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신심의 역사와 한국 천주교의 성모신심
하느님 아들을 잉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는 순간 자리를 지켰던 성모 마리아. 이후 사도들과 기도하며 교회의 시작을 함께한 성모 마리아는 교회 안에서 전구자이자 영적인 어머니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러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은 교부 시대 때부터 이어져왔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는 마리아가 평생 동정이었으며 ‘하느님의 어머니’임을 선언했다. 이후 16세기에 이르러 종교개혁과 함께 성모 마리아 공경에 대한 문제가 검토됐고, 성모 신심이 장려되는 계기가 됐다. 1568년에는 성 비오 5세 교황이 성무 일도에 성모송을 삽입시켰으며 이듬해에는 묵주의 기도를 표준화해 보급하기도 했다.
이처럼 16세기 후반에 강화된 성모 신심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의 특징적인 신심으로 자리 잡게 됐다. 1917년 파티마에서 성모 발현이 이뤄진 이후 성모 신심은 더욱 널리 전파됐다. 비오 12세 교황은 파티마 성모 발현 25주년을 맞아 전 세계를 성모 성심에게 봉헌했고 1944년에는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축일을 8월 22일로 고정시키고 서방 전례에 속한 모든 교회가 이 축일을 지키도록 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은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인격에 대한 공경과 덕행에 대한 공경,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온전히 동참하는 성모 마리아의 역할에 대한 공경이다. 이처럼 교회가 마리아를 공경하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께 순명한 신앙의 모범을 신자들이 따르도록 권하고자 함이다.
■ 한국 교회의 성모 신심은 어떻게 시작됐나.
16세기 후반 유럽에서 성행했던 성모 신심은 17세기에 이르러 유럽 선교사에 의해 중국 교회에 전파됐다. 17세기 초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 롱고바르디 신부는 성모 호칭 기도를 중국어로 번역했고, 부글리오(Buglio) 신부는 북경에서 1676년에 ‘성모소일과’를 간행했다. 또한 1694년에는 수아레즈(Suarez) 신부가 ‘성모영보회’를 간행해 성모 신심을 고취시키 고자 했다. 이처럼 중국에 전파된 성모 신심은 18세기에 조선으로 전해졌다.
조선대목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는 조선교회의 새로운 주보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모시고자 했고 184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1846년 11월 2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무염 성모 성심회’가 설립되는 등 한국 신자들의 성모 신심 운동은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단체를 통해 신자들은 정기적으로 기도문을 바치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오늘날 각 본당에 남아있는 성모회의 요체가 됐다.
아울러 신유박해 때 소각된 서적들 가운데 성모 관련 서적들이 상당 부분 존재했다는 기록 들을 통해 한국 신자들의 성모 신심이 얼마나 돈독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성모 신심 운동 및 사도직 활동도 1950년경에 이르러 활발하게 전파됐다. 1953년 ‘푸른군대’가 미국인 군종신부 마태오 제이 스트롬스키 신부에 의해 소개된 것을 비롯해 같은 해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레지오 마리애’가 시작됐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 이 두 단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힘들고 고된 현실 가운데서도 신자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갔으며 성모마리아의 은총을 간구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 |
첫댓글 성모신심의 역사
잘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