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세 부부가 땅을 사서 고추를 심었을 그 당시에는 그렇게 쉬운 농사가 있을까 싶을만큼 풍작이었다 고추 고랑으로 각자 들어가서 한바구니씩 따다가 앞뜰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으면 윗집 할머니께서 부러워하셨었다 물론 고추를 말리는 문제에 곧바로 부딪히기는 했으나 일단 고추를 기르는 일은 별개 아니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 해 두 해 고추농사를 짓는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고추에 생기는 여러가지 병충해도 늘어나 처음 고추농사 때처럼 수확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추농사를 지으면서 남의 밭에 고추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겼는데 다른밭들도 고추병으로 누렇게 말라가는 모습은 흔히 보였다 누가 얼마나 부지런히 방제를 해가느냐가 관건이라는 사실과 일단 한번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해 볼 도리 없이 짧은 시간에 밭 전체로 번져 봄부터 들인 정성이 하루 아침에 허사가 되어버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고 했듯 첫 농사에서는 성공하였으나 고추에 대한 지식이 늘어갈수록 첫 고추농사처럼 풍작을 이루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어디 고추농사뿐이겠는가 공부건 기술이건 사랑이건 깊어질수록 점점 까다로워진다
올해 고추농사는 당연하게 풍작이라 믿었다 잎사귀는 윤기가 흐르고 고추나무들은 장마에도 굳건하고 열매들은 주렁주렁 열리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인생사가 변덕스럽듯 고추도 변덕을 부리는가 누구의 짓인지 무슨 병인지 고추를 댕강댕강 잘라내기도 하고 움푹움푹 파먹기도 하고 물렁물렁 썩게도 만들어 고추밭 고랑에 깔아놓았다 첫물 중에 삼분의 일이나 건졌을까 겨우 두바구니 붉은 고추를 땄다 그러나 이러면 어떠하리 저러면 어떠하리 많으면 나눠먹고 부족하면 사 먹으면 될 것을 평온하다 싶으면 찾아오는 삶의 구렁텅이를 그 누가 비껴갈수 있을까 젊어서는 죽어라 무조건 부딪치려고 했으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냥 그러려니 그런것이려니 타협과 포기가 빨라진다
그런데 우리밭에 생긴 병은 무엇이란 말인가 8월 전후 무더운 여름철에 주로 열매와 줄기·잎에도 발병하고 열매에서는 황백색 또는 황갈색 반점이 생기고, 점차 확대되면서 썩어 흰빛으로 변한 채 가지·줄기에 매달려 있게 되는 고추 무름병도 아니고
흑색형과 육색형(肉色形)의 2종류가 있는데 흑색형의 발병이 많으며 열매에 주로 발생하나 잎에도 가끔 침해하며 처음에 수침상(水浸狀)의 작은 반점이 생겨 점차 확대되면서 갈색을 띠며, 병반부는 움푹해지고 표면에 동심윤문(同心輪紋)을 형성하는 탄저병도 아니고
잎 전체가 오글오글해지면서 생육이 지연되면서 잎은 작아지고 새로 나오는 줄기는 마디가 짧아져 빗자루 같이 되기도 하다가 어떤 경우에는 부드러운 줄기에 검은 괴저가 나타나면서 꽃눈이 떨어지고 줄기끝이 말라 들어오는 오갈병도 아닌 것이 도대체 어느놈이란 말인가
그래도 고추 두 바구니를 햇살에 널었으니 저만하면 만족이다 엎드린 채 파란 하늘과 양자산과 꽃밭과 뜰에 널린 고추와 날아온 새와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한 눈에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그리고 곁에서 변함없이 온기를 전해주는 남자를 가진 지금의 나는 막 피어나는 주홍빛 백일홍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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