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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쪼깐이집
흐느끼도록 몰아대는 바람 속의 둑길을 물지게 진 석이가 부지런히 걷는다. 찌뿌드드하게 흐린 날씨다. 강 건너 대숲 위에 온통 덩어리 같은 잿빛 하늘, 석이 두 귀가 새빨갛다. 누덕누덕 기운 솜저고리는 오늘 날씨 같은 빛깔이었고 버선이 두둑하여 발은 시렵지 않으나 저고리 도련 사이로 기어드는 바람이 맨살을 찌른다. 물에 젖은 바지 아랫도리는 강정같이 얼어서 오금을 떼어놓을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석이네도 이자는 한심 돌리겄네. 세월이 잠깐이라 어느새 석이가 저리 커서.. 머시매 꼭지라고,"
"한심 돌리기는요? 우리 석이가 열다섯 적부텀 물지게를 지는데! 살아가기는 날이 갈수록 태산이고."
"그래도 이자는 평지에 나선 셈 아닌가. 사내 대장부는 입이 중천금이라 카든가? 머시마가 입이 없으믄서도 미련하지 않고 꾸벅꾸벅 일만 하는 거를 보믄은 참말이제, 남으 자석이지마는 애인한 생각이 들어서... 우찌 아아가 그리 실겁겄노."
"실겁으믄 머하겄소. 소도 언더막이 있이야 비비더라고 아무리 나부대봐도 세상에, 딛고 일어설 작지가 있어야지요. 생때 겉은 가장잃고... 그리만 안 됐이믄 하다못해, 무신 일을 하더라도 자석들이 이 고생이사 하겄소? 참말이제 사는 기이 죽느니보다 나을 기이 없소. 사시사철 부석강생이맨치로 남으 물독에 물이나 채워주고... 불쌍한 우리 석이 어느 시울에 허리 페고 장개는 갈 긴지."
치맛자락을 걷어 콧물을 닦으며 이웃 아낙과 주고받는 어미의 푸념이지만 겨울이 가고 강둑 수양버들에 물이 올라야 석이는 이가 들끓는 누더기 솜옷을 벗게 되리. 옥봉의 기화네 집 대문을 밀고 석이 들어섰을 때 팔자걸음의 허우대 좋은 중년 사내가 마당을 질러 걸어나왔다. 코끝이 뭉실하고 구레나룻이 짙은, 두리널찍한 얼굴의 사내는 매우 심기가 좋지 않은 듯 헛기침을 한다. 여느 때와 달리 기화도 배웅하러 따라나오질 않았고 고개를 숙인 채 석이 지나치려 하는데 가래침을 돋구어 퉤! 하고 내뱉는 사내.
"이 개쌍놈이! 으응, 눈구멍에다가 말뚝을 박았나?"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른다. 허리를 겨우 구부리며 시늉만으로 인사하는 석이, 마음속으론
'자개는 머 쌍놈 아니라 말가. 돈 가지고 산 그 따우 양반, 누가 모를 기라고.' 비웃는다.
"짐승을 구하믄은 은혜를 갚고 사람을 구하믄은 악문을 한다 카더라, 애흐흠!"
기화에게 들으란 듯한 말인가본데
'내가 무신 자개 은혜를 받았다고 저러까?'
흰 가죽신발과 털토시를 낀 손목이 석이 눈 밑에서 지나간다. 덩치에 비하여 작은 손이다. 그 손이 푸들푸들 떨고 있는 것 같다. 석이는 저런 털토시 한번 끼어봤으면 얼마나 따스할까 생각하며 부엌으로 가서 물독에 물을 붓는다. 아궁이 깊이 군불을 밀어넣던 봉춘네가 석이를 쳐다보다 말고 깜짝 놀라며 부엌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아이구매, 간 떨어졌다."
대문을 메어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던 것이다.
"어이구 사람도, 아 문짝이 무신 죄고?"
다시 허리를 꾸부리고 불을 밀어넣는 봉춘네,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기생첩 거나리는 데 돈이믄 다라, 그런 생각이겄지마는 노류장의 계집이라고 어디 돈만 보고 살건데? 논마지기나 떼어주고 씨받이로 데려오는 무지랭이들하고는 다르지러. 사램이 그래도 기방 출입을 할 양이믄 풍류도 좀 알아야제."
고래 속에서 솔가지불이 훨훠 소리를 내며 탄다. 깨끗한 봉춘네 당목 솜저고리에 불빛이 환하다. 이따금 아궁이 밖으로 몰려나온 불빛 그림자가 시꺼멓게 그을은 부엌 서까래에서 춤을 추곤 한다.
"나이가 젋다 말가 식자가 있어서 점잖다 말가. 기화도 자리잡고 살기는 어려블 기구마."
하다 말고 봉춘네
"석아."
하고 부른다. 물독에 뚜껑을 덫으며
"야."
"바깥 날씨가 춥네."
"게울이니께요."
"여기 불 앞에 와서 손 좀 녹이라모."
"괜찮소."
"설 보름이 다 갔는데 금년 할만네 때는 물바가지가 얼겄네."
"..."
"가리 늦기 남강물이 꽁꽁 얼어붙었이니 아아들 얼음 타기는 좋겄다마는, 석아."
"야."
"숭님에 밥 한덩이 말아줄 기니 묵고 가거라."
부지깽이를 놓고 일어선다.
"허기가 들믄 더 춥네라."
석이는 잠자코 부뚜막에 걸터앉는다.
"따끈따끈하다. 묵어라."
