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지막 나팔에 비밀이 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변화하는 일이 있다. 죽은 자는 다시 살 것이고 살아 남은 자들도 변화될 것이다. 이것은 부활을 말한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는 일은 부활이며 이 비밀이 마지막 나팔에 이루어질 것이다. '비밀'의 헬라어 뜻은 '신비'이다. 복음의 신비로운 일은 다시 살아나는 일이다. 이 땅에서 흙에 속한 형상을 입은 것 같이 그 날에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것이다(고전15:49-54).
2 어떤 부활을 할 것인가? 예슈아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게 된다. 물론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 살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들에게도 생명이 있게 하셨고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심판의 권한도 받으실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우린 생명의 부활 또는 심판의 부활을 할 것이다. 생명의 부활로 영원히 살 것인지 심판의 부활로 영원히 심판을 받을 지는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일에 따라 다를 것이다(요5:25-29).
3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 예슈아께서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다. 부활하면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 우리가 결혼하는 이유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남녀가 하나가 되어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 결혼이다. 그래서 반대로 만나게 하시고 부족한 것을 서로 채우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이 없는 부활은 더이상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혼자로서 완전함을 이룬다면 아무 부족함이 없이 완전히 행복하고 완전히 만족하고 외로움도 슬픔도 없는 완전함은 결혼하는 것보다 위대할 것이다. 또한 다시 죽을 수도 없다. 사망을 완전히 이긴 상태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들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살아있다. 우리에게 있는 죽음은 썩을 육체의 죽음일 뿐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눅20:34-38).
4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 그러므로 우린 슬퍼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으로 모두 살아있기 때문이다. 예슈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으로써 이 땅에 오실때 그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다. 이처럼 살아남은 자들도 죽은 자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 그러니 죽는 것은 결코 슬픈 일이 아니다. 살아남은 것도 큰 일이 아니다. 우린 예슈아 안에 있는 것만이 중요하다. 마지막 나팔 소리로 예슈아께서 오실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자들이 끌어 올려져 즉 휴거되어 공중에서 예슈아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힘을 내자. 우린 모두 공중에서 만날 것이다. 당시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제자들도 살아 남아서 예슈아를 만날 줄 생각했지만 모두 순교했다. 우리도 어떠한 결말을 맞게 될 지 모른다. 원하는 방식의 죽음이나 휴거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충성하는 것만이 필요하다(살전4:13-18).
5 일하지 못할 때가 온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곧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입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벗은 자가 아니라 생명을 덧입는 자가 되야 한다. 이 언약을 보증하기 위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항상 담대하자. 오직 보이지 않는 것은 보는 것과 같은 믿음으로 행하자. 우리가 정말 소원하는 것은 사실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다. 이 땅에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그리고 우린 지금 살아있고 죽어서도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에 있든 떠나든 살았든 죽었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언젠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 있을 때만이 순종할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우리가 기회가 있을 때 부지런히 선을 행하는 자가 가장 복되고 지혜로운 자이다. 언젠가 일하지 못할 때가 곧 온다(고후5:1-10).
6 죽음을 통해 마귀를 멸하셨다 예슈아께서는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지니고 오셨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 사망 권세를 잡은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한평생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이유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린 사망 권세를 가진 마귀를 이길 수 있다. 이처럼 예슈아께서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죽으신 이유는 사망 권세를 가지고 두렵게 하는 마귀를 온전히 이기기 위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의 사람들 즉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붙들어 주실 수 있다. 믿는 자들의 대제사장이 되어 그들이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 능히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직 부활의 소망을 가질 때 대제사장이신 예슈아를 통해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것이다. '속량하다'의 헬라어 뜻은 '속죄하다'의 뜻도 있지만 '화해하다, 화목케하다'의 뜻이 있다. 즉 우리로 고난과 시험중에 승리하도록 도우심으로 화목케 하실 수 있는 것이다(히2:14-18).
7 잃는 자는 살리리라 예슈아께서 오실 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밤에 둘이 자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휴거라고 생각하여 데려감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데려감을 당해야 하는 것은 맞다. 우리는 모두 데려감을 당해야 한다. 제자들이 예슈아께 어디로 데려가는지 물었다. 그때 그분의 대답은 산채로 하늘로 휴거되는 것을 말씀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수리가 모인 곳에 주검이 있다고 대답하셨다. 즉 그들은 죽는 곳에 데려감을 당하는 것이다. 예슈아께서는 목숨을 잃는 자들 데려감을 당해 순교한 자들이 결국 사는 자들임을 예언하셨다. 모세가 일어나기 위해 수많은 아기들이 죽었으며 예슈아께서 일어나기 위해서도 수많은 아기들이 죽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들의 희생이 있었다면 예슈아의 나라가 세워지기 위해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예슈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는 예슈아의 순교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영광스러운 예슈아의 나라를 준비하는 자들은 이처럼 의로운 자로서 죽고자 하는 자들이다. 물론 살아남은 자들은 함께 구름으로 끌어 올려질 것이다. 그러나 주된 사람은 죽은 자들의 부활일 것이다. 예슈아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눅17:30-37).
