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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물류의 중심지 서강(西江)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강이 있었기에 한양을 도읍지로 결정한다.
전국의 물산을 원할하게 운송할 수 있는 조운(漕運)의 기능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한강이고 또 서강이었다.
조운의 3대 요소인 조선(漕船) 조군(漕軍) 조창(漕倉)을 두루
갖추고 있는 서강이다.전국에서 몰려드는 물류를 받아낼 나루가
서강에는 즐비했다.서강의 마포나루와 서강나루는 도성과 궁성에
가깝고 운반하기에 편리해 전국에서 배에 실려 온 많은 물건들이
이곳 나루에서 내렸다.조기와 새우젓을 비롯한 많은 수산물이
거래되었다.새우젓은 한양뿐 아니라 한강을 따라 안성 여주 수원 등
내륙 깊숙이까지 전해졌다.
서강나루와 마포나루 일대에서는 유명한 걸출한 인물들이
나와 조선시대를 이끌었다.토정 이지함 흥선대원군 이하응
남계 박세채 이덕무 안평대군 등 참으로 많다.
지금은 서강대교가 놓여있는 곳에 서강나루가 있었다.
서강대교는 밤섬 위에 놓여있다.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전국의 배들이 드나들며
어물과 곡물 각 지역의 특산물이 거래되던 곳이다.
그 나루를 드나드는 선박들로부터 입항세(入港稅)를
받는 공세창도 서강나루가 있었다.
한양도성을 축성하고 궁궐을 지은 삼봉 정도전은
자신이 건설한 한양을 이렇게 노래했다.
"사해 선박 물밀듯이 서강에 와서
용처럼 재빠르게 만 섬 곡식 풀어놓네.
창고에 가득한 저 곡식 보소
정치란 의식의 넉넉함에 있다네. "
-정도전의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에서-
용호(龍湖 용산강) 마호(麻湖 마포강) 서호(西湖 서강)
세 포구를 삼개포구라고 했다.그 삼개포구 중 서호(서강)에
있는 서강나루는 삼남지방과 서해로부토 곡물과 어물이
들어오던 주요 나루였다,
공세청은 조선시대에 서강나루로 들어오는 선박에 대해 세금을 거두던 기관이다.
서강나루는 인천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 수송선의 집결지였다.
이 나루근처에 공세청과 함께 점검청(點檢廳)과 광흥창(廣興倉)이 있었다.
점검청은 공물 대신 바치는 쌀인 공미(貢米)를 검사하던 기관이고,
광흥창은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쌀인 봉록미를 관리하던 기관이다.
강북강변도로 옆 아파트단지 내 밤섬공원이 조성되었다.
밤섬공원 정자에서는 서강과 밤섬 그리고 여의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밤섬공원 동북쪽에 서강을 운항하던 배 모양의 조각물이 있다.
그 옆에는 정조 때 문신 이덕무의 율도(栗島)시비가 있다.
이덕무는 조선후기 서울 출신의 실학자 그룹인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한 가지를 형성한다.이덕무는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린 실학자이다.
그는 경서(經書)와 사서(四書)에서부터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출세에 제약이 많았다.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들을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박물학에 정통한 이덕무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 보다는
고증학적인 학문 토대를 마련하여 훗날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등과 함께 '백탑파'로 조선지풍(朝鮮之風)운동을 이끌었다.
중국에서 벗어나 조선 고유의 독자적인문화 역사를 되찾기 위한 조선풍(朝鮮風)운동이다.
그는 발해사 연구에도 업적을 남겼다.
밤섬공원 바로 옆 현대아파트단지 입구 왼쪽에는
'박세채 정승이 살던 곳'이라는 표석이 있다.
현석 박세체(1631-1695)는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박동량의 차남 홍문관교리 박의(朴猗)의 아들이다.
모친은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다.
벼슬이 높은 사람보다도 학문이 출중한 사람이
더욱 가문을 빛낸 것으로 인정한다.
이는 학문을 중시한 조선의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세계적으로도 학문을 제일로 친다.
박세채는 특히 파주에 율곡 이이를 모시는 파산서원에
사계 김장생과 함께 배향된다. 동방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가문을 빛내는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문묘배향인물 1명은 영의정 9명을 배출하는 것보다 더 중시했다.
