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은 첫번째 미술관… 영감 주는 아이들에 감사”
한국인 첫 안데르센상 이수지 작가
지난해 출간한 ‘여름이 온다’를 22일 보여주며 활짝 웃는 이수지 작가. 그는 “늘 최신작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했다. 김동주 기자
“늘 영감과 이야깃거리를 주는 아들 산, 딸 바다를 포함해 모든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한국인 최초로 ‘어린이책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일러스트레이터 부문을 수상한 그림책 작가 이수지(48)는 전날 밤 12시 가까운 시간에 일어난 ‘기적’ 같은 순간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서울 광진구 작업실에서 22일 만난 이 작가는 “집에서 남편과 온라인으로 시상식을 보다 제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믿기지 않아 ‘진짜?’만 반복했다”며 웃었다.
안데르센상은 특정 책이 아니라 아동문학에 대한 작가의 공헌 전체를 평가해 2년마다 글 작가와 그림 작가(일러스트레이터)를 1명씩 선정해 시상한다. ‘파도야 놀자’, ‘거울속으로’ 등 그의 그림책은 글 없이 주로 그림으로 이뤄진다. 그럼에도 풍성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글이 없는 그림책은 다양한 해석과 상상이 가능해요. 제 작품을 보고 느낀 걸 얘기하는 아이들에게 ‘네 생각이 다 맞아’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는 ‘그림책은 첫 번째 미술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가까이 있다고 했다. “그림책은 여는 순간부터 닫을 때까지 온전히 빠져들고, 언제든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어요. 0살부터 100살까지 보는 책이랍니다!”
“종이책 ‘물성’ 살리기, 제 작업의 목적이자 동력”
책장에 난 구멍을 망원경처럼 활용
뒷장의 멀리 계신 할머니 바라보게 전자책은 흉내조차 못낼 감성 담아
회화 전공해 기존의 동화책 틀 깨… 글 최소화하고 그림으로 의미 전달
작품마다 해외서 먼저 진가 알아줘… 신작도 6월 한미서 동시출간 예정
서울 광진구 작업실에서 22일 만난 이수지 작가는 “그림책을 어린이책으로 묶어버리면 활용 반경이 좁아진다”며 “어린이부터 누구나 보는 책으로 독자 연령층이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작가의 뒤로 그의 그림책에 실었던 원작 그림들이 보인다. 김동주 기자
이수지 작가는 안데르센상을 주관하는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의 선정 과정 자체가 올림픽 같았다고 했다. “각국 IBBY 위원회가 자국 대표 작가를 뽑아 연구 자료집과 대표작을 제출해요. 올해 33개국 62명이 후보였어요. 최종 후보 6명 중 다국적 심사위원 12명이 투표로 수상자를 뽑죠.”
그의 작품 가운데 ‘경계 그림책 3부작’으로 불리는 ‘파도야 놀자’(2009년) ‘거울속으로’(〃) ‘그림자놀이’(2010년)를 비롯해 ‘동물원’(2004년) ‘검은 새’(2007년) ‘선’(2017년) ‘심청’(2019년)이 제출됐다.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그의 작품은 전 세계 어린이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무국적’이란 매력은 그의 작품이 세계적 작품으로 발돋움한 원동력이 됐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그림 안에서 아이들이 단서를 얻고 자기만의 서사를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종이책의 물성을 적극 활용한 작업도 그의 주특기다. 경계 그림책 3부작은 제본선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로 활용해 호평을 받았다. 그는 “종이책 물성과의 놀이는 제 작업 동력이자 목적”이라고 했다. 심사위원들은 “책의 물성에 주목한 작가들이 많아졌는데 그중 이수지 작가는 선도적이다”라고 평가했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일러스트레이더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 수상자로 선정된 이수지 작가. 김동주 기자
올해 6월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 출간될 예정인 ‘See you someday soon’ 역시 종이책의 물성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그는 “종이를 오려낸 뒤 구멍 난 창을 통해 뒷장이 보이는 ‘다이컷’ 기법을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See…’는 멀리 떨어져 사는 할머니와 손자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첫 장은 아이가 망원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할머니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에요. 망원경에 뚫린 구멍 사이로 뒷장의 할머니가 보이고요. 각 책장 자체는 아이와 할머니 사이의 장벽이 돼요. 그건 아이패드와 같은 태블릿PC에선 절대 할 수 없는 종이책만의 감각이죠.”
그에겐 ‘해외에서 역수출된 작가’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데뷔작이자 현재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02년)는 영국 런던 캠버웰예술대 석사과정 졸업 작품이다.
“제본한 책을 명함처럼 들고 2001년 이탈리아 볼로냐 도서전에 놀러갔어요. 우연히 이탈리아 출판사 코라이니 편집자를 만나 계약까지 이어졌죠. ‘전형적인 그림책 틀을 벗어나도 책을 낼 수 있구나. 맘대로 만들어 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였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지금도 제겐 영감의 소스북이죠.”
2008년 뉴욕타임스가 올해의 그림책으로 꼽은 ‘파도야 놀자’도 미국에서 먼저 출간돼 유명해졌다. 인터뷰 중간중간 동료 작가들의 축하 꽃다발과 메시지가 쏟아졌다. 몇몇은 장난스럽게 “상금이 얼마냐”고 물었다. 이 작가는 “상금은 없다”며 웃었다.
“작가로서 꿈의 영역에 있던 상을 받았는데, 상금 유무는 상관없어요.”
안데르센상 역대 수상자를 보면 그의 말을 수긍하게 된다. ‘윌리’ 시리즈의 앤서니 브라운, ‘삐삐 롱스타킹’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무민’ 시리즈의 토베 얀손,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모리스 센닥 등 세계 어린이책의 역사를 만든 이름이 가득하다. 한편 안데르센상 시상식은 9월 5일부터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에서 열리는 제38차 IBBY 국제총회에서 열린다. 이 작가는 덴마크 여왕 메달을 받는다.
이수지 작가는
△ 1974년 출생
△ 서울대 서양화과 학사, 영국 런던 캠버웰예술대 석사
△ 2008년 뉴욕타임스 우수 그림책 선정(‘파도야 놀자’)
△ 2010년 〃(‘그림자놀이’)
△ 2013년 보스턴글로브 혼 북 명예상 수상(‘이 작은 책을 펼쳐 봐’)
△ 2019년 한국출판문화상 수상(‘강이’)
△ 2021년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 수상(‘우로마’)
△ 2022년 〃(‘여름이 온다’·사진)
△ 2022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일러스트레이터 부문 수상
김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