봉춘네는 뜨거운 숭늉에 밥을 말아서 한 대접하고 김치 보시기를 내밀었다. 숭늉에서 따스한 김이 피어오른다.
"자아 숟가락 여 있다."
투박스런 주석 숟가락을 선반에서 집어 건네준다.
"어 묵어라."
"야."
봉춘네는 아궁이 앞에서 비질한다.
"너거 외숙모 요새 벵이 좀 나은가 모리겄네?"
"어디가요."
"그라믄 아득도 운신을 못한다 말가?"
"야. 자꾸 더해가는 모양이더마요."
"쯔쯔... 있는 집도 벵이 질믄 살림이 결딴나는 벱인데 남으 땅 부치서 근근히 사는 살림에 자식들이나 적다 말가. 셈찬 큰 자식이 있단 말가. 모두 잔밥에, 제 밥그릇 작은 거만알 긴데 여차한 일이라도 있이믄 늙도 젊도 않은 나이에 니 외삼촌 일이 난감을 기다."
"..."
"부모 마음하고 하누님 마음은 고르다고들 하는데 어이구, 세상사를 가만히 보믄 그것도 빈말이라. 어질고 착한 사람은 도처에서 고생을 하고 남으 입에 든 밥이라도 뺏아묵을 듯이 해구는 사람들만 떵떵 울리고 사는 거를 보믄은."
말없이 사발을 비운 석이 일어섰다.
"갈라나?"
"야."
석이를 따라 부엌에서 나오던 봉춘네
"아이고! 눈이 온다!"
계집아이처럼 소리친다. 어느새 눈이 왔을까. 장독 뚜껑에 눈송이가 날아내려 제법 허옇다.
"참말로 별일이제? 기화야! 기화야! 눈이 온다! 방문 좀 열고 내다봐라."
진주 땅에 눈이 내리는 일이란 그리 흔치 않다.
"와 그라요? 어무니."
"눈이 온다 카이! 방구석에 누워 있지만 말고 눈구겡 좀 해라."
풀어진 머리를 걷어 비녀를 꽂으며 기화가 방에서 밖을 내다본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종잇장처럼 희다. 이마의 생채기가 눈에 띈다.
"눈이사 오나마나,"
"젊은 사램이 그라고 있으믄 되나. 눈도 오고 하니 몸단장하고 밖에 나가서 한바퀴 돌고 오라모."
기화는 눈보다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석이 뒷모습을 본다.
"석아."
"야."
돌아보지 않고 걸음만 멈춘 채 대답한다.
"나는 니가 온 줄도 몰랐구나."
하다가 잠시 생각는 눈치고 석이는 다음 말을 기다린다.
"너거 어무니보고 내일... 내일 좀 오라고 안 해줄래?"
겨우 상반신을 돌려 기화를 쳐다보며 대답한다.
"그럭하겄소."
"잊어부리지 마래이."
그것은 봉춘네가 덧붙인 말이다.
"알았소."
빈 물통을 덜렁거리며 석이는 길을 돌아나섰다. 제법 큰 눈송이가 너울거리며 날아내린다. 아까보다 추위는 한결 누그러진 기분이다. 빈속에 따뜻한 숭늉과 밥이 들어간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눈이 내리는 탓일까. 화장기 없는 기화 얼굴이, 솔밋하면서도 부드러운 이마에 남아 있던 생채기 생각을 석이는 한다. 그 생채기가 옛 일을 생쥐처럼 물어내온다. 아주 먼 옛날 다섯 살 적이든가, 여섯 살 적이든가, 타작마당에 나동그라졌던 유록빛 꽃신 한 켤레. 나비같고 꽃 같은 신발코는 주황색이다. 신발을 두른 가느다란 선도 주황빛이다. 검정 담방치마 밑으로 흰 속곳자락이 황망하게 논둑길을 가고 있다. 흔들리면서 가고 있다. 그것은 물바가지를 든 영만 누님 선이다. 봉순이 이마빼기에서 피가 흐른다고 누군가가 외쳤다. 봉순이 죽었다고 외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이 직일 놈들! 동네 가운데 두겄나! 네 이놈들! 당을 지어가지고 좋은 뽄은 안 보고 개백정 겉은 그놈으 손, 하는 짓만 따라하고, 네 이놈들! 나무에 매달아가지고 오줌을 싸게 패야지!'
얼굴이 거무칙칙한 막딸네가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친다.
'우리는 안 그랬소!'
'봉순이가 상놈으 새끼라고 욕을 한께 거복이가 때렸소!'
'봉순이보고 길상이 각시라 칸께요.'
'아니요!'
'하하핫 하하하...'
조무래기들 목소리, 조무래기들의 웃음 소리 - 밀물처럼 다가오고 썰물처럼 멀어져간다. 선이가 서희를 업고, 영만이 어매는 봉순이를 안고 간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겹겹이 솟아오른 최참판댁, 그 집으로 이르는 언덕길을 올라간다. 서희는 노랑 저고리에 분홍 치마다. 봉순이는 검정 치마에 양회색 저고리다. 빛깔들이 생생하다. 뚜렷하다. 하늘도 나무들도 뚜렷하다. 굿구경을 갔을 때 손가락을 빨면서 침을 삼키면서 바라본 울긋불긋한 제수, 칼춤을 추던 무당의 장옷이랑 꽃갓 등, 그런 것만큼이나 빛깔이 생생하다. 그림같이 곱다. 눈발도 없고 누더기 칙칙하게 때묻은 옷도 없고 물지게도 없다. 그러나 석이는 지난날의 그 오솔길에서 펄쩍 뛰며 소스라쳐 놀란다. 한 사나이의 심장을 찢는 울부짖음을 들은 것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겹겹이 솟아 있는 언덕길을 왜헌병이 내려온다. 총대가 내려오고 구둣발이 내려오고 하이칼라 머리가 내려온다. 사내가 울부짖는다. 개 끌리듯 읍내 가는 길을 끌려가며 울부짖는다.