정권의 끄나풀보다는 대쪽 같은 학문을 더 존경했던 것이다.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예학의 거두라야 가능하다.
현석 박세채는 예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통하여 ‘예학의 대가’로서
학문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의 탕평론과 예학론은 17세기 성리학을 근거로
예학을 구현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세채가 소동루를 짓고 살던 현석동 집터는
밤섬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마포강변의 절승지이다.
박세채는 조선 중기 때의 대표적인 학자로 30여권의 저서를 남기고 있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이다.
그의 가계는 고려말의 명문세족 충신인 박상충(朴尙衷)의 후손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왕조 500년 가운데 당쟁이 가장 치열하고
호란을 겪었던 격동기였으므로 그러한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18세 때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2년만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에게 학문을 배우고,
김장생(金長生)과는 사승(師繩)관계를 맺게 되었다.
1675년 박세채는 천거에 의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관직을 박탈당하고 6년 동안 양근·지평·원주·금곡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은 박세채가 학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이 기간 중 『독서기(讀書記)』를 비롯하여 『춘추보편(春秋輔編)』
『심학지결(心學支結)』 등을 지었다.
그의 학문세계는 대외적으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는
중화적 천하인 명나라가 무너지고 오랑캐의 국가인 청나라가
호령하는 시기와 국내적으로 격화된 당쟁으로 탕평책을
요구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이에 박세채는 정치적으로는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탕
평론을 취하였고, 예학을 중시하였다.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과
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당내간의 친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국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파당적 대립에 대해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고
우려하며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가 죽자 숙종은 크게 애도하며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배향하였다.
"우묵한 길에 흙을 쌓아 가운데 높이가 백 척이나 되는 흙집을
짓고 이름을 토정(土亭)이라고 하였다.밤에는 집 아래서 자고
낮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 거쳐하였다."-<어우야담>에서
토정 이지함(1517~1578),마포나루가 언덕 토정(土亭)에서 살며
유유히 배를 몰아 팔도를 유람하며 16세기 조선의 사상계를
종횡무진한 이단아였다.
전통 명문가의 자제였으면서도 과거를 접고 처사로 은일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혹한 민생의 현실을 목도했다.
교조화되기 전의 조선 성리학에 숱한 상상력의 씨앗을 뿌렸던 인물이다.
그 상상력을 은유로서가 아니라 빈민 구휼과 국부 증대의 실천적 개혁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시대에 앞서 상공업 진흥과 해양자원 개발을 주장했다.
“그 분 머릿속은 오로지 ‘굶주린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까’
밖에 없는 것 같았어요. 소금을 만들거나 고기를 잡아서는 그걸 팔아
금세 곡식 수만 섬을 벌어오셔서 죄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하셨죠.
한데 언제부턴가 곡식을 나눠주는 것은 근본대책이 될 수 없다 하시고는
그때부터 농한기마다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고기잡이며 장사를 가르치셨어요.
그런 걸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볏짚을 갖다 주며 미투리라도 삼게 하셨는데
그 덕에 이 마을엔 배곯는 사람이 없어졌다니까요.”
교우 관계로는 이이가 가장 친했다.
이이가 성리학을 공부하라고 권하자,
지함이 말하기를,
"나는 욕심이 많아서 할 수가 없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공(公)은 무슨 욕심이 있는가?"
하자, 지함이 말하기를,
"사람 마음의 향하는 바가 천리(天理)가 아니면
모두 인욕인데, 나는 스스로 방심하기를 좋아하고
승묵(繩墨)으로 단속하지 못하니 어찌 욕심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내가 1백 리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만들고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리게 하여 나라의 보장(保障)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토정 이지함이 생애 마지막 해인 1578년 아산 현감 때
질병으로 숨지자 율곡 이이가 큰 별이 졌다며 슬퍼했으며
6년 뒤에 이조판서였던 율곡이 죽자 선조가 통곡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이는 토정선생 술회기에서 "내가 일찍부터 속마음 내비치고
조금의 장벽도 없었다. (토정)선생은 나에게 인망(人望)을 요구했고
나는 선생에게 천방(天放)을 조금 거둘 것을 요청했다.
서로를 살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늦은 공업(功業)을
얻기를 빌었다." (이이의 석담일기)
토정 이지함은 충남 아산현감으로 부임한다.
