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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북부, 노르망디
◆ 몽생미셀:8E,5E
- 역사 : 켈트족 전설에 의하면 Mont St-Michel 은 죽은 자의 영혼의
보내지는 바다 무덤 중 하나라고 한다.
서기 708 년, 바다 위의 산 Mont St-Michel 에 예배당이 지어졌고,
966 년에 노르망디 군주였던 리샤르드 1 세가 이 예배당을 베네딕토
교도들에게 하사 하였다. 이들은 이 예배당을 일종의 연구센터처럼
사용하였고, 11 세기에 이르러서는 수도원장과 국왕 산하의 병영을
갖춘 일종의 교회겸 요새로 변했다.
- Abbaye du Mont St-Michel (몽생미셸 수도원)
수도원 내부관람 : 교회, 라메르베유(북쪽, 수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회랑, 수도원 뒷쪽 모래사장,바위 산책, 수도원 외부 및 주변관광(성벽)
- Grande rue(섬입구서 수도원까지의 좁은 통로)
- 그리고 요새의 성벽 : 성벽으로 올라가 Mont St-Michel 주변의 드넓은 바다(썰물 때에는 갯벌)를 둘러보며 비릿한 바다내음을 맡아 보자.
나중에 숙소는 몽셀미셀에서 구하는 것 보다는 생말로(근교의 항구) 쯤에다 정하는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볼것도 많고, 괜찮은 음식점도 있고,대서양물에 발도 한 번 담그고요,,
# 290 브리따뉴 지방 여행 (생 말로)
[지구방랑자 베르디에의 세계 오지 여행11] 프랑스 브르타뉴
[월간 산 2005-08-19 18:51]
에메랄드 코스트의 보석 생 말로
해안절벽의 요새들 구경하며 걷는 1700km의 산책로
고대 켈트 문화가 아직도 숨쉬고 있는 땅 브르타뉴(Bretagne)는 프랑스 서부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랜 세월 ‘바다 옆의 땅’을 의미하는 아르모니카(Armonica)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지역은 그림 같은 풍경과 푸르른 들판, 안개가 서린 언덕들, 거친 바위절벽, 고즈넉한 분위기의 항구들과 신비한 섬들, 이 모든 것들이 합쳐 마치 한 폭의 태피스트리 같다.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변덕스러운 날씨, 그리고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조수간만의 차 등은 단지 이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매력이다. 비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지 단 몇 분도 되지 않아 등장하는 맑은 하늘은 우리 인생이 그렇듯 조금 전의 궂은 날씨를 잊게 한다.
낭만적인 이곳 브르타뉴는 관광객뿐만 아니라 유명한 작가들, 자연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곳에 살던 켈트인들은 이곳이 대서양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곳으로 이상하고 묘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며 거친 파도는 해변 형태를 바꾸어 왔고, 사라진 도시들에 관한 오랜 전설들도 점점 잊혀져 갔다.
사실 바다는 이곳 사람들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곳이며, 조수간만의 차나 기상 변화는 여전히 이곳 사람들의 생활에 가장 큰 변수가 되고 있다. 썰물과 밀물에 따라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1,700km에 달하는 해변 산책로 그 중에서도 생 말로(Saint Malo)는 ‘에메랄드 코스트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웅장하게 솟은 성벽이 바다에 맞닿아 있고, 그 성벽 안으로 거대한 가옥들과 잘 만든 요새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생 말로는 전 세계를 누비던 많은 탐험가들이 출발하고 돌아오는 곳이었다. 이곳의 해변과 그 끝을 장식하고 있는 가파른 절벽들은 위대한 작가들과 시인,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에메랄드 코스트(Emerald Coast)는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이곳의 풍요로운 자연을 즐기고 싶으면 그저 길을 나서서 걸으며 인어와 요정의 전설이 숨쉬고 있는 브르타뉴의 향기를 느끼면 된다.
브르타뉴가 자랑하는 것 중 하나는 해변에 접한 산책로가 무려 1,700km에 이른다는 점이다. 이 길은 걷기 어렵지 않아 초보자들이나 나이 드신 분들, 혹은 아이들과 함께 걸으며 바다 내음을 즐기기에 좋다. 또 언덕을 올라가 내려다보는 에메랄드빛 바다 풍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다.
이 길들을 지금은 관광객들이 이용하고 있지만, 한 때는 밀수 사건을 감찰하기 위한 관리들이나 난파된 배들을 찾아다니던 사람들이 머물던 곳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변했다. 이 길에는 차가 진입할 수 없기 때문에 방해 없이 특권을 누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다. 관광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하는 뛰어난 경관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해변 길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유지하고자 몇 년 전 해변보호소가 세워졌다. 이 보호소의 임무는 훼손된 산길을 복구하고, 위험에 처한 곳의 생태학적 균형을 잡는 일이다. 이 해변보호소는 또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기념물들과 고고학적 유적, 새들이 집중적으로 머무는 곳을 포함하고 있는 땅을 사들였다. 이 기관은 자연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즐거운 하이킹을 제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바위섬들과 신비로운 요새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생 말로를 한눈에 잘 내려다보려면 바닷물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물이 빠진 길을 건너 그랑 베(Grand Be)라는 거대한 돌섬으로 가는 것이다. 돌섬 위로 난 쾌적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돌을 깎아 계단을 만들어 놓은 정상에는 레몬 빛 꽃들이 만발해 있다.
이 화려한 꽃들과 더불어 내려다보이는 푸르른 바다와 저 멀리 보이는 도시 생 말로의 웅장한 광경은 보는 이의 숨을 앗아가게 한다. 생 말로 해변으로는 태양을 즐기는 유럽인들의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또 다른 쪽으로는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서있는 등대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이 섬 정상에 오르면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무덤 하나를 볼 수 있는데, 19세기 낭만주의 작가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샤토브리앙은 죽어서 묻힐 때 누운 자세가 아니라 선 자세로 묻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영원히 바다를 보고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돌섬 뒤로 또 다른 요새가 작은 돌섬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프티 베(Petit Be)라는 요새다.
바닷물이 빠져나가면서 곳곳에 드러난 웅덩이들, 아직도 바위에 붙어있는 하얀 조개들, 푸른 해초들을 즐기다 보면 마치 낙원의 섬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바닷물이 다시 밀려들어 오기 전에 이 섬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조금만 머뭇거리다간 사방으로 바다에 둘러싸인 이 섬 안에 갇혀 몇 시간을 보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낙원이 순식간에 공포의 지옥으로 변할 수도 있다!
에메랄드 코스트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구간 중 하나는 프레엘 곶(Cape Frehel)과 라라트 요새 (Fort La Latte)를 연결하는 루트다. 프레엘 곶은 핑크빛 사암으로 형성된 거대한 곶으로, 바다에서 뻗어 올라간 높이가 무려 70m에 이른다. 이곳을 오르면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거친 바람과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등대 뒤를 장식하고 있는 금잔화의 화려한 노란 빛이 에메랄드 빛 바다와 대조되며 잘 어울린다. 4월부터 6월까지 만발하는 다양한 꽃들은 이곳에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드리운다. 또한 절벽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이라고 칭송되고 있다.
16세기에 세워진 라라트 요새는 프랑스에서 훼손되지 않고 가장 잘 유지되고 있는 요새로, 1960년대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한 영화 바이킹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곳은 ‘거인의 손가락(Giant Finger)’이라고도 불리는데, 실제로 모든 것이 거대하고 위대해 보인다.
유명한 화가들이 사랑했던 곳
19세기 말 브르타뉴에서 활동하던 무명의 예술가들은 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위인들이 됐다. 그런 이유로 이곳 자연의 아름다움은 자주 화폭에 담기곤 했다. 고갱, 르누아르, 피카소, 모네, 그리고 마티즈 등 유명한 화가들이 브르타뉴에서 영감을 얻어 많은 작품들을 창조해냈다.
브르타뉴에 머물면서 그들은 새로운 화법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마티즈는 “나는 팔레트에 흙빛만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브르타뉴 여행을 다녀온 후 내 팔레트는 무지개 빛으로 가득하다”고 했다.
프랑스나 혹은 다른 나라에서 온 수많은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들은 한결같이 브르타뉴를 뛰어난 경치와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예술적 영감으로 가득 찬 천국으로 여겼다.
글·사진 알랭 베르디에
번역 최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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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정보
경로 다양한 항공사들이 서울에서 파리 구간을 운행한다. 파리의 몽파르나스 열차역에서 초고속열차 TVG(테제베)를 타고 브르타뉴의 주도 레느(Rennes)까지는 2시간.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1시간이면 생 말로에 도착한다. 프레엘 곶과 라라트 요새로 가기 위해선 생 말로에서 출발하는 여객선 코르세이어(Corsairs)를 타고 1시간 더 가야 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느리다. 다만 서머타임이 실행되는 3월부터 9월까지는 7시간 느리다.
환율 유로(Euro) 사용. 1유로=약 1,350원(변동이 심하다).
언어 전통적으로 브르타뉴 지역은 고유의 브레통 언어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프랑스어가 널리 사용된다.
음식 브레타뉴 최고의 전통음식은 단연코 메밀로 만든 크레페(일종의 부침개)와 사과로 만든 술 시드르(cidre)다. 또 바다에 인접한 곳이다 보니 다양한 해산물 요리가 발달했는데, 크림 소스를 곁들인 홍합 요리와 화이트 와인 한 잔은 반드시 맛봐야 할 별미다. 브르타뉴 사람들은 이 홍합 요리와 함께 언제나 프렌치 프라이를 같이 먹는다.
숙소 호텔 라 빌프로무아(Hotel La Villefromoy)는 샤토호텔연합 멤버로, 생 말로의 한적한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프랑스 샤토 특유의 인테리어를 자랑하며 호텔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전화: 33 2 99409920, villefromoy@chateauxhotel.com).
#[ 캠핑카 여행에 대해서 ]
이번 여름, 캠핑카 협찬을 받아 노르망디 주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일정은 다음과 같았어요~
제 1일 : 파리 출발(18:00) -> 에트르타(23:00)도착 주변 숙박
제 2일 : 에트르타 자유일정(~12:00) -> 노르망디 대교 -> 옹플뢰르(13:00~17:00) -> 도빌(18:00) 캠핑장 숙박
제 3일 : 도빌 캠프장(10:00) -> 깡(12:00~13:00) -> 몽셀미셀(16:00) 캠핑장 숙박
제 4일 : 캠프장 출발(10:00) -> 생말로(12:00) 캠핑장 숙박
제 5일 : 생말로(10:00) -> 오베르 쉬르 오아즈(17:30) -> 퐁투와즈 숙박
여기서 몽셀미셀 주변 캠핑장이 꽉차서 생말로 근처의 캠핑장에서 2박 하게 되었는데...
정말 시설환상에 해변도 좋고..꽃미남 프랑스 오빠도 만나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답니다..^^
(그런데, 캠핑장 내부 지도는 있는데...캠핑장 이름이 안적혀 있군요..-_-;;;)
하지만, 전반적으로 올해 이상기온으로 날씨가 너무 더운 탓에 캠핑카 여행이 무척 힘들었어요. --;
그래서인지,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많이 봤는데...정리해 드리자면 다음과 같아요.
단점은...
1. 캠핑카는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이 몰아야 한다.
차운전이나 내부사용방법은 익히면 된다고 하겠지만,
오수처리나 물저장 등등을 해야해서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는 캠핑카를 몰고 다니기 힘들어요~
2. 기차보다 더 피곤하다.
일단, 자동차를 모는 사람을 제외하고서라도 이동할 때의 흔들림이 기차보다 심해서...
기차에서처럼 뭔갈 정리하고 얘기하고 그러기 보다 쓰러져 있게 됩니다~-_-;
그러니, 캠핑카로 다닐 때에는 정말 근교에..캠핑장에서의 머무는 날짜를 늘리는게 좋아요~
기차타고 여행할 때처럼 무박이나 1박..이런식으로 다녀서는 안됩니다. 힘들어요!
3. 기대했던 것 보다 시설이 불편하다.
화장실과 샤워실을 사용할 수 있지만, 저장된 물이 그리 많지 않고..수압도 좋지 않아 실제 사용하는 건
불가능이라기 보다는 불편해서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그냥, 캠핑장의 빵빵한 시설을 이용해버리죠~
장점은...
1. 저렴하다.
호텔이나 유스호스텔 보다 숙박비가 저렴해요~ ^^ (단, 기름값이 들긴해요..^^;)
2. 친한 친구들이나 가족끼리 여행시 즐겁게 여행할 수 있다.
음..다시 간다면, 진짜 친한 사람들이랑 위에 말했던 생 말로 근처의 캠핑장에서...
3~5박하면서 놀다오고 싶네요.. 무엇보다 캠핑장 분위기도 너무 좋구요~
2. 아무데나 차를 세우고 잠잘 수 있다.(단, 시내에서는 캠핑카 주차장에 별도로 세워야 함)
3. 캠핑카의 주방에서 원하는 곳에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다.(단, 이동시에는 안됨. 흔들려서..--;)
마지막으로, 캠핑카 여행시 기본적으로 갖출 소양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아무래도 단체생활을 해야하는 관계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없이 자기 편의에
사람들이 맞춰주길 바라고 행동한다면, 본인에게나 또 다른사람에게도 생의 최악의 여행이 됩니다.
(이곳에서는 함께 *캠핑*을 하는 공동체 생활의 방법이 필요한 것이지,
차량을 단지 호텔이나 이동수단으로 쓰는 단체 패키지 관광의 여행법이 필요한건 아니거든요.)
또한, 여행하는 동안 서로 피곤하더라도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구요.
# 171 노르망디 지방의 중세의 도시 바이외(Bayeux)
며칠동안 노르망디 지역의 여행지를 올려볼까 합니다. 오늘은 바이외라는 곳이구요^^
이곳이 유명한건 영국과 프랑스의 헤스팅 전투에 대한 기록이 태피스트리에 기록이 되어 있는
바이외 랜딩 뮤지엄때문에 특히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답니다.
또한 오마하 비치는 특이한 모양의 오벨리스크를 볼수 있습니다.
이곳은 칸에서 75번 버스로 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차도 운행되고 있으니 헤스팅 전투에 관심있거나 중세의 모습을 보고 싶은 분들은
한번 방문하셔도 좋을 듯 하네요^^
http://www.bayeux-tourism.com/
인구는 1만 4704명(1990)이다. 칸에서 북서쪽으로 24km 떨어진 오르강(江) 연변에 있다. 레이스·플라스틱 제품의 생산이 활발하고 낙농식품공업이 이루어진다.
고대부터 바요카스·아우구스토두룸·키비타스바이오카시움 등으로 지명이 바뀌어온 오랜 도시로, 갈리아인(人)·브로톤인·색슨인·노르만인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의해 맨 먼저 탈환되었고, 기적적으로 전화(戰禍)도 입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11세기)·주교관저(11~14세기)가 남아 있으며, 바이외박물관의 특별전시실에는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을 보여주는 유명한 ‘바이외의 태피스트리’ 벽걸이가 있다. 파리의 생라자드역(驛)과 셰르부르를 있는 철도와, 칸~셰르부르 간 국도가 지난다.
프랑스 북서부지방...지금은 노르망디라고 불리는 그곳은...지리적 입지의 영향과 그곳에 정착한 바이킹들의 성향으로 역사와 함께 ...전쟁을 늘 몰고 다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르망디의 대표적 도시는 CAEN 과 ROUEN이 있다. CAEN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공수부대의 강하로 유명한 곳이다. Rouen은 100년전쟁으로도 유명하며 ...특히 쟌다르크가 화형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Paris는 이 Rouen에서 남쪽으로 약 1시간(시속 100km/h) 거리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대서양에 접한 이곳 노르망디는 바다를 통하여 Paris로 진입하는 좋은 단거리 코스이기도 하다.
CAEN에서 약 25분 정도 떨어진 곳에 Bayeux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수도원과 성당이 유명한 이 작은 마을의 한편에 위에 보이는 것과 같은 ...긴 천에 일일이 수를 놓은 Tapisserie (따피스리 [불어])가 있는 박물관이 있다.
이 따피스리는 노르망디의 윌리엄공이 영국을 침입하여 헤럴드왕을 몰아내는 일련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Hastings전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당시의 복식등 다양한 사회적 정보를제공하고 있어서 오늘도 많은 부분의 고증에 인용되고 있다.
# 126 해적들의 도시, 생 말로 (Saint-Malo)
해적들의 도시, 생 말로 (Saint-Malo)
내가 생 말로를 가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빠리에서 열흘을 다 있을까 생각했다가 그건 좀 너무 심심할 것 같아서 하루를 루와르 지방의 고성 투어에 바쳤는데, 어째 그것도 너무 맹숭맹숭한 듯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몽 생 미셸 (Mont Saint Michel)'.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를 눈물의 바다로 밀어넣었던 영화 <라스트 콘서트>의 배경이 되는 곳이자, 다녀온 사람들보다 좋다고들 난리여서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에... 그러저러한 이유로 마음이 동해 몽생미셸의 사진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곳으로 와서 심신을 달래보라는 듯, 그 옛날 은둔자들이 이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네게도 하나님과 자연이 주는 위안을 얻어보라는 듯 속삭이는 것 같았다.
물 위의 수도원, 은둔자들의 쉼터 몽 생 미셸
여행할 지방으로 몽생미셸을 택하자 자연스레 그 일대의 어느 시골에서 이틀 정도를 묶는 것으로 일정을 맞췄다. 몽생미셸은 노르망디와 브리타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있었다. 노르망디 지방은 대학시절 읽었던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서 매혹된 곳으로, 언젠가는 바람과 물과 안개가 많은 노르망디의 축축한 땅을 밟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해적들의 도시 생-말로 (생말로 항구)
브리타뉴 지방은 전혀 다른 이유로 방문하고 싶었다. 1년전 쯤에 브리타뉴 지방의 농업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프랑스의 농촌 민박 '지트(Gites)'였다. 우리나라에도 농촌민박이 있지만, 프랑스는 훨씬 더 까따로운 조건을 내걸고 전국적으로 네트워크망을 만들어 지트를 관리하고 있었다.
Gite Rural (시골 민박),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지정된 농촌민박집에는 이와 같은 표지판이 붙어있다.
프랑스 시골 민박집 검색 및 예약
- http://www.likhom.com
- http://www.paris-touristoffice.com
Saint Malo시 인근의 프랑스풍 시골집. 원래 묵기로 예약돼있었던 민박집 Les Croix Gibiouns
프랑스 농촌에서 민박집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사람만이 가능하다. 민박을 할 건물은 그가 대대로 내려오는 프랑스의 전통 농촌 건물이어야 하고, 민박집 주인 역시 그 지역에서 농사를 지어온 농부나 그 후손, 가족이어야 한다. 그래서 프랑스의 지트를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프랑스 농촌 본래의 모습과 그곳의 생활방식, 그곳 사람들의 순수한 인심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작업을 하면서 접하게 된 지트는 브리타뉴 지방의 농촌민박집 몇곳이었는데, 열이면 열 모두가 동화 속에 나오는 그림 같은 집에 아담하고 어여쁜 정원을 꾸며놓고 있었다. 누구나 그곳을 본다면 하룻밤 쯤은 프랑스 농촌 인심에 묻히고 싶을만큼...
처음 묵기로 예약돼있던 민박집의 거실
평화로운 브르타뉴의 농가
몽생미셸과 농촌 민박, 그리고 노르망디와 브리타뉴... 이 모든 걸 만족시켜줄만한 곳이 바로 생-말로였다. 생 말로는 브리타뉴와 노르망디의 경계 지역에 있는 해양도시이고, 오래전부터 해적들의 도시로 유명했던 곳이다. 노르망디 특유의 우수와 브리타뉴의 소박함이 어울어진 도시, 거기다 몽생미셸과는 한 시간 거리에 불과하다. 이보다 더 적절한 선택이 있을까? 결과가 어땠냐고? 1000% 만족이다. 빠리에서 일주일과 함께 생 말로에서의 사흘-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었다.
# 153 모네 꾸르베 등 많은 화가들이 칭찬한곳 에트르타
에트르타라고 혹시 들어보셨나요? ㅎㅎ
오늘은 이곳에 대해 소개를 해드릴까 합니다.^^
에트르따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디에프와 르 아브르 사이의 해안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에트르따 해안의 절벽은 작가인 알퐁스 카(Alphonse Karr)가 그의 작품에 자주 언급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이 절벽은 이 곳을 찾는 여행자들 뿐 아니라 코로, 모네, 마티스, 쿠르베, 모리스, 르블랑과 같은 많은 화가들과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풍경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 코로는 1872년부터 이곳에 머물렀으며, 인상파의 선두주자였던 보뎅도 1884년부터 4차례에 걸쳐 이곳을 방문해 "팔레즈의 역류(La Falaise d'Amont)"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클라우드 모네는 에트르따를 특별히 사랑하여 이곳을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그중에서도 "항구의 풍경(View from the harbour, 1883년)"과 "절벽 위에서 본 에귀유 풍경(Aiguille, View from the Top of the Cliff, 1885년)"이 유명합니다.
그 밖에 사실주의 선두주자인 구스타프 쿠르베도 "파도(The wave)"를 비롯해 미국 사실주의 화가인 인네스나 볼디니, 마티스 등도 이곳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고, 독일의 작곡가 오펜바흐도 에트르따에 빌라(Orphee)를 지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와 사무엘 베케트와 같은 작가들도 에트르따를 흠모하여 이곳의 비범한 자태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이 곳(Les Verguies)에서 살았고, 모파상은 빌라(La Guillett)를 지었으며, 앙드레 지드는 이곳에서 결혼식(1895년 신교도의 신전)을 올렸습니다.
제가 이곳을 다녀온 건 2004년 여름이었습니다.
전 자동차로 갔는데 가는법을 올려드리겠습니다.^^
파리 Saint-Lazare(쌩라자르)역에서 아침일찍 Le Havre(르아브르)라는 도시로 가면 됩니다.
그곳 기차역에 내리면 바로 옆에 시외로 가는 시외버스역이 있는데 거기서 에트르타까지 버스타고 가면 됩니다
# 114 프랑스 자존심 노르망디... 에트르타
프랑스 자존심 노르망디... 에트르타
글쓴이: 네비게이터 번호 : 114조회수 : 4862005.11.06 22:45 고대에는 벨기에인과 켈트인의 거주지였고, 로마시대에는 카이사르에 정복되어 속주가 되었다
메로빙거왕조 때(3세기)부터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고, 9세기부터 바다의 무법자 바이킹족의 후손
들의노르만인의 침입이 시작되어 911년 샤를은 노르만의 수장 롤로에게 땅을 넘겨주고 공작(公爵)
작위를 주었다.
노르망디공(公) 윌리엄 1세는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앵글로 노르만왕조를 세웠으며, 1106년
영국의 봉토(封土)가 되었다.
1204년 필립 2세가 프랑스에 통합했고, 백년전쟁 중인 1420∼1450년에는 영국령으로 되었으나 1468
년 프랑스 왕령과의 연대(連帶)가 선언되었다. 1944년 6월에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행해진 곳으로서
널리 알려졌다.
노르망디 지방은 깎아 지른듯한 절벽을 끼고 끝없이 펼쳐진 해안선과 비옥한 땅의 조화가
아름답다.
*프랑스인의 자존심 노르망디 다리
예술적인 아름다움과 기술력이 잘 융합된 다리로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되었다
두 버팀대 사이가 865m,시속 440km의 강풍에 견딜수 있고 화물선과 충돌하여도 파괴되지 않을정도로 견고하게 설계 되었다.보행자와 자전거는 무료로 통행할 수 있다
*노르망디 해안의 절경 에트르타
르 아브르에서 버스로 40분정도 걸리다.
코끼리 바위 해변으로 유명한 이곳은 쿠르베와 모네의 작품에 많이 나온다
여름철 프랑스인에게 인기있는 피서지로 유명하다.
★ 프랑스 중부 & 서부
◆르와르(Loire) 고성지대 ( 뚜르 부근의 여러 성 )
루와르 강 유역에 거대한 성을 세우면서 고성지대가 형성된 것, 가장 큰 규모와 남성다움을
자랑하는 상보르 성과 화려한 여성미를 자랑하는 쉬농소 성 ,쇼몽,앙브와제
앙부아즈와 쉬농소만 보실거면 생삐에르떼꼬역에서 내리면 됩니다.
① 쉬농소 성(Chateau de Chenonceau) :
쉬농서 성은 앙리 2세의 부인과 정부 간에 권력을 쥐기 위한 암투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들의
흥미진진한 암투를 뒷받침할 만큼 성 내부의 볼거리가 뛰어난 것은 아니다.
개방 : 11월~1월 9:00-16:30, 3월~9월 9:00-19:00
입장료 : 일반 7.00유로, 학생 5.00유로
가는 법 : 뚜르역 앞에 위치한 버스터미널에서 쉬농서로 가는 공공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뚜르발 쉬농서행 기차로 이동할 경우, 쉬농서 행 바로 앞에서 하차할 수 있다.
② 아제 르 리도 성(Chateau d'Azay-le-Rideau) :
16세기 플랑드르 양식의 아제 르 리도 성은 르와르 고성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성 중 가장
우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방 : 4월~6월, 9월 9:30-18:00, 7월~8월 9:00-19:00, 10월~3월 10:00-12:30, 14:00-17:30.
입장료 : 일반 7.50유로, 학생 5.50유로.
가는 법 : 뚜르역 앞에 위치한 버스터미널에서 SNCF 버스를 이용하여 갈 수 있다.
③ 앙부와즈 성(Chateau de Amboise) :
르와르 고성지대에 있는 성 중 처음 이탈리아 양식을 도입했다. 게다가 성 허버트 성당과 몇몇
건물에서는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부분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무엇보다 허버트 성당에
묻혀있는 다 빈치의 유해로 유명하다.
개방 : 11월~3월 9:00-12:00, 14:00-16:45, 4월~6월, 9월~10월 9:00-18:30, 7월~8월 9:00-19:00.
입장료 : 일반 7.70유로, 학생 6.50유로.
가는 법 : 앙부와즈 역에서 북쪽 방면으로 도보 10분
④ 블루와 성(Chateau de Blois) :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4세기에 걸쳐 지어졌으며, 19세기에는 한 번의 개축이 있었다. 이처럼
건설기간이 길고 크고 작은 개축이 비교적 잦게 이루어진 까닭에 여러 가지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개방 : 매일 9:00-18:00.
입장료 : 일반 6.50유로, 학생 4.50유로.
가는 법 : 블루와 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위치.
⑤ 샹보르 성(Chateau de Chambord) :
르와르 고성지대에서 가장 인기있는 성 중 하나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이중나선 계단으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440개의 방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며 수면에 비친 성의 모습이 일품이다.
개방 : 4월~9월 9:00-18:30, 3월~10월 9:00-17:15
입장료 : 일반 8.50유로, 학생 6.00유로
가는 법 : TLC에서 운영하는 샹보르 투어는 블루와 관광안내소에서 신청할 수 있다.
⑥ 쉐베르니 성(Chateau de Cheverny) :
쉐베르니 성은 내부가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숨겨두었던 이력 덕에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개방 : 4월~6월, 9월 9:30-18:15, 7월~8월 9:30-18:30, 10월과 3월 9:30-12:00, 15:15-17:30,
11월~2월 9:30-17:00
입장료 : 일반 6.30유로, 학생 5.00유로.
가는 법 : 샹보르 투어와 마찬가지로 블루와 관광안내소에서 쉐베르니 투어를 신청할 수 있다
# 115 France Loire Valley-중세 고성에서 맞는 풍성한 가을 향 (르와르 고성)
샤토성
붉게 물든 단풍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
게 반갑게 손짓하는 루아르 지역.
성이 군락을 이루는 이 곳은 프랑스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꼽힌다.
중세시대 성들의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곳은비옥한 토양과 탁 티인 들판
그리고 맑은 햇살이 나무와 고성 마당위를 비추며 그 아름다움을 전한다.
구절양장으로 굽이쳐 흐르는 루아르 강은 1천k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강이다. 이 강줄기를 따라
16세기 이후에 지아진 왕과 귀족의 성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마치 성을 전시한 야외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이곳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도입한 프랑스와 1세때부터 루아르지역에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귀족들의 아름다운 성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전성기 때에는 성이 3,000개에 이를 정도로 대단한 규모를 자랑했다고 하며, 현재는 대략 1,200여개의 성들이 남아 있고 작은 성들은 아직도 개인 저택으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다빈치의 숨결 '앙부와즈'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수 있는 성들이 루아르 지역에는 많이 있는데, 그중의 백미는 르네상스가
낳은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황혼의 열정이 숨어 있는 '앙부와즈(Amboise)'성이다.
