의 심야 전화는 좋은 내용이기 힘들다. 아버지는 슬프지만 놀랍지 않다는 듯 할머니의 부음을 전했다. 향년 97세. 나는 그날 새벽까지 일을 하고 오전에 일어나 일정을 정리하고 빠질 수 없는 회의에 참석한 후 근처 옷가게에 들러 흰 셔츠 한 벌과 검은 양말 세 켤레를 샀다.
내 가족은 한동네에 오래 살아서 가족 장례마다 이용했던 장례식장이 있다. 할머니는 그곳에 모시지 못했다. 오미크론 때문에 사망자가 폭증해 서울에 빈소가 없었다. 고양시의 빈소에 도착하니 다들 상황이 비슷한지 빈소의 화환 중 서울에서 온 게 꽤 많았다. 주차장에는 백신 접종 여부를 확인하고 나눠주는 스티커가 벽 가득 붙어 있었다. 코로나 시대의 장례였다.
장례 첫날 밤엔 나 혼자 빈소를 지켰다. 다음 날이 대선이라 가족 모두 투표하러 귀가했는데 나만 사전투표를 해서였다. 나는 어느 문화권이든 특유의 풍습은 지키자는 주의다. 할머니 영정 옆에서 미룰 수 없는 마감을 하는 틈틈이 향이 꺼지지 않도록 불을 붙였다. 향로와 빈소를 보며 현대 한국의 종교적 다양성을 실감했다. 망자의 이름을 적은 위패 속 지방엔 한자 ‘성도’와 붉은 십자가가 인쇄되어 있었다. 제사상 옆에는 교회 이름이 쓰인 백자 속에 흰 국화가 가득했다. 유교와 토속신앙과 개신교가 어우러진 현대 한국의 정신문화가 고양시 모 병원 7호 빈소에 현대 미술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장례는 기술 발달의 쇼케이스이기도 했다. 오미크론이 한창이라 빈소가 한산했는데 상주인 아버지는 계속 스마트폰을 보며 방명록에 조문객 이름을 적었다. 계좌로 들어온 조의금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메신저 돈 보내기로 조의금을 받았고, 때가 때인 만큼 그게 실례라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미국에 있는 둘째 사촌 누나는 영상통화로 발인제에 참석했다. 누나는 뇌 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아 미국에 자리 잡았는데도 스마트폰 카메라에 비친 할머니의 빈소를 보며 실시간으로 큰절을 했다. 전통과 기술의 힘의 우열을 잠깐 고민하다가 둘 다 세다고 결론지었다.
오랜만에 모여 보니 내 가족도 시대의 초상이었다. 1925년생 김월남 님은 고향인 경남 의령을 떠나 남편과 함께 일본 고베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전쟁을 겪고 당시 서울의 빈촌이던 세검정 근처 신영동에 자리 잡았다. 이촌향도의 전형이다. 할머니가 자식들을 낳고 그 자식들이 나를 포함한 손주들을 낳는 동안 교육 수준은 높아지고 성혼율과 출산율은 낮아졌다. 할머니가 평생 머문 신영동은 부촌으로 변한 그 일대의 마지막 낙후 구역으로 남았다가 최근 재개발이 시작됐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모든 이들이 어떻게든 시대를 반영한다. 이번 장례로 새삼 깨달았다.
어릴 때는 제사를 지냈다. 할머니는 칠순 지나 한글을 배웠지만 제사 때마다 내게 새 양말을 챙겨주셨다. 제사 지낼 때는 새 양말을 신어야 한다면서. 나는 그게 보통 사람 단위의 존엄과 예의라 생각한다. 장례가 끝나고 주변에 알리자 친구에게 ‘할머니를 기억해’라는 메시지가 왔다. 나도 할머니가 보여준 좋은 것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옛날 제사의 기억 때문에 할머니 부음을 듣고 양말을 샀나 싶다.
박찬용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