그는 평소 지론대로 상업과 공업을 통해 백성들을
잘 살도록 하는 정책을 폈다.
토정 이지함은 흉년이 거듭되던 선조 11년 빈민과
노약자 구제를 위해서 걸인청(乞人廳)을 설립한다.
노약자와 병자는 짚신을 삼게 하고 건장한 이에겐 고기잡이를
시키고손재주가 좋으면 수공업을 가르쳐 의식(衣食)을
자급할 수 있는 자립기반을 제공한 걸인청이다.
"걸인청은 가난한 백성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던 기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먹을 것 제공에 그치지 않고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이라든가
수공업까지 가르쳐 줌으로써 백성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한 기관이었습니다."
-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걸인청은 토정 이지함이 창안한 빈민구제기구였다.
아산과 그 근처의 거지들은 걸인청에서 짚신 만드는 기술과
새끼 꼬는 기술 그리고 쇠 담그는 기술을 배웠다.
이들은 기술을 익히는 동안 먹을 걱정 안하고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또 걸인들이 만든 물건은 시장에 내다 팔아 거지들이 자립할 때
도움을 주었다.걸인청 덕분에 아산 지방의 길거리에서
거지 구경을 할 수 없게 되었다.아산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빠르게 나아진 것으로 전한다.
토정 이지함은 걸인청의 일이 끝나자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너희들을 가만히 앉혀 놓고 나라께서 먹여 살리겠다는 것이
아니니 명심하라.첫째,노인층은 편을 짜서 짚신을 만들어라.
너희들이 만든 짚신은 현청에서 모두 사들일것이며
현청에서는 그것을 다시 서울로 가져다 팔 것이다.
짚신 만든 수만큼 보수를 지급할 것이니
이 돈으로 장차의 자립 밑천으로 삼아라.
둘째,젊은 층은 지금부터 나누어주는 둔전에서 농사를 짓고
그 수확량의 2할을 현청에 바치고 나머지는 걸인청의 식량으로
삼고 그러고도 남는 것은 역시 자립의 밑천으로 적립하라."
그러자 한 사람이 일어서며 물었다.
"사또!저는 짚신을 삼을 줄도 모르고 농사 지을 줄도 모릅니다.
저에게 합당한 일은 없습니까?"
"그것 큰일이로구나.그렇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냐?"
"저는 원래 고기 잡는 어부입니다."
"고기 잡는 일이라면 그것도 좋다.너는 고기를 열심히 잡아
돈을 벌고 그 돈에서 2할은 현청에 3할은 걸인청에 바치고
나머지는 장차의 자립을 위해 적립하거라."
이지함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다.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익혔고 양반들이 외면한 공업과
상업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그의 삶은 보통 선비들이 보면
기행(奇行)에 가까웠다.결코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삶을
살아온 그이기에 일화가 많다.
-이지함이 포천 현감으로 발령이 나, 낡은 옷에 짚신을 신고
임지에 도착하였다. 그의 모습을 본 아전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 좌정하니, 그제야 원님인
줄 알고 음식상을 내왔다. 이지함이 음식상을 말없이 노려보자,
아전들은 서둘러 음식상을 물린 뒤에 더 호사스럽게 차려왔다.
그가 여전히 상을 찌푸리고 노려보기만 하자, 아전들이 벌벌 떨며,
넙죽 엎드려 빌었다. 그는 우리 나라 백성들이 고생을 하는 것은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사치스럽게 먹기 때문이라고 하며
자기는 잡곡밥에 산나물 한 가지만 먹으면 된다고 하였다.
다음 달, 이지함은 고을에 사는 모모한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초대 받은 사람들은 원님이 새로 도임하여 한턱 내는 줄 알고,
모두 기대하고 왔다. 그러나 음식은 나물 한 접시와 끓인 죽 한 그릇이었다.
이지함은 앞으로 많은 도움 부탁드린다며 당당하게 행동하였다.
-이 토정이 아산 현감일 때, 천기(天機)를 보고 몇 월 며칠에
일부 지역이 바다로 변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마을을 떠나라는 방을
곳곳에 붙였지만, 곧이 듣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답답해진 토정이
시장에 나가 한사람, 한사람 관상을 살펴보니 모두가 죽을 상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천명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니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토정은, 물이 찰 시각 하루 전날 저녁에
홀로 짐을 챙겨 가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토정이 한참 올라가고 있을 때, 소금지게를 진 소금장수 하나가
토정의 앞에서 올라가고 있었다.