특히 앙부와즈에 다빈치의 무덤으로 추정도되는 예배당 앞에 서면 500년전 다빈치의 예술혼이 온몸을 쓰다듬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천재로 불리는 다빈치는 조국 이탈리아가 아니라 프랑스 앙부아즈라는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3년 동안 소박하고 조용하게 살다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다빈치의 예술혼이 숨어 있는 앙부아즈 클로 뤼세(Clos-Luce)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는데 매년 그를 좋아하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 클로 뤼세는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그의 제자 멜치와 하인 비라니스와 함께 1519년 5월 아름다운 생애를 마칠때까지 다빈치가 산 곳이다.
앙부아즈에서 남은 생을 보낸 다빈치는 이곳에서 궁정화가로서, 또한 궁정 설계자로소 자신의 생을 조용히 정리하며 신이 부여한 마지막 생명이 다할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았다.
박물관 안에는 프랑스 IBM사가 1960년대 초 다빈치의 설게도를 참고로 해서 만든 모형제작물이 영구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성녀 잔 다르크가 샤를 7세에게 신의 계시를 전했다는 '쉬농성(Chinon Castle)'을 꼭 들러보길 권한다.
숲과 정원, 그리고 강의 완벽한 조화
수천여개의 루아르 고성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성은 바로 '샹보르(Chanmbord)'이다.
이 성은 남성적 이미지를 지녀 웅장하고 듬직하며 하늘을 향해 나란히 솟아 있는 여러개의 지붕과 탑이 아주 인상 깊은 곳이다. 루이 14세에 이르러 완성된 이 성은 방이 무려 450여게나 될만큼 루아르 지역에서 가장 큰 성이다. 일꾼 1,800여명이 15년에 걸쳐 완성한 샹보르는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룬 르네상스풍의 건축양식이다. 특히 성 지붕과 탑이 기복이 심한 요철을 이뤄 중세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반대로 '쉬농서'성은 예쁘고 아기자기한 여성 이미지를 지녔다. 특이한 점은 400년 동안 대대로 주인이 여자였다는 점이다. 이곳은 성곽 주변을 장식하는 정원과 끝없이 늘어선 플라타나스 숲길이 우리의 눈길을 유혹한다. 수백년이 된 듯한 아름드리의 나무들이 1km가양 늘어선 숲은 마치 터널을 연상시킬민큼 아름답다. 숲과 정원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이곳은 셰르강 위에 떠 있는 60m의 회랑과 탑이 빚어내는 경치가 특히 아름다운데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보물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루아르 고성을 여행하는 동안 마치 별천지에 온곳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인간이 만든 완벽한 동화의 도시처럼 성이 내뿜는 다양한 향기는 삶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기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만해 선생의 시구처럼 루아르 고성 지역의 꽃다운 모습은 사람이 가진 오감으로 모두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 아닐까.
# 104 [프랑스]뚜르 찾아가기
2. 뚜르 시내 돌아보기
뚜르역에는 환전소, 샤워실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다만 현재(2003년 4월1일 기준) 짐보관소는 일시 중지된 상태이므로, 자칫 짐보관이 어려울수도 있는 단점이 있다. 뚜르역에 도착하면 가장먼저 역 앞 광장을 앞에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아가 고성 투어 프로그램을 예약하고, 시내지도를 구하도록 한다. 투어 프로그램의 출발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고풍스러운 뚜르 시내를 돌아보자
뚜르 역 앞으로는 사람들로 활기를 띤 카페가 늘어선 거리를 지나서 플랑부아양 고딕 양식이 아름다운 생 가티엥 성당(Cathedrale St. Gatien)으로 가자. 13세기에 짓기 시작해 16세기에 완공된 이 성당은 중세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성당 오른쪽 대로인 콜베르 거리(Rue Colbert)를 따라 걸으면 이 지방에서 가장 섬세한 건물이라 평을 받는 구앵 관(Hotel Gouin)이 나타난다. 이곳은 원래 어느 비단 장수의 집이었는데 지금은 고고학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이 길을 조금 더 가면 플뤼므로 광장(Place Plumereau)이 나타난다. 구시가의 중심이며 카페와 상점, 화랑들이 줄지어 있는 이곳은 투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 광장에서 브리소네 거리(Rue Briconnet)로 들어서면 반목조의 건물들이 특이하다. 구시가에서 강변으로 나가면 잔잔한 르와르 강이 시간이 멈춘 듯 더욱 운치가 있다.
<Cathedrale St. Gatien & 뚜르 시내>
3. 투어 참가하기
투어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선 위에 언급했듯이 인포메이션 센타를 찾아가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인포메이션 센타에 가면 자세히 투어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많은 브로셔를 통해서 직접 투어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도 있다.
투어는 오전투어, 오후투어, 하루투어로 나누어 지며, 여름 성수기의 경우엔 나이트 투어도 진행된다.
오전투어의 경우는 보통 09:00~12:30 까지 진행되며, 오후투어는 13:30~19:00 까지 진행된다.
뚜르에서 숙박을 하지 않는 경우엔 파리에서 당일로 뚜르를 다녀올 수 있으며 오후투어를 참가한 후 파리로 돌아올 수 있다.
오후투어의 경우엔 방문하는 고성이 제한적이므로, 자신이 꼭 가고싶은 성들이 포함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것이 좋으며 무엇보다도 르와르 지방 고성의 하이라이트인 쉬농소 성(Chenonceau) 과 샹보르 성(Chambord)이 포함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신청하도록 하자. 하지만 쉬농소와 샹보르 성은 거리가 좀 떨어진 편이라 오후투어를 통해선 두곳이 포함된 투어를 참가하기는 쉽지 않다. 참가인원이 6명 이상인 경우는 자신들만의 일정의 투어를 계획할 수도 있다.
투어참가비는 오전투어는 15-20 euro, 오후투어는 25-30 euro, 하루투어는 40-50 euro 정도이며, 투어요금에는 입장료, 식사비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투어 참가를 하게되면 성 입장료를 할인된 요금에 제공받을 수 있으며, 영어회화가 가능한 운전기사가 성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입장전에 안내해 준다.
투어 프로그램의 요금은 다소 비싸 보이지만, 직접 성들을 방문하는 수고스러움과 편하지 않은 교통편등을 감안한다면 투어 프로그램 참가를 적극 권장한다.
투어회사 : www.tourevasion.com
4. 르와르 지방 고성들,,
1> 쉬농소 성(Chatear de Chenonceau)
투르에서 기차로는 20분, 버스로는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성 입구에서 플라타너스가 일렬로 열을 이루고 있는 길을 한참 걸어 가면 셰르 강에 닻을 내린 배처럼 낭만적으로 또 있는 성이 나타난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보석이라고 불릴 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 성은 대대로 성의 영주가 여자였던 것도 특이할 만하다. 원래 이 성은 앙리 2세가 그의 애인이었던 디안느 드 푸와티에에게 선물한 것이었는데 앙리 2세가 죽자 왕비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디안느로부터 이 성을 빼았고 그녀를 쇼몽성으로 쫓아 버렸다. 카트린느는 성을 빼앗은 후에 여러 곳을 개조하면서 메디치
정원을 안뜰에 만드는 등 자기 취향의 성으로 만들어 나갔다. 메디시스 정원에서 보는 성의 모습도 매우 아름답다.
성안에는 교회와 도서관, 밀랍 인형관, 화실, 프랑시스의 방 등이 있다. 성과 이어진 아치형의 다리 위에는 60미터 길이의 화랑이 있는데 이 우아한 그랑드 갈러리(Grande Galerie)는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가 만들도록 했으며 피렌체스타일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 화랑에서 내려다 보는 셰르 강의 풍경도 아름답다. 쉬농소 성 아래로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원래는 부엌에서 바로 강물을 길어 쓸 수 있도록 하는 취지였다고. 지금은 이 강에서 배를 탈 수 있는데 배로 다리의 아치 아래를 지나가는 느낌은 특별하다.
개방 : 3월~ 9월 0900-1900, 10월 0900-1800 11월~2월 0900-1700
빛과 소리 공연: 쉬농소 여인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6명의 여인들이 우아한 저택을 만들고 그 곳에서 화려한 축제를 연다는 내용. 6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매일 22시 15분에 공연.
Tel : (33)(0) 2 47 23 94 45
2> 샹보르 성(Chateau de Chambord)
르와르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샹보르 성은 기차로는 갈 수 없고 투르역앞에서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성 안에는 방이 무려 4백 40여개나 있는데 이것은 베르사이유 궁과 거의 비슷한 규모다. 1519년 사치스러웠던 그럼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려 했던 프랑수아 1세의 명에 의해 사냥 숙소로 건축을 시작해 루이 14세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내부는 2층 구조로 되어 있어 오르내리는 사람이 서로 부딪히지 않는 나선형 계단, 프랑수아 1세의 방, 성에서 가장 넓은 루이 14세의방, 한때 무도회와 연극이 상연되었던 둥근 천장의 근위실 등을 둘러 볼 수 있다. 대칭성을 강조한 르네상스 스타일의 이 성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은 지붕의 테라스다. 이곳으로 나오면 눈 앞으로 넓은 잔디밭이 시원하게 펼쳐지면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블루아 성에서도 버스를 이용해 여행할 수 있다.
개방 : 0930-1215 /1400-1815 (1월2일-3월31일/10월1일-12월31일 : 1715, 7월, 8월 : 1915)
휴관 : 1월 1일, 5월 1일, 11월 1일, 11월 11일, 12월 25일
빛과 소리 공연 : 샹보르성에서의 생활을 재현해 놓은 쇼. 4월 15일부터 10월 15일까지(공연시간은 해가 지는 시간에 따라 변동) 7월 : 22시 30분, 8월 : 22시
Tel : (33)(0) 2 47 23 94 45
3> 아제 르 리도
동화 속의 성처럼 외호에 둘러싸여 아름답다. 발자크가 '앵드르의 보석'이라고 경탄했을 만큼 르와르의 고성 중 가장 품위있고 여성스럽다. 성에 이르는 좁은 골목길에는 창문을 예쁜 화분으로 장식한 집들이 늘어서 있어 전형적인 프랑스 시골 마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1518년부터 1523년 사이에 건축된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아제 르 리도 성(Chateau d'Azay-le Rideau)은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그리고 강물에 비치는 성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프랑스 양식과 이탈리아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완벽한 건축물로 평가되는 아제 르 리도 성은 가구나 그림, 태피스트리 등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교통 : 투르 역에서 아제 르 리도 역까지는 기차로 20분 정도 소요되고 역에서 성까지는 표지판을 따라 30분 정도 걷는다.
나이트투어 : 5월부터 9월까지 매일 저녁에 나이트 투어가 펼쳐지는데, 르와르의 고성들 중 밤의 모습이 특히 아름다우므로 이 성으로의 나이트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좋을 것이다.
개방 시간 : 0930-1800
휴관 : 1월 1일, 5월 1일, 11월 1일, 11월 11일, 12월 25일
빛과 소리 공연 :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들이 엮어내는 화려하고 감동적인 쇼.
5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매일 밤.
Tel : (33)(0) 2 47 05 58 08, (33)(0) 2 47 45 44 40, (33)(0) 2 47 31 48 05
3> 그 외의 볼 만한 성들
◉ 앙브와즈 성(Chateau d'Amboise)
투르의 동쪽, 쉬농소 성 건너편 지역에 있는 앙브와즈 성은 샤를르 7세가 이탈리아에서 건축가를 불러와 짓기 시작해 샤를르 8세때 완성하였다. 때문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많이 띠고 있는 성이기도 하다. 이 성에는 아픈 역사가 간직되어 있는데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등극하자 당시 구교도였던 기즈 공이 실권을 쥐게 되었고 이에 반발한 신교도들이 기즈공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이 되어 이 성에서 약 1천 5백여 명이 처형되었다. 앙브와즈 성은 다빈치가 그의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한데 그가 사용했던 방은 현재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그의 유해는 성 안에 있는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 쉬농 성(Chateau de Chinon)
투르의 서쪽 비엔느 강변에 있는 폐허의 요새와도 같은 성이다. 잔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샤를르 7세에게 전달했던 곳으로, 성의 내부에서 잔다르크의 이야기가 담긴 것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쉬농 역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골목과 길들은 오래된 집이나 와인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으므로 남다른 운치를 느낄 수 있다. 투르에서 기차로 약 40분 걸리며 쉬농역에서 성까지는 걸어서 약 7분 정도 소요된다.
◉ 위세 성(Chateau d'Usse)
투르외 서쪽 20킬로미터, 르와르 강변에 있는 위세 성은 샤를 페로의 동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성 안에 동화 속 이야기를 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1485년에 건축된 이 성은 동화 속의 성처럼 하늘로 솟아 오른 첨탑이 주변의 강, 산과 어울려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 랑제 성(Chateau de Langeais)
투르의 서쪽, 르와르 강을 따라 내려가다 강변에 있는 성으로, 백년 전쟁이 벌어졌을 때 영국은 이 성을 차지하기 위해 프랑스와 격심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성은 이러한 대립이 반영하듯 요새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ㄷ. 투르에서 국도를 이용하여 이곳에 도착할 수 있으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12시~2시는 제외)개관하고 있다
◉ 앙제 성(Chateau de Angers)
투르와 낭트의 중간 지점에 있는 성으로 군사적인 목적이 강한 성이다. 그 증거로 성벽의 외부에 7개에 이르는 망루가 있다. 내부에는 니콜라 바티유가 1375년부터 1380년까지 약 5년에 걸쳐 만든 길이 1백 7미터, 높이 5미터의 태피스트리가 전시되어 있다. 투르에서 기차로 약 20분 소요되며,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여름에는 6시 30분까지) 개관한다.
◉ 블루아 성(Chateau de Blois)
13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왕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건축 양식을 택해 증축했기 때문에 이곳에는 다양한 건축 양식 혼합 되어 있다. 처음에는 블루아 백작 개인 소유의 성이었지만 루이 12세가 정권을 잡은 이후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그 뒤 왕위 계승을 위한 암투가 벌어지면서 앙리 3세가 신교도였던 기즈 공을 암살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투르에서 약 40분 정도 소요되며, 블루아 역에서 버스를 이용해 성까지 올라갈 수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관한다
◉ 쇼몽 성(Chateau de Chaumont)
투르와 블루아의 중간, 르와르 강변 언덕에 위치한 성이다. 투르에서 버스 투어를 이용하면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샤를르 1,2세때 만들어진 성이다. 이곳은 왕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와 앙리 2세의 애인이었떤 디안느 드 푸아티에가 싸워 결국 디안느가 쫓겨온 성이기도 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20분까지 개관한다.
◉ 슈베르니 성(Chateau de Cheverny)
블루아 성으로부터 15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슈베르니 성은 슈베르니 백작이 1634년 이 성을 지은 후 현재까지 그의 자손들이 소유, 관리하고 있는 성이다.화려하게 꾸며진 각 방에는 18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져온 거대한 샹들리에 뿐만 아니라 각종 무기와 태피스트리 등을 구경할 수 있다. 블루아 역에서 버스를 이용해 여행할 수 있으며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둘러 볼 수 있다.
자료협조 : 프랑스 관광청
# 36 프랑스 [프랑스]고성투어 쉬농소성
셰르 강의 낭만 쉬농소 성
투르에서 기차로는 20분, 버스로는 1시간정도 소요된다.
성 입구에서 플라타너스가 일렬로 열을 이루고 있는
길을 한참 걸어가면 셰르 강에 닻을 내린 배처럼 낭만
적으로 떠 있는 성이 나타난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보석이라고 불릴 만큼 빼어난 아름
다움을 자랑하는 이 성은 대대로 성의 영주가 여자였던
것도 특이하다.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뽐내며 셰르 강 위에 걸쳐 있는 쉬농소 성은 프랑수아 1세 때 왕실의 국고 관리인이었던 Thomas Bohier가 1513년에 건축한 것이다.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보물인 쉬농소 성은 물과 푸르른 숲, 정원, 무성한 나무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자연 속에서 우아하고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가로수길을 걷다보면 강 위에 떠 있는 쉬농소 성이 여성스런 모습으로 조용히 방문객을 기다린다.
성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15세기의 건축 양식이 남아 있는 둥근 탑이 따로 떨어져 있고 모서리마다 작은 탑이
있는 건물과 다리 위에 있는 본채가 서로 이어져 있다.
이 성의 멋을 한껏 더해주는 것은 아름답게 잘 정돈된 정원이다.
양쪽 정원을 앙리 2세의 애첩이었던 디안 드 푸아티에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재미있다. Bohier가 쉬농소 성을 세운 이래 400년 동안 많은 여주인을 거쳐온 이곳은 '여인들의 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원래 이 성은 앙리 2세가 그의 애인이었던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선물한 것이었는데 앙리 2세가 죽자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디안으로부터 이 성을 빼앗고 그녀를 쇼몽 성으로 쫓아버렸다.
카트린은 성을 빼앗은 후에 여러 곳을 개조하면서 메디시스 정원을 안뜰에 만드는 등 자기 취향의 성으로 만들어나갔다.
메디시스 정원에서 보는 성의 모습도 매우 아름답다.
성 안에는 교회와 도서관, 밀랍 인형관, 화실, 프랑시스의 방 등이 있다. 성과 이어진 아치형의 다리 위에는 60미터 길이의 화랑이 있는데 이 우아한 그랑드 갈르리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만들도록 했으며 피렌체 스타일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 화랑에서 내려다보는 셰르 강의 풍경도 아름답다.
쉬농소 성 아래로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원래는 부엌에서 바로 강물을 길어 쓸 수 있도록 하는 취지였다고.
지금은 이 강에서 배를 탈 수 있는데 배로 다리의 아치 아래를 지나가는 느낌은 특별하다.
# 35 프랑스 [프랑스] 고성투어 앙부아제
투르의 동쪽, 쉬농소 성 건너편 지역에 있는 앙부아즈
성은 샤를 7세가 이탈리아에서 건축가를 불러와 짓기
시작해서 샤를 8세 때 완성했다.
때문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많이 띠고 있는 성
이기도 하다.
이 성에는 아픈 역사가 간직되어 있는데,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등극하자 당시 구교도였던 기즈 공이 실권을
쥐게 되었고 이에 반발한 신교도들이 기즈 공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이 되어 이 성에서
약 1,500명이 처형되었다.
앙부아즈 성은 다빈치가 그의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한데 그가 사용했던 방은 현재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
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그의 유해는 성 안에 있는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샤를 13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에 의해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건축된 앙부아즈 성은 최고의 왕궁 중 하나다.
프랑스 역대 왕들의 발자취를 따라 고딕과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화려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성 안에는 빼어난 가구 콜렉션이 훌륭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앙부아즈 성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술적인 정열을 불태우며 인생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왕 덕분에 이곳에서 천재적인 예술혼을 발휘하며 죽음을 맞이했던 그는 15세기의
우아하고 찬란한 고딕 스타일 건물, 생 튀베르 예배당에 편히 잠들어 있다.
앙부아즈 도시 위쪽에 솟아 있는 성의 정원에서 루아르 계곡으로 이어지는 파노라마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 34 프랑스 [프랑스] 고성투어 쇼몽
블루아에서 서쪽으로 17km정도 떨어진 Montrichard
주에 있는 성으로 최초의 성채는 10세기에 세워졌으나
루이 11세의 명령에 의해 1461년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후 Pierre d’Amboise에 의해 재건된 쇼몽성은 중세
양식과 함께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도 받게 되었다.
1550년 이 성을 차지하게 된 카트린느는 앙리 2세가 죽은 뒤 그녀의 라이벌이었던 디안느에게서 쉬농소 성을 빼앗고
대신 이 성을 주었다.
옛 바시니 지방의 주도(主都)였다. 1814년 3월 영국·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에 대항하기 위해
이곳에서 쇼몽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군의 총사령부가 이곳에 주둔하였다.
# 33 프랑스 [프랑스]고성투어 샹보르성
루아르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샹보르 성은
기차로는 갈 수 없고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성 안에는 방이 무려 440개나 있는데, 이것은 베르샤유
궁과 거의 비슷한 규모다.
1519년 사치스러웠던, 그럼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자랑
하려 했던 프랑수아 1세의 명에 의해 사냥 숙소로 건축을 시작해 루이 14세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쉬농소가 여성적이라면 샹보르는 남성다운 매력을 가진 성이다. 거대한 규모 면에서 샹보르는 베르사유 궁전을
예고하는듯하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서서히 자태를 드러내는 하얗고 웅대한 샹보르성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는데,
특히 일몰 때의 샹보르는 매우 인상적이다.
사냥터로 쓰였던 울창한 숲과 잘 어우러진 샹보르성은 르네상스식 건축 양식과 풍부한 장식이 전성기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특히 궁전 중앙에 있는 크고 육중한 계단과 테라스는 훌륭한 작품 중 하나다.
내부에는 2층 구조로 되어 있어 오르내리는 사람이 서로 부딪치지 않는 나선형 계단, 프랑수아 1세의 방, 성에서
가장 넓은 루이 14세의 방, 한때 무도회와 연극이 상연되었던 둥근 천장의 근위실 등을 둘러볼 수 있다.
대칭성을 강조한 르네상스 스타일의 이 성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은 지붕이 테라스다.
이곳으로 나오면 눈앞으로 넓은 잔디밭이 시원하게 펼쳐지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 97 어느 천재 이야기(11)-프랑스에 온 다 빈치 그리고 죽음
프랑스 “클로 루체”에서
1) 프랑스를 향하여(1516)
르와르 강가의 고성루트는 익히 알려진 코스이다.
쉬농소, 앙부와즈, 샹보르…
모두가 전통과 규모, 아름다움을 갖춘 보석같은 성들이다.
(샹보르와 쉬농소 성)
하지만 이 고성들 사이에 사실은 더 뜻깊은 문화유적이 있다.
진주속의 다이몬드라고 할까…
여하튼 나에게는 상류 귀족층의 권력과 부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고성들보다
한 작은 그러나 매우 아름답고 우아한 “클로 루체”라는곳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왜 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클로 루체…!
이곳은 바로 다빈치의 마지막 발길이 머문곳이기 때문이다.
1516년에 로마를 떠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찿아든곳
그가 죽기 까지 그의 생애 마지막 3년을 보낸곳이 바로 이곳이다.
말하자면 권력이나 富가아닌 “정신”이 문화유산인곳이기때문이다.
도대체 레오나르도는 어떻게 프랑스로 오게 되었을까?
이곳 클로 루체에서의 삶은 어떠했는가?
사실 레오나르도는 로마에서 매우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런 전망이 보이지 않는 로마에서 생활은 더 이상 무의미했다.
교황은 레오나르도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레오나르도는 연금술에 심취한 종교적으로 좀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고 있었다.
더우기 바티칸은 신예 라파엘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곳으로 갈수도 없었다.
플로렌스는 미켈란젤로, 베니스는 티티안의 무대였다.
그런가하면 이미 18년이나 일한바 있던 밀라노는 정치적으로 당시 너무 불안정했다
과연 어디로 갈것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바로 이 상황에서 프랑스와 1세의 초청장이 도착한것이다.
거기에는 아주 후한 조건이 쓰여져 있었다.
프랑스에서의 멋진 숙소, 년 700 금 에큐라는 보수,
무엇보다 레오나르도에게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꿈꾸고 일하는 삶이 보장되었다.
모든 것에 왕 자신의 따뜻한 배려가 넘쳐나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몇 달후 기꺼이 초청을 받아 들였다.
(젊은 나이의 프랑스와 1세 모습)
2) 다빈치가 알프스를 넘은 까닭은?
프랑스와 1세는 과연 어떻게 레오나르도를 초청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고향과 조국인 이태리를 떠나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프랑스와 1세는 이때 즉위한지 2년도 채 안된 22세의 패기넘치는 젊은 왕이었다.
즉위하자마자 그가 한 일은 이태리와의 전쟁이었다.
샤를 8세, 루이 12세등 그의 선왕들이 이태리에서 겼었던 패배를
한꺼전에 일소할 작정이었다.
유명한 마리그낭 전투가 바로 이것이다
마리그낭 전투는 1515년 9월에 밀라노 근처 마리간이라는곳에서 일어났다.
3만의 군사와 함께 알프스의 아르쟝티에르 고개(le col de l'Argentière)를 넘은
프랑스와 1세의 프랑스군은 스위스 용병을 물리치고 밀라노를 굴복시킨다.
(마리그낭 전투)
왕의 군대는 승리했고 왕은 당당히 입성했다
평화조약이 교황이 참석한 가운데 블료냐에서 열렸다.
레오나르도는 교황을 동행하여 이 회합에 참석했다.
프랑스와 1세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만남이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프랑스와 1세는 비록 전쟁에서 이겨 당당한 군주의 모습이었지만
당시 나이는 불과 22세, 그리고 즉위한지 2년차의 아주 젊은 왕이었다.
사절단의 일원으로 블로냐에 간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프랑스와 1세를 만나게되었고
그들간의 대화는 프랑스와 1세에게 깊은 인상을 안겨 주었다
“그는 단지 조각가, 화가가 아니라 철학자요 대 천재이다”라고 프랑스와 1세는 대화후 감격했다.
프랑스와 1세는 사실 이미 레오나르도를 알고 있었다.
밀라노에 있는 최후의 만찬을 본후 너무 감격하여
심지어는 “최후의 만찬”을 몽땅 떼어가려고까지 했던 그였다.
프랑스와 1세는 레오나르도를 자신의 궁정 화가로 임명한다.
그리고 돌아가 초청장을 보내온것이다.
그만큼 프랑스와는 레오나르도를 탐내고 있었던것이다.
다 빈치는 하지만 오랫동안 숙고를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마침” 그동안 후원자였던 쥴리우스가 1516년 3월에 죽는다.
레오나르도는 이제 더 이상 로마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밀라노나 플로렌스로 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그는 초청을 받아 들였다.
그는 프랑스 앙브와즈를 향해 길을 떠났다.
이것은 그의 조국과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그는 결국 다시 이태리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프랑스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예감을 했고 각오도 했을것이다.
이미 그의 나이는 60을 넘어 63세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처분했다.
그리고 가져가야할 것은 다 나귀등에 실었다.
이것은 프랑스에로의 여행이 사실 귀환을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원웨이 티켓”만으로 그는 여로에 오른것이었다.
로마에서 프랑스에로의 길…
이것은 결국 알프스를 넘어야하는 험한 여정이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3개월이나 소요된 무척이나 힘든 여정이었다.
(레오나르도가 넘은 Genevre산 고개가 지도상에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언제 출발했을까?
정확하게 알려진바는 없다.
하지만 그가 1516년 8월에는 아직 로마에 있었음은 확실하다.
따라서 8월이후이다.
그리고 1517년 5월에는 이미 클로 루체에 있었다.
따라서 이 사이에 출발했고 도착했을것이다.
단지 겨울에 이 험한산을 넘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1517년 봄이라고 보는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레오나르도 일행은 출발했다.
일행은 제자 멜치(Francesco Melzi )와 살라이, 그리고 시종 바티사 드 빌라니 이었다.
그들의 잡다한 세간 사이, 나귀위에서는
무엇보다 그가 애지중지한 그림 3점이 실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모나리자, 성 안나 그리고 프랑스에서 완성하게되는 성 세례요한…
알프스에서 그들이 넘은 고개는 1858미터의 몽 제네브르 고개였다.
이 산은 로마를 정복하기위해 한니발이,
골족과 게르만을 점령하기위해 시저가 넘었던 산이었다 .
이제는 정복하기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기위해,
정복자가 아니라 가장 위대한 노구의 대 천재가 넘고있는것이다
(그리고 약 500년후...레오나르도 일행이 넘었을 고개를 넘은 사람들)
봄이라 해도 아직 눈발은 흩났렸을것이고,
현기증나는 절벽아래는 얼어붙어 있었을것이다.
특히 알프스 정상의 만년설은 레오나르도에게 많은 인상을 안겨주었을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상에 관한 그림이나 글이 남아있지 않음은 아쉽다.
여하튼 일행은 알프스를 넘었고 그레노블, 리용을 거쳐
레오나르도는 드디어 왕이 기다리고 있는 앙브와즈성에 도착했다.
왕은 약속대로 그에게 최상의 대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짐을 풀게된 클로 루체는 왕의 성인 앙브와즈성과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을만큼
바로 근처에 있는 매우 아름다운곳이었다.
사실 왕은 이 통로를 통해 와서 환담을 나누고 돌아가기도 했다.
3) 다빈치의 마지막 자취 “클로 루체”에서
클로 루체는 약 1477년경에 에띠엔 로룹이 세운 작은 성이었다.
말하자면 레오나르도가 거주하기 시작했을 때 40년밖에 흐르지 않은 “새집” 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샤를 8세,
특히 프랑스와 1세의 어머니 루이즈 드 사브와가 살았던곳이었다
따라서 프랑스와에게도 대단히 소중한 집이었다.
하지만 그는 선뜻 이집을 레오나르도에게 내주었던것이다.
큰 환대였다.
왕은 결코 압박을 주지도 초조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에게 충분한 휴식과 여유를 보장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는 주로 노트정리로 소일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몇가지 흥미로운 행사를 레오나르도는 멋지게 치루었다.
