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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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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신앙, 수난의 민족사 |
대륙에 웅거하던 고구려는 수나라 114만 대군을 물리쳤던 동아시아의 강자였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에서는 30만 수나라 군대 중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2천7백 명뿐이었다. 그러나 그 강대했던 고구려도 A.D. 688년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망하고 말았다.
한국사는 고구려의 멸망으로 활동 영역이 한반도로 좁혀진 이래 약소국으로 전락하여 계속해서 위축일로를 걸었으니, 약 1천 번에 달하는 이민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수난을 당하던 우리 겨레는 마침내 20세기 초에 이르러 일제에 나라를 완전히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민족의 혼인 말과 글을 빼앗기고 부모, 형제, 자매가 징병, 징용, 정신대로 끌려 나가고 공출(供出) 요구로 놋그릇이고 뭐고 다 긁어 바치면서 35년 동안이나 질곡의 역사를 경험해야 했다.
고구려 멸망 이전까지는 약소민족이 아니었던 천손민족 우리 겨레가 왜 그렇게 약소국이 되어 외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한 채 위축되고 시든 역사를 이어 와야 했을까? 우리 한민족은 어떤 민족보다 슬기가 뛰어난 백성인데도 말이다.
그 근본적 원인은 민족의 고향인 고조선의 ‘제천신앙’이 민족적으로 승화 ․ 계승되지 못하고 일찍이 외래 사상에 치우쳤기 때문이다. 즉 선조들이 물려준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을 배척하고 외래 종교를 신봉하면서 우리 겨레는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왜일까? 우리 겨레는 욕단의 직계 후손으로서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한알님과 함께” 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천손민족’이기 때문이다.* 무릇 천손민족이 하느님을 잊으면 ‘복’ 대신 ‘화’를 당하는 법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이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엘' '얼' '알라'의 어원으로서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이랑'은 '~와 함께'라는 뜻으로 영어의 'with'이다. 그래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겨레의 노래 '알이랑'은 욕단계 천손민족 우리 겨레가 대홍수 후 파미르 고원~천산 산맥~알타이 산맥(창 10:30)을 넘어 오면서 불렀던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이다(자세한 것은 신앙계 04년 1월호 '아리랑과 성경과 민족사의 만남'이라는 글을 참고하십시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이것을 벨렉 계열의 천손민족 이스라엘의 백성의 역사를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주전 586년 유대 나라는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다. 이유는 우상을 숭배하여 하느님의 진노를 격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어 폐허가 되었고 성전은 무너져 터만 남았으며 재산은 바벨론으로 반출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던 것이다.
부처님께 절하다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고조선의 국법인 8조금법 제1조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정성을 다해 순수하게 섬기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약성경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십계명의 제1계명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과 본질상 똑같은 것으로서, 욕단 계열의 천손민족 배달겨레가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이었다. 그러나 고조선 붕괴 후 북부여시대로부터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외래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였다. 가장 먼저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A.D. 372)에, 다음에 백제가 침류왕 원년(384년)에 불교를 수용했다. 신라는 눌지왕(417~457) 때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 14년(527년)에 공인되었다. 8조금법의 제1조가 깨진 것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1계명을 거역한 것과 같았다.
그 후 이 땅에는 우리 겨레 고유의 종교인 ‘제천신앙’을 버리고, 외래종교의 우상인 ‘불상’ 에 절하는 우상숭배자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배달민족이 고구려 멸망과 함께 지속적으로 쇠망하게 된 결정적 원인인 것이다. 아래는「규원사화」‘단군기’에 기록된 강대했던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한 설명으로서, 우리 한민족이 쇠퇴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알려준다.
“나라 이름은 진(震)이라 하고 건원을 천통(天統)이라 하여 항상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자손들이 교만해져서 점차 이것을 폐지하고 유교와 불교를 함께 일삼아 드 디어 나라가 시들어졌다.”