토정을 본 소금장수는 소금지게를 받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토정이 올라가 그의 관상을 살펴보니 죽지 않을 상이었다.
토정은 하루 전에 왔으므로 느긋한 마음으로 소금장수와 이야기하니,
소금장수는 자오상통(子午相通)도 모르느냐며 올라가기를 재촉했다.
물이 찰 시각을 토정은 다음날 낮 열두 시(오시)로 보았는데
소금장수는 그날 밤 열두 시(자시)로 보았던 것이다.
깜짝 놀란 토정이 무릎을 치며 소금장수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소금장수는 해일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을 지점에
소금 짐을 받쳐놓고, 바위에 앉아 토정과 농을 하며 학문을 주고받았다.
그 바위를 농바위 또는 농암(弄岩)이라고 한다.
-이지함의 조카인 이산해가 일찍이 이지함에게
사윗감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얼마 후, 이지함이 이산해에게 “어제 한 시골 양반이
수레에 이삿짐을 싣고 그 위에 남자아이를 얹어서
서울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이가 앞으로
크게 될 인물로, 아마 시골에서 살기가 어려워
서울 친척집에 의지하는 것 같으니, 그 집을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이산해가 그 집을 찾아가니 추측한 바와 같이 시골에서 살림이 어려워
서울로 올라와 친척집의 사랑방을 빌려쓰고 있었다.
만나기를 청하니 그 아이의 아버지가 집주인의 저고리를 빌려 입고 나왔다.
그는 아이의 아버지와 아이를 만나보고, 정혼하였다.
집에 와서 이지함에게 어떤 인물이 되겠는가를 물으니,
이지함은 조카보다 더 빠른 나이에 재상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아이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인데, 36세에 재상이 되었으니,
과연 이산해보다 빠른 나이였다.
서울 마포구 백범로 139번지 공덕리에 자리하였던 아흔 아홉 칸의 대저택 아소당(我笑堂)터이다.
아소당은 흥선대원군이 직접 길지(吉地)라고 알려진 곳을 찾아 자신이 묻힐 묘지를 조성하면서
건립한 첫번째 별장이다.그 아소당은 1950년 한국전쟁 후 당시 동도중·공업고등학교
증축공사로 헐려 일부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사로 이전되었다.
서울디자인고등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화단 옆에 아소당(我笑堂) 터이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 때 대원군은 자신이 거처하는 집 이름을 아소당이라 짓고
스스로 자신의 무상한 삶을 비웃었다. 대원군이 아소당에 기거할 때 지은 다음의 시는
이러한 그의 심경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내가 내몸 저바리니 책임 스스로 중한 것이
공직에서 물러난 나날을 술잔이나 기울이네.
지난일 생각하면 모두 다 꿈인 것이
어쩌다 남은 생애 세상 물정 따를거나.
산촌에 앉아 있으니 속된 말도 좋은 것이
시냇가 버들 그늘에 매미소리 들으며
시나 지어본다네.
이 내 인생 백년간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나
전생도 이생도 내 스스로 웃을 일이네."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아소당(我笑堂) 건물이다.
서울 서대문 안산자락 봉원사 대방(大房)으로 활용되고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아들 명복을 고종으로 앉히고
10년동안 섭정을 하면서 살아있는 대원군의 실세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며느리 명성왕후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뒤로 물러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몇 차례 쿠테타를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아소당을 떠나 훈련대장 우범선을 따라 경복궁 건천궁에서
며느리 명성왕후가 살해당하는 현장에 있게 된다.앙숙처럼 그렇게 대립관계였던
며느리 명성왕후가 살해당하는 현장에 있었던 시아버지로서의 이항응은
세간의 차가운 눈길이 몹시 괴로웠을 것이다.그의 마지막 쿠테타 미수사건과
관련된 일화를 음미하려고 한다.
"내가 준용이를 만나 볼 것이다!
이 놈들이 준용이를 죽이는 일을 음모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이냐?"
1895년 서울 마포나루 배 앞에서 흥선대원군이 군줄과 실랑이를 하고 있다.