1517년 10월 1일
왕이 직접 참석했던 이날의 성 파티를 레오나르도는 멋지게 치루어냈다.
그로부터 9일후(10월 10일) 레오나르도는 방문객을 맞는다
추기경 일행이었다.
그 일행에게 레오나르도는 작품 3개를 보여주었다.
이 방문에 같이 했었고 후에 회상기를 쓴 일행중 한사람은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한 플로렌스의 여인, 성 안나, 그리고 세례요한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과연 여기에서 플로렌스의 여인이 바로 모나리자였을까?
확실하지않다
이것은 너무 복잡한 수수께끼이다.
만약 이것이 지오콘도 모나리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프랑스와 1세는 모나리자를 손에 넣을수 있었을까?
일단 이 그림은 살라이에게 넘겨졌고 이후 그로부터 6000F에 사들였을까?
아니면 직접 “레오나르도”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받은것일까?
이 외에도 레오나르도는 여러차례 왕을 위한 파티를 열었다.
그때마다 입에서 꽃을 토하는 사자등 레오나르도의 사자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다
클로 루체에 사는동안 가장 큰 계획은 근처에 있는 “로마랑탱”이라는곳에
성을 세우기로 한것이었다
프랑스와 1세는 로마랑탱에 새로운 성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아마도 바로 이것이 레오나르도를 초대했던 가장 큰 이유였을것이다
레오나르도와 왕은 몸소 로마랑탱에 머물면서 이 계확을 구상했다.
레오나르도는 성을 짓는 정도를 넘어 프랑스와1세를 위한 새 로마를 세우려까지 했을까?
하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아, 레오나르도가 10년 아니 5년만 더 살았더라도…
레오나르도의 죽음으로 로마랑탱 성 건축은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아, 만약 신이 다 빈치에게 거의 90세까지 살았던 미켈란젤로의 수명을 허락했었다면
건축사에서 불멸의 작품이 탄생했었을것이다
하늘은 천재를 내렸건만 마지막 기회는 허락하지 않았으니
천상의 비밀이 지나치게 탄로됨을 우려했던 탓일까?
레오나르도는 로마랑텡성을 시작조차 못한채 숨을 거두고 말았던것이다
1519년 4월 23일에는 앙브와즈에서 공식 유언장을 쓴다.
노트와 작품들은 멜치가 관리자로, 시종은 두터운 외투를,
살라이는 그러나 거의 빈손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은 맞았다.
그로부터 열흘도 안된 5월 2일 레오나르도는 생을 마감했다.
후일 잉그르의 그림에서처럼 레오나르도는 왕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것은 아니었다
이 시각 왕은 자기 조카의 세례식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제자, 하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인류 최고의 대 천재 레오나르도는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가 그 토록 알려고 열망했던...
그가 잠을 자고 영면한 침대는 클로 루체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레오나르도의 침실)
레오나르도의 사망소식을 듣고 세례식에 참석하고 있던 왕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진심으로 레오나르도를 아버지처럼 존경했던것이다.
물론 너무 빨리 허무가 그를 초청할때의 기대를 가로채 버린것은 사실이다.
레오나르도를 초청할 때 프랑스왕은 보다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왕의 환대가 손해본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결정은 현명한것이었다.
(루브르에 걸린 쟝 클루에의 작품으로서의 프랑스와 1세)
대 천재를 프랑스땅에 잠시나마 살게하고 활동하게 함으로써
프랑스는 “레오나르도의 나라”가 되었고 이 전통은 피카소, 샤갈로 이어져 갔다.
또한 프랑스는 값을 매길수 없는 레오나도의 중요한 세 작품을 가질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루브르에 걸린 작품들은 이 덕택이다.
레오나르도의 주검은 8월 12일에 콜레기알 상 프로렌틴에 매장된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에게 영원한 안식은 허용되지 않았다.
종교전쟁와중에서 이곳은 파괴되었다
더우기 400년후 나폴레옹 1세로부터 이 앙브와즈성을 하사받은 Roger-Duco는
앙부와즈성의 일부뿐만 아니라 “콜레기알”까지 허물어 버리고 만다
이후 그의 유해는 어찌 되었을까?
쓰레기장로 갔다는말도 있고
아이들이 그의 해골로 공놀이하고 했다는 이야기기까지 있는판이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여하튼 그의 뼈는 다시 수습되어 앙브와즈성의 Saint-Hubert에 다시 묻혔다.
( 다 빈치 유해가 다시 가 묻힌 Saint-Hubert. 앙브와즈 성내에 있다)
실제 레오나르도의 유해중 어느부분이, 어느만큼이나 수습되어 묻혔는지는 알수없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유해가 묻힌곳으로 이곳은 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르는 모짜르트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수 있을정도일뿐이다
# 98 다 빈치의 마지막 거처 "클로 루체"를 방문하고...
레오나르도 연재가 끝났다
살펴보니 일년이나 걸린 작업이었다.
게으름이었을까?
아니...나는 마지막을 남겨두고 있었던것이다.
그의 마지막 자취가 남아있는
클로 루체를 방문하기전에는 연재를 마무리할수 없었다
(마담유의 그림 이야기 1-11회 참조)
결국 나는 클로 루체를 다녀왔고
키보드에서는 다시 불꽃이 일었다.
이렇게해서 나의 "어느 천재 이야기" 다빈치 연재는
오랜 머뭇거림끝에 그러나 전광화석처럼 그 피날레를 맞이할수 있었다.
이제 클로 루체 방문기를 소개한다
***
(클로 루체)
“클로 루체”는 정말 앙브와즈성에서 가까운곳에 있었다
그 만큼 레오나르도를 가까이두려했던 프랑스와 1세의 진심이 느껴진다.
레오나르도가 그의 생애 마지막 3년을 보낸 이곳
다 빈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하여
플로렌스. 밀라노, 로마를 거친 그의 여정은
사실은 지금도 잘 알려지지않은 작은 마을 앙브와즈에서 막을 내리게된다.
(클로 루체에 살 때의 레오나르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화상)
어쩌면 앙브와즈는 격에 맞지않게 너무 큰 “손님을 가진 행운의 도시라고 할것이다.
최고의 르네상스인, 최후의 중세인, 최초의 근대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를 위해
파리가 더욱 격에 맞는 도시였지않았을까?
하지만 앙브와즈에 왔을 때 레오나르도의 나이는 이미 64세
사실 파리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노동이었을지도 모른다
휴식과 관조, 안락과 창조성
이것이 필요했던 그에게 앙브와즈의 “클로 루체”는 오히려 이상적이었다.
나는 이것을 직접 클로 루체를 방문한뒤 확인할수 있었다
설레이는 가슴에 끼어드는 죄스러운 마음까지 억제할수 없었다
파리 체류 6년에 그것도 멀지도 않은 이곳을 처음 찿는다는 부끄러움때문이었다.
그의 유해가 묻힌 St.Hubert는 사실 몇 년전에 가 보았지만
거기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은 클로 루체를 들리지못했던것이다.
차를 주차시키고보니 큰 담이 길을 따라 이어지고있다.
바로 클로 루체의 담인것이다.
담의 길이만으로도 이미 집의 규모를 짐작할수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본 클로 루체는 밖에서 상상한것보다 훨씬 더 컷다
소담한 문을 지나 입구에서 입장권을 샀다
일행은 가족과 나의 손님이었다.
여기에서부터 상당히 드 넒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이미 사진에서 익숙해진 건물전체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입구쪽에서 보이는 클로 루체)
앙브와즈성 같은 엄청난 규모는 아니지만
그냥 빌라로 보기에는 오히려 더 큰 건물이었다.
그냥 보기에도 3-4층 건물 규모였다
르네상스식 탑과 외벽의 단장이 무척 아름답게 다가온다
특히 코스가 시작하는 쪽은 이층 베란다식 복도로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방문자들은 건물안으로 들어가 바로 방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입구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면 바로 밖을 향해 툭 터진 이층복도를 걷게된다
(들어가는 입구의 개방형 복도)
다시한번 정원과 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집 자체로도 아름다운 건물이다.
이러한 대 빌라를 통째로 레오나르도에게 내준
프랑스와 1세의 후한 인심에도 새삼 존경이 간다
개방형 복도를 지나니…
아, 거기에 바로 “그 방” 이 있었다
너무 일찍 맞딱드리는 감격에 당황조차 된다
그 방…
바로 레오나르도의 침실이자 그가 영면한 방이다
유명한 붉은 침대가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다.
한 위대한 인간이 숨쉬었던 현장을 보는것은
단순히 관음적 호기심이 아니다.
뭔가 말없는 대화가 이어지는듯한 느낌
영감이 스쳐가는듯한 흥분….
바로 이 기분을 레오나르도의 자취는 허락하고 있었다.
떨어지지않는 발걸음
하지만 다음 방에서 감격은 더욱 진하게 이어져간다
그의 거실 즉 응접실이다.
그가 왕을 맞아 대화를 나누었던곳
가끔씩 찿아온 지기들과 웃음을 터트렸었을 이곳
유명한 일화인 추기경 일행을 맞이한곳도 이 방이었을것이다
낯선 이방인은 공중 한 구석에라도 혹시 그 웃음 한 조각이 남아있지 않을까
헛된줄 알면서도 손을 뻗쳐본다
모든 가구들은 정갈하고 우아하고 중세의 품격이 배어 있었다.
꽈배기 스타일 의자가 이곳의 주인이 16세기의 사람이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
가구는 그대로이되
주인도, 손님도 다 사라진 이곳에 관광객들만 꾸역꾸역 밀려든다
단지 레오나르도만을 보기위한곳인데도 찿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특히 역시 이태리어가 간혹 주위에서 들리곤한다
64년을 이태리에 살고도 마지막 3년을 프랑스에 “뺏긴탓으로”
이곳을 찿아야하는 이태리인들은 과연 어떠한 심정일찌 궁금해진다
프랑스에 고마워할까? 아니면 억울해할까?
몇 개의 방들이 계속된다
하나같이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방들이다
하지만 진짜 레오날드의 자취를 보여주는곳은 더 아래 반 지하층에 있었다
그곳에는 레오나르도가 스켓치하고 구상했던 기술적 고안품들이 모델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는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설명하기에 바쁜방이다
코스는 이제 밖 정원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밖으로 나왔다
빌라와 기념품 가게사이의 정원은 작지만 매우 아름다웠다.
(정원쪽에서 본 클로 루체)
이제 넒은 정원으로 내려가 한바퀴돌 차례이다.
가는 길목에 큰 나무가 보이고 주위로 의자도 설치되어있다.
그리고 스피커에서는 레오나르도의 단상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바로 사색의 나무였다.
크기로 보아 레오나르도때에도 있었을것이라 짐작되는 나무였다
몇 사람들이 레오나르도의 단상을 화두삼아 의자에 앚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지긋이 나무에 손을 대어 보았다
(클로 루체의 숲길)
특이한 건물도 눈에 띄었다
500마리 비둘기를 키웠다는 비둘기집이었다
걸음을 계속하자 더 넒어진 정원이 나오며 그 사이로 작지않은 내(川)도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보트놀이도 레오나르도식 발 동력으로 즐기게 되어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레오나르도의 고안품이 실현되어 설치되어 있었다.
마치 야외 조각공원에 온 느낌이 든다.
냇가에는 물을 길어 올리는 장치가 저 쪽으로는 “탱크”가 보인다.
(탱크뎃상, 모조품 그리고 실제설치작품)
구석구석에 까지 레오나르도의 손길을 느끼도록 세심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다리도 그냥 다리가 아니다
모든것이 레오나르도의 고안품들인것이다
숲 나뭇가지 사이마다 그의 작품들이 투명천에 인쇄되어 걸려 있었다
모나리자의 미소도 그렇게 허공에 걸려 있었다
숲사이로 통과하는 햇볕의 효과를 다분히 이용하는 설치였다
요리조리 숲길을 돌아 나오니 다시 빌라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어느덧 출구가 되어버린 “입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나는 클로 루체를 떠난다
하지만 다시 찿을것이다
클로 루체는 그 가치를 충분하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곳은 단순히 레오나르도의 한때의 거주지가 아니라
기술 박물관이었다.
당시 사람들로써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수 없었던 헬리콥터, 잠수정, 탱크, 물 동력장치….
말하자면 상상력과 사유의 실험장이 클로 루체인것이다.
반복과 일상에서 상상력이 고갈되고 창조성이 바래질 조짐을 보일때면
나는 아들의 손을 잡고 주저없이 이곳을 찿을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가 “옆에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빈치가 클로 루체에서 완성한 마지막 작품 세례요한)
참고
개관시간
1월 :: 10 h à 17 h
2월 – 3월: 9 h à 18 h
4 – 6월 : 9 à 19 h
7-8월: 9 h à 20 h
9-10월: 9 h à 19 h
11-12월: 9 h à 18 h
어른 12유로, 비 성수기(11.17 -2월 28) 8.50유로
# 183 옛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이자 와인의 고장, 디종(Dijon)
옛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이자 와인의 고장, 디종(Dijon)
과거 500여년동안 부르고뉴 공국의 영화로운 수도였었던 디종(Dijon)은 프랑스의 매력적인 지방도시중의 하나로 시내 중심부에는 우아한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디종의 거리 분위기는 발랄하고 신선한데 이것은 주요한 대학이 거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종은 세계에서 가장 큰 포도주 생산지역인 황금해안의 포도밭으로 여행하는 관광객들에게 있어서 기점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와인의 본고장인 디종은 "마스타드"는 특히 유명하다. 그리고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로서 우아한 품격을 가지고 있는 도시로 호화로운 궁전과 옛 가옥이 아름답게 둘러싸여 있는 온화롭고 평화스러운 도시이다. 이 도시까지의 항공이동은 LONGVIC AIRPORT공항을 이용하면 된다.
#가는방법
파리 리옹역(Gare de Lyon)에서 TGV로 약 1시간 40분 소요, IC로 2시간 35분 소요
#가볼만한 곳
성당,사원
노트르담 교회(EGLISE NOTRE DAME)
1250년에 세워진 고딕양식의 교회로써 특히 인상적인 건물이다. 디종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13세기의 스탠드글랴스와 검은 마리아상이 유명한 곳이다. 디종역에서 하차하면 바로 이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예배중일때는 입장이 불가하다.
성미셸성당
Mont St Michel Abbey
궁궐,성
옛 부르고뉴의 영화, 부르고뉴 대공 궁전(Palais des Ducs et des Etats de Bourgogne)
부르고뉴 대공 궁전(Palais des Ducs et des Etats de Bourgogne)은 시내중심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14~15세기에 걸쳐 부르고뉴 공을 위해 건축한 궁전인데 이 성의 고전적인 외관은 17, 18세기에 걸친 보수공사에 기인한다. 19세기에 파괴되어 현재는 원래 건물의 1/3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서쪽은 시청사로, 동쪽은 보자르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리베르테거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디종역에서 걸어서 6분정도의 거리에 있다.
건물의 입장에는 입장료가 필요하다. 궁전은 원래 9세기까지는 가로로만의 간단한 요새에 지나지 않았으나 1336년에 재건되었다. 대공의 거처는 1450년에서 1455년에 걸쳐서 건설되었다고 한다.
# 160 보르도 와인투어 그리고 보르도에 대한 정보
보르도 많은 분들이 이곳을 먼저 생각하면 와인을 떠올릴겁니다.
프랑스 남부의 대 도시이기도 한 이곳은 아펠라시옹에서 양질의 와인을 생산해서
전 세계서 가장 유명한 와인 도시가 되었죠^^
오늘은 이곳을 소개 드릴까 합니다.^^
보르도(Bordeaux)
프랑스 제6의 도시. 대서양 연안의 항구도시인 보르도는 프랑스 제 1의 포도주 집산지이다. 역사 깊은 보르도는 아름다운 18세기 도시의 형태와 매혹적인 부두, 웅장한 건축물 등 고풍스런 매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축복받은 땅이다. 2천년전 가론땅과 포도원 등 사이에 씨앗을 내린 보르도는 유명한 사상가들을 낳은 숭고한 정신이 깃든 도시이며, 르네상스 시대의 풍요로움과 예술, 낭만이 깃든 과거의 도시이자, 최첨단 항공산업과 미래의 우주 산업 기지로서 아끼뗀 지방의 수도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초현대적 도시이다.
▶ 포도주의 집
포도주 제조 과정에서부터 포도주에 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각 지역의 특산 포도주를 시음해 볼 수도 있다.
▶ 보르도의 최고 와인 생산지대 메독(Medoc)
보르도에서 차로 강을 따라 북쪽으로 한참 달리면 나오는 와인생산지대로 이 일대는 가론강(Garonne)과 도르도뉴(Dordogne)강의 물과 대서양이 서로 결합하는 지롱드(Gironde)강의 모래톱 지역이다. 메독은 그냥 메독(Medoc)과 오메독(Haut-Medoc)지역으로 나뉘는데 그냥 메독지역은 하구의 생-비비앙부터 중부의 생-띠장(Saint-Yzan)까지이고, 생-띠장 밑에서부터 블랑끄포르까지는 오메독(Haut-Medoc: 윗쪽 메독의 뜻)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특히 오메독 지역은 Bordeaux AOC(Bordeaux Appellation Origine Controlee) 유명 포도주들의 산지(産地)다.
▶ 그랑 떼아트르(GRAND THEATRE)
그랑 떼아트르(GRAND THEATRE)는1773년에서 1780년까지 7년동안 건축가 빅토르 루이에 의해 건축된 대극장의
화려하고 웅장한 장식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중앙홀은 전세계의 18세기에 지어진 오페라홀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고 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이 이 건물을 보고 100년 후에 지어졌다고 한다.
▶ 성 안드레 성당
프랑스의 고딕양식을 가장 훌륭하게 보존하고 있는 성 안드레 성당(SAINT ANDRE)은 보르도의 유서 깊은 대표적인
상징물로 프랑스의 고딕양식을 훌륭하게 보존하고 있다. 성 소랭 예배당, 성 미셸 예배당과 함께 보르도에 있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중의 하나이다
아펠라시옹 와인투어
보르도 투어리스트 오피스(타운센터)를 가면 아펠라시옹 와인투어에 대한 정보를 얻을수 있습니다.
가격은 약 29유로 정도 되구요^^ 버스는 약 한시에 출발합니다.
투어시간은 약 다섯시간이구요^^
5~9월까지 이게 운영이 된답니다.^^
보르도에서 하루정도 머무시면서 투어 참가하면 되구요^^
아펠라시옹 지역을 가면 아래와 같은 사인을 볼수 있는데요
degustation-이건 와인을 맛볼수 있다는 이야기이구요^^
en vente directe-바로 와인을 살수 있다는 의미이구요^^
vin a emporter-바로 와인을 태이크 어에이 해갈수 있다는 거구요^^
gratuit -공짜라는 의미입니다.
보르도 투어리스트 오피스에 대한 정보
투어리스트 오피스 (타운센터) 보르도 기차역 인포메이션
12 cours du XXX Juillet
33080 Bordeaux Cedex
Tel.: 33 (0) 5 56 00 66 00
Fax: 33 (0) 5 56 00 66 01
otb@bordeaux-tourisme.com Rue Ch. Domercq
Esplanade arrivee
33800 Bordeaux
Tel. & Fax: 33 (0) 5 56 91 64 70
otb.gare@bordeaux-tourisme.com
Days and opening hours Days and opening hours
From November to April:
from Monday to Saturday from 9am to 6.30pm
first Sunday of the month 9h45 - 18h30
Sundays and public holidays from 9.45am to 4.30pm
closed December 25th and January 1st From November to April:
from Monday to Friday
from 9.30 to 12.30
& from 2pm to 7pm
Closed on Sundays and public holidays.
From May to June:
from Monday to Saturday from 9am to 7pm
Sundays and public holidays from 9.30am to 6.30pm From May to June:
from Monday to Saturday from 9am to 12pm and 1pm to 6pm,
Sundays and public holidays from 10am to 12pm & 1pm to 3pm
From July to August:
from Monday to Saturday from 9am to 7.30pm
Sundays and public holidays from 9.30am to 6.30pm From July to August:
from Monday to Saturday from 9am to 12pm and 1pm to 6pm,
Sundays and public holidays from 10am to 12pm & 1pm to 3pm
September and October:
from Monday to Saturday from 9a.m to 6pm
Sundays and public holidays from 9.30a.m to 6.30pm September and October:
from Monday to Saturday from 9am to 12pm and 1pm to 6pm
Sundays and public holidays from 10am to 12pm & 1pm to 3pm
Access Access
Tramway: B & C, Quinconces station Tramway: C, Gare Saint-Jean station
Front of hall B entry
Tel.: 33 (0) 5 56 34 58 07
Fax: 33 (0) 5 56 34 58 08 Days and opening hours
Summer season 2006 (Upcoming dates):
from Monday to Saturday from 8.30am to 6pm
and at THE BORDEAUX WINE FESTIVAL
Access : Airport shuttle
넌남이아냐 지금 보르도에 살고 있는데요 사실 보르도 시내는 별로 볼거 없구요(다른 유럽도시랑 다를게 없어요;) 주위에 포도밭이랑 샤또가는게 좋아요 저도 생떼밀리옹으로 와인투어 갔다왔는데요 재밌었어요 직접 샤또에 가서 시음도 하고 포도주마시는방법도 가르켜주고 그런 다음에 생떼밀리옹 마을로 가서 마을 구경도 했어요 06.02.07 20:24
답글
넌남이아냐 와인투어는 매일매일가는 지역이 다르구요 메독, 생떼밀리옹 등등 와인투어말고 개인적으로 가는 방법도 있는데 기차타고 가면된대요 하지만 기차타고 가면 샤또에 들어가서 시음같은건 못하고 가이드 설명도 못듣죠 생떼밀리옹 같은 경우 마을 구경과 마을 주변의 포도밭은 볼 수 있어요
# 루르드
프랑스 남쪽 스페인과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의 산록에 위치한 루르드는 1858년 2월 11일 이후 18회에 걸쳐 성모 마리아께서 벨라뎃다(1844-1878) 소녀에게 발현하신 후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유명해진 곳이다. 가브강이 흐르고 그 중간에는 살레섬이 있어서 강물을 두 갈래로 나누고 있지만, 그것이 다시 합류되는 곳에 큰 절벽이 있고 그 가운데 마사비엘(massabielle)이라고 부르는 동굴이 있다. 이 곳이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이다. 이스라엘 성지를 제외하고 현대에 가장 유명한 순레지로 꼽히고 있다. 해 마다 순례자가 늘어나 지금은 연중 4백만이 넘는 순례자들이 루르드를 찾고 있다.
1858년2월11일부터 7월16일까지 성모님께서 18번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셨다. 성모님의 발현 당시 벨라뎃다의 나이는 14세였다. 2월 18일 성모님은 세 번째 나타나셔서 벨라뎃다에게 2주간 동안 계속 동굴에 와달라고 부탁하시고 벨라뎃다에게 이 세상에서 행복해주지 않고 다른 세상에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모님의 이 약속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벨라뎃다 축일을 돌아가신 날짜가 아닌 이 날 2월 18일에 지낸다. 2월 24일에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죄인들을 위한 보속으로 무릎을 꿇고 걸으며 땅에 입맞추라 하셨다. 7월 16일 18번 째를 마지막으로 성모님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루르드는 세계 어느 순례지 보다 어머니 품에서 처럼 푸근하게 기도에 잠길 수 있는 곳이다. 성모님의 발현 이래 이 곳에서는 수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이 기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장님이 눈을 뜨고 절룸발이가 목발을 버리게 되고 여러 가지 불치병이 깨끗이 낫는 기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다. 동굴 벽에는 이들이 봉헌한 기적의 증거물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음을 지금도 볼 수 있다. 너무나 많아서 관리자들이 수시로 치우지만 금방 또 걸리곤 한다.
그러나 루르드의 참가운 가치는 이러한 외적인 기적 보다 내적인 기적에서 찾아야 한다. 20년 또는 30년 동안 얼어 붙었던 마음이 녹고 냉담자가 회두하고 근심이 쌓인 사람이 평화와 위로를 얻으며 기적을 바라고 왔던 사람들이 병이 오히려 더 심해져도 실망하지 않고 감사하며 돌아가게 되는 곳이다. 성모님을 만나고 성모님의 위로를 안고 돌아가기 때문이다
루르드의 성모님께서는 벨라뎃다에게 "여기에 성당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모여들기를 원한다고 본당신부에게 말하라"고 당부하셨고, 또 "죄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고도 당부하셨다.
9번 째의 발현이 있은 2월 24일에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죄인들을 위한 보속으로 무릎을 꿇고 걸으며 땅에 입맞추라 하셨다. 그러면서 "여기를 파 보아라. 샘이 솟아날 것이다. 너희는 속죄하는 뜻으로 이 물로 씻고 마셔라"라고 지시를 하셨다. 이 것이야 말로 수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한 정화수(淨化水) 인 것이다
루르드에 세워진 병원에는 남녀를 구분할 뿐 병명은 전혀 개의치 않고 같은 방에 여러 가지 환자가 수용된다.
기적수라고 일컬어지는 루르드 샘물로 만든 목욕탕의 경우는 하루에 한 번 물을 간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전염병 환자들이 이곳에서 함께 몸을 씻는다.
의사들은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루르드를 폐쇄하려고 하였으나, 이곳에서 본래 있던 병이 더 악화된다든지 다른 사람의 병을 옮겨 받는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 86 성지순례지 루르드
루르드(Lourdes)
마리아신심의 영사적 변천사(가톨릭신문 제2311호 2002년 08월 18일자)
프랑스 남쪽 스페인과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의 산록에 위치한 루르드는 1858년 2월 11일 이후 18회에 걸쳐 성모 마리아께서 벨라뎃다(1844-1878) 소녀에게 발현하신 후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유명해진 곳이다. 가브강이 흐르고 그 중간에는 살레섬이 있어서 강물을 두 갈래로 나누고 있지만, 그것이 다시 합류되는 곳에 큰 절벽이 있고 그 가운데 마사비엘(massabielle)이라고 부르는 동굴이 있다. 이 곳이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이다. 이스라엘 성지를 제외하고 현대에 가장 유명한 순레지로 꼽히고 있다. 해 마다 순례자가 늘어나 지금은 연중 4백만이 넘는 순례자들이 루르드를 찾고 있다.
1858년2월11일부터 7월16일까지 성모님께서 18번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셨다. 성모님의 발현 당시 벨라뎃다의 나이는 14세였다. 2월 18일 성모님은 세 번째 나타나셔서 벨라뎃다에게 2주간 동안 계속 동굴에 와달라고 부탁하시고 벨라뎃다에게 이 세상에서 행복해주지 않고 다른 세상에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모님의 이 약속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벨라뎃다 축일을 돌아가신 날짜가 아닌 이 날 2월 18일에 지낸다. 2월 24일에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죄인들을 위한 보속으로 무릎을 꿇고 걸으며 땅에 입맞추라 하셨다. 7월 16일 18번 째를 마지막으로 성모님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루르드는 세계 어느 순례지 보다 어머니 품에서 처럼 푸근하게 기도에 잠길 수 있는 곳이다. 성모님의 발현 이래 이 곳에서는 수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이 기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장님이 눈을 뜨고 절룸발이가 목발을 버리게 되고 여러 가지 불치병이 깨끗이 낫는 기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다. 동굴 벽에는 이들이 봉헌한 기적의 증거물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음을 지금도 볼 수 있다. 너무나 많아서 관리자들이 수시로 치우지만 금방 또 걸리곤 한다.
그러나 루르드의 참가운 가치는 이러한 외적인 기적 보다 내적인 기적에서 찾아야 한다. 20년 또는 30년 동안 얼어 붙었던 마음이 녹고 냉담자가 회두하고 근심이 쌓인 사람이 평화와 위로를 얻으며 기적을 바라고 왔던 사람들이 병이 오히려 더 심해져도 실망하지 않고 감사하며 돌아가게 되는 곳이다. 성모님을 만나고 성모님의 위로를 안고 돌아가기 때문이다.
◆ 루르드 전경
루르드의 성모님께서는 벨라뎃다에게 "여기에 성당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모여들기를 원한다고 본당신부에게 말하라"고 당부하셨고, 또 "죄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고도 당부하셨다.
9번 째의 발현이 있은 2월 24일에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죄인들을 위한 보속으로 무릎을 꿇고 걸으며 땅에 입맞추라 하셨다. 그러면서 "여기를 파 보아라. 샘이 솟아날 것이다. 너희는 속죄하는 뜻으로 이 물로 씻고 마셔라"라고 지시를 하셨다. 이 것이야 말로 수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한 정화수(淨化水) 인 것이다.