'이 천하에 극악무도한 놈아! 내 이 정한조가 살아서 돌아오는 날 바로 그날이 네놈의 제삿날 될 줄 알아라, 아!'
구둣발이 눈앞에 어지럽다.
'네 죽어서 못 돌아오게 되믄은 넋이라도 돌아올 기다아! 돌아와서 네놈에 목을 물어 씹을 것이니, 이놈아! 조준구 놈아!'
하이칼라 머리의 키 작은 사내가 오랏줄에 묶인 사내에게 달려든다. 주먹으로 입을 내지른다. 하이칼라 머리가 이마빼기에서 너풀거린다. 하얗고 빤들빤들한 이마다. 오랏줄에 묶인 사내 입에서 피가 쏟아진다.
'하하하하... 하핫핫...'
미친 것같이 웃어젖히며 사내는 피를 내뱉는다.
'윤보 이 개자식아! 네놈이 형이가! 네놈이 의병이가아! 내가, 내가아 있었다믄 머리카락을 헤쳐서라도 저놈! 조가 저놈의 숨통을 막았일 기다! 이 악독한 놈아!'
왜헌병이 총대로 옆구리를 찌른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쾍쾍거린다. 넘어졌던 사내가 일어선다.
'조가 이놈아! 넋이라도오--'
어미는 밭둑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석이는 짚세기를 벗어 들고 맨발로 뛴다.
'아부지이! 아, 아부지이!'
포승을 잡고 가던 왜놈이 돌아보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른다. 구둣발로 걷어찬다.
'아부지이! 아부우--지이!'
이번에는 총대 든 놈이 돌아섰다. 총대 끝에는 칼이 꽂혀있다. 총대가 석이 가슴을 겨눈다.
'울아부지 와 잡아가노오! 와 잡아가노오! 이놈들아! 나쁜 놈들아! 내 아부지 내놔아라아! 아부지이!'
물지게를 지고 가는 석이 입에선 신음 소리가 난다.
나루터 근처를 지나 장터 옆에 이르렀을 때 눈발은 뜸해져 있었다. 그새 온 눈 때문에 파장이 되지는 않았던가보다. 정월 들어 처음 서는 장이라 정터가 쓸쓸하다. 희뜩희뜩한 눈발 사이로 포립을 삐뚜름하게 쓴, 눈썹이 새까맣고 수염이 허연 가위장수 노인의 을씨년스런 모습이 보인다.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다 어려운 처지임이 뻔하다. 곡식 됫박이나 팔아가려고 전을 폈을 것이요, 장보러 나온 사람들 역시 비축한 것이 없어 나왔을 터인즉 쓸쓸하고 빈한한 장날이다.
"임마! 석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다.
"아아 관수형님."
"형님이 멋꼬? 아제비다, 아제비."
웃으며 다가오는 사내, 바짓말기에 두 손을 찌르고 움츠린 양어깨 사이로 자라처럼 목을 묻은 꼴이다. 삼십이 될까말까. 핏발 선눈이 조그맣고 얼굴빛은 까무잡잡하다.
"무신 생각을 하고 가니라고 사램이 불러도 모르노 말이다."
"아무 생각도 안 했심다."
"쪼깐이집에 가나?"
"야."
석이와 나란히 걷는다. 물지게에 걸린 물통 때문에 거리는 있었으나.
"나도 거기 간다. 밤샘을 했더마는, 아이고 속쓰리다."
"..."
"니한테도 내 국밥 한 그릇 사지."
"점심은 묵었소."
"봉순이 집에서?"
"야."
"젊은놈이 점심 두세 그릇쯤, 그라고 점심때는 벌써 지났다. 내 주무니 걱정은 말고, 간밤에 한 놈 깝데기 벗긴인께."
"노름했구마요."
"했지러."
"형님도,"
"와? 마땅찮다 그 말이가?"
"그렇소."
"바린 말을 한께로 기특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 아제비가 비리갱이 겉은 장돌뱅이 벳기묵지는 않는다. 꾼들하고 몇 판 벌였제. 하하핫..."
흰 이빨을 드러내놓고 태평스럽게 웃는다.
"말하잘 것 같으믄 이 아제비는 말이다, 암행어사 같은 거다, 그말 아니가. 비리갱이 겉은 장돌뱅이 털어묵는 장터 건달놈들을 한달에 한 분씩, 더도 말고 한 달에 한 분씩만 혼짝을 내주니께, 하하핫..."
움프린 두 어깨 사이에 자라처럼 목을 묻은 모습과는 달리 뱃심 좋은 큰소리다.
"그라고 또 노름판에서 걷은 돈 가지고 주색잡기하는 잡놈도 아니고 말이다. 어림없지, 어림없어. 마 그거는 그렇다 하고 봉순이는 집에 있더냐?"
"야."
"머하더노?"
"아픈갑십디다."
"그럴기다. 심화병이 났일 기구마."
관수 입가에 묘한 웃음기가 번져나온다.
"니 길상이 알제?"
"길상이라 카믄,"
"봉순이하고 함께 있었던 그 최참판네 길상이 말이다."
"말이사 많이 들었지마는, 더러 보기도 했지마는 어릴 적이라서,"
"어리기는 머가 어릴 적고? 니 지금 열하홉, 아마 그렇기는 됐일거로?"