종손 이준용이 강화도의 교동부에 유배 가기 위해 배를 탈때 마포나루로 달려 간 것이다.
공덕리 별장 아소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한걸음에 달려 간 마포나루였다.
이 때 군졸들은 대원군을 강제로 연행하여 공덕리 별장 아소정에 감금시킨다.
"이 놈들아! 이 못된 놈들아!
대원군은 땅을 치고 통곡을 하였다.
강화 교동으로 귀양가는 이준용을 살리기 위해 마포항까지 달려간 대원군의 모습이다.
"가리다.내 몸소 준용이를 만나러 강화섬으로 가리다!"
대원군의 피눈물나는 몸부림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는 천하장안의 인도를 받으며 운현궁을 떠났다.
이들이 마포나루에서 강화섬으로 떠나는 배에 오를 때였다.
"멈추어라!"
순검들이 달려와 대원군을 강제로 끌어내렸다.
애손을 만나고자 했던 대원군의 꿈도 이렇게 물거품이 되고만다.
뿐만아니었다.이날 이후 대원군은 마포에 있는 공덕리 별장에 연금된다.
그를 감시하는 순검들이 배치된 것은 말할 나위없다.
그러나 이 무슨 소용이더냐.
별장에 걸려있는 현판은 아소정(我笑亭).
그런데도 여든을 바라보는 노정치가 흥선대원군은 웃을 수 없었다.
-소설 <조선왕조 500년>에서-
<이준용역모사건>으로 강화도로 유배가던 종손 이준용을 구하기 위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몸부림치다 아소당에 감금되는 과정을 소설 <조선왕조 500년>이 그리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세력을 잃고 갑오개혁과 동학혁명이 나는 등 뒤숭숭할 때 그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고종을 죽이고 대원군의 손자(큰아들의 아들) 이준용을 받들자는 역적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역적, 역모사건으로 다섯 명이 사형으로 죽임을 당했다. 열 명은 종신형이었다.
이준용은 고종의 조카가 된다고 해서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서 평생 살게 되었다.
대원군은 그 손자와 함께 강화도로 가겠다고 나섰다.
실제로 마포에 나가서 한강에 배를 띄워 떠날 작정이었다.
강화도까지 말이다. 그날 마포나루에서 대원군은 배에 타려고 하고 순검들은 못 타게 말리다
그만 떼밀리어 한강에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4월에 이르러 국태공(國太公)의 처소에는 커다란 불운(不運)이 닥쳐왔다.
국태공의 손자이자 왕의 조카인 이준용(李埈鎔)이 동학(東學)과 관련하여 왕을 폐위하고
다른 정권을 세우려고 하였다는 죄목(罪目)으로 기소되었다.
이준용이 그와 같은 역모(逆謀)에 주동 인물이 되었는지 또는 그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동조적(同調的)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되지 않았으나 어쨌든 그와 같은 사건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그는 강화도에서도 더 떨어진 교동도(喬桐島)로
귀양살이를 떠나기에 충분하였다. 후일 그는 고종이 친정에 나서서 자신과 대립하게 되자
고종을 폐하고 장남 재황을 옹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그의 서장자인 재선은 역모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이준용은 국왕의 특사로 강화 교동부(喬桐府)에 10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그 해 8월에 특별 사면으로 풀려 나왔다. 1896년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그가 출국한 뒤 귀국이 허락되지 않자 1897년 일본을 떠나 유럽의 각지를 시찰하고
1899년에 일본으로 돌아와 지바현에서 한거(閑居)하고 있었다.
1907년 고종이 태자에게 양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였을 때에 귀국하였다.
1908년 상공근무사(商工勤務社)에 총 고문을 역임하였고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
이준공(李埈公)의 칭호를 받았다. 말년에 친일행각은 두드러졌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른 뒤 육군참장이 되었다.
1899년 4월 장윤상 권형태 신현표 등이 황제를 폐하고 이준용을 초대 대통령으로
앉힌다는 음모사건도 벌이지는 등 이준용은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여러 번 거론된다.
1881년 8월 흥선대원군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척사론자들과 제휴하여 고종을 폐위하고
대원군의 맏아들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기도하는 등
흥선대원군은 여러차례 정권재창출을 위한 '역모'를 꾀한다.