이 물을 흔히 기적수 또는 영적수라고 하는데 이 말은 적합하지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물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속죄의 뜻으로 이 물을 마시고 또 씻으면 그 믿음과 회개하는 마음 때문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 이 물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적수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이 때부터 이 조그마한 샘에서 매일 12만 2천 4백 리터의 물이 오늘 날까지 솟아오르고 있다. 벨라뎃다는 1866년 느베르 수녀회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다.
1879년 4월 16일 이 세상을 떠난 벨라뎃다는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3년 12월 8일 역시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로써 벨라뎃다는 성인의 반열에 들 게 되었고 성모님께서 벨라뎃다에게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 이다." 라고 말씀하신 약속을 지키셨다.
루르드의 시가지 전경. 시가지에는 호텔들이 즐비하고 오른 쪽 위로 성모발현 기념 성당이 보인다.
◆ 마사비엘 동굴
1858년2월11일부터 7월16일까지 성모님께서 18번 벨라뎃다에게 이런 모습으로 발현하셨다. 성모님의 발현 당시 벨라뎃다의 나이는 14세였다. 2월 18일 성모님은 세 번째 나타나셔서 벨라뎃다에게 2주간 동안 계속 동굴에 와달라고 부탁하시고 벨라뎃다에게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해 주지 않고 다른 세상에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모님의 이 약속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벨라뎃다 축일을 돌아가신 날짜가 아닌 이 날 2월 18일에 지낸다. 2월 24일에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죄인들을 위한 보속으로 무릎을 꿇고 걸으며 땅에 입맞추라 하셨다. 7월 16일 18번 째를 마지막으로 성모님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지금 동굴 속에는 제대가 있고 이 제대에서는 연 중 내내 미사가 바쳐지고 동굴 앞에서는 신자들이 밤낮 없이 기도하며 순례자들이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 자신들을 봉헌하는 뜻으로 봉헌한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크기에 따라 값이 다르다. 24시간, 365일 촛불이 끄지지 않는다. 동굴 전체가 하나의 바위인데 순례자들의 손길에 닳아서 반질반질하다. 순례자들은 이 바위에 입마춤을 한다. 겸손과 경애의 표시로. <사진 위는 오늘의 동굴모습>
30년여년 전의 동굴 모습
초창기의 동굴모습
제대 뒤쪽에 있는 정화수가 쏫는 샘
너무나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수도 꼭지를 통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러나 이 물은 속죄의 뜻으로 씻고 마셔야 한다. 그런데 흔히 중환자들을 위한 무슨 비상약인 듯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동굴을 향해서 왼편에 마실 물의 수도꼭지가 있고, 오른편에 몸을 씻는 곳이 있다. 몸을 씻는다고해서 우리의 공중 목욕탕 처럼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냥 옷을 벗고 잠시 침수하면 된다. 옆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도와 준다. 침수상태에서 주의기도를 한번 바치면 끝난다. 겨울 철에도 침수를 하는데, 신통하게도 침수하고나면 온 몸이 후끈거려 오히려 몸이 더 따뜻해 진다.
동정 성모께서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 사이에 벨라뎃다 수비루에게 18번 나타나셨던 곳이다. 성모상은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던 바로 그 모습이며, 바로 그 자리에서 성모님께서는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 라고 말씀하시면서 벨라뎃다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셨다. 성모상 아래 자물쇠로 잠겨진 유리판 아래에는 1858년 2월 25일 아홉번째 발현당시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벨라뎃다가 땅을 파헤쳤을 때 솟았던 샘이 있다.
마사비엘 성모 동굴의 모습은 지금 대구시 남산동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관내에 있는 성모당의 모습과 흡사하다. 대구의 성모당은 루르드의 성모동굴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것이다.
◆ 원죄없이 잉태된 자의 대성당(無染始胎大聖堂) '한국의 성모' 자수화
3월 2일 성모님은 13번 째 나타나시어 "본당 신부님에게 가서 사람들이 행렬지어 이 곳에 오게하고 성당을 짓도록 하라"고 말씀하였다. 동굴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여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벨라뎃다는 부인의 요구에 충실히 응했다. 그러나 본당 신부의 요구로 벨라뎃다는 계속 그 부인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부인은 말 없이 미소만 지을뿐 이었다.
3월 25일 성모영보축일에 그 부인이 다시 나타났다. 16번 째 발현이었다. 벨라뎃다는 네번째로 다시 부인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그 부인은 가슴에 손을 모으면서 「나는 원죄 없는 잉태」라고 이름을 밝히셨다. 성모님은 벨라뎃다가 사용하던 지방 사투리로 이름을 밝히셨다. 「나는 원죄 없는 잉태」= 「무염시태」라는 말 뜻이 어려워 뜻도 모르면서 그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정신 없이 본당으로 달려가서 놐크도 없이 본당신부님 방문을 열어제치고 「나는 원죄 없는 잉태다」하고 외쳤다. 본당 신부님은 이 때부터 성모님이 동굴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 시작했다.
(왼쪽 사진은 멀리서 보이는 뾰족 탑의 성모 발현 100주년기념 성당 내부 모습)
이 성당은 "여기에 성당을 지어라" 고 하신 성모님의 요청에 따라 지어진 것이며, 성당 제대는 성모님 발현 장소의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당 양쪽의 유리창은 발현 당시부터 1867년 루르드 성모상이 세워질 때까지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좀 더 위쪽 유리창에는 태초부터 교황 비오9세가 「성모무염시태 」신비를 정식 교의로 발표하기까지의 역사를 표현하고 있다.
대성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커다란 대리석 판이 있는데, 여기에는 오랜 조사가 있은 후 루르드 성모님의 발현을 인정하는 따르브 주교의 사목교서가 새겨져 있다. 그 후 로랑스 주교는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실제로 벨라뎃다에게 나타나셨다"고 선언하였다.
◆ 지하성당
대성당 아래에는 제일 먼저 세워진 성당이 있다. 로랑스 주교는 벨라뎃다 생존 당시인 1866년 5월 19일 이 대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렸으며, 이 성당 건축을 위해서 일 할 때 벨라뎃다의 아버지도 그 작업에 종사하신 분들 중 한 분이었다. 이 성당 제대에는 늘 성체를 현시하여 신자들이 찬미와 조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로사리오 대성당
이 대성당은 성모님 발현 후 30년이 훨씬 지난 뒤에 완성되었는데 항상 묵주를 손에 들고 벨라뎃다에게 나타나신 동정 성모님을 위해 특별히 로사리오 대성당(묵주의 대성당, 매괴의 대성당)으로 봉헌되었다. 이 성당은 1901년에 축성되었고, 그리스 십자가의 형으로 지어진 내면은 묵주의 15현의를 뜻하는 작은 15개의 제대(성당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성당에서 순례자들이 성모님 신비에 대해 묵상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성 비오10세 지하성당
위의 지하성당과는 별개로 왕관의 성모상이 있는 광장의 지하에 건립된 길이 200m, 폭 80m의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지하성당이 있다.
◆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제1처 빌라도 예수를 재판하는 장면.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면서 기도한다. 여성 신자들은 얇은 스타킹을 신은채로 오르기 때문에 무릎에서 피가 흐르기도 한다. 14처가 모두 실물크기로 만들어져 있다.
1912년 1,530m의 거리를 두고 언덕 위에 십자가의 길이 만들어졌다. 각 처마다 쇠로 조각된 2m 높이의 상들이 있다. 누구나 이 언덕의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면서 대사를 얻어 은총의 상태에서 거룩한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다. 또 한편 병자 순례단을 위한 십자가의 길은 가브강을 따라 목욕실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 나는 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 기도한 후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은혜의 선물을 얻었다.
대축일에 장엄미사, 다양한 전례, 행렬 등 여러 형태의 순례단들의 신심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3만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까 늑장을 부려도 되겠지 한다면 오산이다. 큰 축일이면 이 넓은 지하성당이 입추의 여지가 없지만, 그래도 못들어가는 신자들이 더 많다.
◆ 벨라뎃다 생가
1844년 벨라뎃다 성녀는 이 집에서 태어나 10살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곳은 물레방앗간 이었다. 벨라뎃다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재법 잘 살았다. 작은 마을이지만 하나 밖에 없는 방앗간이라 동네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사람이 워낙 무골호인이라 품싻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냥 공짜로 일을 해주고 외상으로 해준 일은 떼이기가 다반사였다. 그래서 결국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방앗간은 마침네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날씨는 추운데 식구는 많고 딱한 사정을 가엽게 여겨 마을 이장이 비어있는 마을 감방서 살도록 주선을 해 주었다. 아래의 까쇼가 벨라뎃다와 그 가족들이 살던 감방이다. 원래의 방앗간은 지금 기념품 가게로 변했다. 그러나 옛날의 방앗간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지금도 옛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사진설명 : (위 왼쪽) : 1858년 성모님의 발현 당시의 조그마한 마을 루르드의 모습.
(위 가운데) : 물레방앗간으로 변한 벨라뎃다의 집. (위 오른쪽) : 1854년 벨라뎃다가 태어난 집.
★ 지금 루르드는 하나의 도시로 변모하여 옛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루르드에서 북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유모의 집과 동네는 지금도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유모의 집은 후손들이 살면서 일부는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고 벨라뎃다의 방은 사진의 모습과 같이 보존되어 있다.
◆ 바트레스(Bartres) 마을
벨라뎃다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루르드에서 오리정도 떨어진 이웃 마을 유모집에서 잠시 살았다. 마을 어귀 오른 쪽 언덕에 양우리가 있다. 벨라뎃다는 갖난 아기 때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 친구인 양모에게 와서 자랐다. 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어릴 때의 신세를 갚으라고 다시 양모집에 보내어 벨라뎃다는 농사 일을 거들고 양을 치다가 첫 영성체를 준비하기 위하여 루르드로 돌아왔을 때 성모발현을 보았다. 마을에는 양모의 집과 벨라뎃다가 다니던 성당이 옛 모습 그대로 있다. 양 우리 앞 언덕배기에 걸터 앉아 마을을 내려다 보면 벨라뎃다가 자연 속에서 누렷을 법한 평화로움을 지금도 맛 볼 수 있다.
아래 사진들은 유모의 집이 있던 조그마한 마을의 평화로운 정경을 다양한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 전형적인 프랑스의 시골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을 한 가운데 성당이 있고 성당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 성당의 자그마한 마당은 이 마을 신자들의 공동묘지이다. 한 집에 무덤이 하나씩이다. 집집마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 뚜껑을 열고 순서대로 관을 넣는다. 가족들은 성당에 올 때마다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산이와 죽은이가 언제까지나 함께 살아간다. 성당 앞에는 찻집이 있는데 이 집에서 직접 굽는 쿠키와 향기 좋은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루르드에 좀 여유를 가지고 순례하는 사람들은 이 곳까지 산책을 할 만하다. 유모의 집은 지금 선물가게를 하고 있는데, 벨라뎃다가 살던 방은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1855-1856년 벨라뎃다의 가정형편이 너무 가난하여
벨라뎃다는 이웃 마을 유모의 집에서 살았다.
유모집에서 살 때의벨라뎃다의 방.
◆ 옛 감방 - 까쇼 (Le Cachot)
프랑스어로 꺄쇼라고 부르는 감방인데 어린 시절 벨라뎃다는 너무나 가난하여 가족들이 이 곳에서 살았다. 벨라뎃다가 성모님을 만난 것은 이곳에서 살 때였다.
원래 죄수들의 감방이었던 이 곳을 사람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감옥을 옮기면서 이 낡은 건물을 벨라뎃다의 친척이 불하받았다고 한다. 그 때 물래방앗간을 하던 벨라뎃다의 아버지가 망해서 갈 곳이 없자 친척이 감방 하나를 빌려주었다. 그래서 벨라뎃다 4남매와 부모 등 6식구가 이 단칸 감방에서 생활했다. 크기 4-5평 정도나 될까? 북쪽 방이라 얻둡고 추우며 공기가 잘 안통해 천식을 앓던 약한 벨라뎃다에게는 더 없이 고통스러운 거처였다.
겨울 철에 이곳은 산중이라 몹씨 춥다. 그래도 우리나라 겨울 처럼 매섭지는 않은데 습도가 높아 으스스하게 춥다. 이런 추위가 몸을 더 상하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냉방을 덥히고자 2월 11일 동생과 친구와 함께 땔감 나뭇가지를 주으러 가던 길에 마사비엘 동굴에서 성모님을 만난 것이다. 지금 이 건물은 수녀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벨라뎃다가 어릴 적 살던 모습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훗 날 사람들이 벨라뎃다에게 "성모님께서 왜 당신에게 나타나셨느냐?"라고 물었을 때 벨라뎃다는 "성모님께서 저 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가난해야 성모님을 뵈올 수 있다면 우리는 가난을 택할까? 아니면 성모님 뵈옵기를 포기 할까? 오늘날 이곳은 시가지 한가운데가 되었다.
◆ 장관을 이루는 야간 촛불행렬
촛불 행렬은 동굴 앞에서 촛불을 들고 묵주의 기도를 끝내고 성체거동과 같은 코스로 진행된다. 루르드 순례에서 아름답고 감격적인 순례행사 중 하나이다.
야간에 로사리오의 기도를 하면서
촛불 행렬을 하고 있다.
성모발현기념성당 옥상에서 내려다 본 루르드 성지의
대광장 모습. 큰 행사는 보통 이 광장에서 이루어진다.
동굴에서는 매일 오후 3시에 성체강복식이 있다. 루르드에서는 모든 행사에 병자와 장애인들에게 앞좌석을 내어준다. 하절기 순례자가 많을 때에는 매일 오후 4시 30분에 동굴 앞에서 시작하여 광장을 돌아 묵주의 성당 앞에서 성체강복으로 끝난다.
성체행렬을 위해 성체를 모시러 간다
성체강복예절에 참례하는 병자들
광장에서의 대축일 미사
성체강복식에서 환자들에게 성체강복을 하고 있다.
루르드에는 언제나 다양한 종류의 환자들이 모여든다. 이들 중 육체적 치유의 은사를 얻는 이는 적지만 한결같이 마음의 평화를 얻고 돌아간다.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 마다 성체를 영해준다. 흔히 성체강복 때나 영성체를 할 때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 이 때 갑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기적을 보겠다고 몰려 드는 바람에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성체 주위를 호위하고 있다. 어께에 멜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 이다.
1986년 가을, 순례시즌이 끝난 10월말 쯤이었다. 성모동굴 앞에서 오후 3시 성체강복식에 참례하려고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순례자들이 적어서 한적한 기분이 감돌았다. 시간이 다되어갈 무렵 머리가 새하얀 노부부가 수레에 아들인 듯한 젊은 남자를 싣고 왔다. 그 젊은 남자는 동굴 앞에 가까이 오자 팔을 비틀면서 괴성을 크게 질러댔다. 뇌성마비인 듯 했다. 성체강복 때 맨 앞줄의 환자들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 마다 성체를 모시고 가까이 가서 강복을 해 주었다. 이때 그 젊은 이는 또 괴성을 질렀다. 혹시 기적이라도 일어나려나 호기심을 가지고 나는 지켜보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체강복을 마치고 순례자들이 흩어져갔다. 성모동굴을 떠나가는 그 젊은이와 노부부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실망하지나 않았을까 걱정을 하면서.... 그런데 그들의 얼굴에는 실망은커녕 기쁨과 평화의 모습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멀쩡한 육체를 가지고 언제나 갈등과 부족함으로 가득찬 내 모습과 비교해 볼 때 그들이 얼마나 더 행복한가! 루르드의 가치는 육체적 병의 치유보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랜 냉담으로 마음이 차고 굳어있던 사람들이 루르드에서 봄 눈 녹듯이 회개하고 고백신부를 찾을 때 이것이 바로 루르드의 기적의 은사가 아니겠는가?!
성녀 벨라뎃다의 시신은 방부처리를 하여 기념성당에 모셨다.
물론 화장을 했지만 마치 살아있는 사람이 잠든 듯 하다.
◆ 루르드의 주변 순례 관광
루르드는 스페인과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에
위치해 있다. 사진은 국경수비대가 주둔했던 성.
피레네 Gavarnic산. 해발 1,357m
1991년 1월 12일 주일 미사를 마치고 옥실리움 Center에 초대를 받아 우아한 프랑스 요리로 점심 대접을 받았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 음식도 가지각색으로 다양했다. 점심 후 미카엘라 자매님의 운전으로 차로 1시간 30분 가량 피레네 산 속 Gavarnic 산까지 드라이브를 했다. 거대한 절벽이 마치 병풍과 같이 늘어서 있어 겨울에는 어름 절벽이 된다. 떠날 때는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구름이 끼고 눈발리 날려 산 정상과 빙벽은 멀리서 바라보고 만족해야 했다. 양수산나 선생, 박세레나 선생의 안내로 눈내리던 날 골롬바와 함께 이곳 찻집에서 따끈한 커피를 마시면서 낭만을 즐기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 St. Savin성당을 방문했다. 12세기에 건립된 로마네스크식 성당으로 지금은 쇠퇴하여 본당신부도 상주하지 않는다. 수도원 건물은 현재 면사무소로 쓰이고 있다. 양선생이 가까이에 Pieta 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의 성모님께 촛불을 봉헌하면 불임여성도 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어 오늘날에도 많은 여인들이 찾는다면서 가보겠느냐니까 골롬바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성 야고보 성당
(사진을 클릭하면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성당은 사도 야고보에게 봉헌 된 성당이다. 루르드에서 얼마 안되는 곳에 이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사도 시대 때 성 야고보 사도께서 이곳까지 전도여행을 왔다고 한다. 모슬램이 쳐들어 왔을 때 방어를 위해 창들이 모두 지붕 가까이 높은데 위치해 있다.
결론적으로 루르드를 순례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이 있다. 루르드는 관광할 곳이 아니라 순례할 곳이라는 말이다. 하루 이틀 잠시 들러 이곳 저곳 둘러보고 돌아와서 루르드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처럼 시간과 금전을 아껴 성지순례를 나서기 때문에 한 나라라도 더 다녀야 되고 한 도시라도 더 구경해야 만족하게 된다. 물론 처음 가는 분들에게 이것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생활에서 근검절약하게 되면 몇 해마다 한번 쯤은 외국여행을 나설 수 있는 분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럴 경우에는 루르드에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머물면서 순례다운 순례를 한번 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성모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으시는데는 다 뜻이 있을 것이다. 결코 눈에 보이는 기적을 바라지 말고 마음의 기적, 신심의 은총을 구하면서 순례를 해 보면 참으로 큰 평화와 기쁨을 얻을 것이다. 나의 홈페이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좀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성모님은 결코 자신을 들어내시지 않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남동부(샤모니,안시,몽트뢰)
◆샤모니
에귀 디 미디,메르디 빙하
**샤모니(1035)-(가장 아름다운 구간3h)-락블랑(2352)-(평탄3h)-플랑프라(1999)-(케이블카 탈수3h도)-(케이블카 & 리프트로 하산가능,도보시3시간)-브레방(2526)-샤모니
시내통과 콜데몽데에서 시작...
*샤모니-(4h케이블카도 가능,하산시 트레킹?)-플랑드레귀유(2308)-에귀디미디(3860)-샤모니
*샤모니1035-(차로 20분)-레주쉬1007-(케이블카)-벨르뷔1800-(등산열차)-르니데글2365-(트레킹2h)- 테트루스3167 - 역순으로 샤모니로
◆몽트뢰(Montreux)와 레만호수
시옹성:스위스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불린다는, 마치 호수 위에 떠있는 듯한...
◆에비앙(Evian)
◆안시(Annecy)
구시가지(꽃과 운하)
일궁전(palais de Lisle 운하에 떠있는듯한 궁전);역사 박물관,안시성,안시호수...저렴한 숙소가 별로 없다.
# 289 [프랑스+스위스]알프스 마테호른-몽블랑
[이정현의 테마여행]알프스 마터호른-몽블랑
알피니스트들이 등정하기를 꿈꾸는 마터호른의 장엄한 자태. 마터호른의 기점이 되는 도시 체르마트는 스위스 최고의 청정구역이다. 사진제공 캠프
등반가, 특히 알프스의 여러 봉우리를 오르는 산악인들을 일컫는 ‘알피니스트’라는 호칭이 시작된 기원을 더듬다보면 몇몇 이름과 마주치게 된다. 영국 출신의 에드워드 윔퍼(1840∼1911)와 스위스인 자크 발마(1762∼1834). 윔퍼는 마터호른봉(4478m)을 첫 등반하고 산악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알프스 등반기’를 남겼다. 발마 역시 알프스의 최고봉인 몽블랑을 최초 등정한 산악인이다.
●마터호른의 신비로운 빛, 체르마트
‘마터호른은 어느 쪽에서 보아도 당당하다. 결코 흔히 있는 산과는 다르다. 이에 견줄 만한 산이 알프스에는 없으며 세계 어디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윔퍼의 말이다. 히말라야가 알려지기 전의 이야기지만 그의 평은 지나치지 않다. 올해로 창립 90년을 맞는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심벌도 마터호른이다. ‘영화인들이 운집한 거대한 산’을 꿈꾼 설립자의 의도에서 마터호른이 상징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체르마트에 있는 산악 박물관 내부.사진제공 캠프
마터호른은 독일어로 알프스 초원(Matte)에 솟은 뿔 같은 봉우리(Horn)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몬테체르비노, 프랑스 사람들은 몽세르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마터호른이다. 스위스쪽에서 바라보는 마터호른은 훼른리 능선을 사이에 두고 동벽과 북벽을 그대로 드러낸 가장 균형잡힌 모습을 보여준다. 19세기 알프스의 산간 마을 사람들에겐 이 봉우리가 신령스러운 대상으로만 인식되었지 사람이 오를 곳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에드워드 윔퍼는 1840년 런던에서 태어나 1911년 몽블랑이 바라보이는 샤모니 계곡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저술가, 탐험가, 등산가’라고 적혀 있다. 72년이라는 그의 생애는 알프스 등반의 황금기와 더불어 시작돼 근대 등산의 기초가 굳어질 때 끝났다. 원래 삽화가였던 윔퍼는 알프스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21세 때 처음 알프스로 향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등산은 고사하고 산을 본 일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터호른에 매료돼 무려 8번이나 등반을 시도했고 그 힘든 과정에서 진정한 알피니스트로 변했다.
그는 발레 데 에크랑, 몽돌랑, 에귀 아르장티에, 에귀 베르트같은 봉우리들을 차례로 등반했고, 그 과정을 자신의 ‘알프스 등반기’에 자세하게 묘사했다.
누구든 알프스에 첫 걸음을 옮기는 알피니스트들은 그의 기록을 읽고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마터호른을 윔퍼와 함께 등정한다고 한다. 특히 그가 남긴 사진같은 세밀화와 서간문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당시의 모습들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어서 알피니스트가 아니더라도 마터호른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마터호른으로 오르는 관문인 체르마트는 해발 1620m의 고산지대이다. 무공해 청정 구역으로 일반 자동차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이곳으로 여행하려면 자동차를 중간역인 티슈의 대형 주차장에 세우고 그곳에서부터 등산 철도로 들어가야 한다. 마을 내에선 전부 전기 자동차로 움직이고 스키어들과 여행자들의 짐을 부릴 수 있도록 자동차 뒤에는 별도의 짐칸이 마련되어 있다.
마을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아서 어른 걸음으로 1∼2시간이면 다 돌아볼 정도지만 이 마을이 중심이 돼서 펼쳐지는 알프스 관광의 범위는 실로 넓다. 알프스 어느 마을이든 케이블카로 거미줄같이 연결되어 쉽게 다가갈 수 있어 한여름엔 트레킹족, 겨울에는 스키어들로 붐빈다. 다양한 레포츠 프로그램들도 많아 관광청을 비롯, 알파인 센터에서 그 진행을 맡고 있다. 체르마트에서 특별히 들를 만한 장소로는 산악박물관과 힌터도르프를 꼽을 수 있다. 산악박물관에는 윔퍼의 마터호른 첫 등정 후에 일어난 사고 기록이나 각 봉우리의 축소 모형 등 알프스 등반의 귀중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알프스 마을들을 이동하는데는 등산열차가 가장 편리하다. 사진은 스키장들을 연결하는 샤모니지역의 등산열차.사진제공 프랑스 관광성
또 체르마트 인근에 서식하는 동물의 박제와 꽃 생물 지질에 관한 기록, 산악인들의 사진도 살펴볼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1865년 당시에 사용하던 등산 자일. 그냥 노끈일 뿐인 이 자일에 몸을 내맡기고 험난한 등반길에 올랐을 알피니스트들의 대담함이 놀라울 정도다.
힌터도르프는 체르마트가 속한 발레 지방의 독특한 오두막이 밀집한 지역이다. 이 오두막들은 쥐로부터 곡식을 보호하기 위해 오두막을 지탱하는 나무받침 중간에 돌을 끼워넣은 스타일이다.
●스키 스포츠의 발원지,샤모니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4807m)이 있는 샤모니는 알피니즘이 처음 태동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한해에도 수만명의 등산가가 성지처럼 찾는 곳이지만 오래 전 샤모니의 주민들은 목축업이나 수정 채취로 근근이 생업을 이어갔고, 도시와는 거의 단절된 오지나 다름없었다. 산악인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 마을은 체르마트와는 달리 프랑스령이다. 처음 마을이 시작된 때는 11세기.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샤모니 주민들은 몽블랑 정상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등반하기를 두려워했다.
이 지역주민이었던 자크 발마는 산악가이드 겸 수정채집자였다. 함께 몽블랑을 등반한 미첼 가브리엘 파카드는 의사였다. 그들은 1786년 8월 7일 오후에 샤모니를 출발해 몽타뉴 드 라 코트 정상에서 야영하고 이튿날 오전 4시에 등반을 시작해 오후 6시23분에 마침내 정상에 섰다. 그들의 등반 전 과정은 샤모니에서 망원경으로 관찰되었고 바로 이 날이 알피니즘의 기원이 되었다.
이들의 몽블랑 등정 이후 조용하고 평화스럽던 샤모니는 유명세를 치르게 됐다. 몽블랑에 집요한 관심을 가졌던 또 다른 유명한 인물은 제네바 출신의 자연과학자인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이다. 1760년 샤모니의 빙하를 관찰하기 위해 혼자 도보로 출발했던 소쉬르는 곧 몽블랑에 과학적인 관심을 품고서 이 봉우리를 오르는 등반로를 찾는 사람에게 큰 사례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어떤 시도도 성공하지 못한 채 26년이 흐르다가 발마가 비로소 그 일을 해낸 것이었다.
발마는 첫 등정 이후 여섯 번이나 몽블랑 정상에 섰는데, 한번은 소쉬르와 함께였다. 소쉬르는 그 등반에서 몽블랑의 표고를 재는 방법과 끓는 물의 온도가 고산지대에서는 다르다(80도)는 과학적인 결론을 얻어 후세에 남겼다.
오늘날 샤모니는 등산열차와 케이블카가 건설된 유명관광지로 변신했다. 특히 1924년 제 1회 동계 올림픽 개최지가 됨으로써 유럽 최고의 스키 리조트들이 들어섰고 이제는 산악인들보다 겨울을 즐기는 스키어들로 더 붐비는 곳이 되었다.
●다양한 코스, 최고수준 강습
눈이 탐스럽게 쌓인 샤모니의 교회 지붕. 멀리 알프스 영봉들이 보인다.사진제공 프랑스관광성
샤모니에는 스키 초보자부터 전문가까지 모두 만족할 만한 다양한 난이도를 지닌 스키장이 있다. 샤모니에 첫 스키장이 만들어진 것은 몽블랑 정상이 정복된 지 꼭 100년이 지난 후인 1886년. 프랑스 스키 발전의 주역인 미셀 파이요 박사가 주도했다. 이 스키장의 건설은 스포츠로서의 스키를 전 세계에 대대적으로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샤모니의 스키장들은 전체적으로 넓은 둔덕을 연상케한다. 슬로프의 폭이 넓고 경사의 완급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에 어린이는 물론 초보자에서 숙련된 마니아까지 골고루 코스를 골라가며 탈 수 있다. 또 눈이 두툼하게 쌓인 것도 안전하게 스키를 타는 데 도움이 된다. 샤모니에서는 몽블랑 스키 패스를 구입하는 게 편리하다. 샤모니 지역에 있는 모든 스키장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각각의 스키장을 연결하는 버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샤모니에는 모두 13개의 스키장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로냥 레 그랑 몽테’이다. 관광사무소 앞에서 출발하는 샤모니 버스를 타고 아르장티에르까지 간 후 로프웨이로 갈아탄다. 초급 또는 중급자에게 적당한 스키장은 ‘슈퍼샤모니’라고도 불리는 ‘플레제르’다. 샤모니 버스로 10분 정도 걸리며 ‘레 플라즈’에서 로프웨이로 바꿔 타야 한다. 샤모니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스키장은 ‘사라미용 콜 드 발므’이다. 샤모니버스로 르 투르까지 간 다음 로프웨이로 바꿔 타야 한다. 고급 스키어들에게 적당한 스키장으로는 샤모니 서쪽의 ‘브레방’을 추천할 수 있다.