"야."
"그러믄 보자,"
관수는 바짓말기에서 한 손을 뽑아 손가락을 꼽아본다.
"열세 살, 그러니께 니가 열세 살 적에 그 난리가 났구마."
"열세 살 적에 우리 아부지는 죽었지요."
"맞다. 그러니께 육 년 세월이 지났고나. 열세 살이라? 열세살이믄 길상일 모릴 턱이 없지."
"모린다는 기이 아니고 얘기해본 적도 없고 해서..."
그러나 관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난데없이 길상이 얘기를 꺼내었는지 궁금했지만 석이도 되묻지는 않는다. 육 년 전, 그렇다. 가을걷이를 앞둔 그러한 날, 아래윗마을에서 낫, 도끼, 쇠스랑, 대창 등 각기 연장을 손에 든 장정들이 모였을 적에 깃털을 세운 투계처럼 관수는 그들 속에 끼여있었다. 횃불을 켜 든 그 무시무시했던 밤 조준구의 행방을 결사적으로 찾은 것도 그였었으며 산에서는 용감한 젊은이 중의 한 삶이었다. 끝까지 싸우고 행동을 함께 했었다. 그러나 윤보의 죽음으로 와해된 대열이 우왕좌왕 갈 바를 모르고 흩어졌을 때 양반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김훈장을 싫어했던 관수는 김훈장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마다하고 교분이 두터웠던 길상과 갈라서버렸던 것이다.
그 후 얼마 동안 관수는 화적떼를 따라다니다가 그것도 시시하여 산을 떠나 진주로 내려왔고 진주서는 또 얼마 동안은 백정네 집에서 은신했었는데 백정네 딸을 얻은 뒤부터 그의 전력을 알고서 추적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진주 성내를 활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활의 뿌리를 박은 듯싶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은 점도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면 주먹깨나 쓴다는 것, 노름 솜씨가 대단하다는 것, 그리고 가끔은 막일 품팔이도 하고 소매통 실은 소달구지도 끌고 다닌다는 대개 그런 정도였었는데 한 가지 소문이 난 일화는 소매통 사건이다. 한낮, 여름 햇빛이 쏟아지는 날이있었다. 길켠에 소달구지를 세워놓고 인가에서 인분을 담은 소매통을 들고 나오는데 마침 조선인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고약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영치기,"
관수는 우선 소달구지 옆에 소매통을 내려놓았다 소매통 아구리를 지푸라기도 막아서 달구지 위에 올려놓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길바닥에 이게 뭐얏!"
하고 순사가 눈알을 굴렸다.
"보믄 모르시오?"
관수는 본체만체 지푸라기를 둘둘 말아서 소매통 아구리를 막으려 했다.
"뭐? 이 건방진 놈이,"
"순사 나으리라고 설마 밥그릇에 모래 담아 잡숫겄소?"
"아아니 이놈이? 뉘 앞에서 감히 주둥아릴 놀리는 게야!"
"순사나으리 아니라 순사나으리 할배라도 머 못할 말 했소?"
관수는 지푸라기를 뭉치다가 그 조그만 눈으로 순사를 쳐다보았다.
"뭣이 어쩌고 어째?"
화가 난 순사는 구둣발로 소매통을 걷어찼다. 그러자 소매통이 구르면서 아구리로부터 인분이 길바닥에 콸콸 쏟아진 것이다. 졸지간이라 순사가 놀라기는 좀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관수는 태연자약하게 무쳐 들었던 지푸라기는 달구지 위에 올려놓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더니 두 손을 모아 인분을 걷어서 소매통 아구리 속에 쏟아붓는 게 아닌가. 기가 질려버린 순사는 오도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일어선 관수는 인분이 묵은 손바닥으로 냅다 순사 뺨을 갈긴 것이다.
순식간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하마 한 소동이 벌러질 판에 급보를 받은 순사들이 달려왔다. 그리하여 관수는 며칠 구류를 살기는 했으나 그 정도로 마무리된 것은 순사주임이라는 자가 식민지에 나온 따라지 일본인치고는 다소 양식이 있었던지 혹은 배짱을 숭상하는 일본인 기질 탓이었던지 관수에게 호의를 베푼 탓이다.
"소레 구라이노 하라가마에닷달 에라이 햐구쇼쟈. 다가 히도갓다네. 난또 잇데모다이니혼데이고꾸노 게이샤쯔쟈. 미세시매노 다메니모 유루수 와께냐이깡 (그 정도 배짱이면 훌륭한 농부다. 그러나 심했어. 뭐라 해도 대일본제국의 경찰이야. 본보기로서도 용서할 순 없어)."
칼날같이 양켠으로 뻗쳐오른 수염 밑에 두툼한 입술을 우물거리며 어눌한 음성으로 말했었다. 그러나 이 밖의, 백정의 딸을 얻어서 산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형님 먼저 가소. 나는 물 질러서 가겄심다."
"그래."
관수는 저만큼 보이는 쪼깐이집을 향해 입김을 흩날리며 가고 석이는 도중에서 길을 꺾어든다. 눈은 싱겁게 멎어버리고 하늘은 개기 시작했다. 길가 삽짝 앞에 강아지 한 마리가 오들오들 떨면서 앉아 있었다. 석이 그 앞을 지나친 뒤 강아지는 우우 하고 짖어보다가 그것도 싱겁게 그만둔다. 우물가에는 아낙이 보리쌀을 씻고 있었다. 소매끝을 걷어올린 두 팔뚝이 빨갛다. 석이는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서 물을 퍼올린다. 누구든 적선하라는 듯 아무렇게나 놔둔 돼지 밥통에 아낙은 보리 뜨물을 부어준다. 물지게를 진 석이는 좁은 골목을 옆걸음질 쳐서 빠져나온다. 쪼깐이집 일각대문을 넘어 가겟방 옆, 장작이 쌓인 골목으로 해서 넓어진 안마당에는 장독대가 있었고 부엌에 잇달린 방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물독에 물을 부어주고 물지게를 벗어 장독가에 놔둔 석이는 가겟방 쪽으로 간다.