8 깨어있어 집을 뚫지 못하게 하라 예슈아께서는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실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예슈아께서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정말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은 주인의 집 사람들 즉 하나님의 양떼을 맡아 책임을 지고 때에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자이다. 모두 영의 양식인 말씀의 쉐프가 되라는 말이다. 매 샤밧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양떼에게 먹이는 자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다. 때마다 주시는 말씀을 양떼에게 먹여 양육하고 돌보는 자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다. 물론 성도들이 짐승의 손에 붙인바 되었을 때는 도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달라고 할 때는 기꺼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짜 믿음으로 준비되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상속 받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죽음을 각오한 충성스러운 믿음을 가질 때이다. 그런 자들이 모든 것을 상속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마24:43-47).
9 마지막 나팔에 비밀이 이루어진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비밀은 부활의 비밀임을 말했다. 그 부활의 비밀이 이루어지는 때는 바로 일곱째 천사가 마지막 일곱째 나팔을 불 때이다. 이때는 첫째 부활에 속하는 자들의 비밀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후에 둘째 부활에 속한 자들에게도 이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 마지막 나팔때는 일곱 인재앙을 겪고 마지막 나팔 재앙까지 고난을 당하므로 고난을 통해 흰옷을 입은 거룩하게 된 자들에게 부활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계10: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계10:7)
10 마지막 나팔 후 보상과 심판이 시작된다 마지막 나팔이 불려지면 예슈아께서 왕으로 오셔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며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즉 보상과 심판이 시작되는 때이다. 일곱 나팔 재앙후에는 일곱 대접 심판이 있다. 심판하기 전에 하늘에 있는 성전이 열리고 여호와의 언약궤가 보일 것이며 이 때부터 심판이 시작될 것이다. 즉 언약에 따라 율법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회개의 기회가 있는 대속죄일까지 우린 진정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회개한다고 무조건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니다. 용서의 권한은 아버지께 있다. 그러므로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주께 나아가야 한다(계11:15-19).
11 그 날에 수치를 제하시리라 예슈아의 온전한 승리를 통해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다. 다시는 죽지 못할 것이고 죽음이 없을 것이다. 이때 여호와께서 우리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고 우리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실 것이다. 여기서 '수치'는 히브리어로 '모욕, 치욕, 참소'의 뜻이다. 즉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받았던 '참소'와 '치욕, 핍박'을 영원히 제하실 것이다. 더이상 참소당하지 않을 것이고 고난도 핍박도 없을 것이다. 온전한 위로와 보상이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고난을 인내하자. 이 땅의 고난이 앞으로 올 영광에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8:18).
12 예슈아의 신부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땅에 하늘로 부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 이것은 예슈아의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이다. 즉 우리가 부활체를 입을 때 덧입을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는 새 예루살렘 성인 것이다. 우리가 땅에 있으나 하늘 새 예루살렘 성에 속한 자가 될 때 우린 그날 하나님의 장막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사망도 애통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도 없을 것이다. 썩을 몸을 입고 고난과 시험을 당하며 사망을 두려워하던 처음 것들은 모두 지나갔기 때문이다(계21:1-4 9-11).
일곱째 나팔은 한번 불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이렇게 말하나요? 나팔절이라고 한번 부는 것이 아니라 100번 부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에 비밀이 이루어진다고 성경을 선언했는데 네번째 인에 휴거를 말씀하시는 건 누구의 관점인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적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자유하라일곱째 나팔은 천사의 나팔이지 하나님의 나팔도 아닙니다. 또 한번만 부는것이지 여러번 나누어서 부는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마지막 나팔은 계시록이 쓰여지기 30 여년전에 언급한 것으로 바울은 계시록을 알지 못했고 또 편지의 수신인인 고린도 교인들도 알수없는 내용인 것이니 계시록의 일곱번째 나팔이 아닙니다
첫댓글 이 글에는 휴거가 일곱째 나팔에 한번있는 것으로 설명 되었는데 이는 유대인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다. 교회는 그보다 먼저 넷째 인에서 휴거가 있을 것입니다
일곱째 나팔은 한번 불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이렇게 말하나요?
나팔절이라고 한번 부는 것이 아니라 100번 부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에 비밀이 이루어진다고 성경을 선언했는데
네번째 인에 휴거를 말씀하시는 건 누구의 관점인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적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자유하라 일곱째 나팔은 천사의 나팔이지 하나님의 나팔도 아닙니다. 또 한번만 부는것이지 여러번 나누어서 부는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마지막 나팔은 계시록이 쓰여지기 30 여년전에 언급한 것으로 바울은 계시록을 알지 못했고 또 편지의 수신인인 고린도 교인들도 알수없는 내용인 것이니 계시록의 일곱번째 나팔이 아닙니다
제가 넷째인의 시기에 아마도 나팔이 불려지리라고 한것은 다섯번째 인에서 수많은 순교자가 나오기 때문에 그 이전에 교회의 휴거가 있을것이라고 예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