우리 배달겨레는 단군 이래로 ‘제천의식’을 성대히 거행하여 오직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이었는데, 그 거룩한 ‘제천신앙’을 내버리고 외래 사상인 유교와 불교를 신봉하면서 나라가 약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불교가 가장 왕성했던 고려시대에 우리나라는 137년간이나 몽골의 지배를 받으며 민족사 최대의 수난기를 통과하였다. 그리고 불교와 더불어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지나(支那․ china)산 수입종교 ‘유교’가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와서는 섬나라 일본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조상님께 제사하다가
조상에게 제사하는 풍습은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이 아니다. 그것은 용을 숭배하는 나라 지나의 풍습이 수입된 것이다. 우리나라 반만 년 역사 가운데 조상에 대한 제사가 들어온 것은 조선시대 이후이며 겨우 500년 밖에 안 된 것이다. 지나에서 유래한 것이니 그것은 지나의 풍습이지 우리 겨레의 풍습은 아닌 것이다. 다만 조선 왕조의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지나의 풍습이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정종 때까지는 백성들에게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하다가 왕가에서 덕행 교육의 일환으로 적극 장려하는 바람에 수많은 폐단을 안고 있으면서도 민간에 퍼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기독교는 서양적이고 불교 ․ 유교는 한국적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불교는 인도적이요, 유교는 지나적인 것이며, 기독교가 한국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겨레는 단군의 고조선 시대부터 기독교의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이다.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풍습은 지나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나에서 수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사 안 지내는 놈은 상놈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양반은 되놈(지나놈)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욕단계 천손민족인 우리 겨레는 단군 이래로 오직 하느님께만 제사하는 백성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와서는 ‘하느님께 드리던 제사’(祭天)를 모든 죽은 조상에게 드리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사에서 조선 왕조 500년은 천손민족 본연의 모습이 가장 심하게 훼손된 최악의 시대였다.
‘불상’은 사람의 수공물로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는 우상이다(시 115:6). 조선의 백성들은 그 조각한 ‘우상’ 앞에 절하는 것도 모자라 더 이상 보지도 듣지도 냄새 맡지도 못하는 죽은 조상에게까지 엎드려 절을 하기 시작 했다. 절이란 절을 받는 대상 앞에 엎드려서 코를 땅에 박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천손민족이 그와 같은 자세로 헛된 것을 향해 절을 하면 하느님의 질투를 격발시킨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선 백성에게 아주 혹독한 징벌이 임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가 말했다. “조선을 정벌해야지!” 1592년 4월 13일(선조 25년) 왜병 25만 대군이 칼과 조총으로 무장하고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 7년 환난이 시작된 것이다. 이 기간동안 왜군이 저지른 만행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은 병사 1명당 코 한 되씩의 책임량을 할당 받았다. 그리하여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코를 베었다. 심지어 금줄이 걸려있는 해산한 산모의 집에도 들어가 산모의 코도, 갓난아기의 코도 베어간 왜군이었다. 갓난아이들은 죽은 엄마의 젖꼭지를 빨며, 어린 아이들은 거리를 방황했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은 당시의 재난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때에 적이 3도(道)를 짓밟아 지나가는 곳마다 여사(廬舍)를 모두 瑙쩔李?백성을 살육하였으니 무릇 우리나라 사람을 보기만 하면 모조리 그 코를 베어서 공(功)으로 삼고 겸하여 시위하였다.”
당시 왜병의 용맹성은 조선인의 귀와 코를 많이 벤 것으로 증명 되었다. 조선인의 잘린 코는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졌다. 일본의 도처에는 아직까지 조선인의 귀무덤과 코무덤이 남아 있다. 히데요시가 코 베기를 명령한 것은 인간의 기(氣)가 코에 머문다는 것 때문에 기를 꺾자는 의도였다. 히데요시는 단군 자손의 기를 자른다는 의도로 이 잔혹 행위를 명했던 것이다.