"형님."
"음. 물 다 질었나?"
"야."
"들어오너라."
짚세기를 벗고 강정같이 얼어버린 바짓가랑이 때문에 몸짓이 어색한 석이 방으로 들어간다.
"앉아라."
기다랗게 만든 술판 앞에 앉는다. 점심때도 저녁때도 아니어서 가겟방은 손님이 뜸했다. 쪼깐이집은 서울식 비빔밥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겨울이 되면서부터 국밥을 찾는 손님이 있어 국밥도 겸해 하는데 방안에 걸어놓은 솥에서 서리는 김과 온기로 방안 공기가 후끈하다. 그새 관수는 술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지마씨 여기 국밥 두 그릇 내놓으소."
"저, 그, 그러지요."
"아니 대답이 와 그리 찐찐하요?"
쪼깐이라는 별명의 서울댁은 묵살하듯 그 말 대꾸는 하지 않는다. 그것으로써 마땅찮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상배기도 아닌데 냉랭하구마는,"
관수는 왜 이 여자가 찐찐해하는가를 알고 있다. 물지게꾼, 그러니까 집에서 부리는 하인 같은 존재에 대한 시중이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 같고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의 석이가 가겟방에 뻗치고 앉은 것을 기분 나빠해 한다는 것을 관수는 어렵잖게 느낄 수 있다.
'빌어묵을 계집년이 지는 머 별수 있는가?'
서울댁은 느적느적 사발 두 개에 밥을 나누어 담고 솥뚜껑을 열어젖힌다. 김이 왈칵 솟구쳐오르고 솥뚜껑의 쇳소리가 꽤나 오래 파동하다 사라진다. 놋쇠 국자를 철벙거리며 국을 푸는 여자, 얼굴이 김에 싸여 아리송하다. 쪼깐이, 조그마한 여자다. 두만이보다 몇 살 위라던가? 얼굴이 조그맣고 코도 입도 밥풀같이 조그맣다. 큰 것은 쌍꺼풀이 굵게 진 눈뿐이다. 눈알이 불거져나온 듯 얼핏 본 느낌이 소눈깔, 윤곽도 다듬어졌고 생김 하나하나 뜯어보면은 나무랄 곳이 없다. 몸매는 가녈하다. 팔다리도 가녈하다. 다만 팔다리가 짧은 게 어쩐지, 어디가 어떻달 수 없는데 밤톨 같지가 않고 마늘각시랄까, 노르께하나 핏기 없이 흰 얼굴에 매쑥한 느낌을 안겨주는 마늘각시다. 마음속으론 욕지거리를 하면서 관수는 묻는다.
"영만이 독골에 있소?"
여자는 국자를 솥전에 걸쳐놓고 솥뚜껑을 닫으며
"거기 안 계시고 어딜 가시겠어요?"
오히려 반문하는 투다.
"두만형님은 요새 일 안 하지요?"
"겨울에 무슨 일이 있겠어요?"
말투는 여전하다.
"그이도 초정월이라고 독골에 가 계시오."
그러니 부재중이라는 것을 밝힌다.
'제에기! 누가 지 서방보고 술 내놔라 할까봐서? 더럽게 고만도 떨어쌌는다.'
자주 오는 것은 아니나 가끔 올 때면 남정네, 시동생과는 잘 아는 사이라 하여 말만이라도 친절했던 여자다. 조금 전만 해도 수굿하게 대하던 여자다. 순전히 석이 때문이다.
"지난해 독골에선 추수 많이 했소?"
관수는 또 물었다.
"많이 하기는요? 자리잡은 지가 얼마나 된다고요?"
국밥에 양념장을 뿌리고 여자는 사발을 관수 앞에 놓는다. 석이 앞에 사발을 놓을 때는 손길이 거칠었다. 술판 위에 국물이 조금 엎질러졌다. 관수는 곁눈으로 여자의 손길을 본다.
"석아, 어서 묵어라."
하고 자신도 밥을 설설 말아 퍼먹으며
"두만형이 독골에 파묻히 있인께 아지마씨 심사가 덜 좋겄소."
슬쩍 약을 올린다.
"덜 좋은 것도 없지요. 부모님이 계시는데 일년 내내 발걸음 끊어야 되겠어요?"
말을 받아서 메어친다.
"하항, 그도 그렇소, 듣고 보니. 임마 석아! 달암질쳐서 묵어라."
관수가 넘겨다본다. 사발 속은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쪼깐이집의 국밥, 무를 엇비슷이 썰어넣고 끊인 생대구국이다. 석이 입에 쫄깃쫄깃한 대구살이 달다. 젖빛깔이 방울방울진 고기는 입속에 들어가기가 바쁘게 녹는다. 향긋한 생파 내음, 사발의 바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발을 기울이며 남은 것을 아쉽게 퍼올리는 석이 모습을 여자는 멸시의 눈으로 힐끗 쳐다본다. 눈살을 찌푸린다.
"아지마시."
"예."
"물지게꾼이 내놓는 국밥 값은 썩은 돈이요?"