세종의 세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의 마포강 북쪽 산자락에 있는 별서 담담정(淡淡亭) 터다.
서울 마포강 북쪽 산자락은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던 곳이다.고려의 왕들도 즐겨 찾던 곳이었다.
만초천(蔓草川넝쿨내)가 한강 서호 또는 용산호에 섞일 즈음 바위가 치솟아 절경을 이루었던 곳이다.
그 안쪽 기가 막힌 절경지에 안평대군 이용은 담담정 정자를 지은 것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안평대군 이용이 담담정(淡淡亭)을 지은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은 …… 성격이 부탄(浮誕)하여 옛것을 좋아하고 경승(景勝)을 즐겨
북문(北門) 밖에다 무이정사(武夷情舍)를 지었으며, 또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만 권의 책을 모아두었다.
문사(文士)를 불러모아 12경시(景詩)를 지었으며, 48영(詠)을 지어 등불 밑에서 이야기하고 달밤에 배를 띄웠으며,
연구(聯句)를 짓고 바둑, 장기를 두는 등 풍류가 끊이지 않았고, 항상 술을 마시며 놀았다.”
<용재총화>에는 안평대군을 비롯한 풍류객들이 이곳에 모여 놀던 풍경이 그려져 있다.
"밤이면 등불을 켜고 이야기하고 달이 뜨면 뱃놀이를 하였다.
풍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진탕 마시고 취하여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한 시대 유명한 인물들 중 이곳을 거치지 않은 자 없었다.
또한 잡업에 종사하는 무뢰한들도 안평에게 귀의하여,
바둑판과 바둑알은 모두 옥으로 만들고 금가루로 글을 썼으며,
사람들에게는 비단을 놓고 글을 써서 나눠 주었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詩會)를 베풀곤 했으며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정벌에 공을 세운 영의정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벼랑고개 위 벽산빌라 앞에 있는 '담담정 터' 푯돌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詩會)를
베풀곤 했으며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후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이 담담정은 안평대군이 죽은 후 세조가 신숙주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이고, 일제시대인 1936년에 만들어진
「대경성정도(大京城精圖)」에 보면 세관감시소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별장이 되기도 하는데, 마지막으로 이곳에 이승만이 머물게 된다. 그게 마포장이다.
정조, 순조 임금 대에 활동한 화원 김석신(金碩臣)이 마포(麻浦) 강가의 명승인 담담정 일대 풍경을 그렸다.
절벽이 끝나는 부분 기둥 위에 자리한 누각은 마포와 용산 일대의 서별영(西別營)에 속해있던 읍청루(揖淸樓)이다.
읍청루 뒤쪽으로 강 건너편 언덕 위에 보이는 건물들은 노량(露梁)의 용양봉저정 일대이고,
그 뒤로 멀리 보이는 산은 관악산이다.
담담정 아래 한강 양안(兩岸)에는 마포 별영(別營)의 군선(軍船)과 전국에서 모여든 조선(漕船)이나
상선(商船)들은 물론, 절벽 아래 물가에서 방망이를 두드리며 빨래하는 아낙네들까지 그려 넣었다.
무성한 버드나무 가지가 강변의 운치를 높여 주고 있다.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시·문·서·화·금·기(詩文書畵琴碁)에 능통하여 쌍삼절(双三絶)로 불리운 인물이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문종·세조의 친동생이자 금성대군의 형이었다.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
시문(詩文)과 서화(書畵) 그리고 금기(琴碁)에 능해 쌍삼절로 불리었다.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필로 불린다.
그는 수양대군의 무신세력에 눌려 실권을 박탈당하고 10월 10일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그해 10월 18일 유배중에 교동도(喬桐島)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이우직
역시 연좌제에 의해 처형되었다. 아내는 관비가 되었으며 의춘군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오대(五臺)와, 딸 무심(無心) 등은 권람의 집의 노비로 분배되었다.
평소에 안견(安堅), 박팽년(朴彭年) 등 당시의 서화가들과 자주 교류를 가졌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서화도 매우 뛰어났다.
글씨는 조맹부체로서 활달하고 자연스러우면서 획(劃) 골(骨)이 들어 있으며
풍류(風流)와 문화를 알던 그의 높은 인품이 그대로 반영되는 듯하다.
그의 주위에는 늘 집현전 학자 등 문사들이 함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