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의 계시
이사 10,5-16; 마태 11,25-27 /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2024.7.17.
제자들을 전국 방방곡곡에 파견하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귀환하여 드리는 보고를 받으셨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ㄴ) 이 보고는 애초에 그들을 파견하시며 당부하신 수칙대로(마태 10,6-8) 그들이 복음을 선포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선포한 복음을 듣고 ‘철부지’ 같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 들인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왔다는 소식이야말로 예수님께는 고대하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0,21)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ㄴ-26)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는 지혜와 슬기를 자랑하던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코라지,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등 고향 근처 갈릴래아 유다인들에게는 거부를 당했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질병과 마귀 들림 등으로 소외되었던 가난한 이들은 철부지 어린이들처럼 순수하게 수락되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가난한 이들에게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선포한 그 복음의 현실이야말로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시고 넘겨 주신 계시 진리였습니다. 따라서 이 계시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참 모습과 진리를 알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반대로 이 계시를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자들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조차도 이 계시, 즉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그래서 감추어졌던 신비였습니다.(루카 10,24 참조) 실제로 복음을 받아들인 가난한 이들, 즉 아나빔들은 사도가 된 제자들을 중심으로 초대교회를 이루었고, 그들의 공동 생활로 복음의 매력은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 비결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다.”(1코린 15,6)고 증언하였고, 그의 제자로서 복음서를 기록한 루카는 ‘거센 바람’과 ‘불꽃 모양의 혀’ 모양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셨기 때문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사도 2,2-3).
이 심오한 계시를 비록 보거나 들을 수는 없었지만, 예언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것도 아주 선명한 모습으로 내다볼 수 있었던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하시게 될 일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한 바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과연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자리에서 고향 사람들 앞에 이사야가 내다본 바로 이 대목을 읽으심으로써 당신의 사명으로 천명하셨습니다.(루카 4,18)
이러한 예언이 실현되기에는 상반된 역사적 상황에서 활약하던 이사야는 왕족 출신의 사제로서 왕국의 운명에 대해 정통했습니다. 그는 당시 남 유다 왕국 임금 우찌야 왕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대신 이집트의 힘에 기대려는 심보를 알고 경고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찌야가 이집트에 기대자 이미 북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 시키고 나서 기회를 엿보던 앗시리아가 이참에 남 유다 왕국까지 쳐버렸습니다. 그래서 맥 빠진 이사야가 한탄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앗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이사 10,5)
이러한 예언에 담긴 이사야의 역사 의식은 이러했습니다. 앗시리아는 하느님을 믿는 백성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 왕국도, 남 유다 왕국도 왕국 분열 이후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고 경쟁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앗시리아를 당신의 진노의 막대로 삼으시어 남과 북의 당신 백성을 치셨습니다.
이러한 예언자적 노선의 역사 의식에 따라서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우리 겨레는 하느님을 섬기려는 착한 백성을 백 년 동안 모질게 박해한 죗값을 식민통치 36년, 분단 70여 년 해서 도합 백여 년의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이사야식의 표현으로라면, 하느님 진노의 막대가 일본이었다가 미국 그리고 북한인 셈입니다. 그들 국가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나라들은 물론 아니지만 적어도 한반도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 한겨레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하느님의 회초리였습니다. 이들 세력에게 부역하거나 적대적으로 공존하던 반민주 독재 세력의 역사적 구실도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는 없으며,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도 없습니다.(이사 10,15) 만군의 주님께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모질게 박해했던 조선 왕조가 치욕스럽게 멸망하고 말았듯이 그 나라들과 그 부역 세력을 야위게 하실 것입니다. 이미 그 징후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명을 경시하는 미국의 풍조, 역사의 교훈을 경시하는 일본의 풍조, 신앙을 경시하는 북한의 풍조 그리고 국내에서도 거짓과 부정부패를 일삼는 풍조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역사는 그분의 뜻을 받들어 오롯이 섬기는 철부지들에 의해 관철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들은 만큼 개인의 실존이나 시대의 정신이 구원을 받게 마련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서구 제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그리스도교 내지 가톨릭교회는 ‘외래종교’ 내지 ‘서양종교’로 간주되고 있거나 제국주의적 정복자들에게 부역한 자들의 종교로서 낙인 찍혀 있습니다. 그나마 아프리카나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선교할 때에는 대량 학살과 노예 무역을 병행한 군인과 상인 뒤에서 정복선교를 자행하던 것과 비교해서, 아시아 대륙에서는 학자들을 선교사로 발탁해서 온건하게 선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습니다. 조선 왕조 후기에 이 땅의 복음화에 커다란 등불이 되어 준 ‘천주실의’ 역시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왕실과 지식인 선교를 염두에 두고 펴낸 적응주의 선교노선의 산물이었습니다. 아시아 대륙에 선교하러 왔던 서양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선한 지향이나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계시하셨던 하느님의 섭리, 즉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명제와는 정반대로 활동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교우 여러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땅이 아시아이고,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세운 초대교회가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증거한 자리가 또한 아시아였습니다. 그런데 서구 라틴 교회는 서구적 신관과 교회 모델을 일방적으로 아시아에 옮겨 심으려 하였고, 현지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며, 식민 모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편승하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고 현지 엘리트들을 먼저 포섭하려는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역사적 반성 위에서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나온 새로운 제안은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노선에 기반한 ‘삼중(三重)의 대화 선교’ 노선이었습니다. 이 노선은 아시아 주교들이 25년 간(1974~1998) 숙고하며 논의하여 공감대를 형성한 산물이었습니다. 즉, 아시아에서 복음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는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 아시아 종교들과의 대화 그리고 아시아 문화들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삼중의 대화를 통해서 ‘아시아 안에서 교회의 새로운 존재양식’을 창출해 내야 한다는 제안입니다.
그러자면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착취당하고 수탈당하여 오늘날 아시아인들이 처해 있는 가난의 현실을 직시하되, 서양인들보다 더 정의롭게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여 인류 모두에게 하느님의 빛을 비추어주어야 한다는 실천적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해방의 길이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파스카적 과업이 되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종교전통과 문화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가난한 이들이 주도적으로 해방의 길에 나설 수 있도록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성 있게 도와야 합니다. 이는 사실상 2천 년의 시차를 넘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의 본 고장에서 다시 한 번 당신의 선교를 주도하게 하시는 것이고, 말씀의 제 열매를 열리게 할 하늘 나라의 신비는 그 과정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1세기 이후의 선교 미래를 내다보며 반포한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의 취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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