성경은 ‘우상’은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도 다 “그와 같을 것”이라고 말한다(시 115:6~8). 코가 잘리고 겨우 목숨을 건진 가련한 조선 백성들은 그들이 코를 땅에 쳐 박고 절하던 그 ‘불상’들처럼, 그리고 무덤에 있는 죽은 조상들처럼 평생을 냄새 맡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하느님은 자기 백성이 다른 것에 절하면 질투하신다(출 20:5). 조선 백성들이 그렇게 이민족에게 침략을 당하여 처참하게 귀와 코를 잘린 것은 질투하시는 하느님께서 내리신 징벌이었다.
“또 내가 네게 대하여 내 질투를 두리니 그들이 광포하게 너를 다룰 것이며 그들이 네 코와 귀를 잘라 갈 것이요 네 남은 자들은 칼에 쓰러지리라. 그들은 네 아들들과 딸들을 데려갈 것이요 네 잔류물은 불에 삼켜지게 되리라.”(겔 23:25 ․ KJV)
“… 그들이 네 코와 귀를 잘라 갈 것이요!” 이 두려운 예언의 말씀은 유다 백성이 이방 열국들을 의뢰하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하느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멸망할 때에 성취된 바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대사상으로 명나라를 의뢰하고 그 나라의 풍습을 좇아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며 또한 외래 종교의 우상인 ‘불상’ 앞에 열심히 절하던 조선 사람(chosen people)에게도 이 예언이 문자 그대로 정확히 이루어진 것이다.
“… 그들이 네 코와 귀를 잘라 갈 것이요”라는 구절만 성취된 것이 아니었다. “네 아들들과 딸들을 데려갈 것이요”라는 말씀도 성취 되었다. 왜병들은 조선인을 납치해 노예시장에 내다 팔 인간상품으로 끌고 갔었다. 일본군은 군자금 확보를 위해 이재(理財)의 수단으로 조선인 포로들을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다. 당시의 화폐가치로 5원에 팔려 필리핀, 마카오, 인도 등지로 갔다. 노예시장엔 조선인 노예들로 들끓었다. 구주 등지에 포르투갈 상인들의 총포와 백사(白絲)에 교환되어 갔다. “네 남은 자들은 칼에 쓰러지리라”는 예언도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7년 전쟁동안 조선 인구의 1/3이 왜군의 칼과 조총에 살육을 당했다. 또한 왜병들은 일제 시대에 조선 처녀 20만 명을 정신대로 끌고 간 황군(皇軍)의 조상들답게 여자를 보기만 하면 길거리든 대낮이든 사람들이 보든 말든 닥치는 대로 강간을 했다. ‘욕봤다’는 말은 이때에 생긴 것이다.
외래 사상인 유교를 수입해 조상님께 열심히 제사한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그렇다! 조선 백성은 외래 종교의 우상인 ‘불상’에 절하고, 거기에 더하여 죽은 조상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하다가 이렇게 참혹한 재앙과 저주를 받은 것이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시 16:4).
부처나 조상은 아무리 절을 많이 해도 복을 주지 못한다. 임진왜란 7년 대환난을 겪은 후에도 조선 사람들은 여전히 조각한 ‘불상’에, 그리고 무덤에 계신 조상님께 열심히 절을 했다. 햅쌀 나오면 조상님께 젯밥부터 드렸다. 그러나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침략을 다시 받고 아예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이래도 계속 ‘불상’에 절을 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해야 할 것인가?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된 후 동족끼리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고 국토가 분단되어 지금까지 민족적 고난이 그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지나의 퇴폐 풍습을 수입한 조선 왕조는 종국엔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고 완전히 망했다. 그리고 35년간 또 다시 왜놈들에게 식민지 백성으로 강압통치를 받으며 온갖 수치와 굴욕과 살육을 당해야 했다. 실로 그것은 반만년 역사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오욕의 역사였다.
이처럼 우리 민족사가 이민족에 의한 침략과 지배라는 어두운 역사로 점철되었던 것은 한마디로 오직 하느님만 섬겨야 할 천손민족 우리 겨레가 선조들이 섬겼던 유일신 하느님을 버리고 헛된 것을 섬겼기 때문이다.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시 7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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