"무슨 말을 그렇게,"
느닷없이 하는 말에 여자는 당황한다.
"똑똑히 들으시오, 각시. 그렇지 두만이 각시믄, 작은 각시든 큰각시든 각시는 각시니께로."
"아니."
얼굴이 벌개진다.
"보소 서울각시, 각시 씨애비 씨에미 그라고 서방도 다 그렇기 누데기옷을 입고 살아왔소. 그거는 그렇다 치고 또 니는 머꼬? 술판이나 닦는 계집 푼수에 누굴 보고 괄시하고, 차벨할 개뿔이나 있다 그 말가?"
뒤에 가서는 주저없이 반말을 뇌까린다. 여자의 말문이 막히나. 약은 여자다. 시비를 걸려고 별러 하는 수작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면천한 처지로서 오늘 이만큼이나 살게 된 것을 이웃사촌이더라고 맴이 안 좋을 까닭이야 없제. 멩색이 서방이나 시동생이나 모두 잘 아는 사이고 보믄 또 고향 있을 적에는 부모들도 형제 겉이 지낸 사정이고 보믄 작은 각시든 큰 각시든 간에 남과 같이 돈을 받더라도 생각은 좀 달라얄 긴데, 누구 동냥은 줄 알았든가?"
"제가 어쨋기에 이리 화를 내실까?"
여자는 누그러진다.
"그거야 가심에 손 얹어보믄 빤히 알 일 아니던가? 예사 별수도 없는 것들이 사람을 괄시하는 법이라. 앵이꼽아서,"
그때까지 아무말이 없던 석이
"머를 그러요. 그만 나갑시다."
"임마! 니는 가만히 있어라. 아무튼지간에 보소, 서울각시. 김두만을 따라 살라카믄 그 고만 떠는 버르장머리부터 고치얄 기요. 김씨네 부자가 자리꼽재기로 소문나 있기는 하지마는 경위에 틀린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닌께. 더군다나 두만이는 색에 반해부리는 얼간이도 아니고,"
서울댁은 움찔한다.
"서울서는 어느 대가댁 기출인지 각시 근본이야 알 턱 없고 영만어매나 두만이댁네는 다 심성 곱고 후덕한 사램인데 앞으로 조심하는 기이 좋을 기구마. 좋지도 않은 소리 귀에 들어가봐야 큰며느리만 싸고도는 시부모 심사에 부채질일 기고 두만이도 역성들 사람은 아닌께, 내가 이래봬도 입이 싸고, 등쳐서 간 내묵는 솜씨도 노름판에서 자알 익힌 터이라,"
슬쩍슬쩍 급소를 찔러놓고 관수는 일어선다.
"석아 가자."
셈을 하고 밖에 나온 관수는 바람에 날려버리듯 침을 뱉는다. 석이는 빈 물지게를 지고 우두커니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약삭빠른 계집년, 펄펄 뛰믄서 달라들기라도 했으믄 덜 밉겄다. 술판을 엎을까봐 겁이 났겄지. 망나니들 데리고 와서 분탕질할까봐 겁이 났을까? 흐흥 그보다 죽자사자 따라 살라 카이 남정네 눈도 두럽고 시부모 눈도 두럽었겄지. 눈이 시퍼런 본댁이 있어, 지가 무신 자식을 낳았나, 가심이 설렁했을 기라. 제에기, 내사 그놈의 경사 쓰는 목소리만 들어도 정이 안 가는데 하기사 그 집구석 부자가 모두 셈이 빠르니께, 못난 것들!'
관수는 또 퉤! 하고 침을 뱉는다.
"석아."
"야."
"나 그렇잖애도 한분 만낼라 캤더니라."
"..."
"마침 오늘 만냈이니께, 내 할 얘기도 있고 하니 저녁에 좀 오니라."
"그럭허소."
"자고 갈 셈치고."
"야."
관수는 추수몰 쪽으로 가고 석이는 봉곡 쪽으로 간다. 봉곡에서도 한참 더 걸어서 띄엄띄엄 네댓 채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나무 한 뿌리 눈에 띄지 않는 자갈밭의 언덕이다. 울타리 없는 마당에 들어서며 석이 되돌아본다. 남강 건너편의 대숲이 아득히 먼 곳에서 어슴푸레 떠 보인다. 그 사이, 넓고 평평한 회갈색 들판이 한없이 뻗어 있다. 넓은 옥토의 임자는 대체 누구일까? 석이는 습관처럼 생각해보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들은 걷혀지고 동천에 신열을 잃은 희미한 해가 서편 산마루에 걸려 있다. 멀지 않아서 저녁이 찾아올 것이다. 어미는 눈을 들어 아들을 쳐다보는데 눈알이 빨갛다.
"무신 일이 있었소?"
울어도 대성통곡을 한 모양이다.
"왜 그러요?"
"내가 온께 아이들이 울고 있더라. 순연이는 불때기가 씨퍼렇게 부어올라서,"
"와 그랬던고요?"
"와 그라기는? 산에 나무하로 갔다가 산지기한테 잽힜더란다."
"...."
"나무하고 갈구리하고 뺏았이믄 그만이지 그 무상한 사램이 어디 때릴 구석이 있다고 어린것을 때맀겄노."