초보자라면 경력 수십년을 자랑하는 전문 강사들이 포진한 ‘에콜 뒤 스키 프랑세’(프랑스 스키 학교)를 빼놓을 수 없다. 이 학교의 강사들은 세계적인 규모의 스키 대회 수상자들 일색이라 최고 수준의 강습을 받을 수 있다. 강사 대부분은 2, 3개국 언어를 구사한다. 일본여행사들은 이 곳에서 2, 3주 동안 스키를 배우는 어린이용 스키투어상품을 마련해놓고 있어 스키장 곳곳에서 동양계 어린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년 내내 눈을 볼 수 없는 남유럽 사람들도 샤모니를 많이 찾는다.
스키가 끝난 후거나 타는 중간에 산 중턱에 자리잡은 샬레 스타일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 것도 샤모니 관광의 재미다. 샤모니의 명물이기도 한 몇몇 레스토랑은 권위있는 레스토랑 평가표인 ‘미슐랭 스타’에서 별점 두 개 이상을 받았을 정도로 고급이다. 모두 정상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면서 들를 수 있다. 알프스의 훌륭한 전망을 앞에 두고 맛있는 점심을 먹은 뒤 다시 스키를 타고 내려갈 수 있는 맛. 샤모니가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여행정보
1. 찾아가는 길
로잔에서 체르마트까지는 기차로 약 2시간45분 정도 걸리고 취리히에선 약 4시간40분이 소요된다.
샤모니는 프랑스 파리에서 앙시까지 TGV로 이동한 뒤 다시 지방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그밖에 매일 앙시, 제네바, 그르노블에서 버스가 왕복한다.
제네바 공항에서는 샤모니까지 하루 세 차례 버스가 다니며 소요시간은 약 1시간30분 정도.
2. 선택관광
체르마트에는 다양한 선택관광상품이 있다. 공중 케이블을 타고 해발 3820m까지 오르면 빙하와 마터호른을 바라볼 수 있다.스키를 타고 이탈리아 국경을 넘을 수도 있다. 소요시간은 약 1시간 정도. 날씨가 좋으면 헬리콥터로 마터호른을내려다보는 유람비행도 가능한데 4인 이상일 때 출발하고 관광시간은 약 20분 정도.
3. 기타 정보
체르마트에 관한 정보는 체르마트 관광청(www.zermatt.ch)과 스위스 관광국(02-739-0034, www.myswitzerland.co.kr)에서, 샤모니에 관한 정보는 샤모니관광국(www.rhonealpes-tourisme.com)과 프랑스 관광성 한국사무소(02-776-9142, www.franceguide.or.kr)에서 얻을 수 있다.
이정현 여행칼럼니스트 nolja@worldpr.co.kr
동아닷컴 2002.12.26.
# 145 겨울철 여행의 꽃 몽블랑 & 샤모니
몽블랑과 샤모니
프랑스 알프스의 최고봉은 몽블랑이다.
이 몽블랑의 베이스가 되는 마을이 바로 샤모니, 여름에는 하이킹 등의 스포츠가 겨울에는 스키가 유명한 곳이다. 샤모니를 통하여 몽블랑에 오르면 스위스편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융프라우와는 또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샤모니는 산악 스포츠의 천국으로서 알프스의 푸른 하늘에 대비되는 얼음과 바위산을 볼 수 있는 멋진 곳이다.
1741년에 영국인 귀족 2명이 처음으로 샤모니로 가는 여행자들을 조직해던 이후로 계속적인 시도를 통해 25년만에 몽블랑이 정복되었다. 이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케이블카 서비스가 1955년에 시작되었으며 1991년에 완전히 수리되었다.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우뚝 솟아 있는 이 거대한 바위산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에귀 뒤 미디에 오르기 위해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된다.
최고봉인 Aiguille du Midi(3942m)로 가는데는 20분이 걸리고 정말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다. 몽블랑과 주변의 봉우리인 에귀유 베르뜨 Aiguille Verte와 그랑 조라스 Grandes Jorasse 그리고 스위스와 이탈리아 알프스, 샤모니 골짜기의 아름다운 모습은 숨쉬는 것을 잊게 할 정도이다. 4월부터 9월까지는 이웃한 이탈리아로 바로 넘어갈 수도 있다.(케이블카로 빙하를 따라서 5Km) 에귀유 뒤 미디(Aiguille du Midi)의 고위도 레이스의 출발점이고 중간의 역인 Le Plan de L'Aiguille는 하계 트렉킹의 출발점이다.
케이블카 승강장은 파카르 거리를 따라 발마 광장 반대편으로 걸어가다 에귀 뒤 미디 거리(Av. de l'Aiguille du Midi)로 접어들어 강을 건너 올라가면 바로 보인다. 티켓을 사서 케이블카에 타면 거의 90도에 가까운 경사를 오르게 된다. 3천 8백 42미터의 에귀 뒤 미디에 오르는 동안 눈덮힌 알프스의 설경이 가슴벅차도록 아름답게 다가온다.
케이블카는 중간에 한 번 갈아타고 북봉에 도착하는데 약 11분이 걸리며, 이곳에서 아름다운 얼음 동굴을 지나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알프스의 전망을 조망하다가 철교를 건너 엘리베이터를 타고 중앙봉에 오르면 눈덮힌 몽블랑의 아름다운 자태가 시야에 들어온다. 탁 트인 전망을 배경으로 신선한 바람을 가득 들이키며 음미하는 진한 커피의 맛은 잊지 못할 것이다. 산 정상은 여름이라도 상당히 추우므로 반드시 두꺼운 옷을 챙기는 것이 좋다.
에귀 뒤 미디(Aiguille du Midi)
중앙봉과 남봉, 북봉 등 세 개의 봉우리로 구성된 에귀 뒤 미디는 샤모니에서 고도차만 2천 8백여 미터가 난다. 이곳에 오르면 알프스의 눈덮힌 산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한 여름에도 상당히 추우므로 외투를 준비해야 한다. 이곳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타야 하는데 탑승장은 샤모니 마을의 남서쪽 끝에 있다. 이곳에서 그랑드 조라스, 돔 뒤 구테, 에귀 뒤테, 등의 만년설로 뒤덮힌 봉우리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보는 알프스
시간이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포엥트 엘브로네(Pointe Helbronner)'까지 가자. 몽블랑을 바라보면서 지나가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만큼 근사하다. 케이블카를 내리면 이곳은 이제 이탈리아다.
이곳에서는 에귀 뒤 미디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알프스의 풍광이 펼쳐진다.
몽탕베르(Monten-vers)행 빨간색 등산열차를 타면 거대한 빙하의 바다를 볼 수 있다. 해발 1천 9백9미터의 몽땅베르는 몽블랑 계곡 사이의 빙하와 이 빙하의 근원이 되는 그랑드 조라스의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서면 '얼음 바다(Mer de Glacier)'라고 하는 빙하를 구경하게 된다. 빙하까지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 구경할 수 있다.
샤모니에는 스키 초보자부터 전문가까지 모두 만족할 만한 다양한 난이도를 지닌 스키장이 있어 외국의 스키어들까지 찾고 있는 추세이다. 샤모니에는 모두 13개이 스키장이 있는데 '로냥 레 그랑 몽테(Lognan les Grands Montets)' 유명하다. 초급 또는 중급자에게 적당한 스키장은 '슈퍼 샤모니'라고도 불리는 '플레제르(Flegere)'다.
샤모니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스키장은 '샤라미용 콜 드 발므(Charamillon Col de Balme)'이다. 고급자 코스로 적당한 스키장은 샤모니 서쪽의 '브레방(Brevent)'으로, 1924년 제 1회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으로 급경사의 슬로프를 자랑한다.
여름에는 다양한 산악스포츠를 모두 즐길 수 있다. 골프, 하계 봅슬레이, 낚시, 행글라이딩, 패러글라이딩, 승마. 급류타기, 카누, 사이클링과 산악자전거 등을 즐길 수 있다.
# 31 프랑스 프랑스의 샤모니
샤모니의 정확한 이름은 샤모니 몽블랑(Chamonix-Mont-Blanc)이다. 해발 4,807미터의 알프스의 최고봉, 만년설의 신비로운 땅, 몽블랑 자락에 위치한 작은 산간마을 샤모니는 연중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산악 스포츠의 천국 샤모니는 겨울철 스키는 물론이고 등산, 패러글라이딩, 래프팅, 암벽타기등 여름 스포츠로도 각광을 받는 곳이다.
스포츠를 즐기지 않더라도 알프스 산의 웅대한 자연경관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꼽히는 이 곳은 관광이 주요 산업이므로 호텔들이 즐비하고 현대적 시설을 갖추어 관광객들의 편의를 돕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공중 케이블카를 타고 이곳에 오르면 알프스의 장엄한 경관에 흠뻑 빠질수가 있다.
샤모니는 언뜻 생각하면 알프스라는 연상이 되어 스위스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프랑스에 속해 있는 알프스의 산중 마을이다. 겨울이면 스키로 유명하여 수많은 스키어들로 붐비는 곳이 또한 샤모니다. 실제 샤모니는 등산이나 스키가 목적이 아니면 시내(작은 마을이지만...)는 그다지 볼거리가 있지는 않다. 우리에게잘 알려져 있는 몽블랑을 오르고자 한다면 샤모니를 시작으로 여행을 준비하도록 하여야 하나 그러나 전체적인 일정을 고려한다면 스위스의 제네바 혹은 로잔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샤모니에서의 에뒤디 미디 봉우리에 올라가 몽블랑 관람을 하기 위한 여행준비로서는 전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몇 가지만 계획을 잡으면 쉽게 여행을 할 수가 있다.
1. 샤모니까지의 가는 과정에서 제네바 혹은 로잔에서 출발할 경우 여정을 정한다
2. 몽블랑을 보기 위해 샤모니에서 에귀디 미디 에 오른다.
3. 에귀디 미디 정상에서 이태리 방면의 산봉우리 엘브로너을 왕복하도록 한다
4. 날씨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몽탕베르 전망대행 산악 열차를 이용하도록 한다.
5. 여름철이라도 따뜻한 복장을 유지하도록 한다.
6. 아래의 사이트에서는 에귀디미디의 케이블카, 열차 운행시간 및 요금표를 볼 수 있다
몽블랑 공식 사이트
샤모니 관광청 사이트
# 32 프랑스 샤모니 가볼만한곳
호텔에 짐을 풀고 나면 간단하게나마 샤모니 시내를 둘러 보도록 한다. 겨울의 스키시즌이 아니면 비교적 한가한 알프스의 산악마을이다. 샤모니 시내는 아담해서 걸어다니기에 부담이 없다. 관광안내소는 에글리즈 광장에 있으며 이곳에서 샤모니의 여행은 시작된다.
관광안내소 맞은편에는 메종 드 라 몽타뉴(Masion de la Montagne)가 있는데 이곳에는 알프스 등산과 스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방문하면 좋다,
에글리즈 광장 (Pl de l'Eglise)에서 역을 향해 조금 더 내려가면 샤모니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발마 광장(Place Balma)이 나온다. 발마광장은 몽블랑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는데 큰 공을 세운 쟈크 발마와 미셀 파카르의 이름을 따서 세운 광장이며 이 광장에는 두 사람의 동상이 있다. 이 발마 광장에서 보면 몽블랑이 보이며 발마 동상이 가르키는 곳이 바로 몽블랑 정상이다.
발마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파카르 거리 (Rue du Dr. Paccard)에는 샤모니의 특성 답게 등산용품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가득하며 샤모니의 최대의 번화가이기도 하다. 발마광장에서 기차 역 방면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악박물관이 있다.
# 185 프랑스 메츠(metz)
프랑스 메츠라는 곳에 대해 올려볼까 합니다.^^
이곳은 낭시와도 가까워서 기차로 쉽게 갈수 있습니다.~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방 모젤 주의 주도.
스트라스부르 북서쪽과 룩셈부르크 국경의 남쪽으로 모젤 강과 세이 강이 만나는 곳에 있다. 이곳은 부분적으로 다시 건설되었고 교외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히 확장되었다.
메스라는 이름은 이곳을 수도로 삼았던 골 부족인 메디오마트리키에서 왔다. 로마인이 성채를 쌓았으며 3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어서 4세기에 주교관구가 되었다. 5세기에 훈족(族)에게 약탈당한 뒤 프랑크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843년 카롤링거 제국이 분할되면서 로렌의 수도가 되었다. 중세에는 신성 로마 제국 밑에서 자유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신교로 개종한 메스는 박해당할 위험에 놓였지만 가톨릭 교도인 프랑스의 앙리 2세(1547~59 재위)가 도움을 주어 1552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포위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뒤 프랑스가 계속 차지하고 있었고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의 결과 툴·베르?瘟? 함께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승패가 나지 않는 전투를 벌인 프랑스 군대는 메스로 후퇴했으며 독일 군대가 도시를 포위한 지 54일 뒤에 항복해야만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뒤에 프랑스로 다시 이양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이 점령하다가 오랜 전투 끝인 1944년에야 자유롭게 되었다.
메스에는 이 도시로 흘러들어올 때 여러 지류로 나뉘는 모젤 강의 둑을 따라 걷기 좋은 산책로가 나 있다. 고딕 양식인 생테티엔 성당은 원래 12세기 것인 두 교회당이 합쳐져 하나의 대건축물이 된 것이다. 프랑스 고딕 양식의 교회들 가운데서 매우 높은 편에 속하는 수랑(袖廊)과 신랑(身廊)은 크고 뾰족한 창문을 갖고 있다. 두 탑은 13세기에 짓기 시작했다.
이 대성당에는 화가인 마르크 샤갈과 자크 비옹의 당대 작품들뿐 아니라 눈길을 끄는 13~14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다. 13~15세기에 세워진 옛 성문인 알레망드 문(독일인의 문)은 총안을 뚫어놓은 탑이 인상적인데,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4년 전투 때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1935년 로마 시대 목욕탕 유적에서 발굴된 갈리아로마의 유물은 박물관에 소장·전시되고 있다. 낭시와 룩셈부르크를 잇는 철도가 지나는 메스는 철도의 연결지로 복잡한 도로와 자동차 도로망의 중심지이며 운하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모젤 강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근처에는 로렌 철광산 분지와 모젤 탄광이 있다. 자동차, 전기·기계 장비, 식품(양조·통조림), 담배생산이 주요산업이다.
낭시와 함께 로렌 경제계획지역의 중심지이며 프랑스의 개발계획에 따른 요충지로 지명된 8개 '평형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낭시와 메스는 초고속열차로 연결된다. 인구 123,776(1999).
# 181 [프랑스/낭시] 스타니슬라, 카리에르, 달리앙스 광장
낭시의 스타니슬라 광장, 카리에르와 달리앙스 광장 ( Place Stanislas, Place de la Carriere and Place d'Alliance in Nancy )
1983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 1752년부터 1756년에 건축되어 군주의 위신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기능면에서도 성공적으로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공국의 수도였다.
- 개화된 군주가 국민의 필요를 인식하여 지은 근대 수도의 가장 오래되고 전형적인 예이다.
- 세계유산가치 : 문화 ⅰ,ⅳ
- 사랑스런 작은 천사, 불을 내뿜는 해룡, 그리고 물의 요정과 트리톤이 냅투누스의 바다 왕국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삼지창을 손에 든 스타니슬라 광장의 넵투누스가 황금 테두리 장식에
둘러싸여 있다.
낭시의 스타니슬라 광장, 카리에르 광장, 달리앙스 광장
폴란드 왕위를 빼앗기고 로렌 공이 된 스타니수아프 1세 레슈친스키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식 도시 경관을 낭시에 완성시켰다. 그리고 낭시의 건축가와 금 공예사들은 장식미가 풍부한
양식을 이끌어 냈다. 특히 스타니슬라 광장에 있는 예술성 높은 황금빛 연철 난간은 아주 뛰어난
작품이다. 이에 비하면 로렌 公의 궁전은 검소한 느낌마저 든다.
로렌 공국의 바로크 도시
인구 11만 명이 사는 낭시는 프랑스에서도 지방 소도시에 속한다. 그렇지만 이 곳에는 유럽의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스타니슬라, 카리에르, 달리앙스 광장이 있다. 로렌공(公) 스타니수아프
레슈친스키가 만든 이들 광장 덕택에 낭시 주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파리나 베르사이유의 화려함을
맛볼 수 있다. 스타니슬라 광장 한복판에는 스타니수아프를 기리는 동상을 세워 놓았다. 동상
뒤쪽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시청사의 박공에는 레슈친스키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폴란드 왕위 쟁탈전
스웨덴 왕 카를 12세가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 국왕인 아우구스트 2세를 퇴위시키고, 1704년에
레슈친스키를 폴란드 국왕으로 앉혀 스타니수아프 1세가 탄생했다. 그러나 1709년에 러시아와
작센이 카를 12세를 몰아내자, 후원자를 잃은 스타니수아프 1세도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프랑스가 그를 받아들여 유명한 샹보르 성을 내주었다.
1733년에 아우구스트 2세가 죽자 레슈친스키는 프랑스를 등에 업고 다시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인 작센 선제후를 지지했기 때문에 왕위
계승 전쟁으로 발전했다. 이윽고 작센 선제후가 아우구스트 3세로 폴란드 국왕이 되는 대신에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왕비의 아버지인 레슈친스키에게 로렌 공작령과 바르 공작령을
넘겨주었다.
1737년에 레슈친스키는 낭시로 옮겨 갔고, 그 곳에서 기념할 만한 도시계획을 진행시켰다. 500m
정도 떨어져 있던 옛 시가지와 새 시가지를 3개의 광장으로 묶고, 그 곳에 시청사, 재판소, 극장
같은 각종 시설을 모아 놓았던 것이다.
건축가와 금 공예사가 협력해 만든 걸작
건축가 에마뉘엘 에레 드 코리니와 금 공예사 장 라무르는 대단히 개성적인 바로크 양식을 이끌어
냈다. 긴 쪽이 124m, 짧은 쪽이 106m인 스타니슬라 광장 주변을 멋진 발코니와 채광창이 달린 7채의
건물이 에워싸고 있다. 시청 안에는 라무르가 연철로 만든 걸작이 있다. 25m 길이의 계단을 장식한
난간에는 황금빛 문장, 머리글자, 기념 장식이 들어 있다. 스타니슬라 광장으로 통하는 거리는
대부분 라무르의 작품으로 꾸며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바르텔르미 기발의 조각 작품을 곁들인
바다의 신 넵투누스 분수와 여신 안피트리테 분수의 황금 테두리 장식이 돋보인다.
레슈친스키가 사위인 루이 15세를 위해 광장 북쪽에 세운 개선문을 빠져 나가면, 가늘고 긴
카리에르 광장으로 들어선다. 한쪽 끝에는 1760년에 에레가 지은 주 청사가 서 있고, 그 앞을 타원형
주랑이 감싸고 있다. 이 곳에 페피니에르 공원, 로렌 공의 궁전, 역사 박물관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달리앙스 광장은 가장 단순하지만 광장 한가운데에는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을 보여 주는 시플레
분수가 있다. 이는 로마의 나보나 광장에 있는 ‘4대 강의 샘’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것이다
가는법:독일이나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기차로 갈수 있다.
글 출처:유로스테이션
# 95 프로방스 여행기 (1)
프로방스 (Provence) 여행기
序
프로방스는 프랑스 남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하지만 프로방스는 단순히 지리적 이름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일 깨우는 이름이다.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
그 속에서 피어 오르는 각가지 야생화들,
지중해와 알프스 사이에 펼쳐진 광대한 자연,
파스텔 톤의 연한 황갈색 집들…
그 속에서 여유롭고 한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문화…
실로 프로방스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경이로운 자연을 가지고 있다.
지중해로 빠져 들어가는 론(Rhone)강 델타지역인 카마르크(Camargue)지역은
프랑스에서 가장 “자연적인”곳으로
여기에는 흰색 말과 검은 소들이 방목상태로 살고 있고
분홍색 깃털의 페리칸들이 무리지어 서식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고지대 프로방스라 불리우는 북쪽지역은
2000미터급의 알프스들이 중부 프랑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 사이의 호수들, 광막한 고원의 벌판, 숲등이 프로방스의 자연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미국의 그랜드 캐년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크다는 베르동 협곡은 그 웅장함과 기묘함으로 단연 압권이라 할수 있겠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비뇽(Avignon), 님(Nime), 아를레(Arles), 악상 프로방스(Aix-en-provence), 상 레미(St.-Remy)등의 도시들은
프로방스 자연 그 사이 사이에 흩어져 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프로방스가 세계적인 문학과 예술의 산실이 된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말할수 있으리라.
프로방스의 강렬한 햇볕에 이끌려 이곳에 왔던 화가들은 고흐, 세잔느, 르노와르, 마티스, 피카소, 피사로, 니콜라스 드 스타엘..등 셀수 없을 정도이며 이곳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알퐁스 도데와 마르셀 파뇰등의 작품을 통해 문학적으로 승화되었다.
그러한 세계문학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자연이 주는 한가로움과 여유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가능하게 하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프로방스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과 더불어 한번 살아보고 싶은 꿈의 장소로 여겨지고 있는것이다. 나에게도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안고 돌아온 여행이었다.
실제로 영국사람Peter Mayle이 자신이 매입한 시골농가에서 직접 살아본 경험을 쓴책 “one year in Provence는 2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는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다.
프로방스는 아직도 프랑스어 사투리인 옥시탕어를 쓰고 있고 특유의 문양과 디자인이 있는 천 그리고 지역 야생화와 특히 프로방스의 꽃이라 할수 있는 보라색 라방드를 이용한 허브향기와 사라다에 사용되는 마른 허브가루는 프랑스 음식에빠져서는 안되는 중요한 양념중의 하나이다. 그러기에 이 지역은 향토색이 무척 강한 지역이다.
오래전 독일에 살던 시절에도 한번 둘러본 적이 있지만 이번 글에서는 금년 봄에 찿아 보았던 발렌솔과 베르동 계곡지역을 나의 발걸음을 따라 그리고 나의 개인적인 추억속에서 소개하고 싶다.
1) 발렌솔(Valensole)
파리로 부터600여 키로를 달린 차는 프로방스에 가까워 가고 있었다.
십여년만에 다시 찿은 프로방스…
어느새 주변경치는 바뀌어져 있었다. 지중해 연안기후의 영향으로 숲은 이미 듬성해졌다. 그 대신 소나무 사이 사이로 드러나 있는 붉그스럼한 황토흙, 바위, 연한 황갈색의 벽과 뿕은 지붕의 집들…모든것이 그때처럼 변함없이 강렬한 봄의 햇살속에 노출되어 있었다.
나는 발렌솔로 들어 가고 있다. 발렌솔은 580미터쯤의 높이에 위치한 프로방스의 대표적인 고원지대로 그 주위에 끝없이 펼쳐진 라방드의 보라색과 향기에 묻혀 있는곳이기에 발걸음을 끌게 하는곳이다. 그러나 들어가는 길목의 햇볕속에 펼쳐져 있는것은 아직은 보라색 라방드가 아닌 붉은 양귀비와 밀밭이었다. (7월중순에 만개를 볼수 있다)
마을입구에서 처음 발길을 멈추게 한곳은 포도나무 덩쿨 밑의 도자기 가게. (이곳은 흙 덕택인지 도자기 공예가 많이 발달해 있는곳이다) 들어가 살펴보니 그냥 가게가 아닌 아틀리에 였다. 마침가게주인인 도자기 작가가 견습생과 같이 작업을 하고 있어서 그의 안내를 받으며 둘러 볼 수 있었다. 시원한 실내에 도자기 물래가 있고 찰흙의 부드러운 냄새와 하늘빛을 고스란히 내려 받는 자연 채광이 있었다. 가마는 전기가마를 사용하고 있었다.
조금은 어리숙하다 할 만큼 착해보이는 제롬은 자신의 작품들을 설명하면서 도자기 비엔날레에 소개된 작품과 글들도 보여 준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작품들중 눈길을 사로 잡는것은 없었다. 평범하면서도 약간 실험적인 디자인이 그가 그저 항아리 장사가 아닌 예술가임을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다시 마을 거리로 나왔다. 발렌솔 마을 자체는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다.
왜 이리 이 마을이 유명할까? 라방들 하면 소개 되는 이지역의 매력은 마을 보다 주위의 고지대 인가?
뜨거운 아스팔트를 밟으며 마을을 벗어 나 처음 나를 반기는것은 누가 밭의 주인인지 모를 양귀비의 몸부림이 더 강렬한 황토흙위에 콩밭이었다.
떠나기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르 클레지오(Le Clezio)의 책 “떠도는 별”에 나왔던 주인공 에스더와 네이마를 생각하며 걷는다. 그녀들은 선택의 자유에 관계없이 걸어야 했고, 머물러야 했던 길들을 나는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택하여 온것이다.
걷다가 하늘과 들이 맞닿는곳.
그곳엔 보리밭이, 밀밭이 그리고 다 베어낸 유채밭 사이에 만개인 유채밭이 있었고 아직도 피지않은 라방드밭이 펼쳐있다. 온 몸을 비틀며 자라고 있는 올리브 나무들도 듬성 듬성 보인다.
나는 한그루 나무밑에 앉았다.
한 쪽은 밀밭, 다른 한쪽은 채 피지 않은 라방드 밭 그리고 그 너머에 서 있는 허물어져가는 집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나무였다. 그 그늘에 앉아 떠 오르는 상념도 써 본다.
“내 맘을 녹이고 터져나오는 땀방울을
자연이 주는 그늘의 쉼터에서 솔 바람에 훔쳐가는 환희에 젖고 싶다.
펼쳐져있는 대지의 모든것에서 숨쉬고 있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
어느곳에서고 살아 숨쉬는 작고 작은 들꽃에 머무르고 있는 생동감으로 재충전 하고 싶다.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을 품은 대 자연,
그대의 품속에 나를 맡기며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마른가지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대지여.
마른대지에 생명을 자라게 해주는 자연이여!
아, 너의 가슴에 나를 품어다오!”
바람이 불때마다 보리의 흔들림은 아름답다.
어느때는 바람보다 먼저 환호하며 바람을 맞기도 하고 작은 바람의 부름에도 온몸으로 대답한다 .
바람소리와 대지의 만남의 평화에 더위를 식히고 프로방스의 대지가 쏟아 내는 뜨거움에 자연을 음미한다.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혹시 보라색 보리를 보았는지…
보리밭옆의 보라색 강아지풀은 요즘 아이들 머리염색같다.
마침 말을 타고 한가로이 산책을 하는 두여인과 마주친다.
멀리 조그만 아름다운 집이 하늘에 닿게 놓여있고
밀밭사이로 들며 나며 길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곳에서였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길가에 작은 비석하나가 서 있다.
앞에는 꽃이 심어져 있는 그 비석은 추모비였다.
추모비에는 “Atelier Vert(1927-1944 ) 독일군에 대항하다 이곳에서 처형되다.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라고 쓰여져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아름다운 길도 전쟁시에 한 인간에게는 죽음의 장소였다는 사실에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진다.
길을 나와 다시 차로 여행을 계속했다
정말 강렬한 야생 양귀비밭을 지나기도 하고 보라색 콩밭의 매력있는 색의 향연을 만나면서 몇개의 동네를 지나 호수가 보이는 정상에서 지는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스테 크르와 (Ste-Croix) 호수는 무척이나 큰 호수였다. 베르동 계곡에서 흘러 나오는 물로 채워진 호수인 만큼 크고 또한 무척 깨끗했다. 하늘과 경쟁이라도 하듯 맑은 파란 코발트 색의 호수가 눈앞에 가득하다.
바로 이 호수가에 Expo라는 안내판이 세워진 집 한채가 보인다.
무슨 집일까? 무엇을 전시하는 집일까? 궁금함을 가지고 들어 서니 반갑게 맞이한다.
한채는 둥근 기둥을 간직한 커다란 집이었고 다른 한채는 작은 집이었지만 무척이나 아담하고 예쁜집이었다. 장미와 여러 꽃들에 안겨있는 집이었다. 널직한 집 마당은 솔밭을 거쳐 바로 호수로 빠지는 절벽에 맞닿아 있었다. 호수전망으로는 최적이었다.
그러나 무엇을 전시하고 있을까? 의문은 곧 바로 풀렸다. 안내를 받으며 들어선 방에는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농부인 주인부부의 아들 28세의 젊은 청년이 만든 작품들이었다.
전시공간도 아담하고 도자기도 발렌솔에서 본것들보다 훨씬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피카소 (Picaso)식의 무늬가 눈에 띤다. 실험성도 강하고 진취적인 특징이 모든 작품에 드러나 있었다. 이렇듯 아름다운곳에서 마음껏 작품활동을 펼치는 젊은 예술가가 부러웠다.
그에게 예술의 생명인 영감과 패기가 이어지기를 바라며…
다음날 나는 호수로 내려갔다. 건너편에 호수가에 유원지가 있었지만 보다 자연적인 이쪽을 택하여 내려가기로 했다. 차를 길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간단한 소지품을 챙겨 호수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험하고 길었다. 그 만큼 이곳은 고원지대인것이다.
역시 물은 맑았다. 호수를 동쪽으로 감싸고 있는 산들은 바위들이 드러난 탓으로 자못 험준한 기세를 보인다. 하지만 다른 쪽 산들은 나지막한 숲이었다.
호수가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막 호수가에 도착했을때 오토바이를 타고 온 독일청년을 만났다.
그는 산림환경원이며 15년째 성령강림절 방학이면 이 지역을 찾아오는 말하자면 이 지역 광이었다. 우리는 자연보호에 대해 약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일과 취미를 즐기는 젊음이 부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부터 차뒤에 실고온 오토바이의 부르릉 소리를 남기며 다시 올라가고 이제 남은건 나와 호수와 그리고 적막뿐이다.
물속에 몸을 던져 수영도 하고 밀린 수면도 취하고 자유를 만끽하며 한적한 오후를 즐긴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때야 비로소 한 노부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왔을때 서로 인사를 하는데 그들의 표정은 이상했다.
무언가 나에게 질문이 있는듯 그러나 불안한 느낌의 얼굴이었다.
그들은 “저위에 세워져있는 회색 Clio 번호 xxxxxx76이 당신차요?”라고 묻는다
렌트카라 번호는 기억이 없었지만 뒷 번호 즉 지역을 표시하는 번호76은 기억하고 또한 회색Clio라는 말에 귀가 번뜩했다.
“네 맞아요 “
나의 확인을 받으뒤 그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하는것 아닌가?
“그차 도둑맞았어요”
“ 차 뒷문이 깨지고 도둑맞은것 같아요”
아아 세상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허락한후 운명은 심술을 부리고 있는것이다.
친절한 룩셈부르그 노부부는 우리차를 본 현장과 그들이 증인이라는 증명을 그 자리에서 써준다.
차의 유리를 깨고 도둑질을 하다니!
조급한 마음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길고 험한 길을 다시 올라간 나에게 현실은 어김없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박살이 나있는 오른쪽 뒷 창문 그리고 여기 저기 뒤진 흔적..
다행히 나는 중요한 서류와 카드 그리고 핸드폰까지 가지고 내려갔었다. 나의 “용의주도함” 덕택에 크게 잃어 버린것은 없었다
완벽한 행복이란 정녕 없는것일까? 마치 천당에서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작은 불쾌함으로 큰 즐거움을 망칠수는 없는 일…
경찰에 신고하고 렌트카 업소에서 다시 차를 바꾸는 수고로 하루를 접으며 나는 드디어 호수 너머 베르동 계곡으로 차를 몰았다.
★ # 94 프로방스 여행기(2)-베르동 협곡편
베르동 협곡 !
유럽에서 가장 큰 협곡.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협곡.
세상에서 제일 크다는 그랜드 캐년은 다 알아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무명으로 남아 있는
이 베르동 협곡은 마치 2등의 비애를 그대로 말해주는듯 하다.
하지만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곳이다.
나와 베르동은 첫 만남.
썽트-크로아 호수를 끼고 협곡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설레임을 안겨준다.
드디어 호수와 협곡이 만나는 지점.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왜 그렇게 큰 썽트-크르와 호수가
“텅텅” 비어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합류지점에서 부터 카누를 타고 베르동 협곡천(峽谷川)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곳처럼 호수만 덩그러니 있는곳라면 사람들이 물놀이를 호수에서 즐기고 있었겠지만 이곳은 호수를 능가하는 비경이 있었기에 그만 호수는 잊혀져 있었던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호수를 뒤로 한 채 협곡천을 따라 베르동의 천애 낭떠러지 사이를 거슬러 노를 저어 가고 있는 모습은 과연 한폭의 그림이었다. 청자빛 물, 깍아지른 죄우의 험한 절벽바위, 그 사이에 점점히 저어가는 카누들…그야말로 丹崖碧川의 절경이었다.
(호수와 계곡이 만나는곳에서 카누를 즐기는 모습)
차는 나의 감탄과는 달리 힘겨운 호흡을 해야했다. 계속 구비 구비 돌고 도는 오르막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전거로 도전하는 사람들의 수도 만만치 않다. 도저히 힘들어 올라 오지 못할것 같은데 좀 쉬고 있다보면 어느새 땀을 뿌리며 앞질러 가고 있었다.
구비를 돌때마다 새로운 경치가 전개되고 있었다. 호수는 멀어져 가는 대신 험한 산 기세가 다가온다. 벌써 몇개 봉우리들은 아래로 보이기 시작한다. 도는곳마다 거의 바위가 튀어 나와 있었고 그곳은 잠깐씩 차를 세우게 하는 훌륭한 전망대였다.
계곡 주위의 산은 1577m의 그랑 마르제(Le grand Marges)를 위시로 둘러 서 있고 협천에 이르러 직각으로 떨어지는 절벽중 가장 높은것은 450m라니 현기증까지 다스려야 하는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조금은 편하게 보이는 툭 터진 아름다운 비탈뜨락이 있었다. 노란꽃과 온갖 들꽃이 넓게 피어 있었고 반대쪽 계곡의 산들은 병풍처럼 둘러 서 있었다. 나는 첫 휴식을 이곳에서 가졌다. 협곡의 비경속에서 들꽃은 자연의 평화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들꽃과의 대화를 나누며 간단한 빵과 커피를 마신다. 아침의 고즈녁한 한가함속에서…그리고 다시 출발.
베르동 협곡은 그 사이를 흐르는 협곡천을 좌우길로 대략 100여km를 달리게 되어 있다. 오르락 내리락 그 구비구비 길에서 눈을 휘어잡는 자연의 조화들! 그야말로 曲曲山回轉 峯峯水抱流 (곡곡산회전 봉봉수포류)…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이 돌 아가고,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돌고 있었다. 게다가 어떻게 그리 칼로 내리친듯 300-400m수직으로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을 수 있는가! 베르동川은 그 아래 까마득히 실개천이 되어 햇빛속에서 반짝이고 있을뿐이다.
전망대에 설때마다 유럽각국 (때가 유럽 성령강림절 휴가철이라 프랑스 인보다 이웃 나라 관광객이 더 많았다) 의 감탄사들이 사진셔터 소리에 섞여가며 어지러히 터져 나온다.
한 전망대 근처 바위에서는 산양을 만나기도 했다. 녀석은 사람들을 피하는 기색이 전혀없이 사진모델이 되어 주고 있었다. 가끔씩 몸을 틀어 이동하는데 정말 발굽과 몸이 바위와 일치가 되는 환상적인 모션을 보여 주었다. 나는 주위의 풀을 한줌 뜯어 다가 서 보았다. 그러자…놀랍게도 이 산양은 기꺼이 손에서 받아 먹는것 아닌가? 그때서야 다른 관광객들도 용기를 내어 각자 손에 풀을 들고 다가온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는것은 산양만이 아니었다. 어느곳에선 땅에서 솟아난듯 난네없이 없이 나타난 사람을 보고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벗어부친 윗 몸통, 허리에 메 달린 자일과 고리로 즉각 알수 있었다. 세상에…보기도 아찔한 이 험한 절벽을 타고 올라온 것이다. 산양과 인간의 경쟁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하루를 차로 돌아도 다 못도는 절경속에서도 베르동 협곡의 절정은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point sublime이라는곳, 말 그대로 절정의 장소라는 뜻이다. 가다 서고 서서 보다 다시 가고 이 반복 끝에 드디어 나는 point sublime에 도착했다. 이곳에서의 경치…! 만약 글로써 표현해주기를 나에게 바란다면 님들은 너무 잔인한 분들이리라…어떤 표현으로 어찌 내가 감히 그 희망을 채워줄수 있을까? 차라리 짐짓 “무덤덤한 말로” 넘기고 싶다.
이곳, point sublime이라는곳! 이곳은 400m의 높은 바위가 금방 쩍 갈라진것 처럼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곳이었다. 역발산 기개세 항우장사가 이곳에 와 그 절벽을 쫙 밀어 부치면 한치의 틈도 없이 그대로 맛 물릴 정도로 견아상착(犬牙相錯: 개 이빨처럼 맛물린 지세)의 形이었다. 그리고 그뒤로 이어지는 숨고 나서고 하는 물길과 절벽들의 숨박꼭질…
(point sublime)
이 협곡이 생긴것이 지리사학적으로는 일억년 전, 바닷속에 있던 알프스의 융기가 시작되고 그렇게 솟아오른 산 사이를 비집고 수천 수만년을 두고 흐른 물살이 결국은 이렇게 높고 좁은 협곡을 만들어 낸것이다. 그러니까 이 절벽들은 한때의 제 살을 지천에 두고도 이렇게 찟어진 채 벌써 또 몇 천만년을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는것이다. 가장 좁은곳은 살이 서로 맞닫기라도 할듯한 불과 몇 미터이니 안타까움이 저절로 느껴진다.
이 협곡의 또 다른 매력은 아래로 내려가 바로 그 물가를 걸을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차로 돌며 감탄하는것으로 끝나는것이 아니고 아래로 내려가 발로 걸으며 진땀을 흘리는데 있는것이다.
오늘은 주위를 차로 한바퀴 돌아본 “바퀴여행”이었다면 내일은 발 여행이다. 직접 협곡밑으로 내려가 굽이치는 물살과 함께 걸어 보는것이다. 다시 하루를 소비해야 하며 많은 에네지를 필요로하는 베르동 트렉킹을 위해 모처럼 해지기 전에 하루를 마무리 해 보았다. 그 만큼 베르동 트렉킹은 심신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베르동 계곡물이 거세게 흐르는 강가에서 나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갈라진 협곡틈에서 튀어나온듯 별들이 하늘에 맑게 흩뿌려져 있는 밤이었다.
다음날…
계곡탐사를 떠나기전 떠오르는 point sublime의 아침햇살이 보고 싶어 그곳이 가장 잘 내려다 보이는 주위의 높은 동네로 향했다.
수억년을 숨쉬고 자연의 침식에 몸을 맡끼고 있는 너 자연이여!
보이지 않는 끝없는 너희들의 몸부림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었일까?
우리의 삶의 몸부림이 또한 이 자연속에서는 어떠한 의미일까?
이제 나는 이번여행의 하이라이트인 계곡 트레킹을 위해 먼저 휴게소가 있는 출발지점으로 갔다. 옛날에는 대피소였는데 지금은 출발하는 사람은 신발끈을 졸라메고 돌아 온 사람들은 아이스 티를 마시며 숨을 고르는 곳이다.
베르동 협곡은 여러 개의 코스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Sentier Martel, Sentier d’l’imbut, Senrtier du Bastidion등…
모든 코스가 하루를 소요하기에 그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나는 랑뷔(l’imbut)코스를 골랐다.
설명서에 적혀 있는 가장 아름다운 코스라는 한 마디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출발점에서 계곡물까지 350m고도의 차이,
내려가는데만도 한 시간 이상의 길이다.
다행히 일찍 왔기 때문에 선선한 아침에 무척이나 상쾌한 출발이다.
이제 물가를 따라 펼쳐지는 4km의 길을 걷는 즐거움만이 남은것이다
휴게소에서 아래로 내려 갈려는데 젊은 환경보호원들이 출발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해야 할 점들을 설명해 준다. 잠시 긴장되던 마음은 출발하는 첫 걸음을 환하게 맞이 해주는 프로방스 산 꽃인 노란 산국 무더기에 의해 누그러진다.
중간쯤에서 만난 아주 큰 도토리 나무에 안겨보기도 하면서, 그늘에 잠시 잠시 몸을 맡겨 가면서 발은 한가히 걷는데 귀는 온통 강물소리를 향해있다. 최소한 물소리 들릴만한 곳쯤은 왔을까?….
드디어 힐끗 협천(峽川)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느껴지는 서늘함은 마치 나를 맞이 하러 나온 전령인듯 반갑다.
내려가 서니 가로 지르는 다리가 있다. 어울지 않게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진 철 다리다. 알고보니 그럴만도 한것이 8년전 큰 홍수가 났을때 나무다리가 떠 내려 가버렸던것이다. 이제 이 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에서 트랙킹이 시작하는것이다.
경치는 같은 경치이지만 물가에 서서 보니 어제 위에서 보던 바와 사뭇 다르다. 아니…이미 나는 감히 내려다 “볼수 있는” 자리에 있지않다. 모든것이 코앞에 서있고 시야는 제한되어 있다. 이제는 정말 내가 이 거대한 자연의 한 일부분이 되어 있는것이다. 물은 천길 절벽을 어루만지듯 감돌아 흐르고 산자락은 물에 발을 담근 채 우뚝 서 있는 이곳에서 나는 그저 나뭇잎뒤에 숨은 미물같다
발길을 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여느 강가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 만큼 길이 편했다. 좁은길이 나오다가 이내 숲 사이길로 바뀌기도 하고 협천에 바짝 다가서다 또 갑자기 숲으로 들어가고, 옆에 끼고 걷다가 보면 어느덧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고.. 정말 다채로움이 있는 길이었다. 거기에다 이제 바로 코 앞에 솟아있는 그 절벽들…내 쪽의 절벽은 아예 볼수도 없다. 겨우 물건너 반대쪽 절벽을 보려도 너무 가까이 있기에 고개를 젓혀 들어야 한다.
그래도 길은 편했다.
이렇게 그냥 가면 되나보다…
하지만 이 생각이 전혀 오해였음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베르동은 그렇게 만만한곳임을 거부하고 있었다.
편한 숲길을 나와 오르막턱을 하나 넘고 보니 또 하나 좁고 가파른 길이 나오는데 저으기 걱정을 하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험하다. 순간 눈에 띄는 절벽쪽으로 걸려있는 쇠줄이 걱정을 누룰수 있게 해준덕에 짐짓 태연히 다가선다. 첫 길은 그런대로 스릴까지 즐기며 넘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이 구간에서 부터 다음 목적지 까지 적어도 여섯번의 “쇠줄길” 이 나오는데 갈수록 간담을 서늘케 하는 길이었다. 한곳은 아예 절벽 중간을 파고 길을 낸곳으로 쇠줄이 달려 있었지만 짦지 않은 길을 후둘거리는 다리로 넘겨야 했다. 겨우 한 절벽 중간에 파인 겨우 한 사람이 지나 갈 정도 넒이의 길, 아래로 보이는 급물살의 谷川…그야말로 "무릎으로 기고 뱀같이 업드려서"(膝行蛇伏) 가야 한다는 무이산(武夷山) 무이구곡을 가는 심정이었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한 사람을 목숨을 걸고 바깥쪽으로 양보해야 하는 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코스옆 바위엔 여기에서 죽은 한 젊은이를 추모하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이렇게 걷기를 한시간 멈추어지는 발길에 따라 계곡가에서 휴식과 점심을 먹으며 잠깐 낮잠도 즐기려는 순간…갑자기 총소리 같이 피이용 그리고 타타탕 탕!하는 소리가 계곡의 적막을 깬다. 깜짝 놀라 바위 밑으로 피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위에서 작은 돌하나가 굴러 왔는데 내려오는 속도에서 가속이 붙어 온 계곡에 메아리를 치며 마치 총알이 날라오듯 한것이다. 긴장으로 죄어오는 몸을 추스리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이 코스는 목적지 까지 5개의 장관이 있다. 어느곳은 별것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하고 어느곳은 역시 비경임을 인정하게 하는 험난한 코스를 극복하며 도달한 마지막 지점은 물이 바위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특이한곳이었다. 이름도 깔데기(Enntonoir)라고 불리우는 지점이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많던 계곡물이 소리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물은 사라지기전 이곳까지 온 사람들을 보상이라도 하려는듯 널직한 자갈톱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진땀을 흘린 사람들 마다 이곳에 이르러 쉬고 있었다.
사실 길은 그 너머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큰 바위 덩어리들을 넘어가야 하는 코스였고 그 사이 사이마다 벌어진 틈들은 더 이상의 접근을 원치 않는다는 강한 경고를 보내는듯 했다. 나는 여기 자갈톱에 그냥 몸을 뉘였다. 물에 발을 담그어 본것은 한참이나 지나서 였다.
이렇게 해서 한바퀴 둘러본 베르동 협곡은 과연 대단한 곳이었다. 하지만 굳이 객관적이기 위해 말한다면 특이한 것은 그 웅장함이야 가히 압도적이었지만 계곡 자체의 아기자기한 멋은 한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큰 바위들도 바로 어제 굴러 떨어진듯 투박했고, 많은 나무, 풀들이 나름대로 무성하게 안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불그레 벌거벗은 절벽위에 한그루 낙랑장송만이 외로히 서 있는 모습, 신선들이 바둑이라도 둘만한 넒찍하고 편한 바위 덩어리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베르동은 아직은 험한 기세로 흐르고, 구르고 움직이는 젊은 계곡이었다. 계곡이 젊어서 일까.. 젊음은 젊음을 부르고 있었다. 여기에는 또한 카누 타는 젊은이, 밧줄 하나에 의지해 암벽을 타고 오르는 젊은이들의 도전이 있었다. 베르동은 젊었고 베르동은 젊음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선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설악산 계곡으로, 자연에 젊음을 던져 도전하고 싶은 사람은 베르동 계곡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림자가 길어지는 계곡을 빠져 나왔다.
뉘엇뉘엇 지는 해를 따라 협곡의 베르동을 떠나며 다시 경유하게 된 발렌솔(Valensole)의 넓은 평야속에서 나의 10박11일 프로방스와 베르동 협곡여행의 긴 호흡을 정리해 본다.
여행이란 하나의 실험이다. 내가 나를 만나고 내가 나를 만드는 나와의 실험인 것이다. 내가 자연에 도전하며 흘린 땀이, 내가 자연에 도전해 받은 열기가 내가 살아 가는 삶에서 힘이 될것이며 이 힘으로 인하여 또 다른 미래를 꿈꾸게 되는것이 아닐까?
다시 파리로 올라가는 길…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이 또 다른 미래를 향해 가는 길이리라.
★ 프랑스 남부
◆아비뇽
구 교황청 궁전을 중심으로한 광장과 쁘띠빨레(구 교황청 북쪽의 우아한 건물...미술관)
*론강의 생베네제 다리(일명 끊어진 다리)아비뇽과 빌르뇌브 레 자비뇽 연결
*빌르뇌브 레 자비뇽; 베네딕트 수도원,성 안드레 요새,필립왕의 탑(올라가면 주변 풍경과 아비뇽 성벽 파노라마)
* 라벤다와 해바라기 아름답게 피는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엽서에서 보는 아름다운 마을..
◆샤모니(Chamonix)
◆니스(Nice)
마세나 광장- 해변 - 구시가지 - 마티스 미술관 - 샤갈 미술관
◆모나코(Monaco) 니스에서 16km
*열대 정원이 있는 모네게티(Moneghetti)
*항구 근처의 라콘탑(La Condamine)
*구시가지 Monaco-Ville; 왕궁..11시55분 교대식,왕궁 광장의 전망대(대포있는곳;환상적),대성당,해양박물관
*카지노 Monte- Carlo
# 198 중세도시 카르카손 (피레네 산맥 근처;유럽에서 가장 크고 잘 보존된 요새도시)
# 142 중세 요새도시 카르카손
영화 촬영장 같은 중세의 도시
-- 카르카손의 요새도시 --
▷문화유산
52개의 탑으로 방어시설을 갖춘 고지의 요새도시를 두르고 있는 2개의 완벽한 원형 성벽.
요새 속의 요새인 80x30m 크기의 샤토 콩탈, 프랑스 남부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이새’와 ‘생명의 나무’로 유명한 유리창과 더불어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생나제르 대성당, 나르봉네즈 문과 도드 문으로 통해 옛 시가지로 이르는 출구 역할을 하는 13세기의 생미셸 대성당 등이 있는 중세풍의 도시
▷위치
오드 주 카르카손
▷의의
유럽에서 가장 크고 잘 보존된 요새도시
흉벽과 탑 방어 시설을 갖춘 찬란하고 숭고한 성벽이 유서 깊은 카르카손의 도심에서 오드의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중세의 음유시인들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영웅적인 카르카스를 노래했던 카르카손의 요새 앞에 서면 마치 중세 시대로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헐리우드 스튜디오의 그 어떤 무대 장식가도 이보다 더 환상적인 성을 꾸밀 수는 없을 것이다.
카르카손이라는 지명을 둘러싼 전설은 ‘중세 무협 영화’의 대본이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사라센의 왕 발락과 결혼한 카르카스 부인은 카를 대제가 몇 달간 성을 포위했을 때 당장 영화화할 수도 있을만한 기발한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돼지에게 곡식을 먹여 살을 찌운 다음 성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적군의 발 앞에 내던졌다고 한다. 그러자 성채의 벽 앞에서 돼지 배가 터져 엄청난 알곡이 쏟아져 나왔다. 돼지에게도 알곡을 먹이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의 주인은 필시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을 분량의 식량을 저장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한 카를 대제는 헛된 포위 작전을 포기하고 병사들을 철수시켰다. 영리한 카르카스 부인 덕분에 승리의 나팔을 불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카르카손(카르카스의 승리란 뜻)이다.
카르카손의 도심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보존된 요새이다. 수많은 탑과 2개의 흉벽이 있는 원형 성벽이 이 거대한 건축물을 감싸고 있다. 많은 관광객과 기념품 가게, 화랑, 레스토랑과 카페들만 없다면, 길게 늘어서 있는 성문을 통해 이 요새도시로 들어서는 순간 과거로의 사간 여행을 떠나게 된다.
둥근 머릿돌로 포장된 골목은 저녁 늦게나 이름 아침에야 원래의 매력을 되찾는다.
카르카손은 12세기에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에 트랑카발 왕조는 높은 성의 언덕을 체계적으로 축성케했고, 고딕 양식의 유리창으로 유명한 생나제르 대성당을 완공했다. 말 그대로 ‘요새 속의 요새’인 화려한 샤토 콩탈도 이 때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 웅대한 성벽에도 불구하고 카르카손의 주민들은 1209년 알비겐저 전쟁 때 12일간 포위당한 끝에 십자군에 무릎을 꿇었다. 부족한 물과 찌는 듯한 더위 그리고 맹위를 떨치는 전염병이 공격군들에게는 최선의 연합군 역할을 해주었다.
승승장구하던 시몽 드 몽포르 장군이 이 도시를 자신의 관저로 삼았기 때문에 도시는 약탈은 당했지만 다행히 화염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수십 년 뒤에 프랑스의 성왕(聖王) 루이 9세는 도시 주변에 2번째 원형 성벽을 쌓게 했으니,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카르카손의 실루엣은 이 때 완성된 것이다. 1659년 피레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카탈루냐의 경계 요새로서의 전략적 중요성이 사라지자, 도시는 점차 황폐해져 갔다.
19세기 중반에는 요새를 허물 계획도 세워졌지만, 프랑스 역사 기념 건축물 총감독이었던 프로스페르 메리메가 적절한 시점에 그 계획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 뒤 유명한 건축가이자 복원 전문가인 비올레 르 뒤크의 지원을 받은 지역 고고학자 장 피에르 크로 메이르비예 덕분에 요새도시는 마침내 고딕 양식의 찬란함을 다시 뽑낸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대성당을 되살리라는 위임을 받았던 복원 전문가들은 때로 낭만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중세 시대에는 없었던 곳에 첨탑과 흉벽을 설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뛰어난 복원작업이 결코 손상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유럽인은 자신들의 문화적 뿌리에 대한 의식을 새삼 되새기게 되었으니, 비올레 르 뒤크와 그 동료들은 고딕 양식의 카르카손에서 유럽 문화가 꽃을 피웠다고 보았다.
# 237 아름다운 꼬뜨다쥐르 지방의 해안가 앙티브 (Antibes)
앙티브 Antibes
니스에서 칸 방향으로 열차를 타고 20분 걸린다. 앙티브 곶의 동쪽에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해안을 따라 바위 위로 난 길을 20분 정도 걸으면 그리말디티 성 Chateau Grimaldi에 도착한다. 성 안은 현재 피카소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1946년에 피카소가 이 성에 머물렀을 때 그린 작품과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조용한 장소로 성수기에는 피카소 팬으로 붐빈다
니스와 칸 사이에 위치한 피카소의 마을 앙티브는 아름답고 작은 마을이다. 아기자기한 기차역에서 나와 걷다 보면 흰 요트와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예쁜 풍경이 펼쳐진다. 바닷가 절벽에 쌓인 그리말디 성 안에 위치한 피카소 미술관도 꼭 들르자. http://www.antibes_juanlespins.com
# 프랑스 남부지역
아를(Arles)
고흐의 그림 중에, 가장 밝고 화사한 그림을 그렸던 곳이에요.
[왼쪽사진]처럼 반 고흐 카페가 있는 곳입니다~
이 카페는 고흐의 유명한 그림, 옐로 카페~의 바로 그 장소죠.
그리고, 이곳 근처에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생레미를 가실 수 있어요. (버스로 가야한다고 알고 있어요~) 아를에 대한 자세한 글은 고흐의 노란방이 있는 곳을 참고하세요..^^
관련 사이트 : http://www.tourisme.ville-arles.fr
님(Nim)
처음엔 샘의 요정 네마우수스의 이름을 관련시켜
이름을 지었다고 해요~
[왼쪽 사진]은 메종카레(Maison Caree)라고
로마시대 건축물이구요, 그 뒤에 보이는 건물이
메종카레를 이미지화해서 만든 현대의 건축물이에요. ^^
아를보다 규모가 큰, 원형경기장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아를과 마찬가지로 투우가 열립니다~
관련 사이트 : http://www.ot-nimes.fr
가르 다리(Pont du Gard)
건축관련 책을 읽고 꼭 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직접 보니..
정말 로마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 다리는 모양도 모양이지만, 폭풍에 끄떡없이 만든거라고 해요.
덕분에,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굳건히 서있답니다.
50km떨어진 님에 물을 끌어오기 위해 이렇게 커다랗고 튼튼한
건축물을 세우다니...그것도 1km당 38cm의 기울기로 말이죠..
놀라울 따름..-_- 수로는 맨 윗 부분.
이곳 가르강변은 수영하는 사람들로 분주한데요,
바닷물 말고..강물에서 물놀이를 하고픈 분들은 이쪽으로 가세요~
이곳에서 카약도 하고, 수영도 하고, 튜브타고 많이들 놉니다..^^
님의 기차역과 함께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가면 되요~
버스 시간표 참고 : http://www.stdgard.com
악상 프로방스(Aix-en-Provance)
악상프로방스는 세잔이 태어나고 활동했던 곳입니다~
관광안내소에서 세잔과 관련된 지도를 받을 수 있어요~
[왼쪽사진]은 세잔이 그림을 그리던 아뜰리에 앞의 정원.
엄청 더웠던 날씨에, 아뜰리에가 시내 중심이랑 많이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기력을 쇠진하고 쉬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 역시도 그늘에서 점심먹고 쉬었죠~
이곳 정원에서 여러 가지 문화행사를 하니 참고하세요..^^
관련 사이트 : http://www.aixenprovencetourism.com
아비뇽(Avignon)
국제 연극 축제로 잘 알려진 도시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 아비뇽, 연극축제글을 참고하세요..^^
관련 사이트 : http://www.ot-avignon.fr
2003. 10. 13 pretty chung..:-)
출처:www.prettynim.com
# 190 화가들의 유토피아 남프랑스
이정현의 테마여행]화가들의 유토피아 남프랑스
마티스와 샤갈의 미술관이 있는 니스의 해변풍경. 해변에 깔린 검은 자갈로도 유명하다. 4월이면 벌써 햇볕을 찾아 남하하는 북유럽의 여행객들로 해변이 북적이기 시작한다.사진제공 월드콤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일년 내내 변함없이 내리쬐는 포근한 햇살. 세상에 지친 예술가들에게 프랑스 남부 리비에라만큼 여유로움을 선사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이미 18세기부터 시작된 예술가들의 남행은 인상파 화가들에서 두드러졌고, 2차 세계대전의 피바람이 그친 뒤로도 그 행렬은 계속됐다. 프랑스 남부의 지역 관광청들은 이를 기억하기 위해 각 예술가들에게 크고 작은 미술관들을 헌정했고 이를 관광상품화 해서 하나의 테마여행 루트로 개발해 놓았다.
● 아를에서 시작되는 고흐의 흔적
‘빛의 화가들의 흔적을 좇아서’라고 이름붙은 남프랑스의 예술 테마여행 상품은 프로방스-아를-코트다쥐르 관광국의 연합상품명이다. 이 코스는 프로방스의 아비뇽에서 시작해서 생레미, 아를, 엑상프로방스를 거치는 코스로 이웃한 코트다쥐르의 작은 미술관들을 돌아보는 예술기행상품과 연결된다.