석이는 선 채 어미를 바라본다. 열두 살과 여덟 살짜리 두 누이의 손등이 터서 피가 흐르던 것을 아침에도 보고 집을 나섰다. 들판이 넓고 멀리 야산이 더러 있으나 진주는 본시부터 나무가 귀한 곳이다. 외지서 남강을 따라 숱하게 들어오는 나룻배는 성내의 땔감을 충분하게 대주지만 돈 없는 가난뱅이들 겨울 한철은 몇 리 길을 걸어야 솔잎이나마 긁어 올 수 있다. 얼음을 깨어 삯빨래를 해야 했고 여름 봄엔 끌밭매기, 치마 밑에 찬밥 한덩이 얻어오는 드난살이에 눈이 진무른 어미와 일년 열두 달 물지게를 지고 나가는 오라비, 언제부터였던가 어린 두 자매는 산지기 눈을 피해가며 근처 산으로 가서 솔잎을 긁어오게 되었다. 틈을 보아서 석이는 한두 짐의 나무를 해다 부엌에 내려주지만 농사도 아니 짓는 처지에 수숫대 콩대 나부랑이도 얻어볼 수 없고 땔감은 항상 감질나게 딸린다. 자연 어린것들도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산지기 몰래 산을 드나들었던 모양이다. 시래기죽을 끓여 양푼에 퍼다놓고 식구들이 좁은 방안에 둘러앉았을 때 석이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든 순연의 얼굴 쪽으로 쏠린다. 어글어글한 눈이 확 풀어지는가 싶더니 빛이 번쩍 난다. 언제나 양이 차지 않는 아이들 배에서는 꾸럭꾸럭 소리가 난다. 먹는다는 기쁨에서 침이 넘어간다. 설움이 무엇이며 추위가 무엇인가 그런 것쯤이야, 아이들은 먹을 것을 앞에 둔 이 순간이 무한하게 행복할 뿐이다. 어미는 석이 몫의 시래기죽을 먼저 떠서 밀어준다.
"나는 안 묵을라요."
"와?"
"관수형님이 밥 사주어서 묵었소."
몫이 많아졌다 싶었던지 두 어린 것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래도 묵어라. 사주는 밥이 얼매나 될 기라고 장골들 배는 헛수바다라 카는데,"
"봉순이 집에서도 밥 한술 얻어묵었인께요. 자아들이나 실컨 묵어보라 카소."
아이들은 어미가 퍼주는 사발을 감싸안 듯이 하고 후루룩 후루룩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죽을 먹는다. 어미도 한술 뜨다 말고
"관수는 우찌 만내서 밥을 억어묵었는고?"
불안해하는 눈빛이다.
"길가에서 만났소.:
"요새도 그 사람 노름장에 댕기는가? 클 때는 아이가 착실하더마는,"
석이는 대꾸하지 않는다. 방안에서는 후루룩거리는 소리만 들렸으며 밖은 어두워온다. 석이 호롱불을 켠다. 불빛 아래 아이들은 아귀같이 처먹는다. 그 꼴을 잠시 쳐다본 석이 눈이 호롱불같이 깜박인다.
어미 아들이 눈 오고 비오는 날에도 쉬지 않고 품을 파는데 네 식구 밥먹기가 이렇게 고단할 리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어려운 사정이 따로 있었다. 빚이 있었던 것이다. 일금 심십 원의 빚, 관리의 한 달 월급에 불과하지만 십오 원짜리 조선인 서기도 수두룩하다면 적은 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일금 삼십 원의 빚, 이들에게는 짚고 일어설 수 없는 무서운 짐이며 잡힐 가산도 없는 처지, 비싼 변리 아니고는 얻어쓸 수 없었던 빚이었다. 빚진 경위는 이들이 믿고 온 친정의 사정서부터 시작된다. 친정 오라비는 누이동생(석이네)을 출가시킨 이듬해 부친이 사망하여 삼년상을 벗었고 상막 치우기가 바쁘게 모친이 죽었다. 혼사 한 번에 초상이 두 번, 작인이지만 부지런한 탓으로 어렵잖게 지내던 살림이 기운 것이다. 이 무렵 조준구 서슬에 견디다 못한 한조가 처가를 연줄 삼아 땅마지기나 얻어부칠 요량으로 찾아왔는데 부지런한 처남을 믿는다면서 요행히 땅을 주겠다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솔가할 작정을 하고 평사리에 돌아가 변을 당했다. 막내 복연을 업고 두 아이를 거느린 석이네가 입은 옷 그대로 평사리 마을을 쫓겨서 친정으로 왔을 때 그 집에는 또 하나의 불행이 도사리고 있었다. 올케가 앓고 있었다. 병은 한 달 두 달에 끝나지 않았다. 자리에 누운 채 운신을 못했는데 허리뼈 속에 병이 생겼다는 것이다. 결국 약값으로 배먹이 소가 없어지고 뼈대가 쓸 만했던 사칸 집이 날아가고 오막살이 초가 한칸으로 자기 식구들은 옮긴 뒤 친정 오라비는 어린 석이와 함께 지금 사는 이 집을 지어주었다. 진인 마른일 조카와 외삼촌이 했지만 일이 끝났을 적에는 빚돈 십 원을 안았다. 그러나 내집이랍시고 살림을 시작한 뒤 석이네는 밤낮 병든 사람처럼 울었다. 총맞아 죽은 남편의 시체를 평사리까지 옮기지도 못하고 읍내 어느 야산에 버리듯 묻고 온 그 일 때문에 우는 것이었다. 시체를 거기 내버려두고 어찌 내 집이라고 지붕 밑에서 잠을 자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이십 원을 다시 빚내어 시체를 진주까지 옮겨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고 본시 묻혔던 자리 근처에다 터를 사서 이장을 한 것이다.
"그때 그만... 봉순이가 순연이나 복연이 둘 중 하나를 달라 했일 적에 보냈더라믄."