길 안내자로 삼는 화가는 단연 고흐와 세잔이다.
고흐가 ‘예술의 미래는 남프랑스에서 발견될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프로방스는 화려한 색감과 따뜻한 기후, 온화한 사람들로 예술가들의 미감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고흐가 입원했던 생 레미의 정신병원. 지금은 고흐의 그림이 판넬로 걸린 관광명소가 되었다.
엑상 프로방스의 세잔 박물관. 사진제공 캠프
우선 고흐가 처음 여행을 시작해 도착한 아를. 오래 전부터 예술가의 공동생활에 기초한 유토피아 건설을 꿈꾸었던 그가 고갱을 초대한 도시다. 이 곳에서 광기에 휩싸인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른다. 지금의 반 고흐 병원에서 그 다음해 옮긴 생레미의 정신병원까지 오랜 병원생활 동안 무려 200점 가까이 그림을 그려냈다.
그가 병상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그렸던 풍경과 끊임없이 화폭에 옮긴 올리브나무들, 해바라기들이 캔버스에 남겨졌고 지금도 이 지역엔 그 풍경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1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도 옛날 모습 그대로 노란색인 카페에서는 고흐가 1888년 9월에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를 떠올려볼 수 있다.
엑상프로방스 출신의 화가 세잔의 흔적 역시 엑상프로방스 전역에서 만나 볼 수 있다. 고흐와는 달리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세잔은 이 곳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교외로 나가면 그가 사랑했던 프로방스의 풍경들이 시간을 거슬러 눈앞에 펼쳐진다. 특히 1011m의 생트 빅투아르산은 세잔의 그림 속 모습 그대로이다. 어릴 적 고향 친구인 에밀 졸라와 함께 근교에 있는 아르크 강가나 비베뮤의 채석장으로 놀러 다니면서 목탄을 갖고 낙서를 즐겼던 세잔은 그 풍경들을 성장 후 그의 작품 속에 등장시키곤 했다. 이 곳에는 당시 그가 사용하던 아틀리에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고 거리 곳곳에 동판으로 세잔이 다녔던 길이 표시돼 있어 이방인이라도 쉽게 그 흔적들을 코스별로 더듬을 수 있다.
앙티브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의 외관
고흐의 작품 배경이 된 아를의 카페.사진제공 캠프
● 코트다쥐르에서 만난 예술가들
그리스인들이 처음 도착해서 세운 도시로 알려져 있는 앙티브에는 피카소 미술관이 있다. 원래 중세의 대주교 저택이었다가 이후 그리말디 가문의 요새이자 성으로 쓰였던 미술관 건물은 1946년 이후로는 피카소의 거처가 되었다.
이 곳에서 피카소는 지중해를 닮은 파스텔톤의 색조로 다양한 시도에 몰두하게 된다. 신화와 앙티브 해안마을의 전설 등이 캔버스에서 되살아났다. 세인들은 당시 연인 프랑수아즈 지로와 함께 이 성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기 때문이라고도 풀이한다.
25점의 주요 회화와 스케치를 비롯해 그리스 토기 제작방식을 떠올리게 하는 수백점의 도예품들로 가득 찬 피카소 미술관은 이 작은 마을을 세계적인 예술의 도시로 만들어주었다. 현재 피카소 미술관은 세 군데. 앙티브 외에 파리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각각 세워져 있다. 하지만 이 곳은 오직 앙티브와 프랑스 남부 연안의 정취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 이 곳에서가 아니면 그려내지 못했을 것들만 전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유럽 최대의 카니발이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한 니스. 이 도시의 가장 오래된 구역인 시미에에는 마티스 미술관과 샤갈 미술관이 이웃하고 있다.
마티스는 니스를 끔찍이도 사랑한 나머지 이 곳에 묻힌 인물. 1921년부터 니스에서 살기 시작한 마티스는 야수파 시기가 지난 뒤 청결하고 간결해진 선과 색을 이용하거나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 등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시미에에 있는 로마시대 원형경기장 인근의 마티스 미술관은 ‘창문이 있는 정물’ 등 그가 50년대 이후 몰두해 제작한 콜라주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17세기 별장 건물이었던 미술관은 외관과는 달리 밝고 세련된 느낌의 실내 전시 공간이 갖춰져 있다.
마티스가 니스에 쏟아 부었던 사랑은 이 곳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방스의 로제르 성당 건축에서도 드러난다. 1948년부터 51년까지 건축된 이 성당은 내부에 그려진 성 도미니크 벽화를 비롯해 마티스 예술의 결정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샤갈 미술관은 시미에 지역 들머리에 있다. 사실 샤갈은 자신이 만년을 보낸 생폴드방스에 미술관을 세우고 싶어했지만 마땅한 부지도 없고 시 당국과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아 이 곳 니스로 낙점된 것. 니스의 샤갈복음미술관은 그의 작품 가운데서 특히 성서를 테마로 한 것들만 모아 놓았다. 노아의 방주, 천사, 홍해의 기적 등 성서의 몇몇 상황들이 영화처럼 화폭에 옮겨졌고 대부분 대형 캔버스를 이용해 보는 이를 긴장시킨다. 유화뿐만 아니라 대형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기법을 함께 만날 수 있지만 메시지는 오직 하나. ‘신의 영광과 평화’다.
시인이면서 화가, 희곡작가, 무대 디자이너, 평론가, 영화 감독과 제작자 등 현대 예술 분야 전반을 섭렵했던 장 콕토. 이탈리아 접경의 해안도시 망통은 그의 흔적으로 더욱 빛나는 마을이다. 17세기 외적을 막기 위해 세운 바스티용 요새는 1967년 장 콕토 미술관으로 변신해 일반에 공개됐다. 그가 망통시청의 웨딩홀 장식과 벽화 제작 의뢰를 받았던 것이 1950년대 말. 이 작업이 끝난 뒤 콕토는 낡은 요새에 자신의 예술을 집대성할 계획을 세웠고 생전에 시작된 미술관 개조 작업은 1963년까지 계속됐다.
● 여행정보
1. 찾아가는 길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남부 도시로 이동하려면 대한항공이나 에어프랑스를 이용, 파리를 경유해서 니스로 이동해야 한다. 파리에서 다시 국내선을 타고 니스국제공항으로 이동하는 데는 1시간35분 정도 걸린다. 이 곳에 각 남부 도시로 가는 기차편과 일반 교통편이 마련되어 있다.
2. 기타 정보
각 미술관 관람정보와 위치 등 프랑스 남부 여행에 관한 문의는 프랑스 관광성(www.franceguide.or.kr, 02-773-9142)으로 하면 된다.
이정현 여행칼럼니스트 nolja@worldpr.co.kr
# 188 [테마가 있는 배낭여행]프랑스 생 레미
[테마가 있는 배낭여행]프랑스 생 레미
늦은 오후 니스의 빨래방에 앉아 세탁기 속에 뭉쳐 돌아가는 알록달록한 옷가지들을 보고 있자니 엉뚱하게도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그림이 떠올랐다.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1889)은 고흐가 프랑스 남부 생 레미(St. Remy)의 정신병원에 머물 때 그렸다. 그림 왼쪽으로는 수직으로 서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산들거리며, 오른쪽에는 산과 언덕이 듬직하게 자리 잡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위로 캔버스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밤하늘에는 초승달과 함께 빼곡한 별들이 빛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유명해진 것은 아무래도 하늘에 펼쳐진 동그랗게 부는 바람의 표현 때문일 것이다. 춤추는 파도처럼, 성난 회오리바람처럼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프로방스의 바람 말이다.
저녁 늦게 아를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자전거를 대여하는 곳을 찾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를에서 생 레미까지 왕복 50㎞의 사이클링을 우습게 본 것이다.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아를 시내 관광안내소에서 지도와 함께 사이클링 루트를 안내받고 생 레미로 출발했다.
◇생 레미 가는 길에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밭
아를을 벗어나자 눈부시게 노란 해바라기 밭이 펼쳐졌다. 태양을 향해 간절히 사랑을 구혼하는 것처럼 모두 같은 모양새로 늘어선 해바라기꽃들은 장관이었다. 이런 풍경을 꽃병의 해바라기 몇 송이에 담을 수 있었던 고흐는 미친 사람이기 전에 천재가 확실하다는 생각을 했다. 해바라기 밭 사이사이 가을도 아닌데 추수가 끝난 스산한 들판이 펼쳐졌다. 들판 여기저기 널브러진 커다란 짚가리 아래 왠지 낮잠을 청하는 농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도로보다는 들판으로 자꾸 눈이 갔다.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들을 많이 본 탓일까.
아를을 떠난 지 2시간쯤 지나자 끝나지 않을 것 같이 한결같은 해바라기 풍경 때문에 길을 잃은 것 같아 걱정됐다. 다행히 플라타너스 나무가 길게 늘어선 아름다운 길의 생 레미 마을 입구로 안내했다. 생 레미도 아를과 마찬가지로 고흐가 그림을 그린 장소마다 표시를 해두고 해당 그림의 설명을 덧붙인 팻말이 있었다.
◇고흐의 방이라 이름붙여진 곳.
나는 ‘별이 빛나는 밤’이 어디서 그려졌는지 알아내기 위해 이미 문을 닫은 관광 안내소 앞을 서성거리다 팻말을 발견했다. 안내문에는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 풍경은 실제 있는 공간이 아니라 고흐의 상상의 공간이라고 했다. 인상파 화가였던 고흐가 그린 상상화는 당연히 없다고 생각했고, 그림의 구도로 보아 당연히 고흐가 요양하던 정신병원에서 바라본 생 레미 풍경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오만했던 내 생각은 빗나갔지만, 천문학자들이 ‘별이 빛나는 밤’에 펼쳐진 하늘과 닮은 우주 사진을 발표하기도 할 만큼 사실적인 느낌이 강하다. 또한 고흐가 요동치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한 바람은 겨울에 론강의 계곡을 따라 불어 내려오는 강한 바람, 미스트랄이라고 한다. 힘겹게 자전거 바퀴를 굴리는 내내 나는 그 바람을 체험하는 중이라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프로방스의 바람은 정말 곱지 않았다.
◇고흐가 머물렀던 생 레미 정신병원 전경.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설명 때문에 황당한 마음을 접고 고흐가 머물렀던 정신병원으로 향했다. 올리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정신병원은 정원을 가운데 두고 정방향의 건물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곳곳에 고흐의 복제 그림이 걸려 있어 낡고 스산한 건물에 친근감이 들었다. 2층에 재현된 고흐의 방에서 MP3에 담긴 돈 매클린의 노래 ‘빈센트’를 들었다. 그제야 이 노래 맛이 났다.
여행은 순간순간의 선택이 모여 만들어진다. 몇 년이 지난 후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직접 대하게 된다면 푸른 니스의 바다를 뒤로 하고 생 레미로 달려간 것, 편안한 버스 대신 프로방스의 바람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던 자전거를 선택한 것에 스스로 고마워할 것이다.
김정윤·배낭여행 커뮤니티 ‘떠나볼까’
(www.prettynim.com) 회원
◇잘 가꾸어진 병원 안 정원.
■여행정보
고흐 흔적 가득한 아를에서 하룻밤
생 레미까지 자전거 빌려 타고 달려
파리나 니스에서 출발한다면 아비뇽(Avignon)으로 가서 아를(Arles)행 기차로 갈아탄다. 생 레미에는 기차역이 없으므로 우선 아를로 가서 버스를 타야 한다. 어차피 아를을 거치게 되므로 고흐의 흔적이 가득한 아를에서도 하루쯤 머물면 좋을 듯싶다.
아를 시내 관광소에서 생 레미까지 가는 길을 자세히 안내받을 수 있으며, 10∼20유로(1만5000∼2만원)를 주고 자전거를 하루 동안 대여(아를 공식유스호스텔에서도 대여 가능)해서 가는 것도 추천한다. 생 레미는 아를에서 25㎞ 떨어져 있다.
프로방스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마을 생 레미에는 로마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동남쪽에 위치한 고흐의 요양소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흐가 머물렀던 요양소의 입장료는 어른 3.5유로, 학생 2.8유로이다. 계절에 따라 개·폐관 시간이 조정되므로 유의해야 한다.
# 173 프로방스 지방의 아름다운 마을 아를
아를...원래 내 계획에는 전혀 없었던 곳!
그리고 사실 고흐에 대해 잘 몰라 갈 생각이 없었던 곳이다.
그러나...지니누나가 몽땅 잃어 버리고 나서
프랑스에 발이 묶이게 되서 가게 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몽셍미셀 갈 때는 아침에 무지 일찍 일어났는데
아를 가는날은 더 서둘러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자다가
지니누나가 깨워서 일어났다^^;
어쨌든 어기적 어기적 준비하고...
파리 리옹역으로 갔다.
아침 7시 20분 정도에 떼제베를 타고...
10시 좀 넘어서 아비뇽에 도착했다.
바로 아를로 갈려고... 아비뇽 TGV역에서 아비뇽 중앙역으로
가려고 책자를 뒤지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한국사람이 말을 걸어온다.
엇! 오르비에또에서 만난 유미였다.
세상 좁다더니..유럽 하늘 아래서 또 만나는구만 ^^
그래서 하루종일 같이 다녔다.
아비뇽 TGV역에서 아비뇽 중앙역으로 셔틀버스를 타고
아비뇽역에 도착했지만...
이미 아를 가는 기차 한편은 떠났다.
그래서 아비뇽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식당을 찾아봤지만...
이 놈의 가계들이 영업시간이 무지 늦어서 오픈도 안했다.
어쩔 수 없이 빵과 음료수를 사고...
기차시간 맞춰서 아비뇽역에서 기다리다가 아를행 기차를 탔다.
유미랑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아를에 도착했다.
우선 난 인포메이션 센타가서 지도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내 앞에 어떤 일본인이 있었는데...
인포의 직원이 "니혼진 데쓰까'
그러면서 일본인에게 묻자 "하이"
그러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인포의 직원은 유창한 일본말로 일일이 여행코스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거였다.
이런 작은 동네에도 일본사람을 위한 배려는 역시 틀리구나!
이런걸 보면서 또 나라의 힘 없음에 한탄을 했다.
어쨌든 지도를 얻고 아를 시내로 향했다.
로마의 영향을 받은 곳이어서 그런지 거리가 상당히 이탈리아의 느낌을 주는 그런곳이었다.
하긴...갈리아의 작은 로마라 불리었다고 하니...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고대 원형 경기장을 가보기로 했다.
아를은 로마의 지배를 받아서 그랬는지
콜로세움 같은 원형 경기장이 아를 시내에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원형 경기장을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여기서 바라보는 시내가 아름답다고 하니..
반드시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표를 사고 원형 경기장 안으로 입장!
원형 경기장 내부는 진짜 아무것도 없어서 횡했다.
아를 축제때는 여기서 투어도 한다는데....
원형경기장 제일 꼭대기에 올라가니 드디어 론강과 함께 마을이 드러났다.
이곳은 고흐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이라는 작품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란다.
원형 경기장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내는 마치 시에나의 거리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게 만든 곳이었다.
원형경기장을 나와서 고대극장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막상 고대극장 앞쪽으로 가보니 특별히 볼 게 많은건 아니다 싶어서
고대극장을 바로 통과하고...
가다보니 고흐의 기념관 같은게 보였다. 기념관인지도 잘 모르겠으나...
내부를 들어가보니 고흐의 그림 몇점을 팔고 있었다.
더 특별한게 없는거 같아... 생 트로핌 교회를 가보기로 했다.
생 트로핌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이탈리아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게 만드는 거리였다.
정말로 로마의 역사가 살아숨쉬는 곳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생 트로핌 교회...
특별히 볼 게 많은곳은 아니었다.
역시 백배즐기기 책자는 믿을 게 못된다. 교회 입구의 최후의 심판을
유심히 보라했으나... 뭐 특별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리나라서 이만한 책자가 없어 봐준다.
이제 고흐의 흔적을 따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에스빠스 반고흐... 고흐가 정신병으로 인해 자진 입원을 하였던 곳!
고흐는 아를에서 있는 시간은 15개월정도였지만...
고흐가 이곳에서 그린 작품은 200점이 넘을정도로 왕성한 고흐의 활동이 있었던 곳이다.
처음에 고흐에게 아를은 거의 인생에 비추어 볼 때 천국과도 같은 곳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그의 작품이 전혀 팔리지 않는다는 자괴감...그게 그를 괴롭게 하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끊임없는 외로움...
또 하나 고흐의 발목을 잡는게 여기서 정신병이 발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갱과의 다툼... 그것도 그의 삶을 흔드는 하나의 사건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귀를 짜르고... 고흐 자신도 자신의 그런 모습에 충격을 입어
정신병원에 자진 입원...
파란만장한 고흐의 삶... 어쩌면 아를에서부터 그의 마지막이 암시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Garden of the Sanitorium(요양소의 정원, Winterthur Collection Oskar Reinhart Switzerland)
에스빠스 반고흐에 한참을 있다가... 나오면서 잠깐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고흐의 테라스를 찾기 위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유미는 힘든지... 뒤쳐지고, 지니누나는 앞서나간다.
사실 더워서 나도 무지 힘들다 ㅡㅡ; 진짜 누나 대단하다.
파리서도 더위를 뚫고 걸어 다니고...난 따라다니다 지쳤었던 기억이 다시난다.
(하긴 40일 이상 여행 나랑 여행기간이 짧은 누나랑은 정신자세가 틀렸으리라 ㅋㅋ)
어쨌든 유미를 챙기고...
상점에 들어가 고흐의 엽서를 하나 사면서
고흐의 테라스가 어디에 있냐고 물어봤다.
상점 주인은 바로 뒤라고 알려줬지만...아무리 찾아도 안보인다.ㅡㅡ;
그래서 다시가서 물었지만...똑같은 대답 ㅡㅡ;
길가는 어떤 할아버지가 있어 내가 산 엽서를 보여주며 여기가 어디냤고 묻자
길을 알려주시는거였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안보인다.
그래서 어딘가 헤매고 있는데
순간 내 관찰력이 빛이났다. 엽서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사진의 오른쪽 가에 호텔의 글씨가 바로 앞에 있는 호텔의 글씨와 일치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세히 엽서랑 거리를 비교해보니 고흐의 테라스가 맞았다.
이곳에서 너무 더워서 음료수를 먹고...정신을 차리고...
고흐의 테라스의 배경이 되었던 가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Cafe la Nuit....철자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가계이름이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이제 고흐의 그림에 또 배경이 되었던 랑글로아 다리를 찾아가기로 했다.
난 우선 백배즐기기 책자에 나와 있는 인포메이션 센타에 가서
영어로 랑글로와 다리를 어떻게 찾아가냐고 물었다.
내가 좀 예의를 지키면서 물어보니까 나보고 어느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본다.
한국 사람이라니까... 잘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흑 ...오늘 두 번 좌절한다. 한국이란 나라가 아직 힘이 없긴 없나보다...
어쨌든 인포를 나와서 랑글로와 다리 근처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놈의 버스는 모습을 안드러낸다.
아비뇽도 봐야 되는데... 어쩔 수 없이 아비뇽 시내 보는건 포기해야 될 것 같다.
버스가 한참을 지나서 오고...
버스를 타고 랑글로와 다리 근처까지 갔다.
그러나 그건 근처가 아니었다. 1킬로미터 이상을 한참 걸어야했다.
무지 더운데... 진짜 힘 빠진다.
가다가다 보니 고흐의 다리라는 표말이 보이고...
드디어 랑글로아 다리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도착하니...
물놀이라 해야될지 수영이라 해야될지..어쨌든 놀고 있는 애들이 보였다.
그냥 고흐의 다리라는 별칭보다... 그냥 애들의 천진함이 더 내게 각인이 되었던 것 같다.ㅏ
잠시동안 녀석들을 보다가...
다시 여행객으로 변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잠시 고흐의 그림을 푯말로 만들어놓은 것도 보다가 사진으로 담았다.
아를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던 고흐...
자기 자신의 그림으로 아를이 모습을 담으면서...
끊임없이 고뇌하지 않았을까... 조금이라도 그림에 대해 양보를 했다면...
그렇게 궁핍하지는 않았을텐데...
랑글로와 다리를 보고... 다시 아를역으로 가야 되서 버스를 타고...
아를 역으로 가려고 했으나... 버스기사와 나의 언어장벽으로 인해 ㅋㅋ
그만 탈려고 계획했던 기차를 놓쳤다.
우리가 내려야 했던 정류장을 지나친것이다.
그 덕에 유미는 리옹으로 돌아가야 되는데...발을 동동 구르게 되고...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아를역 앞에서 겨우 잡아서...아비뇽 TGV역으로
겨우 도착해서 유미를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파리에 도착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미라보 이모에게 하니...
나보고 아를과 아비뇽을 한꺼번에 보려고 나가는 걸 보고...
웃었다고 이야기 하셨다. 진짜 두 도시를 당일치기로 보는건 불가능한 것 같다.
역시...여행은 아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몸으로 부딪히고 느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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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 교황이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우리가 역사 속에서 ‘교황의 바빌론 포로 시대’ 라고 부르는 시절이 그때다. 작은 마을에 불과하던 아비뇽이 교황청의 역할을 했고, 지금 남아 있는 교황청이 바로 교황의 궁전이다. 견고한 외벽으로 둘러싸인 교황청의 전체 면적은 15,000㎡로 상당히 넓은 편이다. 베네딕투스 12세가 만든 북쪽 부분은 구궁전, 클레망스 6세가 세운 부분은 신궁전이라 해서 둘로 나뉜다. 궁전이라고 해서 상당히 화려한 이미지가 연상되지만, 실제로는 교황의 침실조차 원형이 파괴된 채(프랑스혁명 당시 모두 파괴되거나 분실됐다고 한다) 텅 빈 공간만이 남아 있다.
교황청에서 론 강을 내려다보면 중간쯤에 끊어진 다리가 보이는데, 이 다리가 유명한 생 베네제 다리이다. 신의 계시를 받은 베네제라고 하는 목자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가며 마을 사람들로부터 받은 헌금을 모아 평생에 걸쳐 지은 다리라고 한다. 완성 당시에는 맞은편 강변에 보이는 필립 왕의 탑까지 이어져 전체 길이가 900m였지만 지금은 네 개의 다리 기둥과 다리를 만든 성 베네제를 기리는 성 니콜라 예배당만 남아 있다. 성벽과 이어져 있고 마을 쪽으로 입구가 있다. 권위를 상징하는 교황청과 소박한 베네제 다리가 함께 있는 아비뇽. 옛 중세의 신앙 생활과 민중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도시인 셈이다.
- 가장 프로방스다운 마을, 고르드 -
마르세유에서 아비뇽을 향해 출발하면서 현지 가이드들이 꼭 차를 세우고 기념 촬영을 권하는 곳이 있다. 언덕 꼭대기에 고성이 있고, 그 아래 능선을 따라 수풀 사이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르드(Gordes) 마을 입구이다. 프로방스에서도 비교적 고급 주택가에 속하는 이곳의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르네상스 양식의 고성은 12세기의 요새 유적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옛날 양치기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주거공간과 라벤더와 올리브오일 재배로 유명한 세낭크 수도원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 반 고흐의 흔적, 생 레미 -
1889년 5월 고흐는 이 마을 변두리에 있는 생 폴 드모조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그가 아틀리에로 사용했던 병원 내부와 뜰을 둘러볼 수 있는데 그가 사용했던 방과 침대, 욕조 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주위를 둘러싼 언덕 등에는 고흐의 작품들을 기념하는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보이는 풍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실 이 마을은 또다른 인물, 16세기의 의사이자 천문학자이고 예언자였던 노스트라다무스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안에 그의 생가가 남아 있고 가까운 뮤제 데 잘필레 피에르 드 브뢰 박물관에는 그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 세잔의 삶, 액상 프로방스 -
물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도시 한가운데에 큰 분수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길게 뻗은 미라보 거리가 도시의 방향을 잡아준다. 주말이면 이곳에서 프로방스 일대에서 몰려온 장사꾼들이 벼룩시장을 열어 수공예품과 특산품 등 다양한 물건을 판매하는데, 이를 구경하기 위해 멀리서도 관광객들이 찾아올 정도로 규모가 크다. 만약 주말에 이곳을 방문하면 아주 색다른 구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관광 못지않게 중요한 관광 포인트는 역시 세잔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묻힌 액상 프로방스에선 그의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세잔의 아틀리에, 생가, 세잔의 거리 등등 관광안내서에 나온 장소들을 짚어가며 관광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 과거의 로마&현재의 프랑스, 아를로 -
투우, 플라멩코, 파엘라(Paella)로 유명한 부활제와 쌀 수확제, 6월 말에 아름다운 민속의상을 선보이는 퍼레이드는 늘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아를르는 프랑스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로마의 유적들이 많은 곳이다. 시가지의 규모는 작지만 로마 유적과 교회, 미술관 등 구경할 만한 것들이 흩어져 있고 길이 좁고 복잡해서 계획을 잘 세우지 않으면 전부 돌아보기가 어렵다. 우선, 아를로 최대의 기념물인 로마 투기장(고대 경기장 아레나)부터 일정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곳에서 아를르의 주요 유적 10곳을 입장할 수 있는 공통권을 판매한다. 전부 60개의 아치로 되어 있는 이 투기장은 지금은 1, 2층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3층으로 훨씬 규모가 컸다고 한다.
수용 인원은 1만2천 명으로 지름은 가장 넓은 곳이 무려 136m니까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시대에는 이곳에서 노예를 동원해 전투를 벌이게 했지만, 지금은 부활절에서 9월말까지 투우 경기가 열린다. 경기가 없는 비수기에도 아를르 시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훌륭한 전망대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글 이정현(World Com)>
# 69 거리 곳곳에 살아 숨쉬는 ‘고흐의 예술혼’ -프랑스 아를
거리 곳곳에 살아 숨쉬는 ‘고흐의 예술혼’
빈센트 반 고흐 초상화. ‘론강의 별밤’(작은 사진 위부터)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미스트랄 바람, 코발트 빛 하늘, 오래된 3층짜리 붉은 기와집들, 로마시대 원형경기장과 고대극장, 그리고 예술가들….
남프랑스의 휴양도시 아를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다. 이곳은 알퐁스 도데의 희곡 ‘아를의 여인’과 비제의 가곡 ‘아를의 여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요즘엔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고흐가 이곳에 머문 기간은 115년 전 고작 15개월에 불과했고 아를은 수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지만 지금은 고흐를 통해 이 도시가 더욱 빛나고 있다. 고흐 때문에 이곳을 찾는 관광객만 연간 수십만명에 이를 정도.
고흐가 아를을 찾은 이유는 태양 때문이었다. 고흐에게 아를의 햇볕은 자신의 영혼을 고무하고, 화풍에 생기를 불어넣을 유일한 횃불처럼 여겨졌다. 28살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화가를 꿈꾸기 시작한 고흐는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파리에서의 생활을 청산할 필요가 있었다.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창작 의욕을 고취할 수단도 필요했다.
1888년 2월20일 고흐는 아를에 도착했고 곧 이 한적한 도시에 동화돼 갔다. 봄이 오자 고흐는 들로 나갔다. 꽃이 만개한 과수원과 아름다운 아를의 여인들, 압생트를 마시는 쾌활한 사람들, 위험한 코뿔소를 닮은 사람들과 수비대의 알제리 사람들이 그를 즐겁게 했다. 고흐는 자신이 작품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동생 테오에게 자신감 넘치는 편지를 보냈다.
고흐 작품의 3분의 1 이상이 아를서 탄생
12세기에 건립된 성 트뢰핌 수도원 입구의 조각물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다. 여기서 나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고흐는 이곳에서 전 생애의 작품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300여점을 그렸다. 화풍도 이전의 어두운 분위기를 벗고 밝은 색채가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아를의 공원 입구’ ‘해바라기’ ‘밤의 카페’ ‘아를의 도개교’ ‘정신병원의 정원’ 같은 주요 작품들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관광객들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은 110년 전 고흐가 이젤을 놓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고흐가 작품에 담았던 풍경을 거의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점. 아를시는 그런 장소에 고흐의 그림을 새긴 돌비석을 세워놓아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했다.
예컨대 고흐가 입원했던 정신병원은 지금 미디어센터로 바뀌었지만 정원은 ‘정신병원의 정원’ 그림을 토대로 복원돼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라는 이름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별이 빛나는 론 강변, 도개교, 밤의 카페, 투우경기장도 작품 속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거나 유지되고 있다.
관광객을 열광케 하는 또 하나는 고흐의 드라마틱한 일화다. 고흐는 이곳에서 자신의 귀를 자를 만큼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고, 그 대가로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을 완성했다. 그래서 아를 시내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디에선가 고흐가 화구를 들고 툭 튀어나올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고흐 탄생 150주년을 맞아 아를시는 올해 말까지 다양한 고흐 관련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특히 반 고흐 재단의 협조로 7월5일에서 10월12일까지 고흐 작품 원본 20여점이 아를 시내에 장기 전시될 예정이다. (계속)
거리 곳곳에 살아 숨쉬는 ‘고흐의 예술혼’
아를 시내 전경. 원형경기장 주변을 지나가는 관광객. 시내 중심가에 있는 말라르트 노천 카페(위부터).