허기를 반쯤 달랬을 때 어미는 한숨 섞인 말을 했다.
"식구 하나 줄이믄 니 허리도 폐이고, 하나라도 배는 안 곯고 살긴데."
"시끄럽소."
석이 화를 벌컥 낸다. 그러나 어미는 또 다시 밀어본다.
"거기 갔이믄 밥이사 배부르게 묵을 기고 떨어진 옷은 안 입을 기고, 이 치분 날에 나무하러 산에 갔겄나? 저렇기 볼따구가 멍들지도 않았을 긴데, 순임금도 사세 불리하니께 독장사를 했다 안 카더나? 우리라고 무신,"
"아무리 배불리 묵고 떨어진 옷 안 입어도 남자 노리개 되는 것보다 낫소."
"그거사 머 봉순이가 키운다고 꼭 그리 된다는 벱이 있나?"
"갈 데 있겄소? 그 속에서 살믄 자연고로 그리 되는 기지요."
"저 얼굴의 멍 좀 보라모. 내사 간이 아파서 죽겄다."
어미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는다. 정신없이 죽을 퍼먹던 아이들도 배가 불러오니까 숟가락 놀리는 손이 무디어지며 어미와 오라비 말에 귀를 세운다. 큰애 순연이가
"오빠 나 갈란다, 거기 보내도고."
몸을 흔들며 조른다.
"니는 나무 해야 안 하나. 내가 갈 기다. 그제? 어매, 생이는 나보다 큰께로 나무 많이 할 기고, 어매 안 그렇나?"
막내가 어미한테 동의를 청한다.
"이눔 가시나야. 니가 거기 가믄 마리 닦고 군불 때고 밥하고 우찌 그거를 할 기고? 실데없이 까불지 마라, 문딩이가시나."
"거짓말이다. 누가 모릴까봐서? 밥하고 군불 때고 안 한다 카더라. 숭님이나 떠다주고 음. 또오 빗자리 가지고 방이나 씰어주고 그라믄 된다 카더라."
"누가 그라더노! 누가 그라더노!"
순연이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복연이 옆구리를 쥐어박는다.
"어매가 똥돌네보고 하는 말 다 들었다! 다 들었다 말이다."
작은것도 지지 않고 언니의 얼굴을 할퀸다. 한 소동이 벌어질 판인데
"그만 못하겄나?"
오라비 말 한마디에 서로 덤벼들던 동작을 멈춘다. 슬그머니 일어선 석이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처마 끝에 붙여놓은 지게를 지고 낫을 들더니 휭하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 시각쯤 지났을까? 어미는 부엌에 호롱불을 켜놓고 두붓물에 빨래를 주무르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생솔가지 한 짐을 들어다가 부엌바닥에 놓는다.
"니, 니 우짤라꼬 생솔가지를,"
"걱정 마소."
"낮에 순연이 그리키 야단을 맞았는데 알면 큰일날 기다. 그놈의 산지기놈 심술이 좀 하든가?"
"우리 순연이 볼따구 피멍든 값이오. 생솔갱이 아무리 뿌질러도 아파서 울지는 않은께요."
석이 음성은 침울하고 무섭게 울렸다.
"어매."
"와."
"관수형님한테 갔다오겄소. 밤에는 아마 못 올 기요."
"거기는 와 가노?"
일손을 놓고 아들을 쳐다본다.
"좀 다니가라 하더마요."
"나는 니가 그 사람 찾아댕기는 기이 좋잖다. 사램이 전에는 안 그렇더마는 노름방에나 댕기고 뽄볼 기이 머 있다고."
"..."
"사램이란 좋은 거는 배우기 어러바도 나쁜 거는 금세 배우니께. 백정의 딸하고 산다는 것도 내 마음에 끼누마."
"백정은 사람이 아닌가요? 어매는 그런 소리 마소. 설움받기로는 그 사람들이나 우리나 다 같소."
"그거사 그렇다 카더라도 노름방 드나들믄 볼장은 다 본 기다. 인이 한분 백이믄은 세상이 무너져도 그 버릇은 못 고치니께."
"갔다오겄소."
기분이 좋지 않은 어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가버린 줄 알았던 석이 다시 나타났다.
"잊어부릴 뿐했소. 낮에 봉순이가 내일 어매 좀 오랍디다."
"무신 일이고?"
"모르겄소."
"알았다."
어미는 힐끗 눈을 뜬다. 가물가물한 불빛 아래 여위고 주름진 얼굴, 매달리듯한 눈빛.
"석아."
"야."
"에미는 니를 믿는다. 제발 허방에는 발 딜이놓지 마라. 없이믄 없는 대로 살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겄나?"
"어매는 관수형님을 잘 모르니께 그러요. 어매가 생각하는 사람 겉은믄 상종하지도 않을 기요."
"그래도 니는 아직 세상 일을 모른다."
"허 참."
아들의 발소리는 멀어지고 어미는 힘없이 빨래를 주무른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 먼 곳에서 개짖는 소리, 아이들이 잠이 들었는가. 그러고는 온 세 상이 쥐죽은 듯이 고요해진다.
첫댓글 한바퀴 돌고올께!!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릴까 ~ 아~! 그리고 보니 우리도 십여년이 지나면 한바퀴 도는 구나 ~ 내가 돈다 돌아 정말 ~ 술먹고 돌지 성질나 돌지 소가지 못 다스려 돌지 ~ 오늘도 돌다가 어지럼증에 시달리다 허공을 맴도는 정신나간 인간은 ~ 앗~차 약 기운이 떨어졌나 봐 ~ 어제 마시다 놔둔 약이 어디 있더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