현대와 중세와 고대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아를은 면적 698km2로 프랑스에서 가장 큰 코뮌(자치단체)이다. 인구는 약 5만명. 이 가운데 3만2000명 정도가 도시 중심부에 산다. 주요 산업은 관광이며, 여기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의 30% 정도이고, 연간 관광객은 200만명 정도. 특히 부활절 기간(목~일요일)에 50만명이 몰려들어 이때는 모든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룬다.
아를 시내를 구경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작지만 단정한 아를역에서 내려 봉고차를 타고 시내 중심가인 불바르 드 리스의 관광안내센터(ⓘ 표시가 있다)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직원으로부터 볼거리와 주요 행사들을 전해 들은 다음 도시 지도를 얻어 들고 나온다. 안내센터 길 건너편 말라르트 노천 카페에 가면 아침부터 포도주 풍류에 빠진 이들이 제법 눈에 띌 것이다. 거기에 동참하는 것도 좋고, 맥주 한 잔(3유로)이나 오렌지 주스 한 잔(3유로)으로 가볍게 목을 축이고 길을 나서도 좋다. 어차피 아를은 ‘지상에서 가장 한가로운’ 도시다. 볼거리들은 다 가까운 데 있고, 마음만 먹으면 한나절이면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시골 아저씨처럼 생긴 에르베 시아베티 아를 시장은 이 도시의 매력으로 다섯 가지를 꼽았다. 빛, 전통, 유적, 카마르그, 투우.
고흐를 우울에서 해방시킨 그 맑고 투명한 햇볕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를역 앞 카발레리 성곽 입구에서 중국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는 베트남 출신의 누엔 반 푸씨(57)도 햇볕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
“아내가 햇볕을 좋아해서 3년 전에 파리에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파리에서는 열심히 일해야 겨우 먹고사는데 이곳에서는 천천히 일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채 봄이 오기도 전에 따뜻함을 찾아 이곳으로 몰려든다. 아를에는 연중 2800시간 정도 태양이 빛나고, 그 빛을 찾아 사진작가들도 앞 다투어 이곳을 찾는다. 해마다 7월 초면 국제사진축제가 열리는 것도 그런 연유다. 사진작가들을 유혹하는 것은 빛뿐만이 아니다. 수백, 수천년 된 아름다운 유적들과 자연의 풍광이 사진작가들의 시선을 단박에 그 시대로 이끈다. 아를에는 64곳의 국보급 역사 유적지가 있다. 1981년 이 유적들은 모두 유네스코(UNESCO)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아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6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곳을 전략도시로 선택하면서부터. 로마인들은 아를을 발견한 뒤 더 이상 북쪽으로 진출하기를 포기할 정도로 이 도시를 사랑했다. 지금도 고대극장, 원형경기장 등 로마시대의 유적이 즐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대극장은 기원전 1세기에 지어진 로마시대의 반원형 극장이다. 지금은 기둥 2개와 토대, 관람석이 쇠잔해진 자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지만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관람석과 무대를 만들어 지금도 여름이면 국제사진축제, 영화제, 민속축제 등 각종 행사가 치러지고 있다.
고대극장에서 4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원형경기장(Arenes)은 기원전 90년에 건립된 것으로 이 도시의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건물이다. 건물 외부는 60개의 2층 아치로 이뤄져 있으며, 1만2000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다. 중세에는 이 경기장 안에 집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18세기에 경기장 안팎의 건물들이 정리되고 원형을 복원했다. (계속)
거리 곳곳에 살아 숨쉬는 ‘고흐의 예술혼’
아를은 투우의 도시이기도 하다. 투우축제 기간에는 5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이 원형경기장에서는 지금도 1년에 수차례 투우 경기가 열려 아를을 투우의 도시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아를의 투우는 스페인의 투우와 달리 소를 죽이지 않고, 소의 뿔 사이에 달아놓은 장식을 잡아채는 방식이다. 아를의 투우축제는 1830년에 시작됐고, 지금도 해마다 4월 중순과 6월, 9월, 10월이면 이 축제를 보기 위해 5만명 이상이 이곳으로 몰려든다. 투우를 보면 알 수 있듯 아를은 유난히 스페인 문화가 많이 들어와 있다. 투우 외에도 플라멩코 음악과 춤을 즐기는 이들이 많고, 쌀 야채 어패류 등을 함께 찐 스페인식 파엘라(paella)도 유명하다.
아를에서 가장 이색적인 장소는 기독교인들의 공동묘지 알리스캉(Les Alyscamps)이 아닐까. 입구에서 1.5km 떨어진 교회까지 가는 큰 길가에는 플라타너스 등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그 나무들 사이로 석관묘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맑고 높은 소리의 카나리아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뜨리곤 하고,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독특한 장소인 이곳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하다. 고흐는 이곳에서 네 점의 작품을 그렸다.
잘 보존된 고대 유적·투우 경기로도 유명
로마네스크 양식의 유적으로는 12세기에 건립된 성 트뢰핌 수도원 건물이 손꼽힌다. 3세기 무렵 아를에 기독교를 전파한 수호성이자 주교인 성 트뢰핌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 성당 문에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섬세하게 묘사돼 있는데 조각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성당 맞은편에 서 있는 클래시컬한 양식의 시청 건물은 1657년 건립돼 지금도 시청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데, 요즘 한창 외관을 보수하고 있다.
아를 시내에는 고흐의 작품 속 공간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밤의 카페’ ‘정신병원의 정원’ ‘알리스캉’의 사진(위)과 그림(왼쪽부터).
잠깐 눈요기만 하고 떠나는 관광객들이 아를의 전통적인 면모를 발견하기란 사실 쉽지는 않다. 그러나 운 좋게 방문일정과 축제기간이 맞물리면 전통의 정수를 볼 수 있다. 주요 축제로는 부활절축제, 3년마다 5월 첫째날 아를의 여왕을 뽑는 가디언축제, 7월의 아를축제, 9월의 쌀수확축제가 있다. 그리고 수요일 아침 라마르탱 광장과 토요일 아침 불바르 드 리스 거리에서 열리는 번개시장에서 전통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다.
아를 시내에서 자동차로 30여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카마르그는 아를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비옥한 삼각주다. 면적 930km2의 거대한 습지인 이곳에는 수많은 동식물들이 살고 있어 지역공원으로 보호받고 있다. 카마르그에는 지중해에서 가장 긴 23km의 모래밭도 있다. 프란신 리우 아를시 관광청 소장은 “요즘 이 아름답고 신화적인 지역의 생태를 관광하려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다”고 전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아를의 밤거리를 지키는 노랗고 푸르스름한 가로등들이 켜져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고대 건물들 사이로 비추는 가로등이 만드는 정취는 일품이다. 이 느낌은 고흐의 ‘밤의 카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흐는 이곳에서 돈 많은 감식가의 마음만을 만족시키는 세련된 예술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줄 수 있는 소박한 예술을 갈망했다.
그러나 고흐는 아를에서 행복한 생활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 고흐는 발작증세를 일으켜 자신의 귀를 잘랐고 얼마 뒤 정신병원에 수용됐다. 병원을 나와 파리로 갔다가 오베르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 1890년 7월30일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작품 하나하나에 불꽃 같은 정열을 담아 격렬한 필치와 눈부신 색채의 예술을 창조한 고독한 고흐의 말로는 그처럼 비참했다. (계속)
거리 곳곳에 살아 숨쉬는 ‘고흐의 예술혼’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단 두 점밖에 팔지 못했던 이 비운의 화가는 100년 뒤인 지금은 전 세계인들의 추앙을 받는 위대한 화가로 거듭났다. 아를도 그 덕분에 여러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요즘의 막대한 관광수익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아를은 철저하게 고흐의 유적을 복원해놓았고, 정부 차원의 지원도 계속됐다.
앙드레 말로는 문화부 장관 재직시 아를 시내에 집을 지을 경우 까다로운 절차를 밟도록 했다. 개인이 집을 지으려면 건설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고, 로마시대의 유산인 붉은색 기와지붕을 통일하도록 하는 등 아를의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이 쌓여 지금의 아를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화가나 작가, 음악가의 도시가 있었던가, 예술의 도시로 뭇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도시가 있었던가, 새삼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Tips / 여행정보가는 길
샤를 드골공항에서 마르세유 공항까지 이동한 다음 기차를 타고 아를까지 거슬러 오는 게 가장 빠른 방법. 드골공항에서 기차(TGV)를 타는 것도 좋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대개 아침에 떠나기 때문에 드골공항에 도착하면 오후 5시가 넘는다. 이날 바로 드골공항에서 TGV로 아를까지 이동하기는 쉽지 않다. 8시 6분발 TGV를 타면 11시17분에 아비뇽에 도착한다. ‘연극의 도시’이자 ‘아비뇽 유수’로 유명한 이곳에서 1박하고 시내를 구경한 다음 아를로 이동해도 좋다. 아비뇽에서 아를까지는 기차로 40분 거리. 아를역에 도착하면 중심가까지 가는 노란색 봉고차가 15분마다 있다. 가격은 1유로. 짐이 많다면 택시를 타도 좋다. 자동차는 고속도로 A7, A54로 연결된다.
볼거리
주요 볼거리는 다 돈을 내고 봐야 한다. 고대극장이 3유로, 원형경기장이 4유로 하는 식이다. 시내의 관광안내센터에서 고흐 도개교까지는 약 3km 거리. 택시 요금은 11유로. 알리스캉은 5~9월은 오전 9시~오후 6시30분까지 문을 열고, 10~4월은 오전 9시~오후 5시30분까지 문을 연다.
반 고흐를 사랑하는 화가들이 고흐의 작품을 다시 본인의 화풍으로 작업한 작품들이 전시된 반 고흐 재단(Foundation Van Gogh)은 화, 수, 목, 금요일에만 문을 연다.
아를에서는 고대와 현대 박물관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시내에서 론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20분쯤 걸어가면 고대 아를박물관이 나온다. 이곳에는 아를에서 출토된 1300종의 유물들이 소장돼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레데릭 미스트랄이 만든 아를라탕 박물관은 프로방스 지방의 민속자료들이 소장돼 있어 흥미로운 곳이다. 더 자세한 정보는 아를관광 홈페이지(www.ville-arles.fr)를 참조.
칼랑달 호텔 정원. 숙박
중심가인 불바르 드 리스 거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예쁜 집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호텔(04-90-52-52-52)이다. 예쁜 만큼 숙박비도 비싸 1박에 400유로.
현대식 호텔보다 남프랑스 특유의 낭만적이고 소박한 호텔이 많다. 칼랑달 호텔(04-90-96-11-89, 1박에 82유로)이 대표적.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호텔은 겉만 보면 3층짜리 아늑한 여관 정도로 보이지만 내부는 고급 호텔처럼 잘 꾸며져 있다. 음식 맛은 중간 정도. 점심은 햇살이 아늑하게 내리쬐는 뒷마당에서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들 수 있다. 아를역에서 2km 거리에 있는 유스호스텔(04-90-96-18-25)은 언제나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대개 잊고 가지만 꼭 찾게 되는 것이 바로 머리빗. 웬만한 호텔에서도 빗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끝)
# 144 꼬뜨다쥐르 지방의 아름다운 도시 니스
꼬뜨 다쥐르...
쪽빛 해안이 끝없이 이어진 지중해의 보석 코트 다쥐르 지방은 산호빛 하늘, 찬란한 태양, 연중 내내 온화한 기후 등 신의 축복을 듬뿍 받은 땅이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들이 즐비하고, 각종 신선한 해산물을 이용한 지방 특산 요리가 발달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꼬뜨 다쥐르 지방 최대의 도시, 니스...
니스는 1년 내내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해안을 따라 호화로운 고급 호텔들이 줄지어 서 있고, '영국인의 산책로'라 불리는 해변 산책로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거니는 니스 사람들의 밝은 미소를 만날 수 있다. 부자들의 별장과 고급 호텔, 화려하고 값비싼 상점들이 있는가 하면, 구시가지와 전통 재래시장 등 소박하고 서민적인 풍경이 낯설지 않은 곳 니스에는 해안 뿐 아니라 언덕 위의 성과 박물관 등 볼거리도 많다.
니스에서 꼭 봐야 할 곳을 세 군데로 나누자면 구시가, 시미에 지구, 해안 도로인 프롬나드 데 장그레 주변이다. 그리고 여기에 코트 다쥐르 연안의 작은 도시 몇 군데를 추가하면 지중해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섭섭하지 않을 정도는 보는 셈이다.
니스 관광의 핵심 구시가
어느 도시든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구시가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는 법이다. 니스의 구시가는 이탈리아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좁은 골목을 따라 꽃이나 과일 가게가 즐비하고 또 언덕의 골목길에는 생선이나 고기를 파는 가게들이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니스의 구시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샬레야 광장의 재래 시장인데, 조금 서두르면 넓은 광장에 꽃이며 과일을 가득 쌓아놓고 파는 서민적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이 재래 시장은 보통 오후 두 시 경까지 문을 열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온 경우라면 서둘러야 볼 수 있다. 니스의 모습을 담은 엽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므로 시간 맞춰 꼭 들러보자. 또 이곳에서 파는 신선한 오렌지도 맛보도록 한다. 만일 시장이 문을 닫았다면 다음날 아침 일찍 방문해보자. 아침의 시장은 오후보다 훨씬 생동감이 느껴질 것이다.
성에 오르면 니스 시내가 한눈에
이제 성으로 오르자. 성에는 걸어서 갈 수도 있지만 해변에서 출발하는 미니 열차나 께 데 제타 쥐니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다리가 튼튼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께 데 제타 쥐니에서 엘리베이터 옆의 계단으로 올라가자. 성에 오르면 저 아래로 펼쳐지는 니스 시가지와 순수하게 푸른 지중해, 저 멀리 모나코까지 아름다운 전경이 눈 앞 가득 다가온다.
로마의 유적지가 있는 시미에 지구
로마 시대의 유물이 남아 있는 이곳은 해안 주변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전할 것이다. 시미에 지구는 야트막한 언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걸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곳 언덕 꼭대기에서 니스 시를 내려다보는 것도 상당히 즐거운 일. 이곳에는 오래된 수도원 성당인 노트르담 드 시미에와 대형 목욕탕과 원형 극장 등의 로마 유적지, 마티스 미술관이 있다. 매년 7월이면 니스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가는 재즈 페스티벌이 이곳의 원형 극장에서 개최된다. 아직도 시간이 남았고 그림에 관심이 있다면 미술관을 몇 군데 둘러보자. 시미에 지구로 올라가는 즈음에 1)샤갈 미술관이 있고 원형 극장 근처에 2)마티스 미술관 이 있다. 두 미술관 다 15번 버스가 지나는 길에 있으므로 샤갈 미술관을 먼저 보고 올라가든지 혹은 내려오면서 들러도 좋을 것이다.
1) 샤갈 미술관
정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정원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이곳에는 샤갈의 가족이 프랑스 정부에 기증한 샤갈의 작품 4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성서를 주제로 한 것들이며 특히 대형 스테인드 글라스의 화려한 모자이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묘사한 17장의 유화는 샤갈 미술관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그림이다. 10월 1일부터 다음해 6월 30일까지는 10시에서 5시까지 열고 7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는 10시부터 6시까지 연다. 화요일은 휴관한다.
2) 마티스 미술관
로마 유적지 근처에 있다. 야수파의 거장이었던 마티스가 그의 생애 동안 그렸던 작품 3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는데, 그와 친분이 있었던 샤갈의 작품도 일부 전시되고 있다. 현재의 마티스 미술관은 1993년에 새단장한 것으로 니스의 태양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예술가의 열정을 아직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0월 1일부터 다음해 6월 30일까지는 10시에서 5시까지 열고 7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는 10시부터 6시까지 연다. 수요일과 몇몇 국경일에는 휴관한다.
* 파리에서 니스까지 가는 방법
- 항공편을 이용할 경우 파리에서 코트 다쥐르 공항까지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 파리 리옹역을 출발하는 테제베로는 니스까지 7시간 정도 걸린다.
- 일반 급행 열차를 이용할 경우 10시간-11시간 15분 정도 소요된다.
* 니스 시내 지도
# 106 니스보다 아름다운 \"BIARRITZ\
프랑스에 가시게 되면, 여름에 바닷가를 떠올리게 되면, 니스-모나코-칸... 등만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쯤에 있는 "BIARRITZ"라는 도시를 방문해보세요~ 이곳은 아직 일본 관광객들도
별로 오지 않을만큼 프랑스 및 유럽인들에게 유명한 도시입니다...
윈드서핑의 브랜드 "퀵실버"의 유럽 공급업체 선정시에 몇개의 도시가 경합을 했지만, 이곳만큼 윈드서핑의
도시로 딱 맞을 만한 곳도 없다고 하여... 현재 이곳이 퀵실버의 유럽 독점 공급업체로 되어있습니다.
1. 가는방법 첫번째 : 파리 도착 후 유레일 패스가 남아있으면, 야간열차로 왕복으로 다녀오실 수가 있습니다...
PARIS AUSTERLITZ역에서 23:14분에 출발, BIARRITZ에 06:54분에 도착합니다... 주의해야할 사항은 PARIS
출발역이 AUSTERLITZ역이며, BIARRITZ는 종착역이 아니기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합니다.
하루를 지내고 바로 야간열차로 돌아올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물론, 잠이 많으신 분들에게는 장점이
아니겠지만...
2. 가는 방법 두번째 : 야간으로 가는 피곤하여서 새벽에 출발을 해서 정오에 도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새벽에 출발을 할 경우에는 PARIS MONTPARNASSE역에서 07:25에 출발을 해서 BIARRITZ에 12:22분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이럴 경우에는 문제가 숙소문제입니다... 이곳은 휴양지라 성수기에는 숙소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든요... 유스호스텔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연초에 예약이 만료되어 불가능합니다...
여행자 안내소에 가셔서 호텔을 찾아봐야하지만, 부르는 게 가격이라 숙소 예약이 된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방법입니다.
3. 가는 방법 세번째 :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야간열차로 BIARRITZ까지 올 수가 있습니다. MADRID-HENDAYE, 그리고 HENDAYE-BIARRITZ, 즉 HENDAYE라는 곳에서 1회 환승을 해야하구요... MADRID에서
22:45분에 출발하여, HENDAYE에 07:35분에 도착, 다시 HENDAYE에서 07:58분에 출발하여서 BIARRITZ에
08:21에 도착하는 코스입니다...
# 50 프랑스 쇼핑의 천국 안도라공국!
부족한 자원을 극복한 문화 - Andorra
Madriu-Perafita-Claror Valley : 자연, 2004
Encamp의 Communes의 부분, Andorra La Vella, Loria의 Saint Julia 그리고 Escaldes-Engordany
Madriu-Perafita-Claror Valley는 주민들의 자연이 주는 경치와 좌화속에서 거주환경을 만들고 오랜세월동안 피레네 산맥에서 부족한 자원을 얻어낸 장소이다.
물가 (보통) 치안 (안전) 언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일반정보
유럽 서남부에 위치한 이 작은 나라 안도라는 총 인구 6만 7천명가량인 작은 국가이다.
이 작은 나라는 현히 부족한 자원을 속에서도 험난한 산맥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지금까지 지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나라이다.
안도라의 중앙광장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있고 그 남쪽에는 의사당과 법원으로 쓰이는 "Casa de la Valle"가 있다.
안도라는 두가지로 관광사업으로 유명한데 그 첫번째는 스키와 온천이고, 다른 또하나는 면세쇼핑으로 유명하다.
자동차 여행시 안도라의 가장 큰 매력을 느낄수 있는데 그 이유는 스페인이나 프랑스에 비해 기름값이 25%나 저렴하기 때문이며, 또다른 이유는 나라 전체가 면세이다!
안도라의 최고 관광 아이템인 스키시즌은 보통 12월경부터 3월까지가 최대 성수기 이다.
또한 하이킹 시즌은 4월말경에서 10월경까지 이며, 최대 성수기때는 안도라의 모든 호텔들이 만원이기 때문에 예약을 미리하여야 한다.
안도라 라베야 (Andorra la vella)
안도라의 수도인 Andorra la Vella 이 도시는 면세제품 판매가 주 소득원이다.
주 관광 포인트는 면세 제품의 쇼핑이다.
다양하게 진열된 그 제품과 유럽의 다른 관광지와 다르게 저렴한 가격에 현혹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길게 늘어선 쇼핑몰이 밀집해있는 쇼핑거리를 다니다보면 길가에 담배와 함께 덤으로 다른 제품을 끼워줄 정도로 면세로 인한 득을 톡톡히 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구시가를 관광하기전에 쇼핑을 하게 되면 짐때문에 거치장스러울수 있다. 어느정도 아이쇼핑을 한후에 구시가 및 관광지를 둘러본후 쇼핑을 하면 좋다.
쇼핑거리를 지나 이시의 중심부인 골동품 거리"Barri Antic"는 좁은길을 따라가면 엽서에 나올 법한 석조건물이 보이는데, 안도라의 명물인 계곡의 집 "Casa de
la Vall"으로 오래전 개인의 사택이었으나 현재는 안도라 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오후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Placa la Poble 광장에는 극장과 음악아카데미가 있는데 이곳에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열린다.
까르데 (Caldea)
시내중심에서 동쪽으로 외곽지대에 위치한 Caldea는 안도라 관광의 두번째 포인트인 온천휴양지로써
멀리서 보면 건물의 외형만으로는 온천지라 생각 할수 없을 만큼 안도라에서는 독특한 건물이다.
안도라의 최대의 온천 휴양지는 Caldea는 온천수가 솟는 풀장에서 부터 사우나 시설까지 다양한 서비스로 여행자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이 모든 시설은 3시간짜리 입장권으로 이용할수 있으며, 입장료는 3개지 종류가 있는데 그중 안도라에서 2일 이상 묶으며 이용할 생각이라면 3Day 티켓을 권한다.
개장 시간
월~금 오전 10시~23시까지
토요일 오전 9시 30분~24시까지
일요일 9시30분~23시까지
3시간 24.50유로
야간 2시간 16.75유로
3일 65유로
Caldea
Director: Sr. Joan Armengol
Parc de la Mola, 10
Escaldes-Engordany
Tel.: (+376) 80 09 99
Fax: (+376) 86 56 56
E-mail: info@caldea.ad
Internet: www.caldea.ad
오르디노(Ordino)
안도라의 외곽지역중 큰규모의 지역인 오르디노는 외부사람들이 많이 사는 개발도시이다.
이곳의 관광 포인트중 하나는 Museu d'Areny i Plandolit로 전형적인 안도라풍의 저택인 Areny
Plandolits가문의 저택이다. 이지역은 또한 북서쪽의 Ordino-Arcalis 스키지역이 유명하며, 여름철에는 하이킹 코스로도 유명하다.
하이켕 코스중 GR11코스는 지중해에서 페레네중 안도라의 남부지방을 통과해 대서양까지 연결 되는 코스이다.
자전거는 대부분 여름에 큰 스키리조트등에서 빌릴수 있다.
눈이 오는 계절에는 Ordino-Arcalis 리프트장까지 무료셔틀이 운행되고, 보통때는 약 10키로거리에 떨어진 라베야에서 오르디노까지 버스가 운행된다.
오르디노 이외 다른 곳으로는 Pas de la Casa-Grau Roig와 Soldeu-El Tarter가 있는데 가격이 조금 비싼편이다.
Tourist initiatives of Ordino
C/Nou Vial, s/n
Ordino
Tel.: (+376) 73 70 80
Fax.: (+376) 83 92 25
Internet: www.vallordino.com
E-mail: ito@andorra.ad
자동차 박물관 (Museu Nacional de l'Automobil)
안도라에는 박물관이 많지 않은데 그중 Encamp에 있는 이 박물관은 100여종의 자동차를 전시해 놓은 자동차 박물관이 있다.
1989년대부터 1950년대 사이의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다.
개장 시간
토요일 화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1시 30분/ 오후 3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요일및 공휴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월요일 휴무
요금 어른 2.40유로 단체및 할인 1.20
무료입장 매월 첫번째 일요일
City: Encamp
Parish: Encamp
Address: Av. Coprincep Episcopal, 64
Phone +(376) 83 22 66
Fax: +(376) 83 22 66
E-mail: museuautomobil@andorra.ad
Web: www.museuautomobil.ad
담배 박물관 (Tobacco Museum)
안도라는 담배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나라전체가 면세라는 점때문에 쇼핑상가를 다니다보면 상점밖에 진열해 놓은 담배를 볼 수있다
유럽에서는 나라마다 담배의 가격이 틀리기 때문에 어느나라는 비싸고 어느나라는 같은 담배라도 가격이 싸다.
오래전부터 안도라에서는 담배를 생산했었다. 이박물관에는 담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부터 그에 필요한 장치들과 가구등을 전시해 놓았으며,
20세기에 담배공장에서 사용되었던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과 과정을 설명하여준다.
개장 시간
화요일 -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요일 10시 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월요일은 휴무
요금 어른 5유로 단체는 30%할인
무료입장 매월 첫번째 일요일
City: Sant Julia de Loria
Parish: Sant Julia de Loria
Address: Carrer Dr. Palau, 17
Phone (+376) 873 852
Fax: (+376) 873 855
E-mail: info@museudeltabac.com
Web: www.museudeltabac.com
문화행사 축제 1
안도라의 축제는 대부분 7월과 9월사이에 행해진다.
3일동안 행해지는 Andorra la Vella 축제는 매년 8월의 첫째주 토요일부터 시작한다.
축제 2
Mare de Deu de Meritxell은 안도라 북동쪽에 위치한 Meritxell까지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순례행렬이 이어지는 국경일로 9월 8일이다.
관광소요시간 안도라의 관광은 시내 중심에 몰려있는 쇼핑몰과 박물관 하이킹등 다양하게 할 수 있다. 온천과 쇼핑 그리고 관광을 한다면 최소 하루 이상은 머물러 있으면 좋다.
여행 안내소 국립과 시립여행 안내소가 있는데
국립 여행안내소는 Placa del Poblo로 가는 공공리프트가 있는 Placa de Rebes 근처에 있다.
전화 820 214
월-토 오전 9시 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10월-6월 월-토 오후 3시부터 오후 7시까지
7월-9월 월요일 - 일요일 오전 9시 부터 오후 1시까지/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시립여행안내소는 Placa de la Rotonda에 있다.
전화 827 117
월-토 오전 9시 부터 오후 1시/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7월,8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Office de Tourisme de la Principaute d'Andorre
Director: Sr. Enric Riba
26, avenue de l'Opera - 75001 Paris
Tel.: (01) 42 61 50 55
Fax: (01) 42 61 41 91
Minitel: 3615 Andorra
E-mail: OT_ANDORRA@wanadoo.fr
Web: www.tourisme-andorre.net
할인 및 기타정보 http://www.uha.ad
http://www.andorra.ad/ang/xtra/webcam.asp
http://www.turisme.ad
http://www.skiandorra.ad
http://andorraweb.com/aw/arx/index_en.php
운전 안도라를 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뿐이다.
안도라를 입국하기 이전 많은 산을 넘어야 하는데 꼬불꼬불한 이 산의 도로는 매우위험하다.
주요도로는 스페인에서 연결되는 CG1도로와 프랑스에서 연결되는 CG2가 있다.
두 도로모두 안도라의 입국후에도 산을 타야만 한다. 하지만 이 두도로를 운전하면서 보면 펼쳐지는 광경은 매우 아름답다.(그래서 위험하다)
안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천천히 운전한다.
시내의 경우 매우 복잡하고 또한 도로가 좁다(특히 쇼핑몰이 있는 지역) 가능하면 외곽에 주차를 한후 도보로 이동한다.
주차는 관광중심이 외곽에 실외 주차장이 있다. 그곳을 이용한다.
주차 도심은 매우 복잡하다. 특히 쇼핑몰이 몰려있는 중심가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지만 노상주차가 없다.
개인이 운영하는 주차장이나 시내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주차장을 이용한다.
캠핑 Borda d'Ansalonga
2인 약 18-24유로
http://www.campingansalonga.com/
숙박관련 Hotel - Montecarlo Hotel
Av. Co-Princep Episcopal 104
- Encamp -
Principat d'Andorra
Tel. (+376) 731 116.
Fax (+376) 731 117.
info@hotelmontecarloandorra.com
장기 5일 숙박 - 약 160유로 정도
단기 숙박은 별도 문의
http://www.hotelmontecarloandorra.com/
Hotel - Mila
2인 기준 49유로(식사제외)
Cortals d'Encamp
Principaute d'Andorre
Tel +376 73 13 13
E-mail : online@hotelmil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